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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면복을 벗고 도리어 상복을 입음을 논함〔釋冕反喪服論〕 > > 천하에서 가장 근심할 만한 사세는 인심이 불안해하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런 중에 예측하지 못한 변란이 있는 경우 오직 세상살이에 노련하여 안위를 가만히 앉아서 진압할 수 있는 사람만이 깊이 생각하여 돌아보고, 변통을 하여 제어하는 일에 있어서 원리 원칙에 구애되지 않으며, 헤아릴 수 없는 떳떳한 정에서 나온 연후에 끝내 천하를 위하여 대변(大變)을 안정하여 비상(非常)의 화(禍)를 끊을 수 있으니, 기미를 알아 잘 처신하는 대신이 아니면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 > 옛날 성왕(成王)이 죽고 나서 채 장례도 치르기 않았는데 강왕(康王)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군신을 접견한 일에 있어서 소동파(蘇東坡)가 의문을 가져 예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불안하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진정하여 변고를 잘 처리하여 권도의 중(中)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예는 인정(人情)을 참작하여 베풀어지니, 예라는 것은 애초에 정해진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쉽게 옮길 수 없는 것이고, 시대를 헤아려 알맞게 제정하여 중도를 잃지 않은 연후에 예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오늘의 예만 지키고 뒷날의 변제를 염려하지 않는다면 어찌 예의 쓰임을 귀중하게 여기겠는가? 이때에 소공(召公)과 필공(畢公)이 모두 3대에 걸쳐 공경히 보필한 한 때의 원로였는데, 어찌 친상(親喪)에 흉례(凶禮)를 쓰는 것을 살피지 않고 이런 근거가 없는 일을 했겠는가? 그 깊이 도모하고 멀리까지 생각한 계책이 참으로 있었으니, 보통사람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 이보다 앞서 무왕(武王)이 붕서(崩逝)하고 성왕(成王)이 어려 주공(周公)이 섭정하니, 유언(流言)의 변고가 골육 사이에서 일어나 주공이 숙부의 친함을 빙자하는 것으로 비난했으니 매우 위태로웠다. 사람을 죄주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민정을 갑자기 안정시킬 수 있었겠는가? 소보(召保)가 직접 그 변고를 보았으므로 유언(遺言)을 겨우 선양하여 호령을 엄명(嚴明)하여 무사로 호위하고 용감하고 날쌘 군사로 도와 익실(翼室)로 맞이해 들어가 휼택의 주인이 되게 하고, 몰래 간사함을 엿보는 무리들을 없애고 민심을 의혹시키는 무리들을 진압하여 고명(顧命)을 받는데 이르게 하였으며, 여러 제후들을 보고 또한 비상(非常)의 예를 보였다. 죽만 먹어 얼굴이 거무죽죽한 때를 당하여 명마와 옥백(玉帛)의 폐백을 받고 면복(冕服)을 입고서 군하(群下)에 임했으니 길흉의 예가 얼마나 서로 문란했겠는가? 그러나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천자의 용모를 분명하게 알게 하려고 했으며, 임금을 잃어서도 임금이 있어 인심을 저절로 편안하게 한 것이니, 그 뒷날을 위한 생각이 원대하다. 더구나 본연(本然)의 정(情)은 예를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시대의 편의를 헤아려 가복(嘉服)을 입었으나 슬픔에 찬 안색이 그 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나도 반드시 보고 크게 기뻐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한 때의 예를 헤아려 천하의 변제를 만드는 것이 어찌 안 될 것이 있겠는가? 강왕(康王)으로 하여금 초토(草土)에 처하여 명예와 지위가 정해진 것을 보이지 않게 하니, 천하 사람들이 전일의 변제에 젖어 그 사이에 의심하는 생각이 없을 수 없었다. 만약 삼감(三監)이 유배를 가서 유언비어를 창도하여 고무시켰다면 주나라를 비루하게 할 계획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그러므로 천하의 사세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구구하게 당장 편안한 말절(末節)을 지켜 앉아서 천하의 변고를 부르니, 이는 소공이 근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상(非常)의 변고에 처하여 비상의 예를 바꾸어 비상의 근심을 진압하니, 비상의 일은 진실로 보통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 아, 강왕은 성자(聖子)이고, 소공(召公)은 대현(大賢)이다. 밝고 어진 사람이 서로 만나 이때만큼 예제(禮制)가 크게 갖추어진 적이 없었다. 일찍이 통용되는 상례를 통달하지 않고서 이것이 상례와 반대되는 일이 된다고 하겠는가? 그 성인을 탐색함이 또한 얕다. 성인의 행사(行事)는 위의(威儀)의 말단에 구애되지 않고 잘 변화시켜 통용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강왕이 길복을 입었지만 마음으로는 흉례를 따르다가 군공(群公)이 쫓아 나온 뒤에 바로 벗었으니, 세상의 정통을 계승하는 일은 마지못한 데서 나온다. 길복과 흉복이 다른 것은 옛날에 그 제도가 있었으니 어찌 예에 손상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이를 논함에 별도 다른 말이 없었는데 소씨(蘇氏)만 유독 더 의심을 가졌으니, 상도에 빠져서 하나만을 고집하여 너무 시대의 형편을 통달하지 못했다. 저 박잡(駁雜)한 학식으로 어찌 천리의 절문(節文)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불안해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변고를 잘 처리하여 권도의 중(中)을 잡는 것이라 했다. > > [주-D001] 면복을 …… 입음 : 《서경》 〈강왕지고(康王之誥)〉에 “임금이 면복을 벗고 상복을 도로 입었다.〔王釋冕反喪服〕”라는 구절이 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죽고 강왕(康王)이 즉위할 때에 여러 신하들의 조회를 받고 나서 면복을 벗고 상복으로 갈아입었던 것은 변례(變禮)이고 권도(權道)를 행한 것이다. > > [주-D002] 소동파(蘇東坡)가 …… 여겼다 : 송나라 소식(蘇軾)은 성왕(成王)이 붕(崩)하고 아직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군신이 모두 면복(冕服)을 입은 것은 예가 아님은 물론, 변례(變禮)도 아니고, 비례(非禮)라고 비난하였다. > > [주-D003] 예의 …… 여기겠는가 : 《논어》 〈학이(學而)〉에 유자(有子)가 말하기를 “예의 쓰임은 화함이 귀중한 것이니, 선왕의 도가 이것을 귀하게 여겼는지라,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이것을 말미암아서 하였다.〔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斯爲美 小大由之〕”라고 하였다. > > [주-D004] 흉례(凶禮) : 오례(五禮) 가운데 하나. 상(喪)ㆍ장(葬)에 관한 모든 의식 절차를 말한다. > > [주-D005] 익실(翼室)로 …… 하고 : 익실(翼室)은 노침(路寢)의 좌우에 있는 방이며, 택종(宅宗)은 여막의 종주(宗主)라는 뜻으로 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상주(喪主)를 이른다. 《서경》고명(顧命)에 “태보(太保)인 소공(召公) 석(奭)이 중환(仲桓)과 남궁모(南宮毛)를 명하여 제후(齊侯)인 여급(呂伋)으로 하여금 두 개의 창과 방패와 호분 백 명으로 아들 쇠(釗)를 남문의 밖에서 맞이하여, 익실로 들어와 휼택의 종주가 되게 하였다.〔太保命仲桓南宮毛 俾爰齊侯呂伋 以二干戈虎賁百人 逆子釗於南門之外 延入翼室 恤宅宗〕”라고 하였다. > > [주-D006] 삼감(三監)이 …… 창도하여 : 무왕이 은(殷)을 이기고 은의 백성을 세 아우 관숙ㆍ채숙ㆍ곽숙에게 감독하게 하였는데, 무왕이 죽고 나이 어린 성왕(成王)이 서서 주공(周公)이 섭정을 하자 “주공이 성왕에게 해롭다.”라는 유언(流言)을 퍼뜨렸다. 《書經 大誥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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