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란정사에서 바라본 천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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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5회 작성일 21-11-01 10:20본문
월란정사에서 바라본 천사촌
● 눈부신 낙동강의 백사장 천사촌(川沙村)
왕모산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내살미’ 천사(川沙)마을이다. 이 마을도 구한말에는 예안군 의동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촌리, 천곡리, 이곡리를 병합하여 원촌과 천곡의 이름을 따서 원천동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1976년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원천리에는 원촌마을과 내살미 마을이 있으며 50여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옛날 농암선생의 아우이자 간재 이덕홍(李德弘)의 조부인 교수(敎授) 이현우(李賢佑)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으며 외손인 금제순(琴悌荀)이 이어 살았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천사곡(川沙曲)이라 하였고 ‘내살미’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수려하고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예로부터 ‘천사미’(川沙美)라고 하였으며, 내살미 또는 천사, 천곡이라고도 불렀다. 안동댐 축조 전에는 마을 앞 모래 강변에 서식하는 은어(銀魚)가 별미여서 예로부터 귀족들의 선사품으로 올려지기도 하였다.
천사촌(川沙村) - 퇴계 -
幽敻川沙李丈居/유현천사이장거/ 그윽하고 먼 내살미 마을 이씨(이현우)어른 계신곳
平田禾熟好林墟/평전화숙호림허/ 넓은 밭에 벼익으니 숲 언덕이 아름다워
卜鄰我亦專西壑/복린아역전서학/ 나도 역시 이웃삼아 서쪽 골짜기 맡아두고
茅屋中藏萬卷書/모옥중장만권서/ 띄풀집 짓고 그 가운데 만권책을 지녔다오
● 진달래 필때면 주자를 만나러 월란정사(月瀾精舍)
월란정사는 ‘내살미’에서 ’ ‘싹시골’(삵실) 가는 길 왼쪽 언덕위에 있다. 이 정사는 퇴계선생의 제자 의성 사촌(沙村)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이 22세(1560)되던 해 도산에 입문하여, 동문 간재 이덕홍(李德弘)과 더불어 10여년간 수학하던 월란암(月瀾庵) 옛터에, 1860년 사촌김씨 문중에서 만취당의 학덕을 추모하여 지은 정사로 1909년 중건하였다..
정사의 동재를 은구재(隱求齋), 서재를 관선재(觀善齋), 마루를 월영헌(月暎軒)이라 하였다.
퇴계선생은 1546년 하계마을 동암 뒷편 양진암(養眞庵)에 거처할 때 인근에 있던 월란사에 자주 출입하였으며 한때는 농암선생을 모시고 금계(錦溪)황준량, 매암(梅巖)이숙량과 함께 월란대에 올라 상화유산(賞花遊山) 하기도 하였다.
1547년 3월에는 월란사에서 주자의 서림원시(西林院詩)를 화운(和韻)해 “산림(山林)에서 만고심(萬古心)을 체득하는 법을 정녕 알았다” 하였고 “선생을 따라 도를 배울 수 있어 감개(感慨)가 깊다”고 읊었다.
* 示西林可師 元韻 -朱子- (서림원은 주자가 연평에게 도학을 전수 받은곳)
古寺重來感慨深 옛 절에 다시 오니 감개가 무량한데
小軒仍是舊窺臨 소헌(小軒)으로 인하여 지난 날 임했던 것을 엿볼 수 있네.
向來妙處今遺恨 지금까지는 신묘한 곳이었는데 이제 유한이 남아
萬古長空一片心 만고의 긴 허공에 한조각의 마음 걸려 있네
幽居四畔只空林 그윽이 살아가니 사방은 수풀만 비었고,
啼鳥落花春意心 우는 새 떨어지는 꽃에도 봄뜻은 충만하네.
獨宿塵龕無夢寐 홀로 있는 절간에 세속의 헛된 꿈 없는데
五更山月照寒衾 새벽녘 산달이 찬 이불을 비추네
* 月瀾寺 和西林院詩 次韻 -退溪-
似與春山宿契深 봄철에 놀던 산과 묵은 약속 깊었는지,
今年芒屩又登臨 올해에도 짚신 신고 또 올라 왔다네.
空懷古寺重來感 옛 절에 거듭 오니 헛된 회포 느낄 뿐,
詎識林中萬古心 숲에 담긴 만고심을 어찌 알 리 있으랴.
從師學道寓禪林 스승 따라 도 배우려 절간 찾아 머물러서
壁上題詩感慨深 西林院시 벽에 써 붙이니 느낀 감회 깊어지네.
寂寞海東千載後, 스승없는 우리나라 천년 세월이 적막하구나,
自憐山月映孤衾. 선생 비추인 저달 어여삐 여겨 외로운 나를 비추어 주오
이러한 연유와 농암.퇴계 두 선생의 소요유상(逍遙遊賞)을 따르는 후배들이 늘어나서 철쭉이 만발하는 매년 사월초에는 정례적인 월란척촉회(月瀾躑躅會)를 가지게 되었다.
농암선생은 89세 6월에 서세하였지만 자신 때문에 척촉회를 연기할수 없다 하고 병중에도 ‘월란척촉회’에 참석하였으니 당시의 사문풍속과 고사(高士) 청절(淸節)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퇴계선생은 소시에는 청량산(淸凉山)과 용수사(龍壽寺)등지에서 독서하였고 46세 이후에는 월란사에 우거(寓居)하면서 강학(講學) 영시(詠詩) 험몽(驗夢)을 하였다. 혼자 오르기도 하였고 월천(月川)조목, 곤재(坤齋)이명홍, 성재(惺齋)금란수, 적암(赤巖)금제순, 간재(艮齋)이덕홍와 함께 절에 들어와 심경(心經)과 주자서(朱子書) 및 경학(經學)의 강론을 하였다. 특히 66세시에는 계당(溪堂)에서 기몽시(記夢詩)를 읊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하여 고반대(考槃臺)의 불자토실(佛子土室)에 들어가 묵좌(黙坐) 수련하였고 어풍대(御風臺)등에서는 자연성성(自然惺惺)의 양심묘법(養心妙法)을 체득하기도 하였다.
퇴계는 이러한 자기수련을 통하여 체득한 바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주재유경(主宰惟敬), 물망물조(勿忘勿助), 수신정심(修身正心), 충신독경(忠信篤敬), 정제엄숙(整齊嚴肅), 상주공부(上做工夫), 심잠의리(深潛義理)하는 법을 강의하였다.
특히 간재(艮齋)는 선생을 수행하면서 도학을 깨친 바가 많았으며 그후 1568년 봄 만취당(晩翠堂)김사원과 농은(聾隱)조진, 산천재(山天齋)이함형과 함께 강론 질의하면서 서로 얻은 바가 많았다. 이렇게 월란암과 주변 칠대(七臺)는 양성(養性)의 묘법(妙法)을 체험한 곳이고 스승을 따라 도를 배우던 유서가 깊은 도산학도( 陶山學道)의 명소이다.
만취당은 22세때에 증조부 송은(松隱)의 명에 따라 겸암(謙菴)류운룡과 함께 퇴계선생에게 수업을 청하였는데 퇴계는 만취당을 심히 사랑하여 손수 고정(考亭)의 관선시(觀善詩)를 써 주었는데 이런 연유로 관선재(觀善齋)라 하였고, 퇴계의 서림원화운시(西林院和韻詩) ‘연산월영’(憐山月映)의 ‘선생을 비춘 저달 나를 어여삐 여겨 밝게 비추어 다오’ 라는 뜻을 취하여 월영헌(月映軒)이라 하였다.
월란정사 전경
* 觀善 詩 「負笈何方來 今朝此同席 日用無餘事 相看俱努力」
월란정사는 도산과 사촌 양문중에서 정성을 쏟은 사업이었기에 비록 세월의 변천은 있었지만 선대의 세의를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이 정사를 통하여 양문중의 세의를 돈독히 해 오고 있다.
월란정사는 창건후 퇴계. 만취 두 선생 후손뿐 아니라, 선조의 정서가 깃든 영천이씨, 평해황씨, 횡성조씨, 봉화금씨, 양주조씨, 전주이씨와 그후 전주류씨, 인동장씨, 반남박씨, 연안이씨도 참여하여 작시도송(作詩禱頌)하였는데 운자(韻字)는 주자의 서림원시(西林院詩)의 지,심(知,心)의 두자와 퇴계선생의 ‘우월란승사서회’(寓月瀾僧舍書懷)시의 어(漁)운으로 찬화(贊和)하여 모두 70여수가 된다
* 寓月瀾僧舍書懷 -퇴계- (월란암에 묵으면서 회포를 적다)
十五年前此讀書 열다섯 해 전에 이곳에서 글을 읽었지,
紅塵奔走竟何如 세상 일로 바쁘다가 이제 오니 어떠한가.
只今病骨違丹訣 이 몸 이제 병만 들고 신선 비결 어겼으나,
依舊灘聲上碧虛 의구한 여울 소리는 푸른 허공에 사무친다.
居士忘家爲老伴 선비는 집을 잊고 늙은이와 짝이 되고,
胡僧結約刱幽廬 스님은 약속대로 그윽이 초막집 지었다네.
不堪每累君思重 무거운 나라 은혜에 누 끼칠까 못 견디어,
非爲高名向釣漁 높은 이름 얻지 말고 낚시질 하고 싶네.
퇴계는 이곳 주변의 절승지(絶勝地)를 월란칠대(月瀾七臺)라 명명하고 시를 지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유촉지(遺躅地)를 찾을 길이 없었으나 1993년 고 권오봉박사의 주선으로 유촉지를 답심 확인하여 월란칠대기적비(月瀾七臺記蹟碑)를 세우고 매년 월란척촉회 모임을 갖고 있다.
● 퇴계선생의 예던길 월란칠대(月瀾七臺)와 삼곡(三曲)
퇴계선생은 47세시와 66세시 당시 월란사에 유거(幽居)하면서 월란사 주변의 절승처를 월란칠대(月瀾七臺) 삼곡이라 명명하고 시를 읊었는데 속세를 벗어나서 은둔하기를 바라는 초은대(招隱臺), 낙동강 물결에 달빛이 흐르는 월란대(月瀾臺),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즐거움 고반대(考槃臺), 진리 추구를 위해 사색에 몰두하는 응사대(凝思臺), 자연과 함께하며 시를 읊조리는 낭영대(朗詠臺), 바람을 몰아 쉬어가는 어풍대(御風臺), 구름이 발에 걸쳐 타고 노는 능운대(凌雲臺) 와 삼곡은 단사곡(丹砂曲), 천사곡(川沙曲), 석담곡(石潭曲)을 말한다. 이 칠대는 선현의 강학처로 선사(先師)의 가르친 바를 느끼고, 예안 오악(청량산, 축륭봉, 국망봉, 용두산, 영지산)과 도산구곡 및 청하(靑霞), 자하(紫霞)등 도산의 절경을 한 눈에 조망할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도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꼭 한번 답심(踏尋)하여 선기(仙氣) 맛보아야 할 곳이다.
다행이 이러한 선경(仙境)이 인멸(湮滅)되어 위치를 확인할수도 관심도 없던중에 1986년 포항공대 권오봉(權五鳳)박사가 주도하여 퇴계선생의 서찰을 근거로 현지를 수차례 탐사하여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고 월란칠대표적(月瀾七臺表蹟) 및 기적비(記蹟碑)를 세워 선현의 유촉지(遺躅地)가 영구 보존되게 되었다.
성균관청년유도회 중앙회 명예회장 이동수
[출처] 도산구곡예던길 답사(1)|작성자 선비
● 눈부신 낙동강의 백사장 천사촌(川沙村)
왕모산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내살미’ 천사(川沙)마을이다. 이 마을도 구한말에는 예안군 의동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촌리, 천곡리, 이곡리를 병합하여 원촌과 천곡의 이름을 따서 원천동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1976년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원천리에는 원촌마을과 내살미 마을이 있으며 50여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옛날 농암선생의 아우이자 간재 이덕홍(李德弘)의 조부인 교수(敎授) 이현우(李賢佑)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으며 외손인 금제순(琴悌荀)이 이어 살았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천사곡(川沙曲)이라 하였고 ‘내살미’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수려하고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예로부터 ‘천사미’(川沙美)라고 하였으며, 내살미 또는 천사, 천곡이라고도 불렀다. 안동댐 축조 전에는 마을 앞 모래 강변에 서식하는 은어(銀魚)가 별미여서 예로부터 귀족들의 선사품으로 올려지기도 하였다.
천사촌(川沙村) - 퇴계 -
幽敻川沙李丈居/유현천사이장거/ 그윽하고 먼 내살미 마을 이씨(이현우)어른 계신곳
平田禾熟好林墟/평전화숙호림허/ 넓은 밭에 벼익으니 숲 언덕이 아름다워
卜鄰我亦專西壑/복린아역전서학/ 나도 역시 이웃삼아 서쪽 골짜기 맡아두고
茅屋中藏萬卷書/모옥중장만권서/ 띄풀집 짓고 그 가운데 만권책을 지녔다오
● 진달래 필때면 주자를 만나러 월란정사(月瀾精舍)
월란정사는 ‘내살미’에서 ’ ‘싹시골’(삵실) 가는 길 왼쪽 언덕위에 있다. 이 정사는 퇴계선생의 제자 의성 사촌(沙村)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이 22세(1560)되던 해 도산에 입문하여, 동문 간재 이덕홍(李德弘)과 더불어 10여년간 수학하던 월란암(月瀾庵) 옛터에, 1860년 사촌김씨 문중에서 만취당의 학덕을 추모하여 지은 정사로 1909년 중건하였다..
정사의 동재를 은구재(隱求齋), 서재를 관선재(觀善齋), 마루를 월영헌(月暎軒)이라 하였다.
퇴계선생은 1546년 하계마을 동암 뒷편 양진암(養眞庵)에 거처할 때 인근에 있던 월란사에 자주 출입하였으며 한때는 농암선생을 모시고 금계(錦溪)황준량, 매암(梅巖)이숙량과 함께 월란대에 올라 상화유산(賞花遊山) 하기도 하였다.
1547년 3월에는 월란사에서 주자의 서림원시(西林院詩)를 화운(和韻)해 “산림(山林)에서 만고심(萬古心)을 체득하는 법을 정녕 알았다” 하였고 “선생을 따라 도를 배울 수 있어 감개(感慨)가 깊다”고 읊었다.
* 示西林可師 元韻 -朱子- (서림원은 주자가 연평에게 도학을 전수 받은곳)
古寺重來感慨深 옛 절에 다시 오니 감개가 무량한데
小軒仍是舊窺臨 소헌(小軒)으로 인하여 지난 날 임했던 것을 엿볼 수 있네.
向來妙處今遺恨 지금까지는 신묘한 곳이었는데 이제 유한이 남아
萬古長空一片心 만고의 긴 허공에 한조각의 마음 걸려 있네
幽居四畔只空林 그윽이 살아가니 사방은 수풀만 비었고,
啼鳥落花春意心 우는 새 떨어지는 꽃에도 봄뜻은 충만하네.
獨宿塵龕無夢寐 홀로 있는 절간에 세속의 헛된 꿈 없는데
五更山月照寒衾 새벽녘 산달이 찬 이불을 비추네
* 月瀾寺 和西林院詩 次韻 -退溪-
似與春山宿契深 봄철에 놀던 산과 묵은 약속 깊었는지,
今年芒屩又登臨 올해에도 짚신 신고 또 올라 왔다네.
空懷古寺重來感 옛 절에 거듭 오니 헛된 회포 느낄 뿐,
詎識林中萬古心 숲에 담긴 만고심을 어찌 알 리 있으랴.
從師學道寓禪林 스승 따라 도 배우려 절간 찾아 머물러서
壁上題詩感慨深 西林院시 벽에 써 붙이니 느낀 감회 깊어지네.
寂寞海東千載後, 스승없는 우리나라 천년 세월이 적막하구나,
自憐山月映孤衾. 선생 비추인 저달 어여삐 여겨 외로운 나를 비추어 주오
이러한 연유와 농암.퇴계 두 선생의 소요유상(逍遙遊賞)을 따르는 후배들이 늘어나서 철쭉이 만발하는 매년 사월초에는 정례적인 월란척촉회(月瀾躑躅會)를 가지게 되었다.
농암선생은 89세 6월에 서세하였지만 자신 때문에 척촉회를 연기할수 없다 하고 병중에도 ‘월란척촉회’에 참석하였으니 당시의 사문풍속과 고사(高士) 청절(淸節)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퇴계선생은 소시에는 청량산(淸凉山)과 용수사(龍壽寺)등지에서 독서하였고 46세 이후에는 월란사에 우거(寓居)하면서 강학(講學) 영시(詠詩) 험몽(驗夢)을 하였다. 혼자 오르기도 하였고 월천(月川)조목, 곤재(坤齋)이명홍, 성재(惺齋)금란수, 적암(赤巖)금제순, 간재(艮齋)이덕홍와 함께 절에 들어와 심경(心經)과 주자서(朱子書) 및 경학(經學)의 강론을 하였다. 특히 66세시에는 계당(溪堂)에서 기몽시(記夢詩)를 읊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하여 고반대(考槃臺)의 불자토실(佛子土室)에 들어가 묵좌(黙坐) 수련하였고 어풍대(御風臺)등에서는 자연성성(自然惺惺)의 양심묘법(養心妙法)을 체득하기도 하였다.
퇴계는 이러한 자기수련을 통하여 체득한 바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주재유경(主宰惟敬), 물망물조(勿忘勿助), 수신정심(修身正心), 충신독경(忠信篤敬), 정제엄숙(整齊嚴肅), 상주공부(上做工夫), 심잠의리(深潛義理)하는 법을 강의하였다.
특히 간재(艮齋)는 선생을 수행하면서 도학을 깨친 바가 많았으며 그후 1568년 봄 만취당(晩翠堂)김사원과 농은(聾隱)조진, 산천재(山天齋)이함형과 함께 강론 질의하면서 서로 얻은 바가 많았다. 이렇게 월란암과 주변 칠대(七臺)는 양성(養性)의 묘법(妙法)을 체험한 곳이고 스승을 따라 도를 배우던 유서가 깊은 도산학도( 陶山學道)의 명소이다.
만취당은 22세때에 증조부 송은(松隱)의 명에 따라 겸암(謙菴)류운룡과 함께 퇴계선생에게 수업을 청하였는데 퇴계는 만취당을 심히 사랑하여 손수 고정(考亭)의 관선시(觀善詩)를 써 주었는데 이런 연유로 관선재(觀善齋)라 하였고, 퇴계의 서림원화운시(西林院和韻詩) ‘연산월영’(憐山月映)의 ‘선생을 비춘 저달 나를 어여삐 여겨 밝게 비추어 다오’ 라는 뜻을 취하여 월영헌(月映軒)이라 하였다.
월란정사 전경
* 觀善 詩 「負笈何方來 今朝此同席 日用無餘事 相看俱努力」
월란정사는 도산과 사촌 양문중에서 정성을 쏟은 사업이었기에 비록 세월의 변천은 있었지만 선대의 세의를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이 정사를 통하여 양문중의 세의를 돈독히 해 오고 있다.
월란정사는 창건후 퇴계. 만취 두 선생 후손뿐 아니라, 선조의 정서가 깃든 영천이씨, 평해황씨, 횡성조씨, 봉화금씨, 양주조씨, 전주이씨와 그후 전주류씨, 인동장씨, 반남박씨, 연안이씨도 참여하여 작시도송(作詩禱頌)하였는데 운자(韻字)는 주자의 서림원시(西林院詩)의 지,심(知,心)의 두자와 퇴계선생의 ‘우월란승사서회’(寓月瀾僧舍書懷)시의 어(漁)운으로 찬화(贊和)하여 모두 70여수가 된다
* 寓月瀾僧舍書懷 -퇴계- (월란암에 묵으면서 회포를 적다)
十五年前此讀書 열다섯 해 전에 이곳에서 글을 읽었지,
紅塵奔走竟何如 세상 일로 바쁘다가 이제 오니 어떠한가.
只今病骨違丹訣 이 몸 이제 병만 들고 신선 비결 어겼으나,
依舊灘聲上碧虛 의구한 여울 소리는 푸른 허공에 사무친다.
居士忘家爲老伴 선비는 집을 잊고 늙은이와 짝이 되고,
胡僧結約刱幽廬 스님은 약속대로 그윽이 초막집 지었다네.
不堪每累君思重 무거운 나라 은혜에 누 끼칠까 못 견디어,
非爲高名向釣漁 높은 이름 얻지 말고 낚시질 하고 싶네.
퇴계는 이곳 주변의 절승지(絶勝地)를 월란칠대(月瀾七臺)라 명명하고 시를 지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유촉지(遺躅地)를 찾을 길이 없었으나 1993년 고 권오봉박사의 주선으로 유촉지를 답심 확인하여 월란칠대기적비(月瀾七臺記蹟碑)를 세우고 매년 월란척촉회 모임을 갖고 있다.
● 퇴계선생의 예던길 월란칠대(月瀾七臺)와 삼곡(三曲)
퇴계선생은 47세시와 66세시 당시 월란사에 유거(幽居)하면서 월란사 주변의 절승처를 월란칠대(月瀾七臺) 삼곡이라 명명하고 시를 읊었는데 속세를 벗어나서 은둔하기를 바라는 초은대(招隱臺), 낙동강 물결에 달빛이 흐르는 월란대(月瀾臺),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즐거움 고반대(考槃臺), 진리 추구를 위해 사색에 몰두하는 응사대(凝思臺), 자연과 함께하며 시를 읊조리는 낭영대(朗詠臺), 바람을 몰아 쉬어가는 어풍대(御風臺), 구름이 발에 걸쳐 타고 노는 능운대(凌雲臺) 와 삼곡은 단사곡(丹砂曲), 천사곡(川沙曲), 석담곡(石潭曲)을 말한다. 이 칠대는 선현의 강학처로 선사(先師)의 가르친 바를 느끼고, 예안 오악(청량산, 축륭봉, 국망봉, 용두산, 영지산)과 도산구곡 및 청하(靑霞), 자하(紫霞)등 도산의 절경을 한 눈에 조망할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도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꼭 한번 답심(踏尋)하여 선기(仙氣) 맛보아야 할 곳이다.
다행이 이러한 선경(仙境)이 인멸(湮滅)되어 위치를 확인할수도 관심도 없던중에 1986년 포항공대 권오봉(權五鳳)박사가 주도하여 퇴계선생의 서찰을 근거로 현지를 수차례 탐사하여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고 월란칠대표적(月瀾七臺表蹟) 및 기적비(記蹟碑)를 세워 선현의 유촉지(遺躅地)가 영구 보존되게 되었다.
성균관청년유도회 중앙회 명예회장 이동수
[출처] 도산구곡예던길 답사(1)|작성자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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