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瀾躑躅會 유래 및 회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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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0회 작성일 22-01-11 12:40본문
月瀾躑躅會
1. 유래
월란척촉회는 약 460년 전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선생을 중심으로 시작된 유림모임이다. 모임의 장소는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낙강 줄기의 위쪽에 위치한 월안사(月安寺)라는 작은 암자에서 행해졌다. 월안(月安)은 ‘달빛이 고요하게 머무른다.’는 뜻인데 후에 ‘달빛 물결이 넘쳐흐른다.’는 의미의 월란사(月瀾寺)로 개칭되었다.
두 선생은 서로 내왕하면서 이 곳의 자연을 유상(遊賞)하고 시와 문학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 회동에는 농암의 자제들과 퇴계의 제자들이 따라오면서 모임의 규모가 확대되고 해마다 열리는 정기적인 모임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두 선생이 차례로 타계하고 세월이 흘러 암자도 무너져 빈터만 남았는데, 1860(철종 11)년에 만취당의 후손이 선조의 유적지를 기념하기 위해 폐사지에 월란정사(月瀾精舍)를 창건하였다. 당시 개기고유문(開基告由文)은 고계 이휘녕(古溪 李彙寧)이, 상량문은 운산 이휘재(雲山 李彙載)가 지었다. 또, 이건 때의 개기고유문은 목재 이만유(穆齋 李晩由), 상량문은 봉강 이만여(鳳岡 李晩輿)가, 기문(記文)은 기산 김석유(奇山 金奭裕)와 신암 이만각(愼庵 李晩慤)이 각각 지었고 중건 때의 기문은 범암 류연즙(汎庵 柳淵楫)이 지었다. 그 후 1902년에 또 개건하였고 그 뒤에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1993년에 유서 깊은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월란암칠대기적비(月瀾庵七臺紀蹟碑)를 세워 월란척촉회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권오봉(權五鳳)․이근필(李根必)․김창회(金昌會)․류창훈(柳昌勳) 등이 논의하여 ‘속월란척촉회(續月瀾躑躅會)’를 결성한 이래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2. 구성과 운영
1) 구성
월란척촉회는 철쭉이 만발하는 4월 초를 정일로 삼아 정기적인 모임으로 확대되었으나 회와 관련된 당시의 문건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회원수와 언제까지 존속되었는지 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두 선생의 사후에 문인들의 글 등에서 회와 관련된 부분이 언급된 것이 없어 두 분이 타계한 후 자연스럽게 전승이 중단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근래의 월란척촉회는 1993년도에 퇴계의 후손, 농암의 후손, 퇴계 제자의 후손들에 의해서 속계되어 속월란척촉회라고도 한다. 속계되었을 당시의 계원은 약 180여 인이었으나 15년이 지난 지금 20여 인은 작고하고, 나머지 150여 인 중에서도 50인 정도만 매년 모임에 참석한다.
월란척촉회의 가입은 상당히 까다롭다. 회원의 가입조건은 유림의 후손 집안에서 장남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회원으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유림의 추천이 있어야 하며, 정기 모임 때 기존회원들의 수락이 있어야만 회원으로 활동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회원의 직함이 자손대로 유임되기 때문이다. 아닌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사례이다. 형제가 가입된 것이 의성 사촌의 안동 김씨 문중에서 두 사례, 부자(父子)가 가입된 것이 진성 이씨와 영천 이씨에서 각각 한 사례가 있다. 회원의 성씨는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이것이 유림의 연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성씨는 진성 이씨와 사촌 김씨이다.
2) 운영
월란척촉회는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모임을 갖는다. 장소는 원칙적으로 월란정사에서 개최한다. 그러나 회원들이 전국각지에 퍼져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하다가 최근에는 이렇게 하면 원래의 의의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3년에 한번씩은 월란정사에서 한다. 작년과 재작년에 외부에서 해서 올해는 월란정사에서 모임을 가졌다. 속월란척촉회가 발기될 당시의 위원회를 살펴보면 위원장, 부위원장, 총무, 재무, 편간, 직일, 감사로 구성이 되어 있다. 첫 번째 임원진은 발기 당시의 임원들이 그대로 연임되었다. 현재의 월란척촉회는 회장, 부회장, 총무, 감사로 구성되어 있다. 임원의 임기는 2년이며, 연임도 가능하다. 현재 회장은 영천인(永川人) 이유창(李有昌)씨이다.
월란척촉회는 회원의 회비와 찬조금 등으로 운영되는데 우선 회원의 가입 당시에 20,000원을 낸다. 그리고 년 20,000원을 계속 낸다. 계원들이 모이게 되면 일년의 결산을 하게 된다.
회의 운영은 1994년에 재정된 10개 조항의 회칙과 부칙에 따라 운영되며 아래와 같다.
3. 기타
1) 會則
第一條(名稱) 本會의 名稱은 月瀾躑躅會라 稱한다.
第二條(目的) 本會의 目的은 先賢의 敎學從事와 學徒 精神을 바탕에 두고 月瀾躑躅 會를 通하여 頣神賞適하신 옛 陶山儒賢의 學風을 이어박아 道學綱領을 指標로 修養精進함을 目的으로 한다.
第三條(場所) 本會의 會所는 月瀾精舍로함을 原則으로 하되 會員의 決議에 다라 間或變更할 수도 있다.
第四條(會員) 本會의 會員은 本會會則 第二條의 目的에 積極贊同하고 誠實히 參與하는 이로 한다.
第五條(任員) 本會의 任員은 다음과 같이 定하고 任期는 二年으로 하되 重任할 수 있다.
․會長 1名 ․副會長 若干名 ․監事 2名 ․總務 2名 ․財務 1名
第六條(任員의 選任) 本會의 任員은 總會에서 選任한다.
顧問 若干名을 推戴할 수 있다.
第七條(任員의 職能)
1. 會長은 本會를 代表하고 會務全般을 統轄한다.
2. 副會長은 會長을 補佐하며 會長이 有故時에는 그 職務를 代行한다.
3. 監事는 本會의 財政 및 會務執行事項을 監査하여 總會時 그 結果를 報告한다.
第八條(會議) 本會의 會議는 定期總會로 하고 總會 日字는 每年 陽曆 五月 첫째 日曜日로 한다.
第九條(財政) 本會의 財政은 會費 및 贊助로 充當한다.
會費는 一年 萬원으로 하되 義務負擔키로 한다.
但 三年 以上 年會費를 未納한 時는 自進退會 看做한다.
第十條(會計) 本會則은 西紀壹九九四年 五月 一日부터 施行한다.
다만 本會則에 未備한 事項은 通常慣例에 따른다.
附則:本會則은 西紀 壹九九四年 五月 一日부터 施行한다. 다만 本會則에 未備한 事項은 通常慣例에 따른다.
一. 會則一部改正(別添會則參照)
1. 副會長二人을 副會長若干名으로 改正하고 義城沙村 金昌會氏를 副戶長으로 選任하였음.
2. 年會費 一萬원을 義務負擔으로 定하고 今年度부터 施行키로 하였음.(95년도부터 實施)
3. 今年부터 始作하여 앞으로도 二年 以上, 年會費 未納하시는 분은 自進退會로 看做키로 하였음.(1995年 6月)
2) 月瀾誌序
宣城固山水鄕也坏胎磅礴淑氣停毓名賢輩出後先相繼曰若聾巖孝節公爲汝南羣賢之首退陶文純公爲東方道學之宗二先生俱有山水仁智之樂岡巒林壑擧被昭回之輝光而至如月安寺<後改月瀾>則在陶山數武許東翠屛中腰杖屨相尋非止一再孝節公嘗答退陶書曰月瀾躑躅之會爲我延退吾則老除曾有江山全付于君之簡但此則舊約扶病欲副云云可見當時風流韻事不徒兩家後承之緬懷興慕而已也其後文純公又以七臺三曲之勝命名之輒有題詠以寓西林之感懷如趙月川李艮齋李蒙齋金晩翠諸賢多讀書于此弄月觀瀾亦足爲千古勝迹後之人其可忍任其湮廢而不之尊尙乎惟晩翠金公後孫爲置精舍管領風煙式至今日其追先肯構之意良由以也嗟夫星霜貿遷風異世變綱紀陵夷彛倫掃地先天文物無復影響而況臺前一曲爲政府水電堤防河伯所驅盡入懷襄九原可作未知如何爲懷也可勝歎哉權斯文五鳳從事學部敏於好古嘗慨然于此窃欲立石以表章之旣又廣搜當時事蹟及諸家文獻彙爲月瀾誌一冊偕李君根必委顧弊廬托以弁首之文善乎其衛斯文重其事之道也自惟謏淺耄荒固不敢下手於此而其義則斯林重事也又何敢一例辭遜不爲之相其役而負其意哉遂忘僭踰强書如右而拙訥之文無所發明第切愧窘悚惶之私
後學 永陽 李龍九 謹序
월란지서
선성은 진실로 산수의 고을이다. 시초가 성대하고 맑은 기운이 머물다 자라나서 명현이 배출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이어져왔다. 말하자면 농암 효절공은 여남 군현들의 수장이 되고, 퇴도 문순공은 동방 도학의 종주가 된다. 두 선생이 산수에서 인과 지의 좋음을 갖추고, 구릉과 임곡에서 일월의 광휘를 입었으니, 월안사(후에 월란으로 고침) 같은 곳에 이르면 도산 가까이쯤의 동으로 푸른 병풍이 감싸니, 지팡이 짚고 서로 찾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효절공이 일찍이 퇴도의 글에 답하여 말하기를, “월란에서 척촉의 모임은 나를 위하여 시기를 미루었으니, 내가 늙으면 일찍이 강산을 그대에게 준다는 글을 보내었으니, 이 구약에 병든 몸으로 부합하고자 하는 것이다.”라 했다. 가히 당시의 풍류 운사를 볼 수 있으니, 헛되지 않게 양가의 후손들은 그것을 이어서 돌이켜 생각하고 흥모하여야 할 것이다. 그 후 문순공이 또한 칠대와 삼곡의 경승에 이름 짓고 문득 기거하는 서림의 감회를 읊음이 있었다. 조월천, 이간재, 이몽재, 김만취 등의 여러 선비들이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 달을 희롱하며 물결을 관람하기에 또한 족히 천고의 뛰어난 자취이니, 후의 사람들에게 가히 차마 그 자취가 묻히기를 맡겨서 존상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만취 김공의 후손이 정사를 배치하고 관리하여 풍광을 다스렸다. 법식은 금일에 이르러 그 조상을 추모하여 긍구의 뜻이 좋은 이유이다. 아아 세월이 바뀌니 풍속이 달라지고 세상이 변하니 강기가 쇠퇴하고 인륜이 땅에 떨어지니, 선천의 문물이 회복될 수 없는 현상이다. 하물며 대 앞의 일곡은 정부에 의하여 댐이 되니, 하백이 몰던 바를 온 산과 들을 뒤덮어 묘지에서 일어나도 어찌한 것인 지 알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가히 찬탄을 이기리오. 권사문 오봉이 학부에 종사하면서 고사를 좋아함에 민첩하여 일찍이 개연히 이곳에 사사로이 비를 세우고자 드러내어 밝힌 것이다. 이미 또한 당시의 사적 및 제가들의 문헌을 널리 수집하여 월란지 한 책을 모은 것이다. 이군 근필과 함께 일부러 나의 집을 찾아와 서문을 잘 써주기를 부탁하였다. 그 사문을 거듭 지키는 것이 그 일의 도리이다. 홀로 생각하니 보잘 것 없이 얕고 연로하여 정신이 흐릿하여 진실로 감당할 수 없어 손을 내렸으나, 그 뜻은 곧 사림의 중요한 일이다. 또한 어찌 한차례 사양하고 서로 그 역할을 할 수 없다고는 하였으나 그 뜻을 저버리겠는가? 드디어 망녕되이 분수에 넘치게 억지로 위의 글을 쓰니, 재능이 모자라고 말이 어눌한 글이라 밝게 드러낸 것은 없으니, 부끄럽고 군색하고 황송한 마음이다.
후학 영양 이용구 삼가 서하다.
3) 先賢杖屨所月瀾七臺剽蹟發起文
月瀾七臺는 宣福 先賢이 講學 歌詠하시고, 道義를 講磨하며 性情을 怡養하신 杖屢所로서 陶山學의 發祥地라 할 수 있습니다. 特히 이 곳은 退陶夫子께서 最初로 朱子 西林院詩를 和韻하여 從師學道를 宣言한 뜻깊은 곳입니다. 그 후 諸賢의 幽棲質學과 躑躅賞遊가 繼續되었습니다.
退溪先生은 四十七歲와 六十六歲 때 月瀾寺에서 幽居하시면서 七臺(招隱․月瀾,考槃․凝思․郞詠․御風․凌雲臺)를 命名 題詩해 두셨습니다. 聾巖, 退溪, 錦溪, 月川, 惺齋, 赤巖, 坤齋, 晩翠堂, 蒙齋, 艮齋, 聾隱, 山天齋 같은 先賢이 寓寺한 由緖가 文獻에 傳해오고, 그 후 後學들이 仁知承誨한 詩歌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衰殘한 儒道를 돌이키고 彛倫을 回復하는데 있어 이 곳처럼 좋은 道場은 없을 것입니다.
七臺를 探勝하고 養眞을 하기 위해서나, 先師의 敎法을 알고 復明發揮하기 위해서는 臺 位置를 明確히 알아야 함에도 不拘하고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一九八六年 여름에 李源武, 李根必, 權五鳳이 踏尋하여 그 位置를 探索하였으나 分明치 못했더니 退溪先生文集(內集 卷三十六 張二十一)에 실린 具松顔公에게 보낸 先生 書札로 그 位置를 分明히 確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一九九一年 七月 二十六日에 李垠鎬, 李根必, 權五鳳, 鄭錫胎가 再次 踏尋하여 그 位置를 마침내 밝혀내게 되었습니다.
이 七臺는 先賢의 講學處로서 山月映衾의 往事를 尋眞할 수 있지만, 淸凉, 祝融, 國望, 龍頭, 靈芝 等 禮安五岳과 陶山九曲 및 靑霞, 紫霞 等 禮安 全景을 한 눈에 眺望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陶山을 訪問하는 學人은 누구나 꼭 한 번 들러 仙氣를 맛보아야 할 勝地입니다. 그러나 案內板이나 標識가 없는 그 곳에 가서 臺의 位置를 찾거나 故事를 理解하기란 無理입니다.
이에 뜻깊은 이 곳을 永久 湮滅시키지 않으려고 簡潔하게마나 글을 새겨 月瀾臺 앞에 紀蹟함으로써 先賢 遺躅地를 恒久的으로 保存코자 합니다. 表石 建立을 獨負擔하겠다는 이가 있으나, 先師 後孫과 私淑하는 後學이 보다 많이 參與하는데 더 뜻이 깊고, 後學이 先賢의 遺蹟을 合力保存하면서 斯林의 憂患을 함께 하는데 더 意義가 있을 것 같아 敢히 알려드립니다. 이 發意에 贊同하시는 분은 修契에 納名하고 獻誠錄에 記入해 주시기 바랍니다.
一九九二年 二月 二十日
眞城 李根必 永嘉 權五鳳 疏上
4) 月瀾庵七臺紀蹟碑銘 幷書
月瀾庵在陶山東翠屛之腰庵有招隱月瀾考槃凝思朗詠御風凌雲七臺退陶夫子所名而復繫之以詩者也自是宣福諸賢杖屨相講學於斯歌詠於斯更數百載殆無虛歲矣今嶺中諸彦有時禮訪夫子播馥之地磨以道義怡養情性無幽不到及於此庵豎此小石以寓宗仰之忱銘曰
莊誦遺詩 感慨繫之 水月宛在 歌斯詠斯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謹譔
월란암칠대기적비명 병서
월란암은 도산 동취병의 산허리에 자리 잡고 있다. 암자 주위에는 초은·월란·고반·응사·낭영·어풍·능운의 일곱 언덕(臺)이 있으니 퇴계 이부자께서 명명하시고 시로써 노래하신 곳이다. 이로부터 예안과 안동의 여러 선현들이 여기를 찾아 더불어 강학하고 시가를 읊조린 것이 수백 년 동안 거의 빠진 날이 없었다. 지금 영남의 여러 선비들이 선생께서 향기를 남기신 자취를 더듬어 도의를 강구하고 성정을 함양함에 찾지 않은 곳이 없더니 드디어 이 작은 돌을 세워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기탁하였다. 銘에 이르기를
남기신 노래 호연히 읊조릴 제
무량한 감개 솟아오르니
노니시던 자취에 완연히 남은 자연
노래하고 읊조리며 길이 사모하리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 삼가 짓다
동래 정석태
성산 이세동 공역
1. 유래
월란척촉회는 약 460년 전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선생을 중심으로 시작된 유림모임이다. 모임의 장소는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낙강 줄기의 위쪽에 위치한 월안사(月安寺)라는 작은 암자에서 행해졌다. 월안(月安)은 ‘달빛이 고요하게 머무른다.’는 뜻인데 후에 ‘달빛 물결이 넘쳐흐른다.’는 의미의 월란사(月瀾寺)로 개칭되었다.
두 선생은 서로 내왕하면서 이 곳의 자연을 유상(遊賞)하고 시와 문학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 회동에는 농암의 자제들과 퇴계의 제자들이 따라오면서 모임의 규모가 확대되고 해마다 열리는 정기적인 모임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두 선생이 차례로 타계하고 세월이 흘러 암자도 무너져 빈터만 남았는데, 1860(철종 11)년에 만취당의 후손이 선조의 유적지를 기념하기 위해 폐사지에 월란정사(月瀾精舍)를 창건하였다. 당시 개기고유문(開基告由文)은 고계 이휘녕(古溪 李彙寧)이, 상량문은 운산 이휘재(雲山 李彙載)가 지었다. 또, 이건 때의 개기고유문은 목재 이만유(穆齋 李晩由), 상량문은 봉강 이만여(鳳岡 李晩輿)가, 기문(記文)은 기산 김석유(奇山 金奭裕)와 신암 이만각(愼庵 李晩慤)이 각각 지었고 중건 때의 기문은 범암 류연즙(汎庵 柳淵楫)이 지었다. 그 후 1902년에 또 개건하였고 그 뒤에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1993년에 유서 깊은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월란암칠대기적비(月瀾庵七臺紀蹟碑)를 세워 월란척촉회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권오봉(權五鳳)․이근필(李根必)․김창회(金昌會)․류창훈(柳昌勳) 등이 논의하여 ‘속월란척촉회(續月瀾躑躅會)’를 결성한 이래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2. 구성과 운영
1) 구성
월란척촉회는 철쭉이 만발하는 4월 초를 정일로 삼아 정기적인 모임으로 확대되었으나 회와 관련된 당시의 문건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회원수와 언제까지 존속되었는지 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두 선생의 사후에 문인들의 글 등에서 회와 관련된 부분이 언급된 것이 없어 두 분이 타계한 후 자연스럽게 전승이 중단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근래의 월란척촉회는 1993년도에 퇴계의 후손, 농암의 후손, 퇴계 제자의 후손들에 의해서 속계되어 속월란척촉회라고도 한다. 속계되었을 당시의 계원은 약 180여 인이었으나 15년이 지난 지금 20여 인은 작고하고, 나머지 150여 인 중에서도 50인 정도만 매년 모임에 참석한다.
월란척촉회의 가입은 상당히 까다롭다. 회원의 가입조건은 유림의 후손 집안에서 장남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회원으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유림의 추천이 있어야 하며, 정기 모임 때 기존회원들의 수락이 있어야만 회원으로 활동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회원의 직함이 자손대로 유임되기 때문이다. 아닌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사례이다. 형제가 가입된 것이 의성 사촌의 안동 김씨 문중에서 두 사례, 부자(父子)가 가입된 것이 진성 이씨와 영천 이씨에서 각각 한 사례가 있다. 회원의 성씨는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이것이 유림의 연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성씨는 진성 이씨와 사촌 김씨이다.
2) 운영
월란척촉회는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모임을 갖는다. 장소는 원칙적으로 월란정사에서 개최한다. 그러나 회원들이 전국각지에 퍼져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하다가 최근에는 이렇게 하면 원래의 의의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3년에 한번씩은 월란정사에서 한다. 작년과 재작년에 외부에서 해서 올해는 월란정사에서 모임을 가졌다. 속월란척촉회가 발기될 당시의 위원회를 살펴보면 위원장, 부위원장, 총무, 재무, 편간, 직일, 감사로 구성이 되어 있다. 첫 번째 임원진은 발기 당시의 임원들이 그대로 연임되었다. 현재의 월란척촉회는 회장, 부회장, 총무, 감사로 구성되어 있다. 임원의 임기는 2년이며, 연임도 가능하다. 현재 회장은 영천인(永川人) 이유창(李有昌)씨이다.
월란척촉회는 회원의 회비와 찬조금 등으로 운영되는데 우선 회원의 가입 당시에 20,000원을 낸다. 그리고 년 20,000원을 계속 낸다. 계원들이 모이게 되면 일년의 결산을 하게 된다.
회의 운영은 1994년에 재정된 10개 조항의 회칙과 부칙에 따라 운영되며 아래와 같다.
3. 기타
1) 會則
第一條(名稱) 本會의 名稱은 月瀾躑躅會라 稱한다.
第二條(目的) 本會의 目的은 先賢의 敎學從事와 學徒 精神을 바탕에 두고 月瀾躑躅 會를 通하여 頣神賞適하신 옛 陶山儒賢의 學風을 이어박아 道學綱領을 指標로 修養精進함을 目的으로 한다.
第三條(場所) 本會의 會所는 月瀾精舍로함을 原則으로 하되 會員의 決議에 다라 間或變更할 수도 있다.
第四條(會員) 本會의 會員은 本會會則 第二條의 目的에 積極贊同하고 誠實히 參與하는 이로 한다.
第五條(任員) 本會의 任員은 다음과 같이 定하고 任期는 二年으로 하되 重任할 수 있다.
․會長 1名 ․副會長 若干名 ․監事 2名 ․總務 2名 ․財務 1名
第六條(任員의 選任) 本會의 任員은 總會에서 選任한다.
顧問 若干名을 推戴할 수 있다.
第七條(任員의 職能)
1. 會長은 本會를 代表하고 會務全般을 統轄한다.
2. 副會長은 會長을 補佐하며 會長이 有故時에는 그 職務를 代行한다.
3. 監事는 本會의 財政 및 會務執行事項을 監査하여 總會時 그 結果를 報告한다.
第八條(會議) 本會의 會議는 定期總會로 하고 總會 日字는 每年 陽曆 五月 첫째 日曜日로 한다.
第九條(財政) 本會의 財政은 會費 및 贊助로 充當한다.
會費는 一年 萬원으로 하되 義務負擔키로 한다.
但 三年 以上 年會費를 未納한 時는 自進退會 看做한다.
第十條(會計) 本會則은 西紀壹九九四年 五月 一日부터 施行한다.
다만 本會則에 未備한 事項은 通常慣例에 따른다.
附則:本會則은 西紀 壹九九四年 五月 一日부터 施行한다. 다만 本會則에 未備한 事項은 通常慣例에 따른다.
一. 會則一部改正(別添會則參照)
1. 副會長二人을 副會長若干名으로 改正하고 義城沙村 金昌會氏를 副戶長으로 選任하였음.
2. 年會費 一萬원을 義務負擔으로 定하고 今年度부터 施行키로 하였음.(95년도부터 實施)
3. 今年부터 始作하여 앞으로도 二年 以上, 年會費 未納하시는 분은 自進退會로 看做키로 하였음.(1995年 6月)
2) 月瀾誌序
宣城固山水鄕也坏胎磅礴淑氣停毓名賢輩出後先相繼曰若聾巖孝節公爲汝南羣賢之首退陶文純公爲東方道學之宗二先生俱有山水仁智之樂岡巒林壑擧被昭回之輝光而至如月安寺<後改月瀾>則在陶山數武許東翠屛中腰杖屨相尋非止一再孝節公嘗答退陶書曰月瀾躑躅之會爲我延退吾則老除曾有江山全付于君之簡但此則舊約扶病欲副云云可見當時風流韻事不徒兩家後承之緬懷興慕而已也其後文純公又以七臺三曲之勝命名之輒有題詠以寓西林之感懷如趙月川李艮齋李蒙齋金晩翠諸賢多讀書于此弄月觀瀾亦足爲千古勝迹後之人其可忍任其湮廢而不之尊尙乎惟晩翠金公後孫爲置精舍管領風煙式至今日其追先肯構之意良由以也嗟夫星霜貿遷風異世變綱紀陵夷彛倫掃地先天文物無復影響而況臺前一曲爲政府水電堤防河伯所驅盡入懷襄九原可作未知如何爲懷也可勝歎哉權斯文五鳳從事學部敏於好古嘗慨然于此窃欲立石以表章之旣又廣搜當時事蹟及諸家文獻彙爲月瀾誌一冊偕李君根必委顧弊廬托以弁首之文善乎其衛斯文重其事之道也自惟謏淺耄荒固不敢下手於此而其義則斯林重事也又何敢一例辭遜不爲之相其役而負其意哉遂忘僭踰强書如右而拙訥之文無所發明第切愧窘悚惶之私
後學 永陽 李龍九 謹序
월란지서
선성은 진실로 산수의 고을이다. 시초가 성대하고 맑은 기운이 머물다 자라나서 명현이 배출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이어져왔다. 말하자면 농암 효절공은 여남 군현들의 수장이 되고, 퇴도 문순공은 동방 도학의 종주가 된다. 두 선생이 산수에서 인과 지의 좋음을 갖추고, 구릉과 임곡에서 일월의 광휘를 입었으니, 월안사(후에 월란으로 고침) 같은 곳에 이르면 도산 가까이쯤의 동으로 푸른 병풍이 감싸니, 지팡이 짚고 서로 찾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효절공이 일찍이 퇴도의 글에 답하여 말하기를, “월란에서 척촉의 모임은 나를 위하여 시기를 미루었으니, 내가 늙으면 일찍이 강산을 그대에게 준다는 글을 보내었으니, 이 구약에 병든 몸으로 부합하고자 하는 것이다.”라 했다. 가히 당시의 풍류 운사를 볼 수 있으니, 헛되지 않게 양가의 후손들은 그것을 이어서 돌이켜 생각하고 흥모하여야 할 것이다. 그 후 문순공이 또한 칠대와 삼곡의 경승에 이름 짓고 문득 기거하는 서림의 감회를 읊음이 있었다. 조월천, 이간재, 이몽재, 김만취 등의 여러 선비들이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 달을 희롱하며 물결을 관람하기에 또한 족히 천고의 뛰어난 자취이니, 후의 사람들에게 가히 차마 그 자취가 묻히기를 맡겨서 존상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만취 김공의 후손이 정사를 배치하고 관리하여 풍광을 다스렸다. 법식은 금일에 이르러 그 조상을 추모하여 긍구의 뜻이 좋은 이유이다. 아아 세월이 바뀌니 풍속이 달라지고 세상이 변하니 강기가 쇠퇴하고 인륜이 땅에 떨어지니, 선천의 문물이 회복될 수 없는 현상이다. 하물며 대 앞의 일곡은 정부에 의하여 댐이 되니, 하백이 몰던 바를 온 산과 들을 뒤덮어 묘지에서 일어나도 어찌한 것인 지 알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가히 찬탄을 이기리오. 권사문 오봉이 학부에 종사하면서 고사를 좋아함에 민첩하여 일찍이 개연히 이곳에 사사로이 비를 세우고자 드러내어 밝힌 것이다. 이미 또한 당시의 사적 및 제가들의 문헌을 널리 수집하여 월란지 한 책을 모은 것이다. 이군 근필과 함께 일부러 나의 집을 찾아와 서문을 잘 써주기를 부탁하였다. 그 사문을 거듭 지키는 것이 그 일의 도리이다. 홀로 생각하니 보잘 것 없이 얕고 연로하여 정신이 흐릿하여 진실로 감당할 수 없어 손을 내렸으나, 그 뜻은 곧 사림의 중요한 일이다. 또한 어찌 한차례 사양하고 서로 그 역할을 할 수 없다고는 하였으나 그 뜻을 저버리겠는가? 드디어 망녕되이 분수에 넘치게 억지로 위의 글을 쓰니, 재능이 모자라고 말이 어눌한 글이라 밝게 드러낸 것은 없으니, 부끄럽고 군색하고 황송한 마음이다.
후학 영양 이용구 삼가 서하다.
3) 先賢杖屨所月瀾七臺剽蹟發起文
月瀾七臺는 宣福 先賢이 講學 歌詠하시고, 道義를 講磨하며 性情을 怡養하신 杖屢所로서 陶山學의 發祥地라 할 수 있습니다. 特히 이 곳은 退陶夫子께서 最初로 朱子 西林院詩를 和韻하여 從師學道를 宣言한 뜻깊은 곳입니다. 그 후 諸賢의 幽棲質學과 躑躅賞遊가 繼續되었습니다.
退溪先生은 四十七歲와 六十六歲 때 月瀾寺에서 幽居하시면서 七臺(招隱․月瀾,考槃․凝思․郞詠․御風․凌雲臺)를 命名 題詩해 두셨습니다. 聾巖, 退溪, 錦溪, 月川, 惺齋, 赤巖, 坤齋, 晩翠堂, 蒙齋, 艮齋, 聾隱, 山天齋 같은 先賢이 寓寺한 由緖가 文獻에 傳해오고, 그 후 後學들이 仁知承誨한 詩歌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衰殘한 儒道를 돌이키고 彛倫을 回復하는데 있어 이 곳처럼 좋은 道場은 없을 것입니다.
七臺를 探勝하고 養眞을 하기 위해서나, 先師의 敎法을 알고 復明發揮하기 위해서는 臺 位置를 明確히 알아야 함에도 不拘하고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一九八六年 여름에 李源武, 李根必, 權五鳳이 踏尋하여 그 位置를 探索하였으나 分明치 못했더니 退溪先生文集(內集 卷三十六 張二十一)에 실린 具松顔公에게 보낸 先生 書札로 그 位置를 分明히 確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一九九一年 七月 二十六日에 李垠鎬, 李根必, 權五鳳, 鄭錫胎가 再次 踏尋하여 그 位置를 마침내 밝혀내게 되었습니다.
이 七臺는 先賢의 講學處로서 山月映衾의 往事를 尋眞할 수 있지만, 淸凉, 祝融, 國望, 龍頭, 靈芝 等 禮安五岳과 陶山九曲 및 靑霞, 紫霞 等 禮安 全景을 한 눈에 眺望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陶山을 訪問하는 學人은 누구나 꼭 한 번 들러 仙氣를 맛보아야 할 勝地입니다. 그러나 案內板이나 標識가 없는 그 곳에 가서 臺의 位置를 찾거나 故事를 理解하기란 無理입니다.
이에 뜻깊은 이 곳을 永久 湮滅시키지 않으려고 簡潔하게마나 글을 새겨 月瀾臺 앞에 紀蹟함으로써 先賢 遺躅地를 恒久的으로 保存코자 합니다. 表石 建立을 獨負擔하겠다는 이가 있으나, 先師 後孫과 私淑하는 後學이 보다 많이 參與하는데 더 뜻이 깊고, 後學이 先賢의 遺蹟을 合力保存하면서 斯林의 憂患을 함께 하는데 더 意義가 있을 것 같아 敢히 알려드립니다. 이 發意에 贊同하시는 분은 修契에 納名하고 獻誠錄에 記入해 주시기 바랍니다.
一九九二年 二月 二十日
眞城 李根必 永嘉 權五鳳 疏上
4) 月瀾庵七臺紀蹟碑銘 幷書
月瀾庵在陶山東翠屛之腰庵有招隱月瀾考槃凝思朗詠御風凌雲七臺退陶夫子所名而復繫之以詩者也自是宣福諸賢杖屨相講學於斯歌詠於斯更數百載殆無虛歲矣今嶺中諸彦有時禮訪夫子播馥之地磨以道義怡養情性無幽不到及於此庵豎此小石以寓宗仰之忱銘曰
莊誦遺詩 感慨繫之 水月宛在 歌斯詠斯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謹譔
월란암칠대기적비명 병서
월란암은 도산 동취병의 산허리에 자리 잡고 있다. 암자 주위에는 초은·월란·고반·응사·낭영·어풍·능운의 일곱 언덕(臺)이 있으니 퇴계 이부자께서 명명하시고 시로써 노래하신 곳이다. 이로부터 예안과 안동의 여러 선현들이 여기를 찾아 더불어 강학하고 시가를 읊조린 것이 수백 년 동안 거의 빠진 날이 없었다. 지금 영남의 여러 선비들이 선생께서 향기를 남기신 자취를 더듬어 도의를 강구하고 성정을 함양함에 찾지 않은 곳이 없더니 드디어 이 작은 돌을 세워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기탁하였다. 銘에 이르기를
남기신 노래 호연히 읊조릴 제
무량한 감개 솟아오르니
노니시던 자취에 완연히 남은 자연
노래하고 읊조리며 길이 사모하리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 삼가 짓다
동래 정석태
성산 이세동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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