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골 마을에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되는 까닭은?..... > 월란척촉회

본문 바로가기

서브이미지

작은 시골 마을에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되는 까닭은?..... > 월란척촉회

작은 시골 마을에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되는 까닭은?.....

페이지 정보

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27회 작성일 21-11-11 06:45

본문

작은 시골 마을에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되는 까닭은?

안동의 서쪽 관문인 서의문(西義門). 전통 목조 양식의 건물이다.

경북 안동(安東)으로 진입하는 국도에는 5개의 관문이 있다(일부는 건설 중). 안동시는 이 관문의 이름을 유교(儒敎)의 기본 이념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서 동인문(東仁門), 서의문(西義門), 남예문(南禮門), 학지문(鶴智門), 도신문(陶信門)으로 지었다.
 
서울 도성의 4대문에 붙은 유교의 이념을 본떠 지은 것이다. 전통 목조 양식으로 지어진 각 관문에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커다란 글귀가 걸려 있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지키고 있는 곳은 바로 ‘안동’이라는 자부심이 담긴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안동뿐만 아니다. 안동 북쪽에 있는 영주(榮州)의 슬로건은 ‘선비의 고장’이다. 영주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전파한 안향(安珦)과 조선의 개국 공신 정도전(鄭道傳)이 태어난 곳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는 지역이다. 명현(名賢)을 배출한 영주의 자부심을 담은 슬로건이다. 안동과 인접한 예천(醴泉)은 오래전부터 ‘충효의 고장’을 내세워왔다.
 
유교는 지난 2000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중요한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조선조(朝鮮朝) 500년간 유교는 거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여, 정신과 물질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유교의 색채를 지닌 ‘유교의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 침략기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유교의 권위는 거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광복 후 지난 수십 년간 유교의 핵심 가치관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평가절하되었고, 의례(儀禮)와 절차는 거추장스럽고 벗어나야 할 구습(舊習)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격변의 시대를 거쳐오면서도 안동을 위시한 경북의 대부분 지역은 우직할 정도로 유교적 전통과 가치관을 지켜오고 있다.
 
도산서원 가는 길에 있는 안내판. 경북 북부 지역을 자동차로 달려보면 곳곳에 옛날 고택과 종택을 볼 수 있다.
경북 안동의 시골길을 자동차로 달려보면 고즈넉한 농촌 마을과 마을마다 들어서 있는 즐비한 고택(古宅)을 만날 수 있다.
 
이상호(李相虎)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은 “경북 지역 유교의 특징은 고택과 종택(宗宅) 같은 하드웨어적인 측면과 유교의 소프트웨어인 핵심 가치관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남북으로 관류(貫流)하는 영남의 낙동강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교문화가 살아서 흐르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현대적인 역할 찾기에 나선 도산서원
 
지난 5월 4일 토요일 오전,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앞마당이 도포와 유건을 쓴 노인들로 북적거렸다. 221년 만에 재현된 도산별과(陶山別科)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온 200여 명의 과거시험 참가자들이었다. 이들은 도산서원 앞마당에 마련된 돗자리에 줄을 지어 앉아 세 시간에 걸쳐 한시(漢詩)를 지었다.
 
도산별과는 1792년 음력 3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기 위해 정조(正祖) 임금이 도산서원에서 치른 이른바 특별시험이다. 당시 시험에 참가한 유생은 무려 1만여 명. 경상 전역의 유생이 총집합한 것이다. 당초 서원 강당인 전교당 앞뜰에서 시험을 치를 계획이었지만, 너무 협소해 강 건너 소나무 숲으로 시험장소를 급히 바꾸었다. 이곳엔 오늘날 시사단(試士壇)이 조성돼 있다.
 
정조는 투철한 성리학 이념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펼치려 한 군주였다. 정조시대는 서학(西學)이 들어오고, 조선조의 누적된 갈등과 모순이 표면화되고, 기타 청나라에서 건너온 속학(俗學)으로 전통 가치관과 질서가 크게 도전받던 시기였다. 정순우(丁淳佑)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도산별시는 정조가 혼탁한 세상과 사회의 갈등, 어려운 정국을 정학(正學)인 퇴계학과 도산서원의 위상을 통해 돌파하고 사림(士林) 사회에 바른 학문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위해 치렀던 의미 있는 시험”이라고 평가했다.
 
2013년 5월 4일, 안동 도산서원에서 221년 전 시행됐던 도산별과 재현 행사에 앞서 지역의 유림들이 퇴계 선생의 사당(尙德祠·상덕사)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기 위해 서원 전교당(典敎堂) 앞마당에 늘어서 있다.
 
도산별과 재현 행사에 참여한 전국의 유림들.

행사를 주관한 한국국학진흥원의 김병일(金炳日) 원장은 “정조는 낮춤과 배려를 몸소 실천한 삶을 살았고,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퇴계 선생으로부터 자기 시대가 직면한 탕평과 통합이라는 과제의 해결책을 읽어냈을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도산서원과 도산별과는 단순한 역사적 유적(사실)만이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멘토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종가와 서원이 몰려 있는 경북
 
서원이 가진 주요한 기능 두 가지는 제향(祭享)과 강학(講學)이었다. 일제강점기 후 유교가 쇠퇴하면서 서원이 담당했던 교육 기능은 공교육으로 흡수되었고, 서원은 선현(先賢)의 제사를 모시는 것 외에는 역할을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도산서원은 제사 지내는 기간 외에는 사람이 찾지 않아 적막했던 공간을 사람이 다시 북적거리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그 시발점은 2002년 개원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시작됐다. 2001년 퇴계 탄생 500주년 행사 후 퇴계 종손이 ‘바른 사람, 도덕 사회 구현’을 위하는 데 쓰라며 1억원의 돈을 도산서원에 기탁했고, 도산서원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선비문화수련원을 만들어 서원의 강학 기능을 복원한 것이다.
 
선비문화수련원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연인원 7만5000여 명의 수련생을 배출했다. 특히 올해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배 가까이 늘어나 연말까지 3만명이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초기에는 학생과 교사들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직장의 간부와 신입사원들까지 연수를 받는 폭이 넓어졌다. 김종길(金鍾吉) 선비문화수련원 원장은 “유교 가르침의 가장 기본은 수신제가(修身齊家)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선비문화원은 수신제가의 기본 덕목인 예의, 겸손, 청렴 등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특히 겸손하고 남을 배려한 퇴계 선생의 삶을 알려주고 실천함으로써 선비정신을 몸소 느끼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봉의 15대 종손인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원장.
김 원장은 퇴계의 학문적 적통을 이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15대 종손이다. 그는 대구·경북 지역 불천위(不遷位) 종가의 종손 모임인 영종회(嶺宗會) 회장도 맡고 있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문과 도덕성이 높은 사람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계속 두면서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된 신위를 가리킨다.
 
-경북 지역 유교의 위상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전국에 불천위 종가(宗家)가 180개 정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120개가 경북에 있습니다. 경북 중에서도 또 안동에만 48개의 불천위 종택이 있습니다. 일반 종택과 합치면 종가의 숫자는 100여 개가 넘어갑니다. 또한 전국 700여 개 서원 중에 제사를 모시는 등 제대로 기능을 하는 곳이 400여 개 정도 있고, 그중에 경북 지역에만 100개 정도의 서원이 몰려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경북이 우리나라 유교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겁니다.”
 
경북과 안동 지역에서는 단순히 고택에 종손이 거주한다고 해서 종택이나 종가에 포함하지 않는다. ‘어부가’로 유명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종손인 이성원(李性源)씨는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먼저 종손이 사는 종택이 있어야 하고,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종손·종부가 있어야 하며, 이러한 종택을 떠받치는 지손(支孫)과 문중이 제대로 역할을 다 해야 종가라고 규정짓는다”고 말했다.

학맥과 혈연으로 맺어진 경북의 종가문화
 
계속해서 김종길 원장과의 대화다.
 
-경북 지역의 종가문화가 다른 지역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경북 지역에서 종가와 종손(宗孫)은 문중에서 거의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합니다. 문중은 종가와 종손을 중심으로 뭉치고 종손은 문중에서 존경과 추앙을 받습니다. 하지만 경기도나 충청도 같은 지역에서는 종손보다는 대종회나 숭모회 등을 중심으로 문중이 운영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왜 그런 차이가 나타났다고 봅니까.
 
“제 생각인데, 경기도나 충청 지역에는 명망 있는 집안에서 높은 벼슬을 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세상 이치가 돈과 권력이 있는 곳으로 힘이 집중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종손이나 종택보다는 벼슬을 한 사람을 중심으로 문중 사람들이 모였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종손이나 종가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약화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지역의 영남학파(남인)들은 오랫동안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했고, 학문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 중심으로 모일 필요가 없었고, 종손이 재력이 있든 없든, 학식이 높든 낮든 도와주고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김 원장은 “경북 지역 유림의 중심에는 언제나 종가가 있었고 종가끼리 혈연을 맺는 독특한 문화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혼인으로 얽히지 않은 종가가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집안도 지난 15대가 내려오는 동안 서애(류성룡) 대감 집안하고 2번, 퇴계 선생 종가하고 3번의 혼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경북 지역 대다수 종가의 정점에는 퇴계 선생이 있었습니다. 퇴계의 학맥(學脈)을 이은 제자들과 그 후손들이 학맥과 혼인으로 더욱 견고하게 단합하면서 오늘날까지 영남 유림의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안동 도산면 토계리의 퇴계 종택. 현재의 퇴계 종택은 일본군의 방화로 1907년 불타 없어진 것을 문중 인사와 전국 유림들의 찬조로 1926~1929년 사이에 재건한 것이다.
 
-종손으로서 가장 큰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당연히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죠. 우리 집에서 일 년에 지내는 제사가 40~50번 됩니다. 제사를 정성을 담아서 철저하게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손님을 잘 맞이하는 것도 유교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요즘은 모든 조상제사를 한날한시에 지내는 문중도 있던데요.
 
“사실 불천위 종가 모임인 영종회를 대상으로 제사 문제 때문에 제가 조사를 해보니까 109가구 중에 53집이 전통에 따라 새벽에 지내고 있었고, 초저녁이 37집이었어요. 이미 불천위 집안에서도 절반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간소화를 하고 있는 것이죠. 너무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정성을 담아서 많은 사람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도록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형식에 얽매이다 보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아예 제사를 회피하게 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유림
 
김종길 원장은 “경북 유교의 주요 특징은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실생활에 실천하는 것,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며 “종가를 중심으로 한 유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고 말했다.
 
실제 국가보훈처 통계에 의하면 대구·경북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거의 두 배 이상(200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이 가운데 퇴계의 고향인 경북 안동은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 국민회의 의장인 일송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고향이다. 또한 저항 시인인 이육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이 지역 출신이다.
 
안동의 독립운동 관련 훈·포상자는 348명인데 이는 전국 시·군 평균수치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퇴계 묘소 입구에 있는 안동시 도산면 하계리 한 마을에서만 국가가 표창한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된다. 이 밖에 미포상 독립운동가도 약 700명이 있는데 이는 타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다. 김종길 원장의 설명이다.
 
“경북 지역의 의병 모의(謀議)는 대부분 종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종손의 위상이 워낙 높기 때문에 종손이나 종가가 의병이나 독립운동에 참여하면 문중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예전에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사돈집과의 약속을 지켰는데, 사돈집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면 이를 도와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조부도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28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재산을 팔아 독립자금을 댔습니다. 또한 구한말 경북 지역의 많은 학교가 종가의 재산으로 지어졌고, 나중에 공교육으로 발전·편입되었습니다.”
 
퇴계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도산면 하계리에는 국가가 표창한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된다. 하계마을 입구에 있는  '하계독립운동기적비(下溪獨立運動紀蹟碑)'.
 
이동수(李東秀) 청년유도회중앙회 명예회장은 “경북 지역의 명망 있는 종가들이 앞장서서 독립운동에 뛰어든 근본 배경에는 훌륭한 선대(先代)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정신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지역의 유풍(儒風)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80퍼센트가 퇴계 선생과 그 제자들의 학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경북 북부지역의 성리학》이라는 책을 지은 장윤수 대구교육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경북의 유교문화는 우리나라 유교의 보편성도 있지만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특징도 있다. 경북 내에서도 지역별로 그 색채를 드러낸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남학파라고 하면 경북의 퇴계 학파와 경남의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학파가 대표적입니다. 나중에 경북 지역이 영남학파의 중심이 되는데, 경북 지역의 유교문화는 크게 안동문화권, 상주문화권, 성주문화권(대구·고령·선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퇴계의 제자인 학봉(김성일), 서애(류성룡),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제자들이 학파를 형성한 것이 영남학파의 주류로 그 세력이 가장 컸습니다. 이들은 주자와 퇴계의 학문적 도통(道統)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들 영남학파 유림들의 자기의식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코드는 ‘중심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중심의식 강해
 
1980년 공자 77대손 공덕성(孔德成) 박사가 도산서원 방문 당시 남긴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 맹자의 고향)’ 휘호.
-중심의식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학문적으로 중심자·중심부라는 의식이 영남 지역만큼 두드러진 곳이 없습니다. 영남 지역의 선비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정신적 수도’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런 중심자 의식은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표출되어 유학의 종주에 대한 존경심, 참 학문을 지켜야겠다는 강렬한 에너지로 집결됩니다. 또한 일제 침략기에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 의식으로 표현되어 수많은 애국애족 운동이 일어난 배경이 되었습니다.”
 
-경북 지역 종손들은 이 지역 유교의 특징을 ‘의리’라고 규정짓기도 하던데요.
 
“구한말과 일본강점기에 보인 이 지역 지식인들의 수많은 희생은 바로 이 지역민들의 ‘의리와 지조, 그리고 정의감’을 잘 말해줍니다. 이런 정신의 배경에는 당연히 영남학파를 형성한 유학의 흐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의리와 지조를 말할 때 대표적인 분으로 퇴계의 후손인 이만도(李晩燾) 선생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정부의 관료였지만,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안동에 내려와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이 되자 단식에 들어가 24일 만에 순국했습니다. 죽음으로써 의리와 지조·정의로 대변되는 유교의 참다운 길을 가르친 것이죠.”
 
-경북 지역 유교문화의 단점도 있을 텐데요.
 
“현대에 들어와 일부 정치권력이 조장한 지역패권주의가 전통 유교의 의리심을 왜곡하기도 했습니다. 정의와 명분을 갖추지 못한 의리심은 한갓 골목 패거리들의 집단의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영남 사람들의 기질이 엄청나게 보수적인데 이것이 긍정적으로 기능을 하면 정의감·의리·지조로 표출되지만, 부정적으로 작동하면 새로운 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주체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장 교수는 “경북 지역의 유학이 국난 시 진리를 지키기 위해 영웅적인 면모를 많이 드러냈는데, 타지역에서 볼 때 지나치게 배타적이거나, 괴팍하고 고루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며 “너무 형식에 치우친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람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고, 남을 배려하고 소통하는 퇴계의 포용 정신을 오늘날에 잘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면면히 이어지는 유교의 힘
 
 도산면 하계리의 수졸당(守拙堂) 종택에서 '월난척촉회'라는 경북 지역 유림 모임이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6일 안동시 도산면 하계리에 있는 수졸당(守拙堂) 종택. 경북 각지에서 온 유림 50여 명이 모였다. 수졸당은 퇴계의 손자인 이영도(李詠道)의 불천위 종택이며, 집 뒤편 야산에 퇴계 묘소가 있다. 이날 모임에는 퇴계의 종손인 이근필(李根必)씨,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김종길 원장, 농암 이현보의 종손인 이성원(李性源)씨 등 현재 경북 지역의 유림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두 모인 듯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월난척촉회’라는 유림 단체 회원들이다. 월난척촉회는 16세기 농암과 퇴계가 월란사(月瀾舍)라는 암자에서 시작한 일종의 문학 동호 모임이다. 이후 20세기 들어 1993년 퇴계와 그 제자의 후손들이 선대의 훌륭한 가르침과 교훈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옛 명칭 그대로 모임을 결성한 것이다.
 
모임의 일반적인 논의가 끝나고 나자 퇴계의 16대 종손인 이근필씨가 “한마디 하고 싶다”고 말하더니 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근필씨는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4년 전에 별세한 선친(당시 101세)에 대한 정성스런 간병과 상심 때문에 그리되었다고 주위에서 귀띔해 준다. 이씨가 읽은 글은 2012년 11월 15일자 《영남일보》에 실린 송일호 소설가의 칼럼이었다.
 
제목은 <세계 제일의 부정부패 없는 국가, 핀란드>. 공무원은 뇌물을 받지 않고 의원들은 무보수로 봉사하고 국회의원은 자전거를 타고, 총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국민은 소득의 50퍼센트를 미래를 위한 투자로 여긴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퇴계의 16대 종손 이근필씨. 종택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꿇어앉아 종택의 내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근필씨는 선비문화원이 생긴 이래 모든 방문객에게 직접 쓴 붓글씨를 봉투에 담아 건네준다. 그는 "개인들의 도덕성 회복 노력이 나라를 건강하고 맑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근필씨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이 설립된 이래 수련생이 종택을 방문할 때마다 꿇어앉은 채 이들을 맞이하고, 모든 방문객에게 직접 쓴 붓글씨를 봉투에 담아 건네주고 있다. 기자가 종택을 방문해 받은 글은 ‘사해춘택(四海春澤)’이었다. ‘온 세상이 봄의 은택과 같이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더불어 살자’는 뜻이다. 기자는 2010년경 종택을 방문했을 때도 글을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두 글자였으나, 지금은 4글자로 늘었다.
 
선비문화수련원의 원생이 해마다 늘어 3만명에 육박하고 있는데 이씨는 이 많은 수련생들에게 직접 붓글씨를 써주고 있는 것이다. 목적은 오직 하나. 이근필씨는 붓글씨를 넣은 봉투 겉면에 ‘도덕성 회복의 물결이 많은 사람에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씨를 드린다고 밝혀 놓았다.
 
2008년부터 이근필씨를 가까이서 지켜본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 원장은 “봉사·헌신하는 마음이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며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묵묵히 실천하는 이 종손의 모습이야말로 경북 유교의 힘이며, 나아가 우리가 모두 본받아야 할 유가(儒家)의 롤모델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한국국학진흥원장 金炳日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걸맞은 정신문화가 뒷받침돼야”
 
김병일(金炳日)

68세. 서울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 행정대학원 석사. 미국 USC 행정대학원 수료. 제10회 행정고시 합격. 국회예산결산특위 수석전문위원, 통계청장,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차관, 금융통화위원, 기획예산처 장관 역임. 現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한국국학진흥원 원장.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2008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시작으로 안동과 인연을 맺었다. 2009년부터는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원장에 취임하여 국학진흥의 보급·확산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에는 퇴계와 여인들의 관계를 통해 퇴계의 삶과 철학을 재조명한 《퇴계처럼》(글항아리)을 펴냈다. 다음은 김 원장과 경북의 유교문화에 대해 나눈 일문일답(一問一答).
 
-직접 경험한 경북 유교문화의 인상에 대해 설명하신다면.
 
“경북은 우리 정신문화의 정수인 유교문화가 가장 잘 보존된 지역입니다. 특히 이들 문화가 과거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지역민들의 일상 속에서 삶의 깊이와 품격으로 살아 작동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현재 경북 북부 지역의 유·무형 유교문화 유산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서원과 종택, 고택, 재사(齋舍), 누정(樓亭)과 의례 및 기록자료가 유형의 유산이고, 무형의 유산으로는 종가의 불천위 제례(奉祭祀.봉제사)와 접빈객(接賓客) 문화, 서원의 향사(享祀)와 교육기능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가운데 도산서원은 선비문화수련원 등을 통해 서원의 교육기능이 현대적인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 밖에 나라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보여준 의병활동이나, 빈민구제 활동 등 종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화도 빼놓을 수 없는 유교의 무형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3년 5월 4일, 도산서원의 도산별과 재현 행사에 앞서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 원장이 손님을 맞고 있다(맨 왼쪽).

-우리나라의 정신문화 관점에서 경북 유교문화의 위상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경북은 동아시아 전통시대를 관통했던 유교문화의 에센스가 가장 본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지역입니다. 유교문화의 원류인 중국의 학자들이 수시로 찾아오고 공자와 맹자의 종손들도 도산서원을 찾아와 참배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유교 목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자문위원들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교적 자산들이 물질만능 사조에 빠져 있는 우리의 천박한 문화를 일신하고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정신문화를 새롭게 진작시키는 데 유용한 자양분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된 유교사상
 
-안동에서 만난 종가와 종손들에 대한 인상에 대해서도 할 말씀이 많죠.
 
“오늘날 종가를 지탱하는 종손들은 한국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했던 선현들의 후손입니다. 제가 종손들을 만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겸손과 배려가 이들의 몸에 배어 있는 기본적인 자세라는 것입니다. 퇴계 종손의 접빈하는 모습을 보세요. 80이 넘은 노인이 손님이 올 때마다 항상 큰절을 하고 꿇어앉아서 맞이합니다. 예의와 염치가 무너진 오늘날 이들이 물려받아 계승하고 있는 정신적 유산과 경험은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데 유익한 참고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유학은 우리 민족의 중심사상이었는데 현재는 학교에서 유학의 기본적인 이해조차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핵심 가치였던 유교와 유학 사상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유교문화는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정한다고 해서 쉽게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유교는 일제 식민 시대와 뒤이은 서구화 과정 속에서 지나치게 부정 일변도로 평가받는 바람에 그것이 지닌 긍정적인 요소들이 간과된 부분이 있습니다.
 
일제는 1919년 ‘조선인교육시책’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가르치지 말고, 자신들의 조상을 경멸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조상이 무능하고 비굴하며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군림하려는 이중성을 가졌다고 세뇌당했고, 조선은 사대의식이 뼛속까지 스민 나라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나라를 운영한 선비들은 역시 허위의식의 소유자로 낙인찍혔고요. 오늘날도 이런 기본적인 시각은 크게 교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하는 문화가 유교문화
 
-오늘날 유교의 긍정적인 가치를 어떻게 계승발전해야 할까요.
 
“물질문명은 발전하는데 정신문화가 제대로 뒷받침되지 못하면 개인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지속적인 경제발전도 한계를 맞게 됩니다.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는 물적인 토대, 즉 자본, 토지, 노동력만 갖추고 있으면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룰 수 있지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서도 사회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려면 사회적 자본(소셜 캐피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 정신문화의 자산을 유교의 가치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우리의 전통 유교 정신문화를 현대에 맞게 계승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첫째,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고 이를 토대로 남을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이런 실천을 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하는 것이 중요하죠. 사람들이 생각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시대를 불문하고 동일하기 때문에 지도층의 모범적인 삶은 어느 사회에서나 파급 효과가 큽니다. 셋째는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우선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가정이나 직장 등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솔선수범을 실천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원장은 “바로 퇴계 선생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후손이 따라 걷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퇴계 종손 이근필씨(오른쪽)가 도산별과에 참여한 한 유학자와 필담을 나누고 있다.
“저는 안동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퇴계 선생은 그저 범접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인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동에서 종손들을 직접 만나고, 퇴계를 알고 나서 이분이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자, 어린이, 하인한테도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손한 성품을 지녔고, 실제 삶에서도 겸손을 실천했다는 것을 알고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마 퇴계 후손들은 조상을 욕보일 짓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큰 삶의 무게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남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워서 그대로 대대손손 실천하고 있는 것이죠.”
 
 
Copyright ⓒ 조선교육문화미디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사명 (주)스피드레이저기술 주소 경기도 광명시 하안로 108 에이스광명타워 208호 사업자 등록번호 119-86-49539 대표 황병극 전화 02-808-3399 팩스 02-6442-7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