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로 본 영주의 뿌리와 선비정신 [10] 평해황씨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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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5회 작성일 21-11-25 06:37본문
선조의 뜻과 정신 그리고 역사가 금계에서 이어진다 기자명 김은아 기자 입력 2015.09.18 11:26 호수 538 댓글 0
종친회로 본 영주의 뿌리와 선비정신 [10] 평해황씨 종친회
종친회 탐방을 통해 영주의 뿌리와 역사를 알려 씨족의 근원을 찾고 어린아이들과 청소년, 젊은 층에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편집자 주]
▲ 금양정사
학식과 덕망 갖춘 선비의 삶으로 700년 세거 금계 이후 500년까지 평해황씨의 시조는 황락(黃洛)으로 6세인 원로(原老, 1270~?)가 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말 영해부사를 지내며 영천 초곡리(푸실)로 옮겨왔다. 원로의 손자 유정(有定, 1343~?)은 문과에 올라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사위로 장인의 가장(家庄)을 물려받아 영주 읍내로 옮겨 살았는데 그 곳이 유명한 삼판서고택이다.
조선 중기에 들어와서는 치의 아들 준량(俊良)이 중종 때 문과 급제로 성주 목사를 지냈고 퇴계 이황의 제자들 가운데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로 도학(道學) 문장으로 크게 알려졌다.
이후에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급제자인 황헌이 일제에게 굴하지 않았던 일화는 지역에서 항일운동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현재 영주에는 풍기 욱금을 비롯해 안정면 대평, 봉현면 노좌, 이산면 지동, 부석면 뿔바우와 보계실, 문수면 전닷 등에 세거하며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 금선정
▲ 영주의 입향조
▲ 황헌 선조
평해황씨종친회가 중시조로 모시고 있는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로 풍기 서부동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청백리로 알려진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18세 진사시에 나간 이후 문명(文名)을 날리게 되었다.
생을 마치는 47세까지 애민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영천현감으로 부임해 당시 높은 세금으로 힘들어했던 백성을 위해 세금장부를 불태우고 비워진 창고를 채웠으며 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서원은 이후 부임하는 곳마다 세웠다고 한다.
1557년 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백성들의 환경은 높은 세금과 공납으로 끼니를 거르게 되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고을을 떠나 40여호 밖에 남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에 임금에게 올린 ‘단양진폐소’는 4천8백여자에 달하는 명문장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진폐소로 백성들은 10년간 부역과 세금이 면제돼 단양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어 200호로 불어났다고 한다. 1560년 성주목사로 부임해서는 서원을 짓고 향교를 증축했으며 퇴계 선생이 초고를 만들고 서문을 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금계가 정리해 출판했다고 한다.
1563년 병을 얻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예천에 이르러 생을 마쳤다. 풍기의 욱양서원과 영천의 백학서원에 제향됐으나 현재는 음력 3월 10일 욱양서원에서 모시고 있으며 저서로는 ‘금계집’이 있다.
▲ 수몰전 욱양서원의 제향을 위한 부속건물 활수당 전경
▲ 선비의 삶을 살다
조선의 마지막 과거급제자인 황헌(1874~1971)은 자는 경도(景度), 호는 금주(錦洲)로 죽한당 세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퇴계의 후손 만기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능했으며 1892년 17세에 대과에 급제해 뛰어난 재주로 칭찬이 자자했고 이듬해 권지승문원 부정자를 지냈다.
▲ 금계 선조의 묘
왜국의 침탈로 인해 갑오년 관방을 고친 일,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을사년 불평등한 협약과 경술년 국치에 이르게 되면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안에서 일제에 대한 분함으로 출사표와 양포령을 읊으며 울분을 참아내자 사실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녹음하려는 일본 앞잡이들을 제지했다. 상투를 자르려 할 때는 목침으로 던져 내쫓으며 일제에 굴하지 않고 선비의 의기를 지켜 항일운동 정신을 고취시켰다.
▲ 역사를 이어가다
2012년 평해황씨종친회는 소수박물관에서 ‘世居 七百年, 영주의 평해황씨 사람들’이란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전시된 유물은 조선시대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금계종가의 자료와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유물들, 금계가 먼저 세상을 떠난 스승인 퇴계 이황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친필제문, 금계가 남긴 친필 유묵, 호곡 황유일의 동자례 서책과 목판들 등이다.
종친회는 특별기획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전시도록’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영주의 평해황씨 사람들과 평해황씨가 배출한 인물들에 대한 논고, 문중전적, 소장전적, 관찬문서, 사찬문서, 전적류 등을 수록했다.
황한섭 회장은 “금계 선조를 포함한 이후의 유물을 기탁한 것은 일제강점기 역사의식 약화와 6.25때 서부동 큰집이 폭격을 맞아 유물들이 소실되었고 금계집 목판도 일부가 분실되었다”며 “이후에도 현판 등이 없어지는 등 더 이상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재천 종손은 “2017년 금계 선조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에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비를 세우고 글을 간추려 책자도 발간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선조의 애민정신을 본 받아야
[미니인터뷰]평해황씨종친회 황한섭 회장, 황재혁 사무국장, 황재천 종손
종친회로 본 영주의 뿌리와 선비정신 [10] 평해황씨 종친회
종친회 탐방을 통해 영주의 뿌리와 역사를 알려 씨족의 근원을 찾고 어린아이들과 청소년, 젊은 층에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편집자 주]
▲ 금양정사
학식과 덕망 갖춘 선비의 삶으로 700년 세거 금계 이후 500년까지 평해황씨의 시조는 황락(黃洛)으로 6세인 원로(原老, 1270~?)가 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말 영해부사를 지내며 영천 초곡리(푸실)로 옮겨왔다. 원로의 손자 유정(有定, 1343~?)은 문과에 올라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사위로 장인의 가장(家庄)을 물려받아 영주 읍내로 옮겨 살았는데 그 곳이 유명한 삼판서고택이다.
조선 중기에 들어와서는 치의 아들 준량(俊良)이 중종 때 문과 급제로 성주 목사를 지냈고 퇴계 이황의 제자들 가운데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로 도학(道學) 문장으로 크게 알려졌다.
이후에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급제자인 황헌이 일제에게 굴하지 않았던 일화는 지역에서 항일운동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현재 영주에는 풍기 욱금을 비롯해 안정면 대평, 봉현면 노좌, 이산면 지동, 부석면 뿔바우와 보계실, 문수면 전닷 등에 세거하며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 금선정
▲ 영주의 입향조
▲ 황헌 선조
평해황씨종친회가 중시조로 모시고 있는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로 풍기 서부동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청백리로 알려진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18세 진사시에 나간 이후 문명(文名)을 날리게 되었다.
생을 마치는 47세까지 애민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영천현감으로 부임해 당시 높은 세금으로 힘들어했던 백성을 위해 세금장부를 불태우고 비워진 창고를 채웠으며 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서원은 이후 부임하는 곳마다 세웠다고 한다.
1557년 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백성들의 환경은 높은 세금과 공납으로 끼니를 거르게 되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고을을 떠나 40여호 밖에 남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에 임금에게 올린 ‘단양진폐소’는 4천8백여자에 달하는 명문장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진폐소로 백성들은 10년간 부역과 세금이 면제돼 단양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어 200호로 불어났다고 한다. 1560년 성주목사로 부임해서는 서원을 짓고 향교를 증축했으며 퇴계 선생이 초고를 만들고 서문을 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금계가 정리해 출판했다고 한다.
1563년 병을 얻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예천에 이르러 생을 마쳤다. 풍기의 욱양서원과 영천의 백학서원에 제향됐으나 현재는 음력 3월 10일 욱양서원에서 모시고 있으며 저서로는 ‘금계집’이 있다.
▲ 수몰전 욱양서원의 제향을 위한 부속건물 활수당 전경
▲ 선비의 삶을 살다
조선의 마지막 과거급제자인 황헌(1874~1971)은 자는 경도(景度), 호는 금주(錦洲)로 죽한당 세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퇴계의 후손 만기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능했으며 1892년 17세에 대과에 급제해 뛰어난 재주로 칭찬이 자자했고 이듬해 권지승문원 부정자를 지냈다.
▲ 금계 선조의 묘
왜국의 침탈로 인해 갑오년 관방을 고친 일,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을사년 불평등한 협약과 경술년 국치에 이르게 되면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안에서 일제에 대한 분함으로 출사표와 양포령을 읊으며 울분을 참아내자 사실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녹음하려는 일본 앞잡이들을 제지했다. 상투를 자르려 할 때는 목침으로 던져 내쫓으며 일제에 굴하지 않고 선비의 의기를 지켜 항일운동 정신을 고취시켰다.
▲ 역사를 이어가다
2012년 평해황씨종친회는 소수박물관에서 ‘世居 七百年, 영주의 평해황씨 사람들’이란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전시된 유물은 조선시대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금계종가의 자료와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유물들, 금계가 먼저 세상을 떠난 스승인 퇴계 이황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친필제문, 금계가 남긴 친필 유묵, 호곡 황유일의 동자례 서책과 목판들 등이다.
종친회는 특별기획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전시도록’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영주의 평해황씨 사람들과 평해황씨가 배출한 인물들에 대한 논고, 문중전적, 소장전적, 관찬문서, 사찬문서, 전적류 등을 수록했다.
황한섭 회장은 “금계 선조를 포함한 이후의 유물을 기탁한 것은 일제강점기 역사의식 약화와 6.25때 서부동 큰집이 폭격을 맞아 유물들이 소실되었고 금계집 목판도 일부가 분실되었다”며 “이후에도 현판 등이 없어지는 등 더 이상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재천 종손은 “2017년 금계 선조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에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비를 세우고 글을 간추려 책자도 발간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선조의 애민정신을 본 받아야
[미니인터뷰]평해황씨종친회 황한섭 회장, 황재혁 사무국장, 황재천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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