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서원에 퇴계와 금계의 위패 봉안문을 쓴 사람은 몽암 이채 蒙庵 李埰(광해군8년~숙종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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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3회 작성일 22-10-03 05:59본문
백학서원에 퇴계와 금계의 위패 봉안문을 쓴 사람은 몽암 이채 蒙庵 李埰(광해군8년~숙종10년)
문집명 몽암집 (蒙庵集)(17c)
간략서지 古 3428-570蒙庵 李埰의 문집. 6권 3책.
간략해제 이채의 문집은 1832년(순조 32)에 후손 李在進과 鼎宖‚ 在發 등이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古 3428-570>본은 목판본으로서 책의 말미에 <壬寅玉山重印>이라는 墨書 刊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을 1841년(헌종 8)에 玉山書院에서 다시 간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奎 15452>본은 후대에 전사한 필사본이다. 본 해설은 <古 3428-570>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편저자 이채 (李埰)
저자개요 1616-1684 (광해군8-숙종10)字: 錫吾‚ 號: 蒙庵‚ 本貫: 驪州‚ 父: 曒‚ 母: 鄭氏
저자내용 李彦迪의 玄孫으로서 50세에 成均館에 들어갔고 1676년(숙종 2)에 성균관의 천거로 英陵參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에 다시 氷庫別檢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평생 벼슬하지 않으면서 慶州에서 圖書와 花卉를 벗하며 은거하였다.
白鶴書院二先生奉安文 (1) 白鶴書院에 退溪 李滉과 錦溪 黃俊良의 위패를 봉안하는 글.
白鶴書院廟宇上梁文 (22) 白鶴書院의 廟宇를 짓는 上梁文. 서원 묘우의 건립 경위를 밝히고‚ 상량 후 文風이 진작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 곳은 錦溪 黃俊亮이 講道하던 곳으로서 衆議를 모아 書院을 세우기로 하고 우선 廟宇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退溪 李滉을 선정하여 合享하고 숭앙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문집명 몽암집 (蒙庵集)(17c)
간략서지 古 3428-570蒙庵 李埰의 문집. 6권 3책.
간략해제 이채의 문집은 1832년(순조 32)에 후손 李在進과 鼎宖‚ 在發 등이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古 3428-570>본은 목판본으로서 책의 말미에 <壬寅玉山重印>이라는 墨書 刊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을 1841년(헌종 8)에 玉山書院에서 다시 간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奎 15452>본은 후대에 전사한 필사본이다. 본 해설은 <古 3428-570>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편저자 이채 (李埰)
저자개요 1616-1684 (광해군8-숙종10)字: 錫吾‚ 號: 蒙庵‚ 本貫: 驪州‚ 父: 曒‚ 母: 鄭氏
저자내용 李彦迪의 玄孫으로서 50세에 成均館에 들어갔고 1676년(숙종 2)에 성균관의 천거로 英陵參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에 다시 氷庫別檢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평생 벼슬하지 않으면서 慶州에서 圖書와 花卉를 벗하며 은거하였다.
白鶴書院二先生奉安文 (1) 白鶴書院에 退溪 李滉과 錦溪 黃俊良의 위패를 봉안하는 글.
白鶴書院廟宇上梁文 (22) 白鶴書院의 廟宇를 짓는 上梁文. 서원 묘우의 건립 경위를 밝히고‚ 상량 후 文風이 진작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 곳은 錦溪 黃俊亮이 講道하던 곳으로서 衆議를 모아 書院을 세우기로 하고 우선 廟宇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退溪 李滉을 선정하여 合享하고 숭앙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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