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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금계집 내집 제4권 / 잡저(雜著) > > > 단양 향교를 중창할 때 기문〔丹陽鄕校重創記〕 > > > 공자의 도는 하늘과 짝이 되고 요순(堯舜)보다 더 훌륭하여 고금(古今)과 원근(遠近)을 떠나서 그 도를 높이고 그 제사를 중시하여 국가의 정신과 명맥(命脈)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그 이유는 모든 제왕들의 사표(師表)가 되고 만대의 법이 되어 하루도 폐지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묘학(廟學)이 온 세상에 두루 생기고 만고에 걸쳐 숭상하였으며, 그 땅을 닦고 그 가르침을 으뜸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10호의 작은 마을이라 하더라도 어디 하나 소홀히 여긴 곳이 없었다. > > 단양군(丹陽郡)은 옛날부터 빼어난 산수가 몰려 있는 곳이다.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응결하여 뛰어난 인재가 배출되었으니, 예를 들면 우 좨주(禹祭酒)의 덕행과 공적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고, 문장에 뛰어났던 이 승선(李承宣)과 외적의 침략을 방어한 우 충정(禹忠靖) 또한 그러한 인물이다. 비록 토지가 척박하여 백성들이 가난하지만 신선세계처럼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이 났기 때문에 명사(名士)가 군수로 부임하는 일이 전후로 이어졌다. > > 10여 년 이래로 홍수와 가뭄이 더해진 데다 전염병까지 이어졌고, 부역에 시달리고 재물이 손상되어 백성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져 호적에 편입되어 뿌리 내리고 살지 못하여 50호에도 차지 못하였다. 죽음에서 벗어나기도 여유롭지 못한데 어느 겨를에 예의(禮義)를 닦겠는가. 이 때문에 학사(學舍)가 황폐해지고 학생들은 흩어졌으니 고을이 고을답지 못하게 된 것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 > 내가 처음 고을에 도착하여 유생들을 모아 공자의 사당을 참배하였더니 위패가 물에 잠기고 서재 터는 잡초가 뒤덮고 있었기에 이마에 땀이 나 감히 우러러볼 수 없었다. 이에 홀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하찮은 탁발승도 길을 가다가 석불(石佛)을 발견하면 반드시 절을 모시고 금빛과 푸른빛으로 찬란하게 치장을 한다. 더구나 우리 공자께서는 우리나라를 미개한 오랑캐로 여기지 않아 일찍이 살고 싶은 뜻을 가지셨고 신(神)이 강림하는 것은 땅에 물이 있는 것 같은데, 명색이 공자를 배운다는 자들이 어찌 차마 편안한 마음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또 고을은 폐지할 수 있지만 배움은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니, 시기가 적합하지 않고 재력이 부족한 것은 따질 겨를이 없다.” 하였다. > > 이윽고 고을 청사 동쪽 모퉁이에 가서 터를 잡으니 바로 지난 왕조의 옛터였는데, 남향에다 위치가 시원하게 트여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에 숲을 쳐내고 흙을 쌓고 재목을 띄워 나르고 기와를 구웠는데, 노는 사람들의 힘을 빌리고 새로 개간한 땅에서 곡식을 마련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일을 시작하여 올봄에 마쳤고, 위차(位次)가 어느 정도 완전하게 되어 기일에 맞추어 석채례를 올리게 되었으므로 마루에 올라 낙성식을 하게 되었다. 이에 어르신들이 감탄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백 년 동안 거친 잡초 속에 묻혔던 곳이 읍양(揖讓)하고 독서하는 곳으로 변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고, 눈앞의 강산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듯하다.”라고 하였다. > > 이에 유생들을 세워놓고 이르기를 “삼대(三代)의 학문은 모두가 인륜(人倫)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어려서는 청소하고 어른 응대하는 예절을 익히고, 장성하여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를 가르쳐서 학문이 자신의 몸에 체득되고 교화가 세상에 행해져, 집집마다 벼슬에 봉해줄 만한 풍속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시대가 쇠퇴한 주(周)나라에 이르러서 위에 참다운 임금과 스승이 없자 하늘이 공자를 내시어 만대 백성의 예악(禮樂)의 종주로 삼아 교화가 끝이 없게 하였다. 지금까지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를 수 있게 된 것과 집안이 집안답고 나라가 나라답게 된 것이 모두 누구의 힘이었던가? 집을 지어 높여야 할 것은 공자의 신위(神位)이고 강론하여 밝혀야 할 것은 공자의 도(道)이니,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봉액(縫掖)을 입고 책을 끼고 와서 공부하는 자가 가르침의 유래를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 > 학문을 하는 순서는 의(義)와 이(利)를 분변하는 데에 신중하고 성(誠)과 경(敬)의 실상을 체득하며, 먼저 《대학(大學)》을 공부한 뒤에 다음으로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에 미치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경유하여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표리정조(表裏精粗)의 극을 다하고 전체대용(全體大用)의 묘리를 밝히면, 성현을 희구하는 공부가 이 단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사업에 시행하는 것도 이것을 들어서 저곳에 적용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구두(口讀)나 익히고 시문이나 읊으며 이익과 영달을 꽤하려는 계책일 뿐이라면 이미 교육의 본의(本意)가 아닌 것이다. 그런 사람을 나라에서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그대들은 성명(聖明)한 군주께서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신 은혜를 입어 피폐한 고을이라고 10년간 세금을 면제받았으니, 지금부터 즐겁게 삶을 영위하며 본업에 편안히 종사해야 할 것이다. 학사(學舍)가 새로 지어진 것이 어찌 인재를 진작, 흥기시키는 일대 기회가 되고 그 사이에 세상의 운수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 인재(人材)가 옛날에는 많았는데 훗날에는 적어진 것이 지기(地氣)가 쇠퇴하고 왕성한 것에 달린 것이 아니니, 학교를 통하여 옛 법을 고찰하는 데에 뜻을 두어 세상을 중흥(中興)시키는 호걸이 되는 것이 어쩌면 오늘에 있지 않겠는가? 저 좨주 선생 같은 분은 불세출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서 집 옆의 강당에서 이학(理學)의 관건(關鍵)을 여시고 군주의 뜻을 돌리는 충정을 떨치셨고, 젊은 나이에 벼슬을 그만두고 후진(後進)을 가르쳤으니 이는 백대(百代)의 스승으로서 평범하게 향리(鄕里)에서 제사 지낼 만한 자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서쪽 한 칸에서 제사를 받들어 온 고을 선비들로 하여금 현자를 높이는 정성을 표하고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는 뜻을 힘쓰게 하는 바이다. 이 또한 한 지방을 다스리는 자가 해야 할 일이며 한 고을의 영광이니, 삼가 지켜나가 폐지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 > 모두들 내 말에 수긍하면서 글로 적어 남길 것을 청하였고, 사양해도 들어주지 않아 대략 전말(顚末)을 기술하였다. > > [주-D001] 우 좨주(禹祭酒) : 우탁(禹倬, 1265~1342)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ㆍ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ㆍ단암(丹巖)이다. 성균관 좨주를 지내서 ‘우 좨주’라 하였고,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어 1683년에 사액되었으나, 1871년(고종8)에 훼철되었다가 1969년 11월 안동대학교 교정으로 이건 복원하였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 [주-D002] 이 승선(李承宣) : 이공로(李公老, ?~1224)로, 본관은 단산(丹山), 자는 거화(去華)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안변 판관이 되자 사재를 내어 민부(民賦)를 대신하는 등 공적이 있어 사의서 승(司儀署丞)으로 승진되었다가 뒤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뒤이어 비서소감(秘書少監)이 되었고, 경상도 안찰사, 전중감(殿中監)을 거쳐 1222년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이 되었다가 대사성이 되었다. > > [주-D003] 우 충정(禹忠靖) : 우현보(禹玄寶, 1333~1400)로, 충정은 그의 시호이고, 자는 원공(原功)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삼사좌사(三司左使)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개국 후 유배되었다가 복관(復官)되어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 > [주-D004] 공자께서는 …… 가지셨고 :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려고 하셨다.〔子欲居九夷〕”라고 하였다. > > [주-D005] 장보관(章甫冠) : 은(殷)나라 때의 예관(禮冠)으로, 뒤에는 유자(儒者)의 관을 이르는 말로 쓰였다. > > [주-D006] 봉액(縫掖) : 소매가 넓은 유자(儒者)의 옷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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