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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 황준량선생 발자취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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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1회 작성일 21-10-04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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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 황준량 선생의 역사적 발자취

 

  황준량 [專門資料] : [전문사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1611)/ 권두에 이황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황준량(黃俊良)과 기대승의 발문이 있다. 이 책은 이황이 주희의 시문과 사상을 수록한 95책에 달하는 『주자선서』중 중국 송대 주희의 학문과 사상이 함축되어 있는 서간문을...(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전문사전] 단양향교 전경/ 1415년(태종 15)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 위해 창건. 명종 초기 이황(李滉)이 군수로 있을 때 현 위치로 옮겼고, 명종 후기 군수 황준량(黃俊良)이 명륜당을 건립./ 한국학중앙연구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전문사전] 금선정계곡 전경1/ 정자는 명종 때 문신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후손이 세움. 소백산 자락의 이 계곡은 절경일 뿐 아니라 부근은 정감록(鄭鑑錄) 비결을 믿어 난세를 피해 은둔하려는 사람들의 길지였음./ 한국학중앙연구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정인홍(鄭仁弘)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다/ 호광|호공(胡公)|이언적|이황|조식|성운|조식|성운|노자|장자|이황|이황|조식|성운|이정(李楨)|황준량(黃俊良)|봉성대군(鳳城大君)|이황(李滉)|이언적|이언적|이황|이언적|이황|정자(程子)|주행기(周行己)|조식.../ 이긍익(李肯翊)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황금계(黃錦溪)/ 퇴계(退溪)|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노소재(盧蘇齋)|황준량(黃俊良)|황수량(黃遂良)|금계(錦溪)|중거(仲擧)|조사경(趙士敬), 성주(星州), 학정(學正), 권신(權臣)|순흥(順興)|왕기(王氣)|제왕(帝王), 제문.../ 이익(李瀷)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간행물] 퇴계ㆍ남명(退溪南冥)퇴계ㆍ남명(退溪南冥)《類選》 卷十上 經史篇九 聖賢門./ 황준량(黃俊良)|퇴계(退溪)|남명(南冥)|김우굉(金宇宏)|조식(曹植)|조식(曹植), 類選|대학(大學)|노자(老子)|燃黎室記述 卷十一|燃黎室記述 卷十一, 사문(斯文), 우도(右道)|천리(天理)|허무(虛無)|소자(小子).../ 이익(李瀷)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基郡守李漢一疏曰, 伏以, 臣於夏/ 慶州|慈仁|竹嶺|太白山|小白山|小白山|竹嶺|丹陽|順興|醴泉|基|嶺|基|竹嶺|湖右|順興|基|基|順興|基|基|鳥嶺|鳥嶺|聞慶|坡州|沁都|安興|竹嶺|坡州|沁都|安興, 李漢一|華|扁|李珥|周世鵬|李敬輿|尹趾完|黃俊良|李滉(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丙寅十月三十日, 上御重熙堂。藥房入/ 李漢慶|炳學|炳學|炳學|炳學|炳學|厚祚|崔好植|厚祚|炳學|炳學|炳學|孔子|文成公李珥|文成|炳學|炳學|炳學|朴熙景|炳學|炳學|炳學|李象容|炳學|李是遠|炳學|黃俊良|李滉|晦庵|炳學|文純公權尙夏|炳學|李寅奭|炳學(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전문사전] 금계집(錦溪集)(표지)/ 『금계집(錦溪集)』의 표지 사진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인 황준량(黃俊良)의 시문집이다.(daum 2011)

 

  황준량 [專門資料] : [한국학자료] 李滉을 모신 白鶴書堂에 賜額해줄 것을 청하는 李益 등의 상소/ 深谷|坡山|紫雲|遯巖|南平|新寧|花山|鶴巖|白鶴書堂|新寧|新寧, 李益|宣祖|白仁傑|李滉|李滉|黃俊良|李滉|黃俊良|黃俊良|李滉|李滉|李滉|李滉|朱熹(daum 2011)

 

  황준량 : 고궁박물관, 농암집 교육홍보해야/ 지난달, 4월 30일 (토) | WPS국제방송 | view/ 5·7언근체시(五·七言近體詩) 약 140수가 있으며 퇴계(退溪), 송재(松齋), 모재(慕齋), 사재(思齋), 황준량(黃俊良), 회재(晦齋) 등과의 화창(和唱)이 있고 3편의 부(賦)가 있다. 2권은 퇴계와의 여답서(與答書)의 주 내용이다....(daum 2011)

 

  황준량 : 고궁박물관, 농암집 전시홍보해야/ 2달전, 3월 14일 (월) | WPS국제방송 | view/ 5·7언근체시(五·七言近體詩) 약 140수가 있으며 퇴계(退溪), 송재(松齋), 모재(慕齋), 사재(思齋), 황준량(黃俊良), 회재(晦齋) 등과의 화창(和唱)이 있고 3편의 부(賦)가 있다. 2권은 퇴계와의 여답서(與答書)의 주 내용이다....(daum 2011)

 

  황준량(黃俊良) : 본관(本貫) 평해(平海), 시대(時代) 1517(중종12)~1563(명종18), 자(字) 중거(仲擧), 호(號) 금계(錦溪)/ 이력(履歷)/ 황준량(黃俊良) 1517(중종12)~1563(명종18), 조선의 문신.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치(●)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 1537년(중종32) 생원(生員)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학유(學諭)를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앞서 부탁을 거절당했던 자가 언관(言官)이 되어 모함하자 외직(外職)을 자청, 신녕 현감(新寧縣監)으로 나갔다가 단양 군수(丹陽郡守)를 지내고 1560년(명종15)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다. 풍기(豊基)의 우곡서원(愚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白鶴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daum 2011)

 

  황준량 : 黃俊良 1517년 (중종 12)~1563년 (명종 18), 문신.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본관은 평해(平海), 치( )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 1537년(중종 32) 생원(生員)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학유(學諭)를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앞서 부탁을 거절당해던 자가 언관(言官)이 되어 모한하자 외직(外職)을 자청, 신녕 현감(新寧縣監)으로 나갔다가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내고 1560년(명종 15)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다. 풍기(豊基)의 우곡서원(愚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白鶴書院)에 제향(祭享)./ [著書]錦溪集 [文獻]明宗實錄, 國朝人物考, 朝鮮圖書解題(daum 2011)

 

  황준량(黃俊良) : 평해황 인명록/ 황준량(黃俊良) 1517(중종 12)∼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금오공 (휘)온인(溫仁)의 13세손,검교공 (휘)진(璡)의 10세손, 문정공파(금계공파)의 파조이며,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휘는 준량(俊良)이며 중종 12년(1517년 丁丑) 풍기 서부리에서 태어나다. 퇴계 이황의 문인(門人)으로 학문(學文)을 닦아 중종(中宗) 31년 진사시에 동 32년에 생원시에 합격 동35년 정시문과에 을과 제2인으로급제하였다.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손자로, 치(#치39)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리었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훈도로 차출되었다. 그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를 겸하였다.1544년 학정, 1547년(명종 2)에 박사가 되었고, 이어 전적에 올랐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중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고,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으며,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상도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앞서 그에게 청탁을 하였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하여 신녕현감으로 나갔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단양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죽었다. 신녕현감으로 있을 때 기민을 잘 진휼(賑恤)하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전임관(前任官)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린 일도 있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로 극론하여 단양이 20여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여주는 특은(特恩)을 받도록 하였으며, 벽지에 있던 향교를 군치(郡治)에 옮겨 세우고, 이 지방의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문묘 서편에 따로 사우(祠宇)를 마련하여 제사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주목사로 나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우는 한편,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우애가 돈독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아끼지 않았으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자식이 없어 아우 수량(遂良)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욱양서원(郁陽書院)은 현종 3년(1662)에 창건하여 문수공 이황을 봉안하고 숙종 16년(1690년)에 금계 황준량을 배향하고 있다. 고종 5년(1868년)3월9일 훼철되었으나 명칭만 바꾸어 욱양단소(郁陽壇所)로 종전과 다름없이 행해오다가 3백여년만인 1983년 계해(癸亥)에 땜을 막아 욱금리(郁錦里)가 수몰되어 욱양단소를 풍기읍 금계리 장선 마을 금양정사 앞으로 이설하였다. 욱금리의 땜 이름을 금계선생의 호를 따서 금계호(錦溪湖)라 이름하였다. 풍기읍 금계동에 가면 금양정사(錦陽精舍)가있다. 이 곳은 금계공께서 독서를 하시던 곳이며  "죽령의 밑 금계의 위에 돌아가고자 그 곳에 두어 칸 집을 지어 금양정사라 이름하고 책을 쌓아 도를 궁구하는 자리로 삼고 독실하고도 학문을 좋아 하는 의지로 심신을 침착하게 하여 수양하려 하였는데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안타깝다."

 

  퇴계 선생은 그 의 제자인 (휘)준량이 돌아가신 뒤 행장을 직접 쓰며 이 금양정사를 떠 올렸다고 한다.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16권 5책이 있는데 초간본(初刊本)은 1567년경 스승인 퇴계의 편차(編次)를 거쳐 단양(丹陽)에서 간행되었다.(daum 2011)

 

  황준량(黃俊良) : 시대 : 조선전기, 국적 : 한국, 생몰년 : 1517(중종 12)∼1563(명종 1), 정의 : 조선 명종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생애 : 자는 중거(仲擧)이고, 호는 금계(錦溪)이다. 본관은 평해(平海)로 경북 풍기(?基) 출신이며, 황치(黃)의 아들로 이현보(李賢輔)의 손서(孫)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0년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성주훈도(星州訓導)·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학정(學正)·전적(典籍)·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승문원전고(承文院殿考)·공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50년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등용되어 중종과 인종 두 임금의 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가 병조좌랑으로 전임되어서는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사헌부지평에 올라 모략으로 파직되자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나가고, 뒤이어 단양군수(丹陽郡守)·예조정랑·병조정랑을 거쳐서 1560년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용되었다./ 사상 : 그는 이황을 만나 학문적인 영향을 받으면서부터 거경(居敬)·궁리(窮理)의 성리학적 연구와 수양에 정진하였다. 퇴계학파(退溪學派) 형성 초기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황의 서원창설운동(書院創設運動)을 도와 새로운 사풍(士風) 진작에 적극 노력하는 한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권장 보급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신녕·단양·성주에서 벼슬을 하면서 민생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민폐를 소진(疏陳)하였다. 그는 민생의 근본적인 대책으로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여 「균전의(均田議)」·「책문(策問)」을 통하여 빈부격차의 심함과 농민의 유리(流離)를 인식하여 정전제(井田制)를 우리 나라 형편에 따라 한전제(限田制)로 실행하였다. 또한 불교는 자식된 자가 부모를 배반하고 신하된 자가 임금을 배반하며 인륜(人倫)을 끊고 천리(天理)를 없앤다고 하여 혁파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하여, 주희(朱熹)의 "사단은 리(理)의 발(發)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發)이다"라는 말을 이황이 더욱 분명히 하였다고 하여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탄다"는 이론에 찬성하였다.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신구도(天命圖說新舊圖)』에 대하여, 제1도는 진덕(進德)·수업(修業)의 건도(乾道)이고, 제2도는 주경(主敬)·행서(行恕)의 신도(神道)라고 하여 정지운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저서 : 저서에 『금계집(錦溪集)』이 있다./ 기타 :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白鶴書院)에 배향되었다.(daum 2011)

 

  황준량 : <국조 문과 방목>/ 황준량(黃俊良) : 중종(中宗)35년(1540년), 식년시(式年試) 을과2(乙科2)/ > 인적사항 : 생년(生年)  1517년, 정축, 자(字) 중거(仲擧), 호(號) 금계(錦溪), 본관(本貫) 평해(平海)/ > 가족사항 : 부(父) 황치(黃치), 조부(祖父) 황효동(黃孝童), 증조부(曾祖父) 황영손(黃永孫), 외조부(外祖父) 황한필(黃漢弼), 처부(妻父) 이문량(李文樑)/ > 이력 및 기타 : 소과(小科) 1537(정유) 생원시,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지평(持平)(daum 2011)

 

  황준량 : 이력(履歷)/ 영주문화원  영주를 빛낸 인물/ 황준량(黃俊良) 본(本) 평해(平海)/ 풍기읍 금계동에 가면 금양정사가 있다. 이곳은 황준량이 독서를 하던 곳이다. '죽령의 밑 금계의 위에 돌아가고자 그 곳에 두어 칸 집을 지어 금양정사라 이름하고 책을 쌓아 도를 궁구하는 자리로 삼고 독실하고도 학문을 좋아하는 의지로 심신을 침착하게 하여 수양하려 하였는데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안타깝다.' 퇴계는 그의 제자인 황준량이 죽은 뒤 행장을 직접 쓰며 이 금양정사를 떠올렸다. 황준량과 퇴계의 만남은 이현보 때문이다.황준량은 이현보의 아들인 이문량의 사위이다. 그래서 17년 맏인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데, 퇴계를 만나면서 비로소 [심경], [근사록]등 여러 성리학의 글을 접하게 되고 주자의 글을 읽게 된다. 그는 고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밝은 지혜와 청렴한 자세로 한결같은 치적을 거두었다. 신령현감 시절, 백성들의 굶주림을 자신의 일같이 여겨 보살피며, 전의 현감이 관의 재물을 많이 축낸 것을 절약 긴축으로 충당하여 그 문건을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거의 쓰러진 상태의 고을을 다시 일으키고자 임금에게 진폐소를 올렸는데, 4천 8백여 자의 명문장으로 임금을 감동시켰다. 그의 마지막 임지는 성주이다. 전임자가 세운 염봉서원을 증축하고, 문묘를 증수하는가 하면 교관을 두어 지방의 제자들을 가려서 가르치고, 매달 강회를 열어 성적에 따라 상벌을 베풀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두터워 언제나 물건이 생기면 먼저 어버이께 드리고 동기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 늘 힘껏 도왔다. 그래서 20여 년의 벼슬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을 때, 염습에 쓸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한다.(daum 2011)

 

  황준량 : 영주문화 > 영주의 역사인물 > 조선시대/ 황준량(黃俊良 1517 ~ 1563) :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 중종 12년(1517)에 풍기(豊基) 금계동(金鷄洞)에서 태어나다. -.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 중종 35년(1540)에 정시(庭試)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 2인(二人)으로 급제하였다. -. 공조좌랑(工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단양군수(丹陽郡守), 성주목사(星州牧使) 등을 지내다.  -. 단양향교(丹陽鄕校) 양심루(養心樓) 앞에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 저서에는 《금계집(錦溪集)》5권이 있다.  -. 풍기(豊基) 욱양서원(郁陽書院), 신녕(新寧) 백학서원(白鶴書院)에 제향./ 부(父) 황치(黃치), 모(母) 창원황씨(昌原黃氏)  교수(敎授) 황한필(黃漢弼)의 女/ 본(本) 황준량(黃俊良)/ 배(配) 영천이씨(永川李氏)  이문량(李文樑)의 女/ 이문량(李文樑):1498(연산군 4, 무오)~1581(선조 14, 신사). 본관 永川. 자는 대성(大成). 호는 벽오(碧梧). 賢輔의 장자(長子). 李滉과 親交하였으며, 문장(文章)과 氣節이 있음. 平陵道察訪 역임. 저서:碧梧集. ▣참고:行狀(李晩燾 撰)/ 자(子) : 황영黃瑛(황지환黃之煥)  系, 배(配) 금응수(琴應銖)의 女/ 형제(兄弟) : 제(弟) 황수량(黃秀良), 자(子) 황지환(黃之煥)  出, 자(子) 황지찬(黃之璨)(daum 2011)

 

  황준량 : 문헌(文獻)/ <울진군지>/ 제1장 인물  제11절 과제(科第)/ 2. 조선시대 1) 문과(文科)1) (1)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등재된 사람/ 황준량(黃俊良) : 1540년(중종 35)에 문과(文科)로 생원(生員)이다. 1) 조선시대의 과거는 대과(大科) 즉 문과(文科)와 소과(小科) 즉 생원(生員)·진사과(進士科)로 나누어진다. 대과(문과)합격자 명부가 국조방목(國朝榜目)이다. 현행 군지에 수록된 문과합격자 가운데 국조방목에 명단이 확인된 사람은 ‘국조문과방목에 등재된 사람’으로, 확인되지 않는 사람은 ‘기타’로 표시하였다. 역임한 관직은 현행 군지의 기술을 그대로 따랐지만 사실이 아닌 경우 주석을 달았다.  1)조선시대에는 이런 관직명이 없었다.(daum 2011)

 

  황준량 : <울진군지>/ 제2장 시(詩) 제1절 시(詩)/ 6. 정(亭) 2) 월송정(越松亭)/ 황준량 시 / 黃俊良 詩/ 하늘에 잇닿은 푸른 바다는 동쪽 끝 땅이요(碧海連天地盡東)/ 명사십리에 장송이 그늘 드리웠네(明沙十里蔭長松)/ 퉁소 부는 신선이 한밤중에 찾아올게고(吹簫仙子來中夜)/ 나막신 벗은 나그네 한밤중에 찾아드네/ 달은 가지 끝에 부서지니 백학이 놀래고(月碎枝梢驚白鶴)/ 바람에 고기비늘처럼 번뜩이니 창룡이 일어나는 듯(風飜鱗甲起蒼龍)/ 도포 소매에다 찬바람 말아서 가노니(袖中卷得寒濤去)/ 스스로 옛 모습이 아님을 꾸짖어 보네(自詣吾非舊日容)/(daum 2011)

 

  황준량 : 2. 금양정사 & 금선정/ 황준량(俊良) : 황성 발원지 평해의 정기가 태백산맥의 줄기를 따라 소백산 최고봉인  비로봉에 이르렀고, 그 아래 경북 영주시 풍기읍 욱금동에 금계호(준량선조의 호를 따서 명명한 저수지)에 평해황 검교공파의 뿌리가 발원하였다. 후손들은 금양정사와 욱양단소에 선조를 배향하고 매년 3월中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소백산의 영봉 비로봉에서 남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풍기의 삼가동, 욱금동, 금계동에 이르는데, 이 절승의 골짜기가 금선계곡으로 북천이라고도 한다. 욱금동(郁錦洞)은 금계 황준량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조상 대대로 살던마을이었으나 1984년 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되어 풍기, 봉현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국립공원 소백산의 실개울이 모여서 심산유곡을 흘러 내려오는 동안 거울처럼 맑은 시내가 되어 기화요초의 숲을 스치고 괴암절벽의 기슭을 돌아 정감록의 마을 금계동에 이른다. 개울은 반석위를 미끄러져 흐르면서 청담을 이루기도 하고, 기암괴석의 절벽을 만나 폭포가 되기도 하면서 절경을 이룬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퇴계의 문하생인 황 준양이 큰 바위가 이룬 대를 금선대라 명명했다하며, 당시의 풍기군수인 이 징계의 친필인 금선대란 서각이 있고 그 금선대 위엔 황 준양의 후손들의 정자인 금선정이 있어 금선계곡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한다. 금선정(錦仙亭)은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장선마을 위 냇가 언덕에 자라잡고 있으며 명종때 문신이던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이 학문을 강구(講究)하고 음풍롱월지(吟風弄月趾)로 택하였다. 금천양안에 기암괴석과 송림이 울창하여 원근에서 유상풍월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고 영조 33년(1757년)에 송징계(宋徵啓)군수가 금선대 삼대자를 암벽에 세겼고 정조5년(1781년) 이한일(李漢一)군수 때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錦仙亭)이라 이름하였다.정조9년 이대영(李大永)군수때 금선정 삼대자를 목사 조윤형(牧使 曹允亨)의 글씨로 새겨 현판(懸板)하였다.(daum 2011)

 

  황준량 : 문헌(文獻)/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황준량 1517-1563 중거 금계 평해 풍기 퇴계문인1540문과 금계집/ 黃俊良 1517-1563 仲擧 錦溪 平海 豊基 退溪門人1540文科 錦溪集(daum 2011)

 

  황준량 :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황준량(黃俊良)/ #경상도(慶尙道)  풍기(豊基)/ *욱양서원(郁陽書遠)/ 현종 임인건(顯宗壬寅建)./ 제향. 이황(호 퇴계 좌찬성 문형 증영의정 시문순 선조묘 문묘배향 본진성). 황준양(호금계 목사 본평해)./ 祭享. 李 滉(號退溪 左贊成 文衡 贈領議政 諡文純 宣祖廟 文廟配享 本眞城). 黃俊良(號錦溪 牧使 本平海).(daum 2011)

 

  황준량 : #경상도(慶尙道)  신령(新寧)/ *백학서원(白鶴書院)/ 광해 무오건(光海戊午建)./ 제향. 이황(호퇴계 좌찬성 문형 증영의정 시문순 선조묘 문묘배향 본진성). 황준양(호금계 목사 본평해)./ 祭享. 李滉(號退溪 左贊成 文衡 贈領議政 諡文純 宣祖廟 文廟配享 本眞城). 黃俊良(號錦溪 牧使 本平海).(daum 2011)

 

  황준량 : 퇴계 문인/ 황준량(黃俊良, 錦溪, 豊基 郁錦,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daum 2011)

 

  황준량 :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풍기(豊基)/ ● 천성암(天性庵) 평해(平海)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소구(所構)/ 주세붕(周世鵬) 본관 상주(尙州) 자(字) 경유(景游) 호(號) 신재(愼齋) 시(詩)(daum 2011)

 

  황준량 :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신녕(新寧)/ ● 백학서원(白鶴書院)(daum 2011)

  황준량 :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풍기(豊基)/ ● 욱양서원(郁陽書遠)(daum 2011)

  황준량 :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이십이(二十二)/ ● 유현열전(儒賢列傳) 원사제현(院祠諸賢)/ 황준량(黃俊良) 평해(平海)(daum 2011)

 

  황준량 : 금계, 중거 황준량(黃俊良)/ 금계, 중거 황준량(黃俊良) 평해(平海) 황준량(黃俊良) 1517(중종 12)∼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손자로, 치(?)의 아들이며.../ artsnet.co.kr(daum 2011)

 

  황준량(黃俊良) : 자 중거(仲擧), 호 금계(錦溪), 생졸년 1517 (중종 12) - 1563 (명종 18), 시대 조선 전기, 본관 평해(平海), 활동분야 문신 > 문신, [관련정보] : [문과]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 [상세내용] : 황준량(黃俊良)에 대하여,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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