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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 > > 장마가 잠깐 개이고 무더위가 아직 심하지는 않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한가한 생활이 상쾌하시고 흉금이 티 없이 소탈하시겠기에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 > 전에 이(李)의 편지를 보고 이웃에 우환이 있어서 자못 걱정하신단 말을 들었는데, 지금쯤은 이미 평상을 되찾았으리라 여깁니다. 지난번에 작은 별지를 덧붙여 보내주신 편지는 글 뜻이 다 진귀하여 고인(古人)에 뒤지지 않았으며 깨우침 역시 깊었습니다. 평소의 함양이 지극하고 힘을 얻은 것이 크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경지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옷깃을 여미고 경건히 낭송해 보니 마치 반쯤은 깨친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 지난번 네 명의 친구가 모였고 모두 속기(俗氣)가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담론이 농사일 같이 하찮은 것은 아니었지만 깊은 경지의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성(成)은 비록 모재(慕齋 김안국)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였지만 청허(淸虛)를 즐기고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하였고, 대부분 처사(處士)의 고담준론으로 진(晉)ㆍ송(宋) 시대의 풍류를 조금 체득했을 뿐이었습니다. 홍인지(洪仁祉)의 준수함과 남언경(南彦經)의 독실함은 그 자질이 도(道)에 가깝고 그 풍도(風度)는 동료들보다 뛰어나지만 또한 공허함을 본받으려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스스로 무우(舞雩)의 기상을 실천한다고 하지만 초학자로서 덕을 닦고 학업에 매진해야 할 때에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기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인데 대다수 만족스럽지 못하니 그 나머지는 알 만합니다. 또 성(成)의 말에서 포은(圃隱)은 고려 창왕(昌王) 때 오산군(烏山君)에 봉군되었지만 공양왕 때 또 훈맹에 참여하였으니 왕씨를 위해 죽은 것은 마치 순문약(荀文若)이 한(漢) 나라를 위한 것과 같고 그 행적은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강직하고 절개 있는 신하를 어찌 낮추어 순욱과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초야의 일종 논의가 벼슬살이를 물에 빠지는 것처럼 비루하게 여겨 가볍게 비평하는 것입니다. 만약 복고공(復古公)을 거론하면서 평생의 학문이 경방(京房)의 역학(易學)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자계(紫溪)에서 일생 동안 부지런히 닦은 학문이 또한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듣고 싶다고 하셨기에 대강 말씀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 > 또 주서(朱書) 몇 권이 이곳에 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 돌려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죄송스럽습니다. 얼마 전에 혼사(婚事)가 있어서 집이 번잡스러웠고, 지금은 무더위에 안질(眼疾)이 생겨서 책을 보는 데 전심(專心)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출처어묵(出處語默)과 사우(師友) 간에 주고받은 사실이 찬란하게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분의 생애가 종합된 것이라, 특히 다른 책들에서 강령(綱領)만 말한 것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또 오랫동안 정밀하게 하고 숙성한 것을 얻어서 번잡한 것을 잘라내고 요지를 취하여 그 종지(宗旨)를 서로 전하며 털끝만큼도 빠뜨린 것이 없으니, 이것을 말미암아 학문의 길을 잡으면 아마도 망양지탄(望洋之歎)이 없게 되고 자못 진보의 여지가 있겠습니다. 이에 혼자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흠모하나, 다만 제 때에 책이 없는 것이 미흡할 뿐입니다. > > 홍(洪)ㆍ남(南) 두 사람이 좋은 활자를 얻기를 원하고 화수(和受)도 떠났는데, 틀림없이 한 가지 얻을 것입니다만 일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천명일 것입니다. 정자중(鄭子中)이 틀림없이 앞의 여러분들을 만났을 터인데,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쪽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가 마침 차출되어 나갔고, 남쪽으로 돌아왔을 때는 혼기(婚期) 날짜가 되어 공교롭게도 자중(子中)과 어긋나서 할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 > 황폐한 고을에 임시 원〔假守〕이 되어 마침내 약간의 성과를 보고, 거기에다 이 책을 인쇄하여 동쪽으로 가지고 간다면 저에게 만족할 만한 일입니다. 감히 다른 것을 바라겠습니까? 다만 혼미하고 게을러서 주체를 세운 것이 없어 종신토록 낭송할 것을 만들지 못한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 > 또 제 생각에 의심나는 점이 있어서 감히 여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교열의 범위가 넓고 주해도 정밀하여 아마도 더 이상 미진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세함과 소략함에 간혹 차이가 있고, 그 사이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하여 빼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한 때 인물과 정사(政事)에 관한 미세한 내용은 전체 역사서를 고찰하더라도 두루 다 살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수업할 때에는 한 글자만 이해해도 기쁨으로 여기게 되지만, 책을 편찬할 때에는 한 가지 일이라도 완비하지 못하면 결국 미진하게 되고, 그것을 끼워 넣어 인쇄하면 아마도 완전하지 못하여 혹 지적을 초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큰 글자만 인쇄하고 주석을 넣지 않으면 도(道)를 독실하게 구하는 사람이면 혹 직접 문하에 와서 의문 나는 것을 해결하도록 하고 또 혹은 원본을 빌려서 책을 베껴 전하게 하면, 모두 애써 망라하여 수집한 노력에 심복하게 되고, 상고하는 과정에 미흡했던 점도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제 뜻이 어떠한지요? > > 사재(思齋)의 《성리대전(性理大全)》 초록본은 이미 표절의 자료가 되고 있으나, 기생(奇生)의 《주자서(朱子書)》 선집은 단지 문자의 말단을 취한 것에 불과하며 선택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오도할 소지가 많습니다. 이 책은 필시 급히 이루는 데에 목적이 있었겠지만, 시세에 따라 좋아하는 자들이 기꺼워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책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남의 걱정을 하겠습니까? > > 또 학관(學館)은 본래 옛날 사찰을 빌려 썼는데, 장마를 만나기만 하면 반이나 침수되었고 지탱해온 세월이 오래 되어서 지금은 쓰러지려고 하니, 곤궁한 때이지만 공사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고을 동쪽 옛날 터로 옮기고 싶은데, 지세는 좋은 듯하나 옮겨 터를 잡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또 봄날에 목욕할 만한 맑은 시내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에 대하여도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 희정(希正)의 답서가 지금 비로소 전해왔는데 이는 작년 가을에 보낸 것입니다. 금군(琴君)이 전한 것으로 열 통 중에 아홉 통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 빈말이 아닙니다. 이분은 중간에 요직을 맡았지만 본인이 바란 것이 아니고 남이 떠밀어 시키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이제 조금 자신의 형적(形迹)을 보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학문은 해박함을 힘써서 반드시 먼저 사물의 실정을 끝까지 궁구하는데, 근본을 힘쓰는 학문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러나 이런 분은 쉽게 얻을 수 없으며, 저 말은 필시 완벽하기를 바라는 말일 것입니다. 가을에 우거할 집을 빌려 책을 가지고 가서 읽을 계획이라고 하니, 어찌 하늘의 뜻이 단련하여 뛰어난 인물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이곳 강산의 영광만은 아닐 것이며, 함께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또한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 > [주-D001] 성(成) : 성제원(成悌元, 1506~1559)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는 자경(子敬)이고, 호는 동주(東洲)ㆍ소선(笑仙)이며,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명종 8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군기시 주부와 돈녕부 주부를 거쳐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임기가 끝난 후 나라에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다.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동주유고》가 있다. > > [주-D002] 진(晉) …… 풍류 : 진ㆍ송은 중국 남조(南朝)의 왕조이다. 당시는 남북조 시대 혼란기여서 문인들이 현실에서 벗어나서 청담(淸談)을 즐기는 풍조가 있었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대표적이다. > > [주-D003] 홍인지(洪仁祉) :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휴(應休)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1546년(명종1)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행 교서관 별좌(行校書館別坐), 진천 현감(鎭川縣監)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 > [주-D004] 남언경(南彦經) :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시보(時甫), 호는 동강(東岡)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헌릉 참봉이 되고, 1566년(명종21) 조식(曺植)ㆍ이항(李恒) 등과 함께 발탁되어 지평 현감(砥平縣監)이 되었다. 지평, 장령 등을 거쳐 전주 부윤이 되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나중에 복직되어 여주 목사ㆍ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또 이요(李瑤)와 함께 이황(李滉)을 비판하다가 양명학을 숭상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 양근(楊根)의 영천동(靈川洞)에 물러나 한거하다 67세로 죽었다. 양근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제향 되었다. > > [주-D005] 무우(舞雩)의 기상 : 공자(孔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슬(瑟)을 울리다 말고, “늦은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쏘이고 시 읊으면서 돌아오겠다.” 하였다. 《論語 先進》 > > [주-D006] 훈맹 : 이성계가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 정몽주가 이성계를 도와 공은 세운 일을 말한다. > > [주-D007] 순문약(荀文若)이 …… 것 : 문약은 삼국 조조(曹操)의 모신(謀臣)인 순욱(荀彧)의 자(字)이다. 후한 헌제(後漢獻帝) 때 조조를 위국공(魏國公)에 봉하고 구석문(九錫文)을 하사하기 위하여 동소(董昭) 등이 분주하게 일을 추진하자 순욱은 이 일이 한(漢)에 반역하는 행위라며 이의 불가함을 간하였다. 자신의 견해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순욱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三國志 卷10 荀彧傳》 > > [주-D008] 복고공(復古公)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자(字)가 복고(復古)이다. 또 다른 호는 자계옹(紫溪翁)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 > [주-D009] 경방(京房)의 역학(易學) : 경방은 중국 전한(前漢) 때의 사상가로, 자는 군명(君明)이다. 본래의 성은 이씨(李氏)였는데, 스스로 경씨로 고쳤다. 양(梁)나라 사람 초연수(焦延壽)에게서 역학(易學)을 배웠으며, 효렴(孝廉)으로 관리가 되었다. 재이사상(災異思想)에 밝았으므로 원제(元帝)의 총애를 받았고, 나중에 위군(魏郡)의 태수(太守)가 되었으나, 재이점후(災異占候)에 대하여 자주 황제에게 아뢰었기 때문에 석현(石顯)ㆍ오록충종(五鹿充宗) 등의 미움을 사서, 하옥된 후에 살해당하였다. 저서에는 《경씨역전(京氏易傳)》 3권이 있다. > > [주-D010] 자계(紫溪) : 이언적이 은거한 옥산서원 곁의 계곡 이름이다. > > [주-D011] 망양지탄(望洋之歎) :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한다는 말로, 다른 사람의 위대함을 보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이다. > > [주-D012] 화수(和受) : 금응빈(琴應賓)의 자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금의(琴椅)의 아들이다. 생원(生員)으로 단양에서 살았다. > > [주-D013] 정자중(鄭子中) : 정유일(鄭惟一, 1533~1576)로, 자중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문봉(文峯)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부(詩賦)에 뛰어났다. 1558년(명종13) 문과에 급제하여, 예안 현감,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안동의 백록이사(栢麓里祠)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 《문봉집(文峯集)》이 있고, 편저에 《명현록(名賢錄)》이 있다. > > [주-D014] 사재(思齋)의 성리대전(性理大全) : 사재 김정국(金正國)이 편찬한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말한다. 김정국의 자(字)는 국필(國弼), 시호는 문목(文穆), 별호는 팔여거사(八餘居士)이다. 김안국(金安國)의 아우이고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509년(중종4)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예조ㆍ병조ㆍ형조의 참판에 이르렀으며, 사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사재집(思齋集)》을 비롯해서 《역대수수승통립도(歷代授受承統立圖)》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 > [주-D015] 기생(奇生)의 주자서(朱子書) 선집 : 기대승(奇大升)이 선록(選錄)한 《주자문록(朱子文錄)》3권이다. 기대승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ㆍ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 > [주-D016] 희정(希正) : 박민헌(朴民獻, 1516~1586)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희정, 호는 정암(正庵)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예천에 살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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