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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던 길’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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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18회 작성일 21-11-06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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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던 길’을 따라서...

  ‘도산 길’의 마지막은 ‘천사’에서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선인들이 ‘청량산’을 갈 때 ‘천사’는 그 깃 점이었다. 천사에서부터 청량산산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온혜에서 청량산까지 국도가 바로 뚫려 있지만, 옛길은 천사-단사-가송-너분들로 이어지는 강변길이었다. ‘도산 9곡’ 가운데 7, 8, 9곡이 몰려있는 곳으로, 청량산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길을 걸어가며 글을 쓰고 시를 지었다.

 퇴계는 생애 6, 7번 정도 갔다. 그때마다 단촐 한 산행이었다. 그런데 1564년은 달랐다. 16명을 초청했는데 13명이 참가했다. 혼자 사색하기를 좋아하며, 집단적 모임을 주도한 일이 거의 없는 퇴계에게 이 해 산행은 ‘퇴계식의 일상’으로 볼 때 매우 의례적이다. ‘유산遊山’의 의미를 알게 하고자 한 계획적인 산행으로, 퇴계 전 생애의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또한 마지막 청량산산행이기도 했다.

  이날 천사에서 퇴계는 참석자 가운데 유일한 친구인 이문량에게 이런 시를 썼다.
烟巒簇簇水溶溶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至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11.  이제부터 그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도산7곡, 단천-







홀로 걷는 즐거움, 퇴계 예던 길
원촌을 지나면 좌측은 단천丹川이고 우측은 천사川沙다. 천사는 ‘내살미’라 부르는데, 원촌과는 강 이편과 저편이지만 천사는 항상 천사로 존재했다. 빛깔도 원촌과는 다르다. 원촌은 퇴계 후손들의 집성마을이나 천사는 그렇지 않다. 원촌이 산촌에 가까운, 그래서 강과 관련 없는 ‘원촌’, ‘원대’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천사는 물굽이와 모래로 인해 ‘도산 9곡’ 가운데 제6곡인 ‘천사곡’이 되었다. 퇴계의 ‘천사곡’ 시는 이러하다.

흐르는 강물 산을 돌아 흘러오고  川流轉山來
붉은 무지개 마을 안고 비껴있다  玉虹抱村斜
언덕 위엔 푸른 밭이랑 펼쳐있고  岸上渴祿疇
수풀 강변엔 흰 모래가 깔려있다  林邊鋪白沙

천사에는 두 가지 유적이 있다. ‘왕모산성’과 ‘월란사月瀾寺’다. 왕모산성에 대해 육사는 “내 동리 동편에 있는 왕모성은 고려 공민왕이 그 어머니를 모시고 몽진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터가 남아 있다”라고 했다. 월란사는 “달빛을 즐기고 물결을 바라본다”는 ‘농월관란弄月觀瀾’의 뜻에서 지어진 조그만 암자로, 지난 시절 농암, 퇴계에 의해 ‘월란사 철쭉꽃 필 무렵의 모임’이란 뜻의 ‘월란척촉지회月瀾琇乘會’란 향기로운 문학동인회가 열린 곳이다. 실로 ‘문향 안동’의 남상이 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천사 강변이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옛날 선인들은 여기서부터 청량산 산행을 시작했다. 그 길은 천사-단사-매내-올미재-가사리-너분들-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이다. 그 가운데 매내-올미재-가사리의 지역은 무인지경의 협곡으로 지금도 뚜렷하지 않는 강변길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길의 아름다움을 어찌 표현하랴! 퇴계는 이 길을 ‘그림 속’이라 했고, 자신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퇴계는 이 길을 따라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래서 이 길을 퇴계가 그리던 이른 바 ‘예던 길’이라 이름하여 본다.

지금부터 그 길을 따라 한 폭의 그림 같은 청량산으로 들어가 보자. 예던 길 초입에는 옮겨 온 도산초등학교가 있다. 이미 야영장으로 변모했지만, 초등학교는 감정의 원형 같은 곳이다. 그 원형 속에는 중학교 진학을 위한 과외 수업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학교의 빈방에서 자취를 한 추억이 서려 있다. 석발기가 없던 시절, 석발 안 된 쌀로 지은 밥은 끼니마다 이를 손상시켰다. 그래도 우리의 자취 생활은 재미있었다.

도산초등학교 앞산은 왕모산王母山이다. 이 산에 오르면 도산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도산에서 ‘도산’을 볼 수 있는 두 지점 가운데 한 곳이다.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면 지금도 모습이 완연한 산성山城이 보인다. 왕모산성이라 한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을 왔을 때 어머니를 이곳에 피신시켰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내판을 따라 등산로가 다듬어진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보니 과연 산세가 천혜의 요새였다. 뒤는 험준한 산이 둘러싸고 있고, 앞은 사방이 트여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강과 단애로 막혀 있어 마치 단종이 유폐된 청령포를 연상케 하는 그런 지세였다. 어제 쌓은 듯 완연한 산성의 모습을 뒤로하고 조금 나아가니 아늑한 뒤편에 뜻밖에 조그만 집이 있는데, 바로 왕모당이었다. 왕의 어머니가 피신한 곳이었다. 당 안에는 지금 두 개의 목각 인형을 모셔 두었고, 사방에는 금줄을 쳐 놓았다. 목각 인형은 왕과 왕모의 형상이며, 금줄은 이곳 주민들이 당제를 지내고 남긴 추모 의식의 한 단면이다.

공민왕의 안동몽진은 이곳 청량산 일대에 신화가 되었다. 지금 이 일대의 마을에는 왕모당, 공민왕당, 공주당, 부인당 등 십여 곳 정도의 추모공간이 있는데,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추모 의식이 계속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하고, 다시 왕모당 뒤를 지나 얼마간 올라가니 관청에서 설치한 갈선대라는 간판과 더불어 까마득한 수직 암벽이 나타난다. 대가 위치한 공간은 너무 협소하여 현기증이 나서 잠시도 있기가 어려웠다. 조심조심 엎드려 나아가니 절벽 아래 도산 9곡의 제7곡인 단사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갈선葛仙’은 신선이며 ‘단사丹砂’는 신선이 먹는 음식이니, 신선은 정녕 이런 곳에 사는 것인가! 

흥 일어 바람처럼 홀로 찾아가다, 갈선대
이곳 갈선대를 떠올리면 너무나 멋있는 한 편의 편지가 생각난다. 그 편지는 나만 숨겨놓고 보는 것인데 이제 공개하게 되니 마치 감추어둔 애인을 공개하는 것 같아 쑥스럽기까지 하다. 그 편지는 퇴계가 친구 이문량에게 보낸 것이다. 나는 퇴계의 수많은 글 가운데 이 한 편의 편지글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제목이 없기에 임의로 ‘능운대, 갈선대 유상遊賞’이라 붙여 보았다.

이대성에게 드림[答李大成-대성은 이문량의 자]
일전에 틈을 내어 홀로 길을 나서 산수를 두루 구경했더니 무르익은 가을풍경과 들국화의 산뜻한 향기가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흐뭇하게 하여 당나귀가 지쳐 절룩거리는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능운대의 선명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한나절을 걸었습니다. 부근의 여러 벗들을 불렀다면 반드시 마음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 돌아갈 길이 낭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늙고 병든 사람이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런 연고로 ‘대나무만 구경하고 주인을 묻지 않은 격’이 되었으니, 만약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렇게 되었다고 알려주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갈선대의 산보는 늘 염두에 두고 있는데, 스무날이 넘으면 늦은 감이 있다 해도 말씀하신 대로 따를 것입니다. 다만 들리기는 근일 안동의 두 관원이 온다고 하니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만약 흥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滉-



이 편지는 갈선대, 능운대 현장으로 나를 유혹했다. 고서를 찾아보니 능운대는 월란사 주변에 있고, 갈선대는 왕모산 아래에 있었다. 두 곳 모두 천사의 북쪽과 남쪽에 위치했다. 우선 갈선대부터 찾았다. 그런데 관청에서 설치한 왕모산 안내판에는 갈선대가 왕모당 뒤편 수직 벼랑인 것으로 되어 있다. 문득 잘못된 고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년의 퇴계에게 그런 가파르고 좁은 단애의 바위 꼭대기가 가을 산책로일 수는 없었다. 갈선대는 “흥이 일어나면 훌쩍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퇴계 역시 “단사벽 남쪽에 왕모산성이 있고, 그 산 서쪽으로 향해서 북쪽을 감싸는 곳에 두 개의 대가 있으니 하나는 갈선대요 하나는 고세대高世臺”라 했다. 《선성지》에도 그 순서가 고세대, 갈선대, 왕모산성으로 나와 있다.

의문을 갖고 있던 1996년 5월, 퇴계종손 이근필 선생을 모시고 월란척촉회 모임을 위해 이곳을 지나는 기회가 있어 물어 보았다. 선생께서는 왕모산성 초입의 언덕을 갈선대라고 지목하셨다. 산성을 오르기 직전 훌륭한 대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갈선대였다. 문헌 자료와도 일치했다. 갈선대에 대해 퇴계는 이렇게 노래했다.

단사 남쪽 벽 갈선대                      丹砂南壁葛仙臺
겹겹 구름 산 구비 구비 시냇물            百匣雲山一水回 
만약 신선을 지금 보고자 한다면          若使仙翁今可見
땔나무와 물을 가지고 신령께 빌어 보렴.  願供薪水乞靈來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능운대”와 “흥이 일어난다면 혼자도 갈 수 있는 갈선대.” 이 능선의 가을 단풍을 바라보며 홀로 걸어가는 퇴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퇴계의 고독을 반추했다. 또한 편지의 말처럼 ‘틈을 내어 홀로 물을 완상하고 산을 찾으며抽身孤往 玩水尋山’ “만약 흥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若不禁興發則 或作孤往 亦未可知耳”라는 ‘홀로 걷는 즐거움’도 음미해 보았다. 

선비들은 이를 ‘유상遊賞’이라 했고, 산행은 ‘유산遊山’이라 했다. 그 속에는 보步, 사思, 주酒, 가歌, 시詩, 창唱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좀 더 고상하게는 ‘풍류風流’라는 단어가 마련되어 있다. 풍류는 ‘바람처럼 흐른다’인데, 바람처럼 흐르는 인생을 구가함이 어디 쉬운 일인가. 풍류의 개념은 높은 인격적 수양을 전제한 까닭에 쉽사리 쓰지 않았고, ‘유상’이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기록들을 상기하면서, 우리들 역시 당시 선인들의 ‘유상’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함께 하기로 한다.

무궁한 모습 시심을 북돋우네, 단사벽과 두 개의 비석
이제 우리는 왕모산을 내려와 장장 1킬로미터에 달하는 바위 병풍의 단사벽을 지난다. 누가 억겁의 세월을 생각하랴만, 원시 지구의 용솟음치는 거대한 물길은 소와 못과 내와 구비와 협을 만들었다. 그때 강은 산을 마음껏 제압하고 할퀴고 짓이겼다. 산은 모든 살을 다 깎아 주고 저항했다. 그후 강은 다시는 산을 이기지 못하고 영원히 복종했다. 강은 이제 조상의 위업마저 잊어버렸고 체념한 지 오래다. 단천의 ‘붉은 내’는 천 년 전에 그러했듯이 천 년 후에도 저렇게 흘러갈 것이리라. 단사벽에 대한 퇴계의 시는 이렇다.

 

아래는 용소 위에는 범 바위              下有龍淵上虎巖
신선 먹는 단사 옥함에 간직 했으니        藏砂千�玉爲函
이곳 사람들 당연히 천수를 누리리라      故應此境人多壽
병든 이 몸 하필 약초 캐어 무엇 하리          病我何須�翠�





단사벽을 따라 올라가면 강 건너 백운지白雲池라는 곳이 나온다. 보통 ‘배오지’라 부른다. 지대가 낮아 자주 강이 범람했다고 한다.

백운지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봉화 금씨 비석’과 ‘선성 김씨 비석’이다. 두 비석은 서로 조응한다. 선성 김씨 비석은 동편 밭 기슭에 있다. 비석 좌우에 일곱 개의 상석이 놓여 있고, 비 전면에는 ‘선성김씨7세분형전의비宣城金氏七世墳瑩傳疑碑’라 쓰여 있다. 풀이하면 ‘선성 김씨 7세까지의 분묘라 전해짐을 표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근거로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요컨대 수수께끼의 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동 선성 김씨의 뿌리를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비석 글 일부를 풀어 보니 대략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김씨는 고려 때부터 대대로 예안현에 살았다. 시조 호장공으로부터 7세까지의 묘소가 북쪽 백운산白雲山에 있다고 전해졌는데 지금은 타인이 차지했다. 지금 산 위에 퇴락한 묘 두 기와 그 아래 십여 기의 묘가 있으나 모두 비지碑誌 글이 없어 증거할 수 없다. 아, 슬프다!

낭장공의 아들이 영주로 이사했고, 아들 형제는 교리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판서의 둘째가 현감이 되어 산 아래 십여 리의 거리에 와서 살았다. 자손들이 이처럼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수호하지 않아 타인에게 점취당해 버렸다.

안동 지방 씨족의 정착 과정 연구에 천착하신 고 소극 서주석 선생의 글을 보니, 안동의 선성 김씨는 16세기에 이미 이조판서 김담, 형조참판 김늑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특히 김담의 가문은 ‘3판서댁’이라 했을 정도의 명가였다. 형부상서를 역임한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이 집에서 살다가 사위 공조판서 황유정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의 외손자인 김담이 이 집에서 태어나 이른바 ‘3판서댁’이 되었다. 비문에 쓰인 이조판서는 김담을 말하고, ‘산 아래 십여 리에 산 인물’은 현감을 역임한 김담의 아들 김만균金萬鈞을 말한다.

《농암집》에 보면 농암이 승지가 되어 오니 어머니가 가사를 지어 “승지가 오거든 내가 지은 노래로 노래하라” 했는데, 그 가사가 <선반가宣飯歌>였다. 농암은 이때를 술회하며 “이는 대개 어머니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시고 외삼촌댁에서 성장하시어 승지 벼슬이 귀한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라 했다. 여기서 외삼촌은 곧 김담을 말한다.

김늑의 《백암집》에 보면 충재 권벌 종손인 권두인이 김늑의 외손으로 묘지명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선성 김씨는 도산에 여러 성씨들이 입향할 무렵 최고의 명문이었다. 그러나 김담의 아버지가 황유정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집을 물려받음으로써 영주로 가게 되고, 이후 영주가 새로운 전거지로 자리하면서 고향의 선영은 잊혀져 간 것이다.

그렇다면 선성 김씨 묘소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정말 타인이 점취한 것인가? 아니면 실전한 것인가? 그런데 이 비석의 바로 옆에 또 하나의 오래된 비석이 있다. 봉화 금씨 비석이다. 여기에는 “봉성금씨백운산변의비鳳城琴氏白雲山辨疑碑”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봉화 금씨의 백운산 관련 의문을 해명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봉화 금씨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해명의 글을 써야 했는가? 또한 무엇 때문에 그것을 돌에 새겼을까? 궁금하여 우선 빼곡한 비문부터 읽어 보니 대략 이러했다.

‘변의비’를 세움은 선성김씨 ‘전의비’를 변파辨破하기 위함이다. 전에 김씨들이 그 조상의 묘소를 잃고 이 산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선영 아래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전의비라 했다. 그 글에는 “시조 이하 7세까지의 분묘가 세상에 전하기를 백운산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백운산은 곧 우리 집 근원의 산이다. 산 중턱에 선조 정략공 이하 4세까지 묘가 연봉으로 있고, 그 위는 성재공 옛 묘 터가 있다. 이 묘 위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묘 흔적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두 묘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로써 비석이 세워진 연유가 밝혀졌다. 요컨대 한때 두 가문은 이 백운산 묘소의 점취 여부를 둘러싸고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했다. 결과는 무승부. ‘전의傳疑’란 전해오는 의심나는 사항을 조리 있게 추정하는 글이다. ‘변의辨疑’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안에 대한 조리 있는 해명의 글이다. 조리 있게 추정했지만 조리 있게 반박했다. 전의와 변의는 저마다 의문을 말끔히 씻어 줄 사실적 근거와 자료를 요구한다. 그래서 아직 이 승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래에 분명한 시비를 가릴 날을 대비하여 장기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영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이런 염원을 반영한 듯 변의비의 끝에는 “비석을 묘 아래 세우고 훗날 식자의 판단을 기다린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고, 전의비에는 “이미 우리 산을 잃었지만 우리의 이 비석만은 상하게 하지 마라”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때 혼인까지 한 가까운 가문들이지만 선영은 양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선성 김씨는 전의비를 세웠고, 봉화 금씨는 변의비를 세웠다. 이런 비석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 같아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그 많던 은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두 비석을 뒤로하고 되돌아 나와 왼편 강기슭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문득 청량산 육육봉과 학소대의 수직 단애, 백운지 넓은 못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지점이 나온다. 퇴계가 언급한 그림 같은 곳이 여기가 아닐까 싶은 그런 곳이다. 본격적인 청량산 산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조성된 ‘예던 길’도 바로 여기서부터다. 이제부터는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옛길 그대로의 길이다. 4킬로미터, 1시간 정도 거리.

칸트가 걸어 전 세계인이 걷는다는 유명한 ‘철인의 길’ 열 배 이상의 유서 깊고 멋진 길이 아닐 수 없다. 퇴계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구비구비 넓은 여울                        曲折屢渡淸凉灘
높고 높은 푸른 산                        突兀始見高高山
청량산은 숨은 듯 다시 보이고              淸凉高高隱復見
무궁한 모습 시심을 북돋우네.              無窮變態供吟鞍

길을 따라 오르면서 백운지 강가로 내려가니 물 흐름이 멈춘 듯 고요히 내려앉아 있다.  물은 한없이 맑고 깨끗하며, 물속에는 온갖 고기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유영하고 있다. 그런데 강가 진흙 모래 위 여러 곳에 알 수 없는 짐승의 발자국과 배설물이 보였다. 전에 주민들이 백운지에 수달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 수달의 흔적이란 말인가! 수달이 있고도 남을 만한 곳이라 여겼다.

이 글을 쓰면서 수달 이야기는 하지 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8년 전 이 일대에 엄청난 은어 떼의 출현이 있었는데 그때 몰지각한 사람들의 난리법석을 생각하면 쉬쉬하고 감추어 버릴 일만도 아닌 것 같다. 그야말로 물 반, 은어 반이라 했는데, 지금 그 은어들은 어디에 있는가? 안동댐으로 회귀하는 그 은어는 ‘육봉은어’라 하여 연구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약에 쓸 정도도 보이지 않는다.

은어의 소멸에 대해 사람들은 상류 지역 오염을 그 주범으로 지목한다. 공감한다. 폐광은 많이 정화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곳곳에 물고기를 괴롭히는 시설이 적지 않다. 이곳 강물을 십여 년간 지켜보았는데, 한번은 아이들이 다슬기를 잡아 왔다. 놀라 나가보니 과연 강바닥에 다슬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또 없어졌다. 최근에는 전에 없던 꺽지가 대량으로 서식한다. 꺽지, 다슬기의 출몰과 존재 여부가 1급, 2급수를 측정하는 거울이라 하니 지금 이곳의 강물은 이 사이를 오고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때 일본인 은어 낚시 마니아 한 사람이 왔는데, 그는 청량산 은어를 두고 세계적이라 했다. 일본에는 은어 낚시 마니아만 수천 명이라 했고, 잘 관리하여 그들이 알게 되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있을 것이라 하며, 무법천지이던 전기배터리 사용을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지리산의 반달곰 서식을 공개하고 왜 보호해야 하는지를 설명함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악산 반달곰도 그렇게 했으면 지금 수렴동 계곡을 지나는 수많은 등산객 중 일 년에 한 두 명은 등산 도중 경이로운 조우를 가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걷는데 갑자기 지축을 흔드는 무한궤도의 굉음이 들려온다. 이 산중에 웬 일인가 했더니 곧 수십 대의 지프가 열을 지어 험한 강변을 따라 내려온다. 최근 출몰하는 이른바 오프로드 차량들이었다. 가송리-단천리 구간 협곡은 이들 동호인들에는 최상의 코스였고, 나 또한 한두 번 이들을 만난 바 있다. 처음 그들이 자본주의 시대의 선택받은 귀족들이 아닐까 했는데, 뜻밖에도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갑남을녀들이어서 무척 놀랐다. 실로 거침없는 문명의 전진이고 장관이었다. 또한 인간 광기의 현장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13. 굽어보면 천길 파란 물, 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

-도산 8곡, 가송-           


병풍 같은 단애, 올미재
오프로드 차량들의 위태위태한 도강을 지켜보며 상류로 올라오면 왼쪽 산허리에 위치한 ‘삽재’와 그 앞 강 건너에 있는 ‘맹개’라는 곳과 만난다. 그 사이로는 큰 강돌이 몰려 있는 긴 소沼가 보인다. 미천장담掉川長潭. 우리 말로는 ‘매내 긴 소’다. 퇴계의 시가 있으며, 강변 너럭바위에는 알 수 없는 고대 생물들의 발자국 화석이 수없이 찍혀 있다. 큰 것, 작은 것. 어떤 것들은 앙증스럽다. 진흙바닥 놀이터가 반석이 된 세월만큼의 까마득한 시대의 흔적이다. 

정신없이 너럭바위 위의 화석들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드니 상류의 그림 같은 잔잔한 물길 끝에 문득 하늘을 찌르는 수직 단애가 나타난다. 여기에는 천연기념물 먹황새가 서식하여 ‘학소대’라고도 불린다. 먹황새는 세계적인 희귀 새며, 이곳이 한반도 마지막 서식처였다. 1969년, 사냥꾼에 의해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새가 3년을 수절하다 떠나갔다. 지금 절벽 허리에는 먹황새의 화신인지 왜가리가 날고, 그 아래 ‘천연기념물 제72호 오학 번식지 대한민국’이라는 표석만이 잡초 속에 쓸쓸하다. 떠나기 싫은 발길을 옮기니 다시 물길이 90도로 급박하게 우측으로 하회를 이루며 병풍 같은 단애와 은빛 백사장이 펼쳐진 상상할 수 없는 멋진 곳에 이른다. 수태극, 산태극의 모습은 진정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여기서부터 가송협이고 이곳은 올미재라는 곳이다.

그런데 올미재의 비석에는 ‘대한민국’이라 새겨져 있고, 고산정 옆 또 다른 비석에는 ‘조선총독부’라 새겨져 있고, 전면에는 다 같이 ‘천연기념물 72호, 안동도산 오학 번식지’라 쓰여 있다. 이를 유추해 보면 그 사이 먹황새의 서식지가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단사 남벽의 칼선대라 일컫는 단애에도 한때 서식했다. 그러니까 당시 먹황새의 주요 서식지가 단천과 이곳 가송을 반경으로 하는 일대의 강변과 단애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조금 쉬어가기 바란다. 장소는 학소대 아래 강가의 바위 위. 강가에는 네 개의 바위가 있는데, 친구처럼 모여 있다. 모두 다듬은 것처럼 반듯하다. ‘경암景巖.’ 퇴계는 경암을 읊은 시에서 “천 년 동안 물과 부딛혔으나 여전히 늠름하다”라고 했다. 경암에 오르면 백운지와 올미재 방향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으며, 물의 흐름 때문인지 문득 세속이 강 저편에서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흘러가 버리는 것 같다.

과거 올미재에는 매내와 함께 한지가 생산되었다. 할머니들은 그때의 생산 과정과 애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밭 언덕 여기저기에 모진 생명력을 지닌 닥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는 십여 년 전, 이 닥나무들을 어루만지며 올미재의 경관에 취해 이곳으로 귀거래했다. 그때 나는 감격하여 한편의 글을 써서 《안동문학》에 보낸 바 있는데 제목이 ‘신 귀거래사’였다. 그 글을 이 책 뒤에 실어 두었다.

고난의 근대를 살아온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벽력암과 김태기 노인
경암에서 상류 지역을 천천히 조망해 보면 남쪽으로 수평 단애가 한눈에 보인다. 선성 14곡 가운데 제5곡으로, 벽력암霹靂巖이라 한다. 선성 14곡에 대해서는 그 연유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5곡은 별다른 설명이 없다. 다만 《선성지》에 “벽력암: 그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있음” 이렇게만 적혀 있다. 연유를 아는 사람 또한 없다.

《오가산지》 발문에는 “일동(가사리) 아래 두 개의 못이 있으니 월명담과 한속담이다. 그 아래 경암이 있는데, 위 아래가 편편하여 5, 6명이 앉을 만하고, 남쪽으로는 ‘미천장담’이 구비 흐르며, 얼마를 지나면 백운동”이라 쓰여 있다. 이 글로 보면 벽력암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소는 한속담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벽력암 단애 위에는 놀랍게도 84세의 김태기 노인 내외분이 살고 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벽은 얇아 문풍지 바람이 사나왔다. 밥상은 조촐하여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벌통이 몇 있으나 꿀 수확은 대단한 것 같지 않다. 농사도 묵밭이 대부분이다. 기적의 인생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몇 번 찾아가 말씀을 나누고 꿀도 얻어먹었다. 기념사진도 찍었다. 사진 속 내외분의 모습은 마치 신선처럼 느껴졌다. 신선이 있다면 아마 그런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외분은 당신들이 겪어 온 모진 인생사를 얘기했다. 내외분은 고난의 근대사를 살아온 바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였다.

노인은 벽력암에 대해서도 두 번 말했다. 한번은 절벽의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벼락 치듯 하여 ‘벼락소’라 한다 했고, 또 한번은 강원도의 뗏목들이 여기에 오면 벼락 치는 소리를 하며 절벽에 부딪혀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신선의 말씀은 모두 이치에 합당했다.

나는 그동안 ‘장구목’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어느 겨울, 온 산에 눈이 하얗게 덮인 숲 속에서 눈을 헤치고 홀로 나무를 자르는 노인의 모습과, 어느 가을 집 앞 수천 평의 묵밭에 핀 들국화의 노란 물결과, 토종 벌통이 놓여있는 돌고개라는 절묘한 단애 위의 전망대 등. 한때는 그런 장면들에 흥분하여 안동KBS의 김시묘 PD에게 <6시 내 고향> 같은 프로에 왜 그런 노인을 방송하지 않느냐”고 했는데, 이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농암 종택
지금 올미재에는 농암 선생 생가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관련 건물도 함께 이건되고 있다. 이 사업은 원촌의 육사 생가 복원, 기념관 건립과 성격이 비슷하다. 모두 안동댐으로 인해 원형과 터전을 잃어버린 것이다. 농암 종택은 수몰되었고, 육사 생가는 안타까운 고난의 여정을 걷고 있다. 경제 시대에 문화 유적은 그렇게 몰각되어 갔다. 그러던 것이 최근 문화가 경제임을 깨닫게 되어 경북 북부의 이른바 유교 문화권 개발 사업이 시작되자 이들 유적들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농암과 육사는 각각 문화관광부의 문화인물로 선정될 만큼 한국 문학사에 뚜렷이 자리매김되어 있다.

2001년 농암 관련의 몇 가지 추모 행사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가송리 입구에 시비를 건립하는 것도 있었다. 시비 전면에는 <어부단가> 다섯 장을, 뒷면에는 연보를 새겼다. 그 2장은 이러하다.



굽어보면 천길 파란 물, 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
열 길 티끌 세상에 얼마나 가려 있었던가
강호에 달 밝아 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국문학사에서 농암 문학은 자연미의 발견으로 특징지어진다. 퇴계는 그 자연미(강호의 진락)를 ‘농암이 자신에게 물려주었다’고 했다. 진락眞樂은 자연 사랑이고, 그 미학은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풍류다. 유상곡수는 지난날 최고 품격의 풍류이자 자연 사랑이었다. 그런 풍류에서 나온 작품이 <어부가>이고 <도산12곡>이다. 그리하여 두 시인은 분강에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을 연출했다. 《농암집》의 기록은 이러하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달빛에 물빛은 흐릿한데, 분강 한가운데 있는 ‘자리바위’에 촛불을 켜니 강물은 여기서 좌우로 나누어져서 흘렀다. 한 줄기는 내가 앉은 자리 곁으로 흐르고, 아래에 퇴계가 앉아 있었다. 내가 취하여 희극을 일삼으며 술잔에 술을 부어 조그만 뗏목木禁에 올려 띄우니 경호景浩(퇴계의 자)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중거仲擧(황준량의 자)의 무리가 이 정경을 보고 부러워했다.

퇴계는 농암의 유상은 ‘진락’이고, 농암이 소요하는 곳은 ‘진경眞景’이며, 농암은 강호를 진정 이해한 ‘진은眞隱’이라 했다. 이런 극찬은 수사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한 인생이기도 했다. 퇴계의 문학은 여기서 다시 이기철학이 스며들어 철학적 사유가 곧 시적 변용이 되는 피안의 ‘경’의 세계에 도달했다. 강호지락의 낭만적 미 의식과 이기철학의 학문적 사색이 깊이를 더해 갔으니, 거기 우리 고유의 진정한 문화의 도, 풍류가 있었다.

한편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찾아온 신재 주세붕은 농암의 따뜻한 대접을 받고 흥에 겨워 춤추고 노래했다. “감격으로 목이 메인다”고도 했다. 그는 이때의 감흥을 <유청량산록有淸凉山錄>이라는 글로 남겼는데, 이것은 이후에 나온 청량산 유기遊記의 전범이 되었다. 그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분강가로 가 농암을 찾아뵈오니 공이 문밖까지 나와 맞이했다. 방에 들어가 바둑을 두니 곧 술상이 나왔다. 공의 아들 문량이 축수의 노래[壽曲]를 불렀다. 나도 같이 일어나 춤을 추니 공 또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이때 공의 춘추 78세로 내 아버지의 연세여서 더욱 감회가 깊었다.

공의 거처는 비록 협소했으나 좌우로 서책이 차 있으며, 마루 끝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담 아래에는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마당의 모래는 눈처럼 깨끗하여 그 쇠락함이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농암 유적이 신재께서 묘사한―서책, 화분, 화초, 마당의 모래가 눈과 같은―그런 소담한 집이 되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이들 선현들이 펼친 낭만적 풍류와 문학이 이곳에서 재현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 일대가 안동 문학의 향기를 전파하는 산실로 가꾸어지기를 기대한다. 티끌 세상에 가려있고 강호에 달 밝아 오는 올미재야말로 “굽어보면 천 길 파란 물, 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의 현장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돌이켜보면 안동은 실로 세계적 문향이다. 그 어느 지역도 안동처럼 문학으로 가득하지는 않다. 안동은 문학의 열정이 폭발한 곳이다. 농암, 퇴계의 문학적 교유 양상과 낭만적 미 의식은 동시대의 세계 어느 나라의 문학적 성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민족 시인 육사가 바로 이 지역에서 태어남도 우연이 아니며 저마다의 작가가 저마다의 글을 남긴 안동이야말로 실로 글의 보고이며 ‘문집의 고향’이다. 산과 강이 완벽하게 조화로운 도산이야말로 문학을 꽃 피울 그런 터전이다. 많은 가난한 문인들이 이 고장을 찾아 문학의 정열을 불태우기를 기대한다. 





어찌 그림이나 글로써 묘사할 수 있으랴, 월명담과 고산정

올미재를 뒤로하고 청석이 비단처럼 깔린 강변을 따라 수많은 강돌을 밟으며 잠시 오르면 S자 모양으로 구비 꺾이는 곳에 깊은 소가 나온다. 월명담月明潭. 달빛 쏟아지는 연못 같다. 너무 고요하여 선인들이 못이라 했다. 못에 용이 산다고 했던가? 용의 등천이 비와 관련이 있다고 했던가? 이 고요한 못 층 벽에는 도우단禱雨壇이 있어서 고을 수령들은 돼지를 잡아 기우제를 지냈고, 이 전통은 30여 년 전까지도 주민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용도용도 물 주소, 도랑용도 물 주소”라고 했는데, 이 말은 사물 장단에 맞추어 제단 앞에서 오래도록 반복되었다. 이윽고 자정이 오면 제사를 지내고 돼지머리를 강물에 띄웠다. 이로써 의식은 종료되었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때 제를 지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비가 왔다고 했다. 믿음은 소망을 이루어 주는 완강하고 기나긴 영적 결심이다. 퇴계의 시는 이렇다.



그윽하고 맑은 소 빼어나고 푸르니            窈然潭洞秀而淸
그 속 깊은 곳 목석 신령 간직했네.            陰猊中藏木石靈
10일 동안 내린 비 이제야 개니                十日愁霖今可霽
용아 구슬 안고 아늑한 달 속으로 돌아가라.    抱珠歸臥月冥冥

나는 예던 길 전체 여정을 좋아하지만 삽재에서 월명담까지를 더욱 좋아한다. 십여 년 전, 처음 이 강변길을 걸을 때 너무나 행복감을 느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태어나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고 이후에도 그런 감정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 길을 ‘행복의 길’이라 불렀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월명담을 지나면 강 좌우로 인가들이 보인다. 좌측은 쏘두들, 우측은 가사리라고 하는 동네이다. 그리고 강물 저 멀리 절벽 아래 그림 같은 정자가 보인다. 고산정孤山亭. 어느 일간신문에 한국의 아름다운 정자로 소개된 바도 있다. 선조 때 명신 심희수는 이 정자의 아름다움을 가리켜 “그 진경은 그림이나 글로서는 묘사하기 어렵다眞景難摹畵筆端”라고 했는데, 나 또한 쓸 능력이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옛 문헌을 뒤적여 관련 기록을 소개하는 것밖에 없다.

정자 주인은 금란수琴蘭秀(1530~1604)다. 호가 성재惺齋로, 퇴계의 제자다. 부포가 고향인 성재는 이 예던 길을 따라 올라왔다가 이곳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래서 만년의 장구지소杖辜之所로 삼았는데, 어느 해는 이곳 경치에 매료되어 한 해 여섯 번을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 시는 이렇다.



한 해 여섯 번을 왔건만                    一歲中間六度歸
사철 풍광 어김없네.                        四時佳興得無違
붉은 꽃잎 떨어지자 녹음 짙어지고          紅花落盡靑林暗
노란 낙엽 땅에 지니 흰 눈 날리네.          黃葉飄餘白雲飛
단사벽 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砂峽乘風披杰服
매내 긴 소에서 비가 도롱이를 적시네.        長潭逢雨荷蓑衣
이 중에 풍류 있으니                        箇中別有風流在
취하여 강물 속의 달빛을 희롱하네.            醉向寒波弄月輝

성재는 자신의 취향 속에 풍류가 있다고 했다. 풍류는 바람처럼 흐르고 예술적으로 노는 것을 말함이니, 성재는 진정 그런 감정에 젖어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제자를 청량산 길에 찾은 퇴계의 시는 더욱 희화적戱畵的이다.

일동 주인 금씨를                          日洞主人琴氏子
지금 계시는지 강 건너로 물어보니          隔水呼問今在否

농부는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耕夫揮手語不聞
구름 낀 산 바라보며 한참을 앉았네.          誦望雲山獨坐久

성재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뛰어났다. 그 가운데 막내인 금각琴恪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다. 그의 천재성을 두고 《선성지》에는 “7, 8세에 만 가지 이치와 조정의 득실과 세상 인사를 모두 터득했다”라고 쓰여 있다. 즉 학문과 정치와 사회와 인간관계의 이치를 어린 나이에 이미 터득했다는 것이다.

성재는 그런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 허균의 형이자 허난설헌의 오빠인 허봉에게 맡겼는데, 시문에 능통한 허봉은 금각에게 준 시에서 “금각의 시는 이태백을 능가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또한 저 유명한 <등왕각서>를 쓴 왕발과도 비견된다고 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다”고도 했다.

그런데 천재는 박명하다고 했던가. 금각은 불과 18세에 요절했다. 지인들은 진정 슬퍼했다. 외삼촌인 조목趙穆은 “천재가 쓰이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 금각이 마침 가송리의 풍광을 묘사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일동록日洞錄>이라 하는데, 그때 나이가 16세였다.

예안 북쪽 산은 청량이요, 그 남쪽 봉은 축융이다. 축융 아래 마을이 일동이다. 마을은 그윽하고 조용하다. 산은 높지만 좁지 아니하여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함을 다 갖추었으니, 참으로 은자가 살아갈 만한 낙지樂地 가운데 하나다. 그런 땅이지만 아직 이곳을 즐기는 사람이 없어 별천지 세계가 숲 속에 버려져 있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후 아버지가 이곳을 드러나게 했으니, 이곳은 곧 하늘이 땅을 만들어 간직했다가 내어준 곳이리라.

고산정의 맞은편 산은 고산孤山이라 한다. 소종래所從來가 강제로 끊어진 외로운 산이다. 억겁의 세월, 물은 산을 잘라 기어코 어머니의 산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 그리움의 손짓이 고산정이란 말인가! 고산과 고산정의 애틋한 만남의 손짓을 못 본 체하며 강물은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가송佳松은 도산 9곡에서 제8곡으로,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금각의 표현대로 “별천지 세계이며, 하늘이 땅을 만들어 간직한 고반의 낙지”다. 낙동강은 1,300여 리를 흐르는 동안 강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곳에서 모두 보여준다. 곡曲, 소沼, 담潭, 지池, 암巖, 협峽 등이 청량산과 더불어 연출하고 있다. 그런 즐겁고 행복한 땅, ‘낙지’였기에 먹황새들도 이곳 곳곳에 날아들어 그 옛날의 낙지임을 증명했다.

걸작의 《안동향토지》를 쓴 송지향 선생은 “안동 땅의 산수미를 꼽으라면 선뜻 가송협을 들 만큼 여기는 영가 산수의 압권으로, 구차하게 그 자세한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작고 부질없는 짓”이라 했다.

사실 나는 글로서 이 예던 길 일대의 풍광을 묘사할 수 없어 권기윤 화백에게 그려 보기를 권유하고 어느 날 동행했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떠날 줄 몰랐다. 그 호기심과 정열로 보아 불후의 권기윤 대표작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놋다리밟기의 갸륵한 정성, 공주당
고산정이 있는 마을은 가사리인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유적이 있다. 바로 공민왕당과 공주당이다. 공민왕당은 고산정 뒤 축융봉 아래에 있고, 공주당은 마을 가운데 있다. 이들 유적은 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 차비 이씨次妃李氏와 왕의 어머니 태후가 함께 몽진한 《고려사》의 기록과 합치한다. 그 밖에도 윗뒤실, 아랫뒤실, 정자골, 등자다리, 높은데, 구티미 등의 지명을 지닌 주변마을에는 저마다 왕의 부인과 딸과 사위를 모신 당들이 있는데, 왕모산의 왕모당과 더불어 십여 곳에 달한다. 모두 공민왕당을 중심으로 하며 지금도 추모의식이 이어지고 있다.

공민왕당 일대를 산성마을이라 하는데, 산성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1960년대까지 열세 가구가 있었고, 《청량지》에는 전에 밭에서 금비녀, 구리솥, 창과 칼을 습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설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단천리의 굉매리, 의촌리의 장군서들, 섬촌리의 민왕대, 부포리의 고통의 지명 등 헤아리기도 어렵다.

전설은 진실이다. 진실이 없었다면 전설은 있을 수 없다. 정몽주가 철퇴에 맞아 죽은 선죽교에 지금도 흐린 날이면 붉은 피가 배어 나온다고 하고, 고양의 최영 장군의 묘는 풀이 나지 않은 적분赤墳이라 한다.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다. 인심은 진실이 그렇게라도 잊혀지지 않기를 염원한다. 염원은 전승된다. 공민왕 전설 또한 진실의 전승이다. 그 진실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어린 시절 섬촌리 끝자락에 위치한 민왕대로 자주 놀러갔는데, 그때 주민들은 밀양대라 수도 없이 말했다. 밀양대, 밀양대, 밀양대……. 공민왕이 오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전설이고, 공민왕이 머무르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고산정이 과거 완료형 유적이라면 공민왕당과 공주당은 현재 진행형이다. 왕모당을 소개하면서 언급했듯이 홍건적의 말발굽에 쫓긴 공민왕의 몽진 행차는 이 일대를 은신처로 삼았고, 그 행차를 목격한 주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마 외계인이 출현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민왕의 안동몽진 기간은 1361년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70여 일이었다. 70일 동안의 임시 수도가 안동인 셈이었다. 왕이 행차한다는 소문이 현실로 나타나자 청량산 일대에는 한바탕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렇지만 어가가 정확하게 어디에 머물렀는지는 기록이 없다. 예천을 지나 안동으로 들어오는 입구, 겨울의 차가운 시냇물에 다리가 없어 곤란을 겪자 이를 본 여자들이 인교人橋를 만들어 왕비인 노국공주를 건너게 했고, 어가는 계속해서 관아를 지나 북으로 향해 청량산 기슭으로 은신해 갔다. 이미 안동 연고의 호종 관료들이 은밀히 추천한 곳이었다. 안동대 김호종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면 호종 관료 28명 가운데 38퍼센트인 10명이 경상도 출신이고, 나머지 18명 가운데도 5명이 안동과 인연이 있었다 한다. 안동과 청량산으로의 몽진은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청량산에 들어온 어가는 계획대로 왕족들을 분산시켰다. 요컨대 청량산은 최적의 피난처였다.

그리고 2개월이 흘렀다. 2개월은 주민들에게 200년이었다. 그리고 왕은 떠나갔다. 주민들은 왕의 무사 귀로를 손 모아 기원했다. 이 기간 주민들에게 왕은 곧 신이고 그 신이 바로 옆에 와 계신 것이었다. 아마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을 맞이한 하회 마을 주민들이 받은 충격의 백 배는 되지 않았을까? 주민들은 상징물과 추모 공간을 만들었고, 그것은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이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매년 정월 보름날 밤, 주민들은 이 공간에서 정성껏 당제를 지내는데, 이를 보노라면 신앙과 종교가 어디로부터 연원하는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하게 된다.

지금 공주당에는 화려한 초록 저고리와 다홍치마가 걸려 있다. 6. 25 전후, 그러니까 30년 전까지 주민들은 정월 초하루나 그 다음날 이 옷을 입고 서낭대를 앞세워 뒷산을 올라 공민왕당이 있는 산성 마을로 세배를 갔다. 왜 세배를 갔을까?  공주당은 바로 왕비인 노국공주가 머문 곳이다. 역사상 가장 금슬이 좋았던 부부였기에 피난처에서도 부인은 남편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그런 지척지간이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런 도중 해가 바뀌었다. 피난 중에도 설날은 각별했다. 마침내 전세는 호전되어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공주는 새 옷을 갈아입고 시녀와 위병을 대동하고 가마에 올라 공민왕이 머물고 있는 축융봉으로 향했다. 이 모습을 주민들은 고스란히 목격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금 당집에 걸려 있는 화려한 옷은 그때 공주와 시녀들이 입은 것이 아닐까? 새해 주민들이 이 옷을 입고 산성 마을로 세배를 간 것은 공주 행차의 재현은 아닐까? 경이적 세계에 대한 충격은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공민왕은 죽지 않았으며, 왕의 몽진은 적어도 여기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안동이 오늘날처럼 발전한 연유에 대해 두 분 왕의 행차를 농담 삼아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 분은 안동을 한반도 전역에 알렸고, 한 분은 세계에 알렸다. 공민왕과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다.

몽진을 끝낸 공민왕은 그후 조그만 목[福州牧]에 불과한 안동을 대도호부로 승격하여 안동대도호부라 하고, 안동응부安東雄府라는 글씨를 써서 하사하여 안동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뿐만 아니라 중앙 정계에 안동출신 인사들이 진출하여 활약하도록 배려했다. 이런 환경은 결국 왕조가 바뀐 이후에도 안동이 영향력을 잃지 않게 했다. 이는 물론 몽진 초기 인교를 만들어 강을 건너게 하여 놋다리밟기의 전통을 만든 안동인의 갸륵한 정성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영국 여왕은 하회마을, 봉정사를 방문하여 안동을 세계에 알렸다. 여왕의 방문은 조용한 반가의 농촌 마을을 송두리째 바꾸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 하회마을은 파천황의 변모를 겪고 있다. 주민들은 천 년을 이어온 천직을 버리고 숙박업으로 직업을 바꾸고 있다.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노골적 상행위는 군자의 의義에 반하는 소인의 이利 추구로 인식되어, 서애 류성룡의 숨결이 남아 있는 전통적 반촌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으며, 백가쟁명의 무성한 처방이 쏟아지게 하고 있다.


14. 선경의 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청량산을 꼽을 것이다.
        -도산9곡, 청량산-

유산하는 자 유록을 써야 한다, 유청량산록
고산정을 지나면 농암시비가 보이고 그 앞으로는 봉화로 가는 35번 국도가 나타난다. 농암시비는 강과 산과 배와 달과 시가 있는 농암의 풍류를 형상화했는데, 멀리서 보면 산, 배, 나비, 물고기 모양을 두루 연상하게 하는 매우 예술성 높은 작품이다. 시비 앞에서 봉화군 명호면까지의 길은 너무 아름답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길이라 생각한다. 경춘가도가 결코 이 길보다 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길을 따라 봉화-태백-사북-고한-정선-하진부-진고개-주문진의 길을 역으로 내려오는 길을 내심 좋아한다.

국도를 오르면 곧 청량산 입구가 나타난다. 이곳을 너분들이라 하는데, 강변에 넓은 돌[廣石, 혹은 博石]이 있어서 얻은 이름이다. 이곳이 선성 14곡 중 1곡인 박석천博石川이며, 도산 9곡의 마지막 9곡에 해당하는 청량곡이다. 돌, 강, 구비, 단애, 그리고 백사장이 갖추어져 있어 도산 9곡의 시발점으로 전연 손색 없다. 요컨대 안동 문화의 기점인 셈이다.

너분들을 건너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 김덕호씨가 근무하는 출입문이 있고, 주변에는 앞 강가에서 옮겨 온 우아한 수석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그 곁에 퇴계시비가 있다. 2001년 퇴계 탄신 500주년 기념으로 봉화군에서 세웠다. 기존에 퇴계 작이라고 하고 세운 <청량산가>는 그 진위 논란으로 교체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청량산가>는 퇴계의 작품이 아니라고 함이 훨씬 합리적으로 보인다. 문집에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도무지 퇴계의 맛이 나지 않는다. 한 번 감상해 보기 바란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峯을 아느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마는 못믿을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어부魚舟子가 알까 하노라

퇴계는 청량산에서 공부한 바 있다. 그리고 혹애惑愛한 나머지 드디어 ‘우리 집의 산’이란 뜻으로 ‘오가산吾家山’이라 했다. 이를 기념하여 후손과 유림들이 힘을 모아 청량사 옆에 오산당吾山堂이라는 집을 지었다. 1832년 일이다. 그런 연유로 청량산은 지금도 그 소유가 퇴계 문중으로 되어 있다.

퇴계는 “산에 대한 소유는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 욕심을 경계했다. 그런데 청량산과 더불어 도산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글 <도산잡영>의 끝에 산주기山主記라 하여 도산서원 일대와 청량산의 소유권을 그 당시부터 결정짓게 했다. 산 소유권과 재산 개념이 희박하던 시대에 이런 표현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청량산의 진가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신재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다. 김생, 최치원, 원효, 의상도 이곳에 머물렀다지만 기록은 없다. 퇴계 역시 이 산을 좋아했지만 어디까지나 유산지처遊山之處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신재는 놀랍게도 이 산을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 구월산, 삼각산 등 5대 명산에 비견되는 하나로 보았다. 그래서 거듭거듭 찬양했다. 
우리나라 산 중에 웅장하기로는 지리산이요, 청절하기로는 금강산이며, 기이하고 빼어나기로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계곡이다. 그러나 단정하고 엄숙하며 상쾌하고 경개한 산으로는 청량산으로, 비록 규모는 작지만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우리나라의 명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저 다섯 산을 이를 것이니, 북은 묘향산, 서는 구월산, 동은 금강산, 가운데는 삼각산, 남은 지리산이다. 그러나 작으면서 선경仙境의 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청량산을 꼽을 것이다.

규모는 작으나 선경의 명산이 신재가 본 청량산이다. 사실이 그러했다. 여러 명산들을 계획적으로 등산한 신재의 안목이기에 이 평가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신재의 청량산 등반은 오랜 준비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행해졌다. 신재가 청량산을 찾은 것은 1544년 4월 11일이고, 하산은 17일이며, 글은 19일에 완성했다. 꼬박 일주일 동안 온 산을 몸소 밟아 가면서 글을 썼다. 그때 신재는 이 작은 산에서 무려 열아홉 개의 절과 암자를 직접 만났다. 문헌으로는 이 무렵을 전후하여 스물일곱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기록이 의문스러웠다. 도대체 이 작은 산 어디에 그런 많은 절이 지어졌단 말인가? 그런데 차츰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유념해 살펴보니 조금 편편한 곳은 절터의 흔적이 완연했다. 청량산은 산 전체가 법당인 불가의 산이요, 사찰과 암자의 바다였다.

그런데 불가의 산 청량산은 신재를 만나면서 일거에 유가의 산으로 변모했다. 한마디로 혁파해 버렸다. 신재는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를 육육봉六六峰(12봉우리)으로 새로 작명하고 나머지 허탄한 불교적 잔재를 그야말로 쓸어버렸다. 천하의 명산 청량산이 올라와 보니 온통 불가의 산임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이는 16세기의 극심한 숭유억불책과 맥을 같이한다. 이를 결산하는 글이 유명한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이다. 이 글은 아마 청량산 기행문으로는 전무후무한 최고의 명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 글을 읽어 본 퇴계는 발문을 쓰면서 청량산과 신재의 만남을 ‘산의 일대 만남山之一大遇’이라 했다. 청량산이 임자를 만나 그 진가를 비로소 얻었다는 뜻으로, 퇴계는 이 글의 빼어난 문장력과 심미안을 극찬하며 “위대하시다偉哉”라고 했다. 퇴계는 나아가 소백산 기행문을 직접 쓰고 그 효용을 역설했다.

내가 그 시문(<유청량산록>)의 뛰어남을 감상하니 곳곳에서 읊은 것이 마치 홍안의 백발 노인과 더불어 말하고 서로 수창酬唱하는 듯했다. 이에 힘입어 감흥을 일으키고 정취를 얻은 것이 진실로 많았다. 진실로 유산遊山을 하는 자는 유록遊錄을 남겨야 한다. 왜냐하면 기행문은 등산에 유익함을 주기 때문이다.

유산은 등산이며 유록은 기행문이다. “유산하는 자 유록을 써야 한다”는 퇴계의 언급은 하나의 산행 지침이 되었다. 그래서 신재의 기행문은 이후 수많은 선비들의 청량산 기행문 저술의 전형이 되었다. 내가 본 청량산 기행문만도 퇴계의 <백운암기>를 비롯하여 허목의 <청량산기>, 이익의 <유청량산기>, 이상룡의 <유청량산록> 등 50여 편이 넘는다. 최근 국학원의 임노직 선생을 만나니 그는 이미 80여 편의 글을 보았고 정리하는 중이라 했다. 따라서 청량산 등산과 청량산 기행문을 쓰는 것이 유행처럼 전파되었다. 이로써 불가의 산 청량산은 유가의 산으로 급격히 변모했으며, 이후 퇴계의 명성과 함께 영남 유교의 메카와 같은 성지로 인식되었다. 선비들의 청량산 유산과 유록 작성은 일종의 성지순례와 순례 보고서 제출의 의미마저 지녔던 것이다.

굳세고 뾰족함이 여러 바위들이 다투는 듯하다, 김생의 글씨

지금 청량산 등산은 2~4시간 정도 소요되며, 네 개 정도의 코스가 있다. 산 입구 관문에서 2분 가량 차로 오르면 두들마을과 새미터로 오르는 최초의 등산로가 있고, 여기서 조금 오르면 청량사를 바로 오르는 계곡 코스가 있으며, 여기서 또 조금 오르면 웃청량골 아래의 등산로로 입석-응진전-김생굴-자소봉으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남청량산 축융봉을 향해 산성, 공민왕당, 가송리를 전망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 저마다 특색이 있으니 두고두고 오르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입석-응진전 코스를 소개한다. 돌 층 벽을 따라 15분 정도 오르면 문득 시원한 전망대와 함께 서편 까마득한 바위 아래 그림 같은 암자가 보인다. 응진전應眞殿이다. 옛 명칭은 상청량암이다. 나는 백 번도 넘게 청량산을 올랐고, 그 대부분을 이 코스로 지났다. 손님이 오면 안내했고 틈이 나면 올랐으니, 아마 가장 많이 오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 이 암자의 근황을 20여 년 정도 지켜보았고, 그 변모의 모습이 우리 조국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음을 보았다. 십 년 전까지도 이 암자를 찾는 신도는 없었다. 뜨내기 중들과 무속인들이 어쩌다 들고 나는 정도였다.

언젠가 고적한 이 암자에 적음寂音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를 만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매월당이 환생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사발로 소주를 폭음하며 시국에 비분강개하는 모습은 바로 무도한 수양대군에 대항해 악전고투하며 방황하는 영락없는 매월당이었다. 적음은 자신이 기관에 끌려가 당했다는 고문의 상처를 보여 주며 “이제 끝장을 내야합니다”라고 포효하며, “곧 올라가겠노라”고 했다. 그때 서울 도심을 들끓게 한 소위 넥타이부대의 출현 의미를 한국의 오지 청량산의 한 암자 속에서 생생하게 느꼈다. 그리고 독재 정권이 곧 멸망할 것도 확신했다. 적음은 자신이 경주 최부자의 후손이라 했고, 중광을 형편없는 사이비라 하며, 자작의 시화집도 보여 주었고, 자신의 애인이 자주 이곳을 찾아온다고도 했다. 실로 파격적인 스님이었다.

적음은 어느 날 수수께끼처럼 사라져 버렸고, 그후 다시는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당시의 건강 상태와 자학적인 자세로 보아 아직까지 생존해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응진전을 지나면 곧 천 길 낭떠러지 석벽을 지나게 된다. 아래에서 보면 도저히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수직 절벽에 길이 있다. 이 석벽 길이야말로 청량산의 압권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이곳을 지나면서 한 번도 아래를 바로 내려다본 적이 없다. 지금은 조금 다듬어졌지만 예전에는 매우 가파른 곳이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곳에서 추락한 사람이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긴 산 전체가 법당인 청량산 입석의 길에 석가모니의 자비와 인도가 왜 없겠는가!

석벽 길을 지나면 청량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른다. 어풍대御風臺다. 바람을 몰아 오고 몰아 가는 그런 우뚝한 지점이다. 여기서는 누구든 쉬어 간다. 하긴 요즈음은 쉬지 않고 가는 사람이 더 많다. 유산의 여유보다 등산의 조급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금탑봉 아래 석별길에는 하청량암, 상청량암, 치원암, 극일암, 안중사 이렇게 다섯 암자가 있었다. 안중사는 신재가 찾았을 때 퇴계의 숙부인 송재 이우 시가 벽에 있었고, 극일암 뒤 풍혈은 그 위치가 매우 험한데 입구에 최치원이 사용한 바둑판이 있었다고 했다. 극일암 돌계단 위에는 둘레가 열 아름에 높이가 천 척인 노송이 있었으며, 주위에 동석, 총명수 등의 명소가 있다고 했다. 송재 이우의 총명수 시는 이렇다.

돌 틈으로 샘물 졸졸 솟아오르는데            石�涓涓側湧淸
중 말하기를 ‘마시면 총명해집니다’ 한다        僧言飮者發聰明

우습다, 나도 그때 수없이 마셨지만            當年笑我傾千斛
아직까지 혼미한 한 늙은이라네                昏瑩依前一老生

총명수는 최치원이 마심으로써 그 이름을 얻었고, 그 부근에는 치원암이 있었다. 서애 류성룡의 아들 류진이 청량산을 찾았을 때 치원암과 보현암에 퇴계가 쓴 친필 시가 벽에 있었다고 했다. 류진의 《수암집》을 보면, 그 시가 실려 있는데, “벽에 그대 탄식의 글 보니壁上看君興歎語, 내 마음 어찌 그대와 같지 않으랴吾心何�與君同”였다. 그 시는 일찍이 제자 금란수가 청량산에서 오랜 기간 공부했지만 별 소득이 없음을 한탄한 시를 보고 지었던 것이다. 퇴계가 이 시를 쓴 해는 1564년이고, 류진이 찾은 해는 1614년이니 적어도 이 40여 년 동안은 치원암과 보현암에 퇴계 시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강 정구는 “치원암의 시는 판각하여 보존했고, 보현암의 시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류진이 찾았을 때 청량산 20여 암자 가운데 중이 있는 곳은 연대사에 서너 명, 지장전에 단 한 명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석벽 길’ 바닥과 좌우 곳곳에 기와파편이다. 당시 암자들의 잔해이다. 이들 기와파편들을 만져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육육봉’의 산세를 가늠해본다. 그리고 청량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우측 등산로로 조금 오르니 ‘김생굴’이 나온다. ‘서성書聖’ 김생金生이 그 유명한 ‘김생필법’을 깨우쳤다는 바로 그 현장이다. 김생필법이 ‘청량산의 산세 때문[山故]’이라는 기록은 여러 글에 보이는데, 신재의 글에 “내 집에 김생서첩이 있는데, 그 글자 획이 굳세고 뾰족함이 마치 여러 바위들이 다투는 듯한데, 지금 이 산을 보니 바로 김생이 이 산세를 보고 깨우쳤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김생의 청량산 공부는 김생이 청량산 뒤 ‘재산면 출신’임과, 청량산 앞 태자사의 ‘낭공대사김생글씨집자비문’으로 그 개연성은 충분하다. ‘청량산을 닮았다’는 그 글씨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도 한번 대조하고 감상해보기 바란다.

‘김생굴’에서 위로 올라가면 옛 선인들이 찾아갔던 ‘자소봉’, 선학봉, 장인봉으로 이어지는 멋진 봉우리능선과 낙동강을 굽어보는 절경의 ‘금강대’와 ‘금강굴’을 보게 된다. 청량산이 16세기 이전에 ‘수산水山’이라 했음은 바로 이 금강대 앞의 펼쳐진 한 폭의 그림 같은 낙동강의 풍광 때문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이번 발길은 여기서 아래의 ‘오산당’으로 향한다.

 ‘오산당’은 퇴계의 청량산 입산공부를 기념해서 19세기에 지어진 아담한 건물이다. 청량산 유교문화의 상징적인 건물로 보면 되겠다.

산행은 곧 공부다
그렇다면 퇴계에게 청량산 유산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퇴계는 13세에 숙부인 송재 이우의 명령으로 청량산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64세까지 여섯 번 정도 입산했다. 13세, 15세, 25세, 33세, 55세, 64세로 평균 10년에 한 번 정도 입산했다 할 수 있다. 많이 올랐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고 결코 적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퇴계는 그 사이에도 청량산과 꾸준하게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교감은 다름 아닌 청량산 관련의 시문 저술이었다. 이것은 퇴계 자신이 산행=공부의 등식인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의 신념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퇴계는 “독서가 유산 같다 말하지만, 이제 보니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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