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란척촉회
페이지 정보
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31회 작성일 21-08-10 04:15본문
月瀾臺 월난대에서
高山有紀堂 높은 산에는 모서리도 있고 펀펀한 곳도 있는데
勝處皆臨水 경치도 좋은 곳은 모두 강가에 있네.
古庵自寂寞 오래된 암자 저절로 적막하니
可矣幽棲子 그윽하게 사는 이에게 있을 수 있네.
長空雲乍捲 넓은 하늘에 구름이 문득 걷히니
碧潭風欲起 짙푸른 소沼에 바람 일 것 같네.
願從弄月人 바라노니 달을 즐기는 사람을 쫓아서
契此觀瀾旨 이 물결 이는 것을 관찰하는 취지에 부합하고자 하네.
[原詩 ; 退溪先生文集 卷一
선생 47세(1547년) 4월에 월란암에 머무르시며『심경부주心經附註』를 하루에도 몇 번씩 읽으시며 학문의 참된 길을 밝혀 나가실 생각을 갖으시고 이를 소회하신 시[우청술회雨晴述懷]를 지으셨다. 그리고 월란암 주변의 대의 형상을 이룬 일곱 곳(月瀾, 招隱, 考槃, 凝思, 朗詠, 御風, 凌雲)과 강이 감돌아 굽이를 이룬 세 곳(丹砂曲, 川沙曲, 石潭曲)을 이름을 부여하시고 그 하나하나에 시 한 수씩을 지어 「희작칠대삼곡시戱作七臺三曲詩」라고 하셨다. 위 시는 이 가운데 월란대에 해당되는 시를 판에 새겨 월란정사에 건 것이다.
월란정사는 본래 월란암이었다. 월안암月安庵을 선생께서 월란암月瀾庵으로 고쳐 부르셨다고 한다. 월란은 달빛이 강물에 비치어 출렁거림을 뜻한다. 월란칠대는 선현이 강학 가영하시고, 도의를 강마하며 성정을 이양하신 장이소杖履所로서 도산학陶山學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월란정사는 만취당晩翠堂(金士元. 1539-1602, 居 義城沙村) 후손들이 1860(哲宗11.庚申)년에 조상이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심신을 수양하던 자리에 정사를 건립하여 선생의 학덕과 조상의 면려勉勵를 기리고 있다. 현재에도 격년으로 퇴계선생과 만취당공의 자손들이 모여 선현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1992년도에 퇴계선생 16대 종손이신 이근필李根必님과 당시 포항공대 교수 권오봉權五鳳님께서 주관하시어 수차 답심하여 도산학의 발상지임을 확인하고, 선생께서 이름을 부여하시고 시를 읊으신 자리를 찾았다. 이곳이 많은 선현들이 학문을 강론하며 심신을 수양하셨고, 청량산에서 예안까지 모든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승지임에도 아무 표식이 없어서 유서 깊은 유적지를 보전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알리기 위해 많은 후학들이 참여하여 1993년에 ‘월란암칠대기적비’를 세웠다.
** 월란정사(月瀾精舍)는 내살미마을에서 싹시골(삵실)가는 길 왼쪽 언덕위에
위치하고 도로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20여분 오르면 의성 사촌의 만취당 김사원과
간재 이덕홍이 도산에 입문하여 10년간 수학하던 월란암(月瀾菴) 옛터에 1860년
사촌김씨 문중에서 지은 정사이다.
동재를 은구재(隱求齋), 서재는 선생이 손수 고정(考亭)의 관선시(觀善詩)를 써 주시어 관선재(觀善齋), 마루는 선생의
서림화운시 연산월영(憐山月映)에서
'선생을 비춘 저달 나를 어여삐 여겨 밝게 비추어다오'라는 뜻을 취하여 월영헌(月暎軒)이라 하였다고 한다.
퇴계선생은 1546년 하계마을 양진암에 거쳐할 때 농암선생을 모시고 제자들과 월란대에 올라 상화유산(賞花遊山)하기도 하였다. 1547년 3월 월란사에서 주자의 서림원사를 화운해 시를 짓고 그후 매년 철쭉이 만발하는 시기에 월란척촉회(越瀾躑躅會)를 가졌으며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명한 문학동호회이다.
월란칠대(月瀾七臺), 삼곡(三曲)은 월란정사 앞에 위치하고 퇴계선생이 朱子의 西林院詩를 화운하고 처음으로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학을 이어가고자 선언한 陶山 道學의 발상지이다. 많은 선현들이 시를 읊고 도학을 講磨하며 性情을
治養하던 곳으로 도산구곡 중 제6곡(川沙曲) 위에 자리하여 예안오악(청량산, 축육봉, 국망봉, 용두산, 영지산)과 도산구곡 및 청하(靑霞), 자하(紫霞) 등 도산의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곳이다. 1986년 포항공대 권오봉 박사가 고증을 거쳐 월란칠대기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 ,겸재 정선이 이곳 월란대에서 도산서원과 퇴계(토계)가 한눈에 보이게 '계상정거도'를 그려 임금에게 올렸다.
계상정거도와 혼천의는 한국은행권 도안으로 채택 발행하였다.
달빛 물결을 보다-월란정사
길 위의 이야기들
월란정사(月瀾精舍) 가는 길은 멀기도 하다. 안동댐에 와룡과 도산면 일대가 수몰되지 않았다면 낙동강과 함께 흐르는 길을 따라 산과 너븐들과 절벽을 감상하며 도착하였을 것이다. 이제는 애꿎게 잘려나간 절개지를 보며 산 위로 난 길을 따라 한 시간 넘게 달려야 한다. 옛길은 물에 잠기고 월란정사 맞은편 도산면 사무소도 없어진지 오래다. 이제는 3집밖에 살지 않는다는 싹실의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장에 갔다가 오는 모양인데 타지 사람을 보기 힘들었는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수몰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달빛 물결을 볼 수 있는 곳에 가려면 지나가야 하는 곳들이 있다. 농암 이현보의 분천과 퇴계 이황의 토계를 지나야 한다. 육사 이원록의 생가가 있었던 원촌과 예안 14곡(曲) 중 6곡인 구룡쟁주의 백운지를 지난다. 이어지는 고개를 내려가면 붉은색 절벽이 눈 안에 들어오는데 신선이 먹었다는 단사(丹砂)가 있는 7곡 단사협이다.
◆사진①:단사협
새로 지은 원천교를 지나면 왼편으로 왕모산성을 거쳐 천사(川沙), 즉 내살미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은 제 8곡으로 일컬어진다. 내살미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산 중턱 절벽 위에 선 예안 14곡 가운데 9곡인 월란정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길 위에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겠지만, 특히 월란정사를 가면서 지나치는 이곳들은 옛 선비들의 풍류와 삶이 낙동강의 굽이와 산들의 높고 낮음과 같이 한다. 선후배들의 풍류가 낙동강에 녹아 있고, 선비들의 절조가 산 정상에 홀로 올곧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황홀경이 이 길 위에 있으니 어찌 내가 이곳을 향해 걷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인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
월란정사가 있는 내살미는 천사미(川沙美)·천사(川沙)·천곡(川谷)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원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수려하고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천사미라고 하였으며, 내살미 또는 천사, 천곡 이라고도 불렀다. 안동댐 축조 전에는 마을 앞 모래 강변에 서식하는 은어(銀魚)가 별미여서 예로부터 귀족들의 선사품으로 올려지기도 하였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를 보면 교수(敎授) 이현우(李賢佑)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으며, 외손인 금제순(琴悌荀)이 이어 살았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로 인하여 예안의 경치 좋은 곳(14曲) 가운데 제 8곡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② : 월란정사에 바라 본 풍경
도산면 원촌리 동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월란정사의 옛 이름은 월란사(月瀾寺)였으며, 더 이전의 이름은 월안사(月安寺)였다고 한다.『선성지』에는 퇴계 이황이 이곳을 월란대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근처에 절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불우(佛宇)조에 보면 월란사는 예안현으로부터 동쪽 15리에 있으며 계촌(溪村)의 남산으로 퇴계 이황이 머무르던 곳이어서 곳곳에 시가 있다고 남기고 있다. 강세황의 ‘도산서원도’의 오른쪽 끝에 이 암자가 그려져 있다.
◆사진③ : 월란정사 사진
월란정사는 북서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며, 왼편으로는 도산서원이 아스라하고, 오른편으로는 내살미 마을과 강 건너 원촌의 일부가 보인다. 세 칸짜리 팔작지붕인 건물은 기단 위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로 나무로 된 문을 달았다. 양쪽에 여닫이 문이 달린 방이 있고, 방 문 위에는 광창인듯한 창문이 달려있다. 가운데 마루는 주 입구이며 사분합문이 달려 있다. 보존 상태는 보통이며 주위 환경은 잡풀이 잔뜩 돋아 있다. 정사 앞 벼랑 끝에 서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흘러가는 완만한 곡선의 낙동강이 얕은 여울과 절벽을 만나 소를 이루고 있다. 강을 따라 마을이 이루어져 있는데, 댐 건설로 수몰이 되면서 예전의 도산면 사무소 자리는 약간의 경작되는 밭과 풀밭으로 변해 버렸다. 벼랑 위에서 보는 경치가 으뜸이며, 이곳에 올라서면 과연 예안 14곡 가운데 한 곳이 되고도 남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
달빛 물결 속에 핀 철쭉
월란정사는 16세기에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에 의해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여기서 월란척촉회를 열었고, 이황은 이곳에서 공부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후 버려진 정자를 의성의 안동김씨들이 중수하여 이황의 후손들과 함께 관리해 왔다. 안동김씨들은 선조인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이 이황에게 수학을 하고 이 암자에서 공부한 사실을 기념하고자 하였다. 1993년 ‘월란척촉회’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권오봉, 이근필, 김창회, 류창훈 등이 논의하여 결성한 ‘속월란척촉회’가 매년 철쭉이 만발한 5월에 열린다.
월란은 월란사를 말하고 척촉은 철쭉의 한자 표현이다. 따라서 월란척촉회는 월란사 철쭉꽃회이다. 89세의 이현보가 임종 직전 이황에게 보낸 편지 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月瀾??之會爲我延退之示吾則老除曾有江山全付于君之簡但此則舊約扶病欲副竝須量照
嘉靖乙卯 4월 10일 聾老 手顫草草 『농암집』
월란척촉지회는 나를 위해 연기한 듯 하나 이제 나는 늙고 병든 몸이라 제외시킴이 어떻겠는가. 또한 일찍이 강산 전체를 그대에게 붙여준 편지가 있었는데 다만 이번만은 언약도 있고 하니 부득불 병든 몸을 이끌고라도 그대의 뜻에 부응하고자 하니 요량하기 바라네.
1555년 4월 10일, 농암 늙은이 손이 떨려 대강 대강 쓰노라 ”
물은 그 성질로 인하여 선비들의 수양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연이다. 중국의 맹자도 말하기를 물을 볼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월란은 바로 낙동강의 물결이며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흐르는 물결인 것이다. 월란대에 올라 장판지에 콩알 굴러가는 소리는 내며 흐르는 여울소리와 된 여울을 따라 일렁이는 보름달 빛은 진실로 자신의 진심을 보지 않을 수 없게 할 것이다. 더구나 붉은 철쭉이 달빛에 뒤척일 때 오가는 그들의 시 한 자락은 오늘날에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풍경인 듯싶다.
서동석
|
1993년 3월 11일 記蹟碑 건립 추진위원 구성 안동문화회관 별실 (위원장 李龍九) 1994년 5월 1일 창립총회 월란정사 회장 李源鏎 선임 1995년 5월 7일 2회총회 월란정사 회장 李源鏎 1996년 5월 5일 3회총회 월란정사 회장 李源鏎 1997년 5월 11일 4회총회 월란정사 회장 李源鏎 1998년 5월 3일 5회총회 月瀾精舍 회장 李源鏎 1999년 5월 2일 6회총회 上溪寒水亭 회장 權五鳳 2000년 5월 7일 7회총회 月瀾精舍 회장 李源鏎 2001년 5월 6일 8회총회 고산정 회장 柳昌勳 2002년 5월 5일 9회총회 월천서당 회장 柳昌勳 2003년 5월 4일 10회총회 오계서원 회장 柳昌勳 2004년 5월 2일 11회총회 月瀾精舍 회장 金聲秀 2005년 5월 1일 12회총회 욱양단소 회장 金聲秀 2006년 5월 7일 13회총회 沙村 만취당 회장 李有昌 2007년 5월 6일 14회총회 月瀾精舍 회장 李有昌 2008년 5월 4일 15회총회 月瀾精舍 회장 金瀅秀 2009년 5월 3일 16회총회 月瀾精舍 회장 金瀅秀 2010년 5월 2일 17회총회 성암종택애일당 회장 金沅杰 2011년 5월 1일 18회총회 안동시 향교관 회장 金沅杰 2012년 5월 6일 19회총회 月瀾精舍 회장 金斗淳 2013년 5월 5일 20회총회 守拙堂 (도산면 하계길 1-9) 회장 金斗淳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