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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목민심서 예전(禮典) 6조 제4조 흥학(興學) - 황금계 관련 내용 포함 > > 목민심서 예전(禮典) 6조 > > > > 제4조 흥학(興學) > > > > 학문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니 스승이 있은 뒤에야 배움이 있는 것이다. 덕망(德望)이 있는 사람을 초빙하여 사장(師長)을 삼은 뒤라야 학규(學規)를 의논할 수 있다. > > > > > > 중국의 주학(州學)에는 모두 교수(敎授)가 있었고, 우리나라 군현의 학교에는 모두 훈도(訓導)가 있었는데, 중세 이후로는 이 관직이 없어졌다. 지금 생도를 모아 학문을 권장하려면 반드시 덕망 높은 큰 선비가 스승이 된 뒤에야 가능할 것이니 어려운 일이다. > > 《경국대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 “향교(鄕校)의 교관(敎官)의 공궤(供饋)에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관찰사가 조사하여 전최(殿最)의 근거로 삼을 것이다.” > > 제(齊)나라 소경(蘇瓊)이 청하 태수(淸河太守)가 되었을 때 매년 봄마다 대유(大儒)인 위기(衛覬)ㆍ융전(融田)ㆍ원봉(元鳳) 등을 불러 모아 군학(郡學)에서 강론하게 하고, 관리들도 사무(事務)를 보고 난 여가에 모두 글을 배우도록 하였다. > > 한문공(韓文公)이 조주 자사(潮州刺史)가 되었는데, 조주 사람들이 학문(學文)을 모르므로 진사(進士) 조덕(趙德)을 스승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니, 이로부터 조주의 선비들이 모두 문행(文行)에 독실하여 모든 백성들까지 본받으니 다스리기 쉬운 곳이라는 평판이 났다. > > 장영(張詠)이 익주(益州)를 다스릴 때 학교가 퇴락(頹落)되어 있었다. 공은 군인(郡人) 장급(張及)ㆍ이전(李畋)ㆍ장규(張逵)가 모두 학행(學行)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초청하여 예우(禮遇)하고 과거에 응시하기를 간곡히 권하였다. 뒤에 세 사람은 모두 등과(登科)하여 좋은 벼슬을 지냈다. 이에 두 고을의 학자들은 권면(勸勉)할 바를 알아 문풍(文風)이 나날이 진작되었다. > > 여공저(呂公著)가 영주 통판(穎州通判)이 되었는데, 이때 마침 구양공(歐陽公)이 영주 지사(穎州知事)가 되어 부임하는데 초천지(焦千之) - 자(字)는 백강(伯康)이다. - 가 따라왔다. 여공은 초천지를 초빙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제자 중에 약간의 잘못이라도 있으면 초 선생은 단정히 앉아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마주 앉아 종일토록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여러 제자들이 외복(畏伏)하여야 선생은 기색을 약간 풀었다. > > 호원(胡瑗)이 소(蘇)ㆍ호(湖) 두 주(州)의 교수가 되었을 적에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입고, 종일토록 여러 제자를 대하되 스승과 제자와 예를 엄격히 하였으며, 경(經)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다스린 뒤에 남을 다스릴 수 있는 것으로 자세히 말해 주니, 학도(學徒) 수천 명이 날마다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문장(文章)을 짓는데도 모두 경의(經義)를 부연할 뿐이었다. > > 그가 호학(湖學)에 있을 적에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治事齋)를 설치하였는데, 경의재에는 기국(器局)이 활달한 자를 뽑아 있게 하고, 치사재에서는 사람마다 각각 한 가지 일을 익히고 게다가 또 한 가지 일을 하게 하였으니, 치민(治民)ㆍ치병(治兵)ㆍ수리(水利)ㆍ산수(算數) 따위였다. 그 제자가 사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아정(雅正) 근칙(謹飭)하니, 그 말씨나 행동만 보아도 선생의 제자임을 알 수 있었다. > > 채양(蔡襄)이 천주(泉州)를 다스리게 되었다. 과거 민(閩) 사람들은 학문을 좋아했으나 대부분이 시부(詩賦)만을 익혀 과거(科擧) 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는데, 공이 주희맹(周希孟)을 선생으로 초빙하여 경술(經術)로써 가르치니, 배우는 자가 항상 수백 명에 이르렀다. 공은 친히 학교에 가서 책을 가지고 강문(講問)하기도 하고, 처사(處士) 진열(陳烈)을 초빙하여 스승의 예로 높이고, 덕행(德行)으로 향리(鄕里)에 소문난 진양(陳襄)ㆍ정목(鄭穆)에게 겸손한 태도를 지어 모든 학생들을 위하여 솔선하였다. > > 왕형공(王荊公)이 운령(鄞令)이 되었을 때 두순(杜醇) 선생을 현학(縣學)으로 초청한 편지는 다음과 같다. > > “제가 이 고을의 현령이 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바야흐로 공자묘(孔子廟)에 학교를 세워 현의 자제들을 가르치고자 하니,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저의 초청에 유의(留意)하시고 왕림(枉臨)하시어 스승이 되어 주신다면 저도 가르침을 들을까 합니다.” > > 임조(林肇)가 자계 현령(慈溪縣令)이 되어 공자묘를 수리하고 그 사방의 부속 건물들을 보수하여 학교 강당(講堂)으로 만들고, 현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두순(杜醇)을 선생으로 초빙하여, 학풍(學風)을 진흥시켰다. > > 석자중(石子重)이 검주(劍州) 우계현(尤溪縣)을 다스릴 때의 일이다. 현이 원래 궁벽하고 학교마저 폐지된 지 오래여서 선비들의 견문이 적어 학문하는 방법을 몰랐다. 석군(石君)은 부임하는 즉시 친구 고전(古田) 임용중(林用中)을 불러 교육의 일을 맡기고 읍(邑)의 자제 중에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을 뽑아 제자의 원수(員數)에 채웠다. 교육을 시작하는 날 친히 좌사(佐史)와 빈객(賓客)들을 거느리고 가서 성현(聖賢)의 교학(敎學)을 설명하였다. 이 뒤로 5일마다 한 번씩 가서 북을 울리며 당(堂)에 올라 여러 학생의 학업 진도(進度)를 묻고, 서로 반복하여 의리의 지당한 뜻을 찾게 하였다. 다른 지방 사람들도 모두 양식을 가지고 와서 취학(就學)하니, 학교가 좁아서 석자중은 곧 학교의 규모를 키워 새로 증축하고, 책 1만 권과 전지 수백 묘(畒)를 사서 학교에 들여 놓았다. 학교가 완성된 뒤에는 옛 제도를 상고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여 낙성연(落成宴)을 하니 선비들은 비로소 학문의 방법을 알고 백성의 풍속도 변화되었다. > > 주자(朱子)가 장주(漳州)에 있을 때 발송한 연군사입학첩(延郡士入學牒)은 다음과 같다. > > “주현(州縣)의 양학(兩學)을 살펴보건대, 강설(講說) 과정이 근래에 와서 점차로 차례가 잡히고 있으나, 주군에서 존현(尊賢)의 마음이 지극하지 못하여 제생(諸生)들로 하여금 훈도(薰陶)되는 바가 없게 하였다. 지금 보니 정주(汀州)의 새 지록(知錄) 황 종사(黄從事)는 기국(器局)과 자질(資質)이 혼후(渾厚)하고 지조(志操)와 행동이 단아(端雅)하고 방정(方正)하며, 집에 들어앉아 글만 읽고 권력(權力)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으니 향려(鄕閭)의 식자(識者)들 중에 그를 추대해 높이지 않는 이가 없다. 만약 예로 초청하여 주학(州學)ㆍ정록(正錄)의 직임(職任)을 맡기고 현학(縣學)의 교도(敎導) 직책까지 겸임(兼任)하게 한다면 반드시 제생들이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교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학정(學正) 시윤수(施允壽)와 석홍경(石洪慶)은 모두 늙은 나이에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고 강의(剛毅) 방정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는다. 공사(貢士) 임이간(林易簡)과 진사(進士) 이당자(李唐咨)는 학문의 연구가 정미(精微)하고 몸가짐이 단아하여 그들의 뜻과 행동을 살펴보매 오래될수록 더욱 볼 만하다. 공사 진순(陳淳)과 태학생(太學生) 양사훈(楊士訓)은 나이는 아직 어리나 학문은 이미 방향(方向)을 알고 있으며, 영가학생(永嘉學生) 서우(徐寓)는 학문에 힘써 스승을 구하며 뜻하고 숭상하는 바가 확고(確固)하다. 이 몇 선비들은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니, 모두 초청하여 특별히 예우(禮遇)한다면 모든 학교의 자제들은 장수 유식(藏修游息)의 어떤 때이고 양사(良師)와 외우(畏友)의 도움을 받지 않음이 없어서 거의 의리(義理)가 밝아지고 학업이 성취되어 위로 인재(人材)의 교양 작성(敎養作成)을 바라시는 성조(聖朝)의 뜻에 부응하게 될 것이다. > > 이 밖에 사인(士人) 중에도 나이가 많고 덕이 높아 온 동리가 추존하거나 경술(經術)에 밝고 행동이 닦여져서 여러 사람들이 존중하는데도 포부(抱負)를 간직하고 자중(自重)할 뿐, 명예를 구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것이니, 널리 탐문하여 계속 초청해야 할 것이다.” - 소희(昭熙) 3년 정월 2일의 첩(牒) - > >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에 부임한 처음에 내린 방유문(榜諭文)은 다음과 같다. > > “본군(本軍)은 뒤에는 강려산(羌廬山)이 있고 앞에는 팽려호(彭蠡湖)가 있어 웅장하고 수려한 지세(地勢)가 동남에서 으뜸이며, 우(禹)의 발자취가 닿았던 곳이고, 태사(太史)가 유람했던 곳으로 성현의 유풍(遺風)이 있다. > > 동진(東晉)에 이르러 도씨(陶氏)의 장사(長沙)와 정절(靖節) 조손(祖孫)이 명망(名望)을 날렸고, 성조(聖朝)에 와서는 유씨(劉氏)의 둔전(屯田)과 비승(秘丞) 부자(父子)가 덕업(德業)을 계승하여 모두 도덕과 공업(功業)이 역사에 실렸으므로 그 풍성(風聲)과 기속(氣俗)이 아직까지 보존된 것이 있어 후세에 우수한 자들이 뒤를 이어 나오고, 어깨를 견줄 만하였더니, 근년에 와서는 사풍(士風)이 쇠폐(衰弊)하여 학교에서 기르는 선비가 30명에 불과하고 대비(大比)에 응시하는 인원 역시 적다. > > 도를 익히고 몸을 닦은 선비로서 학교에 유학하고 과거장〔場屋〕에 들어가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물론(物論)에 물어 물외(物外)의 영호(英豪)를 구해도 탁월하다고 칭할 만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백성을 기르는 관리가 유의(留意)하지 않아 후생들로 하여금 학문에 종사할 수 없게 하였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제 향당(鄕黨)의 부형(父兄)들은 학문에 뜻을 둔 자제를 추천하여 입학시키게 하고, 관에서는 주비(廚費)를 늘리며 자제들은 보결(補缺)을 기다리는 동안 강의를 듣고 과정(課程)을 밟게 하라. > > 한편, 본군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조치하여 학교의 양식을 더욱 늘리고 당직(當職)도 공무(公務)의 여가에 때때로 학교에 가서 학관(學官)과 함께 경(經)의 뜻을 강설(講說)하고 학생들을 다방면으로 인도한다면 거의 훌륭한 인재와 우수한 백성들이 배출되어 위로 인재를 기르시겠다는 천자의 뜻에 부응함이 있을 것이다.” > > 요선(姚善)이 가흥부(嘉興府)를 다스릴 때 경(經)에 밝은 유정목(兪貞木)을 존경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그를 학교로 초청하여 경서(經書)를 강론하여 선비들을 훈계하게 하였다. > > 자신을 매우 고상히 지키는 전근(錢芹)이란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요선이 유정목에게 보낸 쌀이 전근에게 잘못 전달되었는데, 전근은 그 쌀을 받았다. 그러자 유정목이 말하기를, > > “전 선생은 구차히 취하지 않는 분인데 지금 쌀을 사양치 않고 받은 것은 반드시 부공(府公)의 어지심을 우러러보아서일 것입니다.” > > 하였다. 요선은 그 말을 듣고 가서 전근에게 인사를 하니, 전근은 다음 달 초하룻날에 학교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요선은 그 시기에 학교로 가서 전근을 맞아 상좌(上座)에 앉히고 경의(經義)를 질문하니 전근이 말하기를, > > “이는 선비의 일일 뿐입니다. 지금 관직을 지키시는 몸인데 어찌 시무(時務)를 말하지 않습니까.” > > 하고, 드디어 한 장의 글을 내어 요선에게 주고는 끝내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고 가 버렸다. 그가 돌아간 뒤 그 글을 보니 적을 막고 제압하여 승리하는 계책이었다. > > 황준량(黃俊良)이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어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전보다 규모를 늘리었다. 이때 성주 교관(星州敎官)은 사문(斯文) 오건(吳健)이었는데 뜻과 의견이 잘 맞았다. 제자 약간 명을 뽑아 네 등급으로 나누어서 오건에게 가르치는 일을 맡기고, 매월 한 번씩 강(講)하여 그동안 배운 글을 배송(背誦)시키고 의의(疑義)를 논란케 하고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상고하여 상벌(賞罰)의 차례를 정하였다. > > 성주 동쪽의 공곡(孔谷)에 당을 세우고, 또 팔거현(八莒縣)에 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워 여러 방면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니 성취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 > 이상급(李尙伋)이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되었는데, 단천은 북쪽 변방이어서 문학을 숭상하지 않았다. 공은 그중에서 약간 우수한 자를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고, 매월 초하루마다 반드시 친히 공자묘(孔子廟)에 배알(拜謁)하고 인하여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예(文藝)로 모두 손꼽을 만한 자가 있게 되었다. > > > > [주D-001]전최(殿最) : 관리(官吏) 성적(成績)의 우열(優劣)을 말한다. 감사(監司)가 관하 각 고을 수령(守令)의 치적(治績)을 심사하여 중앙에 보고할 때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 하였다. 음력 유월과 섣달에 시행하였다. > > [주D-002]소경(蘇瓊) : 북제(北齊) 사람으로 자는 진지(珍之)이다. 제 문양제(齊文襄帝) 때 청하 태수(淸河太守)를 거쳐 대리승(大理丞)이 되었고, 제(齊)나라가 망한 뒤 다시 주(周)나라에 벼슬하여 박릉 태수(博陵太守)를 지냈다. 《北史 卷86 循吏傳》 > > [주D-003]한문공(韓文公) : 당(唐)나라 중기(中期) 때 유학자(儒學者) 한유(韓愈)로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문공(文公)은 그의 시호이다. 이 사실은 《고문진보(古文眞寶)》 조주한문공비(潮州韓文公碑)에 보인다. > > [주D-004]장영(張詠) : 송(宋)나라 사람으로 자는 복지(復之)이다. 호는 괴애(乖厓),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벼슬은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宋史 卷293 張詠列傳》 > > [주D-005]여공저(呂公著) : 송 신종(宋神宗) 때의 상신(相臣)이다. 자는 회숙(晦叔),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국정(國政)을 보좌하여 흥혁(興革)한 바가 많았다. 죽은 뒤에 신국공(申國公)에 봉해졌다. > > [주D-006]구양공(歐陽公) : 송(宋)나라의 학자 구양수(歐陽脩)를 말한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추밀부사(樞密府使)ㆍ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 > [주D-007]여공은 …… 풀었다 : 이 사실은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보인다. > > [주D-008]호원(胡瑗) : 송 인종(宋仁宗) 때의 학자이며 자는 익지(翼之)이다. 범중엄(范仲淹)의 천거로 호주(湖州) 교수(敎授)가 되어 교육의 성과를 올렸고, 뒤에 국자감직강(國子監直講)을 거쳐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안정선생(安定先生)이라 칭한다. 이 사실은 《소학》 선행에 보인다. > > [주D-009]채양(蔡襄) : 송 인종(宋仁宗) 때의 유신(儒臣)이다. 자는 군모(君謨),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사서(史書)에 밝았다. 복주(福州)ㆍ천주(泉州) 등의 지사를 거처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가 되었다. 그가 천주 지사로 있을 때 만안도(萬安渡)에 석교(石橋)를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 > [주D-010]왕형공(王荊公) : 송 신종(宋神宗) 때의 정승으로 신법(新法)을 행한 왕안석(王安石)을 말한다.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 형공(荊公)은 그의 봉호(封號)이다.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 > [주D-011]석자중(石子重) : 송(宋)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돈(墪), 호는 극재(克齋), 자중(子重)은 그의 자이다. 주자(朱子)의 친구로서 남강군지사(南康軍知事)를 역임하였다. > > [주D-012]영가학생(永嘉學生) : 영가학파(永嘉學派)의 학생이다. 영가학파는 사공(事功)과 경세(經世)를 주로 하는 학파로서, 여조겸(呂祖謙)에게서 창시되었다. > > [주D-013]장수 유식(藏修游息) : 장수는 정과(正課)로 학문을 수습(修習)하는 일, 유식은 정과 이외의 휴식 시간에도 마음을 학문에 두는 일이다. 곧 항상 마음을 학문에 두는 것이다. > > [주D-014]우(禹)의 …… 곳 : 남강부(南康府)는 바로 옛날의 양주(揚州) 관하이다. 우공(禹貢)에 우(禹)가 양주를 다스린 기록이 보인다. > > [주D-015]태사(太史)가 …… 곳 : 태사(太史)는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사기(史記)》 태사공(太史公) 자서(自序)에 “二十而南游江淮”란 말이 보인다. 회수(淮水)가 바로 남강 근방으로 흐르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 [주D-016]장사(長沙)와 정절(靖節) : 동진(東晉)의 충신으로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진 도간(陶侃)과, 그의 증손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은 전원시인(田園詩人)으로 자는 연명(淵明)이고 정절(靖節)은 그의 사시(私諡)이다. > > [주D-017]둔전(屯田)과 비승(秘丞) : 송(宋)나라의 고사(高士) 유환(劉煥)과 그의 아들 유서(劉恕)를 말한다. 유환의 자는 응지(凝止), 호는 서간(西澗)이다. 구양수(歐陽脩)는 일찍이 여산고(廬山高)란 시를 지어 유환의 높은 절개를 찬미하였다. 유서는 자가 도원(道原)이며 경사(經史)에 해박하여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할 때 참여하였다. > > [주D-018]물외(物外)의 영호(英豪) : 세상의 속된 욕망을 초월한 영웅호걸을 말한다. > > [주D-019]요선(姚善) : 명(明)나라 사람이다. 자는 극일(克一)이고 본래의 성은 이(李)이다. 명 혜조(明惠祖) 때, 소주(蘇州)ㆍ진주(鎮州)ㆍ상주(常州)ㆍ송주(松州)ㆍ가흥(嘉興) 등 다섯 고을을 맡아 다스렸다. > > [주D-020]황준량(黃俊良) : 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며 퇴계(退溪)의 문인이다. 명종 15년에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다. > > [주D-021]오건(吳健) :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이며 퇴계의 문인이다. 선조(宣祖) 4년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 > [주D-022]팔거현(八莒縣) : 지금의 칠곡(漆谷)이다. > > [주D-023]이상급(李尙伋) : 인조(仁祖) 때 사람이다. 자는 사언(思彥), 호는 습재(習齋)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를 호종(扈從)했다가 강화(講和)가 된 뒤 강화(江華)로 형 이상길(李尙吉)을 찾아가던 도중 적병에게 피살되었다.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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