국학진흥원 번역 금계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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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진흥원 번역 금계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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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금계문집:조선 중기의 학자 황준량(黃俊良)의 시문집. 내집 5권, 외집 9권, 합 14권 5책. 목판본. 내집은 1584년(선조 17) 동생 수량(秀良)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말에 이산해(李山海)와 이광정(李光庭)의 발문이 있다. 내집은 권1∼3에 시 235수, 권4·5에 잡저 17편, 발 1편, 행장·제문 각 1편, 외집은 권 1∼6에 시 562수, 권7·8에 소 2편, 전 3편, 서(書) 19편, 잡저 26편, 제문 2편, 묘지명 2편, 대책 2편, 권9는 부록으로 행장 1편, 제문 5편, 반사 2수, 기문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집은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산해는 발문에서 그의 시는 성정(性情)에 근본을 두고 음률에 맞아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뜻이 심원하다고 평하였다. 서(書)는 스승인 이황(李滉)에게 보낸 것이 많으며, 대부분 유학·교육·학문 등에 관한 단편적인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다. 내집의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보우(普雨)를 등용해 불교의 부흥을 꾀하고,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켜 승과(僧科)를 시행하는 데 이르자, 그에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문이다. 「여녹봉정사제생서(餘鹿峰精舍諸生書)」는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 권면하는 내용이다. 이밖에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실존여부를 논변한 「사호유무변(四晧有無辨)」이 있다. 외집의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는 단양군수로 있을 때 군민의 실정을 보고한 것으로, 단양은 본래 원주의 속현인데 적을 잘 막아서 군으로 승격이 되었으나, 40호 밖에 되지 않으므로 부역과 세금을 경감해줄 것을 청한 내용이다. 「답퇴계선생논사칠변서(答退溪先生論四七辨書)」는 이황의 사칠논변 가운데 의문이 나는 곳을 지적, 논변한 것이다.(05공주증-20)

    木板本,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英祖 31(1755)]
    9卷 5冊 : 四周雙邊 半郭 29.6 ×15.0 ㎝, 有界, 10行20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 30.3 ×19.6 ㎝ 跋: 上之三十一秊乙亥(1755)仲夏後學平原李光庭(1674-1757)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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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황준량은 퇴계학의 창시자인 이황의 가장 초기 제자로, 이황과 더불어 서원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정치가이면서도 천 여 수에 가까운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금계집錦溪集>은 바로 이와 같은 황준량의 저술들이 기록되어 있는 문집으로, 초기 퇴계학파가 만들어지는 다양한 양상과 인적 교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천 여수에 달하는 시는 당시의 문학적 상황과 시대적 문제의식 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상소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퇴계문인들의 정치적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이황과 주고 받았던 편지 및 잡저의 글들은 퇴계학파 초기의 성리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한 초기 퇴계학의 학문과 문학적 성향, 그리고 인적 유대관계 및 지방사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저자>

저자

금계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1537년(중종32) 생원이 되고, 1540년(중종35)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권지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 훈도로 차출되었다. 1548년(명종3) 공조 좌랑, 1551년 경상도 감군 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1557년 단양 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 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

였다.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졸하였다. 단양 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特恩)을 받기도 하였다. 성주 목사로 나아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 녹봉정사(鹿峰精舍)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 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 되었다. 저서에 <금계집>이 있다.

역자 강성위(姜聲尉)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연구박사, 서울대학교 중국어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책임연구원 등을 거쳐 현재 해동문집연구소 부소장으로 있으면서 서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漢文辭書한글音順索引>, <中國詩와 詩人>(공저), <강서시파 江西詩派> 등이 있고, 역서로는 <두보 지덕연간시 역해>(공역), <完譯杜甫律詩>(공역), <재거감흥시제가집주> 등이 있다.



 

저자인 황준량은 퇴계학의 창시자인 이황의 가장 초기 제자로, 이황과 더불어 서원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정치가이면서도 천 여 수에 가까운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금계집錦溪集>은 바로 이와 같은 황준량의 저술들이 기록되어 있는 문집으로, 초기 퇴계학파가 만들어지는 다양한 양상과 인적 교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천 여수에 달하는 시는 당시의 문학적 상황과 시대적 문제의식 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상소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퇴계문인들의 정치적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이황과 주고 받았던 편지 및 잡저의 글들은 퇴계학파 초기의 성리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한 초기 퇴계학의 학문과 문학적 성향, 그리고 인적 유대관계 및 지방사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저자>

저자

금계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1537년(중종32) 생원이 되고, 1540년(중종35)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권지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 훈도로 차출되었다. 1548년(명종3) 공조 좌랑, 1551년 경상도 감군 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1557년 단양 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 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

였다.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졸하였다. 단양 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特恩)을 받기도 하였다. 성주 목사로 나아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 녹봉정사(鹿峰精舍)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 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 되었다. 저서에 <금계집>이 있다.

역자 강성위(姜聲尉)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연구박사, 서울대학교 중국어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책임연구원 등을 거쳐 현재 해동문집연구소 부소장으로 있으면서 서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漢文辭書한글音順索引>, <中國詩와 詩人>(공저), <강서시파 江西詩派> 등이 있고, 역서로는 <두보 지덕연간시 역해>(공역), <完譯杜甫律詩>(공역), <재거감흥시제가집주> 등이 있다.



 

저자인 황준량은 퇴계학의 창시자인 이황의 가장 초기 제자로, 이황과 더불어 서원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정치가이면서도 천 여 수에 가까운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금계집錦溪集>은 바로 이와 같은 황준량의 저술들이 기록되어 있는 문집으로, 초기 퇴계학파가 만들어지는 다양한 양상과 인적 교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천 여수에 달하는 시는 당시의 문학적 상황과 시대적 문제의식 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상소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퇴계문인들의 정치적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이황과 주고 받았던 편지 및 잡저의 글들은 퇴계학파 초기의 성리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한 초기 퇴계학의 학문과 문학적 성향, 그리고 인적 유대관계 및 지방사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저자>

저자

금계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1537년(중종32) 생원이 되고, 1540년(중종35)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권지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 훈도로 차출되었다. 1548년(명종3) 공조 좌랑, 1551년 경상도 감군 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1557년 단양 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 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

였다.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졸하였다. 단양 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特恩)을 받기도 하였다. 성주 목사로 나아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 녹봉정사(鹿峰精舍)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 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 되었다. 저서에 <금계집>이 있다.

역자

김상환(金相丸)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전공했다. 고문헌 해제 정리와 문집 번역 사업에 참여하였다. 현재 서울과 지방에서 한시와 초서,《주역》등을 강의하며, 삼현학(三玄學)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저자인 황준량은 퇴계학의 창시자인 이황의 가장 초기 제자로, 이황과 더불어 서원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정치가이면서도 천 여 수에 가까운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금계집錦溪集>은 바로 이와 같은 황준량의 저술들이 기록되어 있는 문집으로, 초기 퇴계학파가 만들어지는 다양한 양상과 인적 교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천 여수에 달하는 시는 당시의 문학적 상황과 시대적 문제의식 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상소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퇴계문인들의 정치적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이황과 주고 받았던 편지 및 잡저의 글들은 퇴계학파 초기의 성리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한 초기 퇴계학의 학문과 문학적 성향, 그리고 인적 유대관계 및 지방사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저자>

저자

금계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1537년(중종32) 생원이 되고, 1540년(중종35)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권지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 훈도로 차출되었다. 1548년(명종3) 공조 좌랑, 1551년 경상도 감군 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1557년 단양 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 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

였다.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졸하였다. 단양 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特恩)을 받기도 하였다. 성주 목사로 나아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 녹봉정사(鹿峰精舍)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 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 되었다. 저서에 <금계집>이 있다.

역자

김상환(金相丸)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전공했다. 고문헌 해제 정리와 문집 번역 사업에 참여하였다. 현재 서울과 지방에서 한시와 초서,《주역》등을 강의하며, 삼현학(三玄學)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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