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고단한 인생길 가다가 마음 기댈 수 있는 곳”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중고등학교 점원 생활하며 공부…‘도시계획 전문가’
공공주택 디자인혁신주도, 소통과 개방의 주거문화 조성

재경 영주향우회 박찬흥 회장은 대한민국 유수의 건축사무소인 바탕건축사사무소 대표이다.

건축설계라는 소프트웨어 전문가인 박 회장의 어린 시절은 농사가 중심인 세상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영주의 최남단 문수면이다.

풍기의 금계천과 남원천, 순흥의 죽계천의 물이 모여 흐른 서천의 물과 봉화에서 발원해 이산면을 지나온 내성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담배, 고추, 콩, 보리, 수수 등 많은 작물을 힘들게 재배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곳이기도 하다.

그도 어릴 때 농사일을 하며 자랐다. 당시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 졸업 후 1년간 했던 농사일이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학생 중 농번기에 농삿일을 돕느라 결석을 한 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이 모이면 어린 시절의 고생이 추억담으로 나온다.

재경영주향우회 사무실에서재경영주향우회 사무실에서

영주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부터는 점원 생활을 시작했다. 농사를 돕기보다 더 쉬워서 좋았다고 한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시작했던 점원 생활은 고등학교에 까지 이어졌다. 공부를 잘 하던 학생들 중 빠르면 중학교를 또는 좀 늦더라도 고등학교를 안동이나 대구로 유학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가정 형편상 그럴 수 없었던 박 회장은 “그 때 집안 형편이 좋아 외지에 가서 공부했더라면 지금의 애향심이 약해지지 않았을까요? 영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게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입니다”라고 한다. 애향심을 기준으로 어려운 시절의 여건을 다행이라고 할 정도이니 재경영주향우회 회장다운 말이다.

바탕건축이 2015년 설계한 평택고덕지구 Ca-1·Ca-2 블록 조감도바탕건축이 2015년 설계한 평택고덕지구 Ca-1·Ca-2 블록 조감도

서울시립대 건축공학과 진학...‘건축가 가족’

박 회장 집안은 건축가 가족이다. 20대에 서울대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30대 초반에 서강대 교수로 있는 아들을 제외하곤 딸과 사위도 건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 만나면 건축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다고 한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건축이 무엇인지 고민을 같이 하기도 한다.

박 회장은 서울시립대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대한주택공사에 입사했다. 대한주택공사에 재직하면서 업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서울대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다.

실제 지도교수로부터 모 대학의 교수직 제안을 받았지만 직접 설계를 하고 건축을 하는 대한주택공사의 담당업무가 무형에서 유형을 설계하고 현실에 구현하는 매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가 직접 설계에 참여하고 시공에 공을 들인 전국의 주택단지들이 산고를 거치면서 낳은 자식처럼 보인다고 한다.

울산다운2지구 A-2블록 커뮤니티시설 조감도울산다운2지구 A-2블록 커뮤니티시설 조감도

지방근무가 많던 시절, 가족도 함께 이주

지방근무를 할 땐, 부모님과 부인도 함께 갔다. 주말 가족 보다는 같이 사는 삶을 사람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부부가 함께 살면서 주택의 내부 구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더 할 수 있었다. 지방 근무가 많았지만 자녀들이 반듯하게 컸다.

자녀들이 전학을 많이 다니면서 부적응을 하거나 소외를 느끼는 일이 없지 않았지만 자녀의 문제로 속을 썩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람의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이 사는 공간을 설계하듯이 자녀들을 배려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재경영주향우회 임원진들과 함께재경영주향우회 임원진들과 함께

공공분야의 연속이었던 ‘삶의 길’

공부를 모두 공립학교에서 했다. 고향인 영주에서 다닌 초중고가 공립학교였으며 대학진학은 시립대학인 서울시립대학교였고 대학원은 국립인 서울대학교였다. 직장도 공공분야 사업을 하는 대한주택공사였다. 공기업인 대한주택공사에 1982년 입사 후 한 직장에서 31년을 근무했다. 그는 한 직장에서의 31년 근무를 행운이라고 했다. 공공분야에 자신의 족적을 남길 수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1982년 입사 첫해에 을지로 도심재개발 사업의 설계와 현장 관리를 시작으로 네 번의 현장 감독 소장을 역임했다. 설계, 현장 관리, 감독을 했으니 자신이 그린 비전에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되는지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그 뒤 도시재생사업처장 2회, 도시재생설계처장, 주택사업본부장(상임이사), 건설기술본부장(상임이사)을 거쳤다. 처장 및 본부장 시절, 전국의 도시별로 최적의 도시재생사업을 펼쳤으며 공공주택의 사업기획부터 건설, 사후관리까지 책임 있게 추진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건축 현장에 있으면서도 학문 발전에도 기여

한국구조물진단유지관리공학회 부회장, 한국리모델링협회 부회장으로 동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며 학문 발전에 따른 현장의 개선도 도모했다. 다른 대외 활동으로 국회 도시재생포럼 실무위원장, SH공사 자문위원, 한국생산성본부 심의 및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회사 일을 하면서 맡은 활동이었기에 힘들고 때로는 귀찮은 일일 수도 있었으나 그에게는 공공분야의 가치를 높이는 보람있는 일이기도 했다. 모두 공공분야이며 동 분야에서 박 회장을 필요로 했고 이를 적극 수락해 기여하고자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고향의 저소득층을 위한 사업을 했다.

영구임대주택, 장기임대, 국민임대, 행복주택 등 새정부가 들어설 때 마다 명칭이 달라지기는 하나 저소득층을 위한 사업인 주택 사업을 고향 영주에서도 추진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공사 퇴직 후 건축사사무소 창업

박 회장은 2014년 ㈜바탕건축사사무소를 창업했다. 바탕건축은 창업 이래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주택도시공사, 민간 건설업체에서 시행하는 다수의 공동주택 설계에 참여하고 있다. 사람중심 설계, 친환경중심 설계, 창의적 디자인 혁신을 설계의 목표로 설정하며 그 구현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

바탕건축사사무소는 주식회사로 현재 100명의 임직원들이 ‘살고 싶은 공공주택’ 설계를 하는 유수의 건축사무소로 성장했다. 공공주택 디자인의 혁신에 초점을 두고 개방과 소통의 주거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또 마을공동체를 해체하고 더 나아가 가족 간에도 선을 긋는 등 차별과 경계 구분의 난개발이 아니라 입주민을 포함해 지역 주민들도 함께 소통을 할 수 있고 세대를 이어줄 수 있는 공간 창출을 공공주택 설계 주요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같은 시도는 창업 초기부터의 기조이다. 2015년 설계한 평택고덕지구의 공공주택을 예로 들어 본다. 세대와 계층, 시설을 통합하는 지역 공동체 단지로 설계하고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도록 획기적 디자인으로 지역사회와 소통이 되도록 한 것이다. 성냥갑 같던 공공임대아파트 형태를 벗어나 리조트를 연상케 하는 공간을 구현했고 단지 내 보행로도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생동감을 살렸다.

단지 중앙의 어린이공원과 보행가로축에는 열린마당과 공공시설을 집중 배치해 단지 내·외부를 아우르는 지역 거점으로 만들었다. 옥상에는 옥상녹화와 태양광 발전, 지열 등 신재생 에너지를 활용해 주거비용 부담을 줄이고 환경보호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코로나19로 활동의 제약... 재경향우회장으로서 고향 발전 고민

현재 박 회장은 출향인들의 모임을 활성하기 위해 영주시 각 읍면의 향우회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고향을 사랑하지만 방법론에서 애매하고 때로는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서먹해서 시도를 못하는 애향인들을 위해 출향인들과 고향 사이의 벽을 깨고 소통을 하고 긴밀한 연계를 갖도록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영주시 서울사무소와도 긴밀히 협조를 하고 있다. 박 회장의 공공주택단지의 컨셉이 개방과 소통인 점과 통한다.

그가 용인시 외곽에 주말 주택에서 텃밭 가꾸기를 하며 유기농 채소와 케어팜을 가꾸는 것도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에게 고향은 어머니와 같다.

그는 고향을 생각하며 ‘고향은 고단한 인생길 먼 길을 가다가 어느 날 불현 듯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시기에 우리 서로 마음 기댈 수 있는 곳, 견디기엔 한 슬픔이 너무 클 때 부르지 않아도 달려갈 수 있는 고향이 있기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고향에 사는 사람들은 애향인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대하면 애향인들의 고향 사랑 노력이 더욱 많아지고 깊어지겠단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주도 제4차 산업시대 대처 고민해야

제4차 산업은 이제 미래학의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이미 현실에 구현되고 있다. 영주가 낙후된 시골 지역이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 사회, 문화의 모습을 구현하고 세계와 함께 호흡하는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4차산업혁명과 함께 한다고 박 회장은 본다.

박 회장은 현재 중점 추진하는 사업인 힐링 및 케어 팜 도입, 첨단 베어링 산업, 동서 횡단 철도, 항공 관련 산업 등을 4차산업의 맥락 속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지역이 갖지 못한 특산품, 임산물, 문화, 관광자원들도 이 맥락 속에서 활용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획력, 정책지원, 전문인력 양성 등 역량 강화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향우회 또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황재천(프리랜서) 기자 / 오공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