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란정사 시판月瀾精舍 詩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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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04회 작성일 21-10-31 14:36본문
월란정사 시판月瀾精舍 詩板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내살미
月瀾臺 월난대에서
高山有紀堂 높은 산에는 모서리도 있고 펀펀한 곳도 있는데
勝處皆臨水 경치도 좋은 곳은 모두 강가에 있네.
古庵自寂寞 오래된 암자 저절로 적막하니
可矣幽棲子 그윽하게 사는 이에게 있을 수 있네.
長空雲乍捲 넓은 하늘에 구름이 문득 걷히니
碧潭風欲起 짙푸른 소沼에 바람 일 것 같네.
願從弄月人 바라노니 달을 즐기는 사람을 쫓아서
契此觀瀾旨 이 물결 이는 것을 관찰하는 취지에 부합하고자 하네.
[原詩 ; 退溪先生文集 卷一
선생 47세(1547년) 4월에 월란암에 머무르시며『심경부주心經附註』를 하루에도 몇 번씩 읽으시며 학문의 참된 길을 밝혀 나가실 생각을 갖으시고 이를 소회하신 시[우청술회雨晴述懷]를 지으셨다. 그리고 월란암 주변의 대의 형상을 이룬 일곱 곳(月瀾, 招隱, 考槃, 凝思, 朗詠, 御風, 凌雲)과 강이 감돌아 굽이를 이룬 세 곳(丹砂曲, 川沙曲, 石潭曲)을 이름을 부여하시고 그 하나하나에 시 한 수씩을 지어 「희작칠대삼곡시戱作七臺三曲詩」라고 하셨다. 위 시는 이 가운데 월란대에 해당되는 시를 판에 새겨 월란정사에 건 것이다.
월란정사는 본래 월란암이었다. 월안암月安庵을 선생께서 월란암月瀾庵으로 고쳐 부르셨다고 한다. 월란은 달빛이 강물에 비치어 출렁거림을 뜻한다. 월란칠대는 선현이 강학 가영하시고, 도의를 강마하며 성정을 이양하신 장이소杖履所로서 도산학陶山學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월란정사는 만취당晩翠堂(金士元. 1539-1602, 居 義城沙村) 후손들이 1860(哲宗11.庚申)년에 조상이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심신을 수양하던 자리에 정사를 건립하여 선생의 학덕과 조상의 면려勉勵를 기리고 있다. 현재에도 격년으로 퇴계선생과 만취당공의 자손들이 모여 선현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1992년도에 퇴계선생 16대 종손이신 이근필李根必님과 당시 포항공대 교수 권오봉權五鳳님께서 주관하시어 수차 답심하여 도산학의 발상지임을 확인하고, 선생께서 이름을 부여하시고 시를 읊으신 자리를 찾았다. 이곳이 많은 선현들이 학문을 강론하며 심신을 수양하셨고, 청량산에서 예안까지 모든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승지임에도 아무 표식이 없어서 유서 깊은 유적지를 보전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알리기 위해 많은 후학들이 참여하여 1993년에 ‘월란암칠대기적비’를 세웠다.
** 월란정사(月瀾精舍)는 내살미마을에서 싹시골(삵실)가는 길 왼쪽 언덕위에
위치하고 도로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20여분 오르면 의성 사촌의 만취당 김사원과
간재 이덕홍이 도산에 입문하여 10년간 수학하던 월란암(月瀾菴) 옛터에 1860년
사촌김씨 문중에서 지은 정사이다.
동재를 은구재(隱求齋), 서재는 선생이 손수 고정(考亭)의 관선시(觀善詩)를 써 주시어 관선재(觀善齋), 마루는 선생의
서림화운시 연산월영(憐山月映)에서
'선생을 비춘 저달 나를 어여삐 여겨 밝게 비추어다오'라는 뜻을 취하여 월영헌(月暎軒)이라 하였다고 한다.
퇴계선생은 1546년 하계마을 양진암에 거쳐할 때 농암선생을 모시고 제자들과 월란대에 올라 상화유산(賞花遊山)하기도 하였다. 1547년 3월 월란사에서 주자의 서림원사를 화운해 시를 짓고 그후 매년 철쭉이 만발하는 시기에 월란척촉회(越瀾躑躅會)를 가졌으며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명한 문학동호회이다.
월란칠대(月瀾七臺), 삼곡(三曲)은 월란정사 앞에 위치하고 퇴계선생이 朱子의 西林院詩를 화운하고 처음으로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학을 이어가고자 선언한 陶山 道學의 발상지이다. 많은 선현들이 시를 읊고 도학을 講磨하며 性情을
治養하던 곳으로 도산구곡 중 제6곡(川沙曲) 위에 자리하여 예안오악(청량산, 축육봉, 국망봉, 용두산, 영지산)과 도산구곡 및 청하(靑霞), 자하(紫霞) 등 도산의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곳이다. 1986년 포항공대 권오봉 박사가 고증을 거쳐 월란칠대기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月瀾臺 월난대에서
高山有紀堂 높은 산에는 모서리도 있고 펀펀한 곳도 있는데
勝處皆臨水 경치도 좋은 곳은 모두 강가에 있네.
古庵自寂寞 오래된 암자 저절로 적막하니
可矣幽棲子 그윽하게 사는 이에게 있을 수 있네.
長空雲乍捲 넓은 하늘에 구름이 문득 걷히니
碧潭風欲起 짙푸른 소沼에 바람 일 것 같네.
願從弄月人 바라노니 달을 즐기는 사람을 쫓아서
契此觀瀾旨 이 물결 이는 것을 관찰하는 취지에 부합하고자 하네.
[原詩 ; 退溪先生文集 卷一
선생 47세(1547년) 4월에 월란암에 머무르시며『심경부주心經附註』를 하루에도 몇 번씩 읽으시며 학문의 참된 길을 밝혀 나가실 생각을 갖으시고 이를 소회하신 시[우청술회雨晴述懷]를 지으셨다. 그리고 월란암 주변의 대의 형상을 이룬 일곱 곳(月瀾, 招隱, 考槃, 凝思, 朗詠, 御風, 凌雲)과 강이 감돌아 굽이를 이룬 세 곳(丹砂曲, 川沙曲, 石潭曲)을 이름을 부여하시고 그 하나하나에 시 한 수씩을 지어 「희작칠대삼곡시戱作七臺三曲詩」라고 하셨다. 위 시는 이 가운데 월란대에 해당되는 시를 판에 새겨 월란정사에 건 것이다.
월란정사는 본래 월란암이었다. 월안암月安庵을 선생께서 월란암月瀾庵으로 고쳐 부르셨다고 한다. 월란은 달빛이 강물에 비치어 출렁거림을 뜻한다. 월란칠대는 선현이 강학 가영하시고, 도의를 강마하며 성정을 이양하신 장이소杖履所로서 도산학陶山學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월란정사는 만취당晩翠堂(金士元. 1539-1602, 居 義城沙村) 후손들이 1860(哲宗11.庚申)년에 조상이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심신을 수양하던 자리에 정사를 건립하여 선생의 학덕과 조상의 면려勉勵를 기리고 있다. 현재에도 격년으로 퇴계선생과 만취당공의 자손들이 모여 선현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1992년도에 퇴계선생 16대 종손이신 이근필李根必님과 당시 포항공대 교수 권오봉權五鳳님께서 주관하시어 수차 답심하여 도산학의 발상지임을 확인하고, 선생께서 이름을 부여하시고 시를 읊으신 자리를 찾았다. 이곳이 많은 선현들이 학문을 강론하며 심신을 수양하셨고, 청량산에서 예안까지 모든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승지임에도 아무 표식이 없어서 유서 깊은 유적지를 보전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알리기 위해 많은 후학들이 참여하여 1993년에 ‘월란암칠대기적비’를 세웠다.
** 월란정사(月瀾精舍)는 내살미마을에서 싹시골(삵실)가는 길 왼쪽 언덕위에
위치하고 도로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20여분 오르면 의성 사촌의 만취당 김사원과
간재 이덕홍이 도산에 입문하여 10년간 수학하던 월란암(月瀾菴) 옛터에 1860년
사촌김씨 문중에서 지은 정사이다.
동재를 은구재(隱求齋), 서재는 선생이 손수 고정(考亭)의 관선시(觀善詩)를 써 주시어 관선재(觀善齋), 마루는 선생의
서림화운시 연산월영(憐山月映)에서
'선생을 비춘 저달 나를 어여삐 여겨 밝게 비추어다오'라는 뜻을 취하여 월영헌(月暎軒)이라 하였다고 한다.
퇴계선생은 1546년 하계마을 양진암에 거쳐할 때 농암선생을 모시고 제자들과 월란대에 올라 상화유산(賞花遊山)하기도 하였다. 1547년 3월 월란사에서 주자의 서림원사를 화운해 시를 짓고 그후 매년 철쭉이 만발하는 시기에 월란척촉회(越瀾躑躅會)를 가졌으며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명한 문학동호회이다.
월란칠대(月瀾七臺), 삼곡(三曲)은 월란정사 앞에 위치하고 퇴계선생이 朱子의 西林院詩를 화운하고 처음으로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학을 이어가고자 선언한 陶山 道學의 발상지이다. 많은 선현들이 시를 읊고 도학을 講磨하며 性情을
治養하던 곳으로 도산구곡 중 제6곡(川沙曲) 위에 자리하여 예안오악(청량산, 축육봉, 국망봉, 용두산, 영지산)과 도산구곡 및 청하(靑霞), 자하(紫霞) 등 도산의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곳이다. 1986년 포항공대 권오봉 박사가 고증을 거쳐 월란칠대기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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