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겸 지재교 소고선생 행장 [通政大夫 司諫院 大司諫 兼 知製敎 嘯皐 朴先生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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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3회 작성일 22-07-05 19:13본문
1) 행 장【行狀】
2. 조선국 고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겸 지재교 소고선생 행장 [朝鮮國 故 通政大夫 司諫院 大司諫 兼 知製敎 嘯皐 朴先生 行狀] 門人(문인) - 任屹(임흘) 撰(찬) -
선생의 성(姓)은 박(朴)씨요 휘(諱) 는 승임(承任)이다.자(字:어릴 적에 짓는 또 하나의 이름, 장가든 뒤에는 본이름 대신 자를 불렀다)는 중보(重甫)며, 본관은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이다.
고려 때 급제한 휘 의(宜)가 바로 선생의 비조(鼻祖=시조)다. 고려말에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을 지낸 휘 상충(尙衷:1332년~1375년)은 북원(北元)을 섬기야 한다는 주장에 맞서 대의(大義)를 내세워 이를 꺾으려다가 마침내 유배 도중에 죽었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휘 규(葵?~1437,세종19)는 선생의 고조가 되며 증조인 휘 병균(秉鈞)은 사온서령(司醞署令)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되었고 증조비 유씨(柳氏)는 숙인(淑人)에 증직되었다. 조부인 휘 숙(塾+石)은 충의위 부사직(忠義衛副司直)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증직되었고, 조모 구씨(具氏)는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형(珩)은 성균진사 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니 이렇게 삼대가 추증된 것은 선생이 귀하게 된 때문이다.
영천(榮川:영주의 옛 이름)에 우거하여 살게 된 것은 공의 아버지 참판공 때부터 였다 .공(公:참판공)이야말로 영주의 숨은 군자다 .어머니는 예안김씨 (禮安 金氏)인데 곧 가선대부 호조참판 김로(金輅)의 후손으로 벼슬하지 않고 마을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순후한 장자로 지칭 받는 김만일(金萬鎰)의 따님인데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정부인은 정덕(正德)12년 정축(丁丑:중종12년 1517) 11월19일 인시(寅時:새벽3시- 5시 사이)영주의 두서리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나자 총명하였고 점점 자라남에 재능이 출중하였다. 언젠가 훈장에게 사략(史略)을 배우는데 “무왕이 주임금을 치다(武王伐紂)”라는 대목에 이르자 질문하기를 "무왕이 천하를 위해 한 사나이를 쳤다면 어찌하여 은(殷)나라 종실(宗室)중에서 미자(微子) 같은 사람을 골라서 천자로 세우지 않고 스스로 은나라를 취한단 말이요?“라고 말하여 듣는 사람들을 누구나 놀랍고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겨우 14세에 재능이 활짝 피어서 시험에 응시코자 하였지만 아버지 참판공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啓)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가정 19년 경자(庚子:중종35년 1540)년 봄에 사마시(司馬試)의 두 차례 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또 문과(文科)에 응시, 병과(丙科:과거 시혐 합격의 세번째 합격 그뤂)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정자(權知 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중씨(仲氏) 승간(承侃)도 함께 급제하였는데 선생은 회시(會試)에 서 갑과로 급제한 때문에 판서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1491~1570)이 아버지 참판공 에게 편지로 축하하기를 “형제간에 나란히 같은 방(榜:과거합격자명단)에 기록되고 여려 선비 중에 으뜸으로 크게 이겼으니 이는 국조(國朝)이래로 전에 없던 큰 경사인데 마침내 병과(丙科)의 대열을 스스로 선택하고 장원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하였다.
임인(壬寅 중종37년1542)년에 예문관 검열 (藝文館檢閱)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보선(補選)되었고 이해 시월(十月)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겼다. 갑진(甲辰:1544)년 오월(五月)엔 선교랑(宣敎郞)으로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겸 경연 전경(經筵 典經)에 임명되어 호당(湖堂=독서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함으로써 학업 연마에 더욱 정진하였다. 을사(乙巳:1545)년 2월에 형편대로 따르기를 청하는(從權:원칙을 접소 방편을 행사함. 생전에 왕권을 물려주는 것은 원칙은 아니며 부득이한 형편에 따르는 것임) 상소를 올리기를,
“지금 성체(聖體:임금의 몸, 仁宗을 가리킴)가 오랫동안 상하셨고 기맥(氣脈)이 이미 병드셨다는 둥 진맥한 의원이 밖에 나와 하는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지경이오며 종묘 제사 때 천안(天顔=용안)을 직접 본 신료들은 모두 아연실색 하여 눈물을 글썽이면서 서로 바라보는 실정이며 조정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결코 일적인 간절한 정의에 구애되어 선왕께서 물려주신 중대한 보위를 가볍게 생각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감히 형편에 따르자는 청을 고집한 것이오며, 여려날 동안 간절하게 아뢰자 유음(兪音:신하의 아룀에 대한 임금의 하답)을 비로소 내려 주셨으며 조정이나 지방이나 모두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실지로 따르셨다는 말씀은 듣지 못했습니다. 소문은 이미 전해졌는데 겉으로는 받아들였음을 보이시고 속으론 의견을 고집하심은 작은 일이라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거늘 하물며 국가가 관련 된 그만둘 수 없는 일이겠나이까? 만약 아직도 그 중요도를 알지 못해서 잘못 처리한 것이라면 어찌 정의(情意)가 미덥지 못하다는 혐의뿐이겠나이까? 용납될 수 없는 후회가 뒤따를 것입니다. 저로서는 대왕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하였다.
중종대왕은 갑진(甲辰)년 동짓달에 승하하셨다. 인종대왕(仁宗大王)의 효성은 어찌나 지극한지 부왕의 병을 간호하는 동안 몹시 애를 태웠으며 상중에서 애도가 지나쳐서 옥체가 너무도 수척하였으므로 서울이나 지방할 것 없이 걱정이 태산이었다. 보다 못한 대신들이 방편을 따라 처리(從權)할 것을 애써 청하기 위해 백관들을 거느리고 가서 극구 진언하였으므로 선생이 이 소를 올린 것이다.
유월(六月) 달에 저작(著作:저작랑)겸 경연(經筵)설경(說經:경연청의 정8품 벼슬)에 제수되고 이해 칠월(七月)에 봉훈랑(奉訓郞)의 품계에 올라, 박사(博士) 겸경연사경(司經:경연처의 정7품 벼슬)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이어서 수찬 지제교 겸경연 검토관(修撰 知製敎 兼經筵檢討官)에 제수되고 승의랑(承議郞)의 품계에 올라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다.
병오(丙午:명종1,1546)년 정월에 조사(詔使:명나라 사신)가 왔을 때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옷 한 벌을 받아와서 어머니에게 바치면서 말하기를, “선물 받은 옷인데 마음 같아서는 즉시 돌려주고 싶었지만 동료들은 사양하지 않는데 유독 저만 거절하기가 형편상 난처한 때문에 할 수 없이 뜻을 굽히고 받아왔습니다.” 하였다. 삼월(三月)에 조산대부(朝散大夫)의 품계에 올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이때 권간(權奸:권세를 가진 간신) 진복창(陳復昌).이기(李芑)가 몰래 권력에 아부하여 세력을 휘두르니 그세력의 불꽃이 하늘을 달구었지만 선생은 더욱 꿋꿋하고 확실하게 자신을 지키었다. 사람들이 간혹 처변지도(處變之道:변하는 상황에 잘 대처하는 방법, 곧 그들과 친 하는 것)를 권하고, 그들 권신 또한 한패가 될 것을 부추겼지만 일체 응답하지 않았다. 복창이 관북(關北)으로 출사(出使)할 적에 만조백관들이 모두 물결처럼 문밖까지 몰려나가 앞 다투어 전송했지만 선생은 철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으므로 복창이 감정을 품고 크게 별렀다.
선생이 전랑(銓郞;전조의 낭관, 특히 이조 전랑)으로 있을 적에 동료가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을 이조에 천거했는데 선생은 동의하지 않았다. 선생이 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 벼슬)으로 있을 적에 복창(復昌)이 사헌부 대사헌이었는데 선생의 강직성을 매우 미워하였으며 선생 또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를 탄핵하려고 하다가 동료들의 만류로 뜻대로 하지 못하고 즉시 이고(移告)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창(昌:진복창)과 기(芑:이기)가 또 죄를 얽으려고 하였는데 기의 조카 원록이 적극적으로 말린 까닭에 겨우 면하고 체직(遞職)되는데 그쳤다.
오월(五月)달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고 6월에 직강(直講)에 제수되었으며 이달에 다시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무신(戊申:명종3,1548)년 10월에 내간상(內憂:어머니 상)을 당하고 기유(己酉1549)년 6월에 외간상(外憂: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신해(辛亥1551)년에 3년 상을 마치고 팔월(八月)에 현풍 현감(玄風縣監)이 되었는데 전임 현감이 자리를 비웠고 창고가 고갈되었지만 담담하게 처리하여 마땅한 조처를 하여 수년에 걸처 대개 다 채웠다. 균등한 부담을 싫어한 토호들이 황당한 말을 꾸며 감사 정언각(鄭彦慤)에게 청하여 선생을 밀어제치려고 하였으나 끝내는 공론의 저지를 받아서 그들의 간계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정사(丁巳:명종12,1557)년 정월에 봉열대부(奉列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직강(直講)에 제수되었다. 7월에 중훈대부(中訓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사예(司藝:성균관의 정4품 벼슬)가 되었고 이달에 특별히 경상도 재상어사(災傷御史)에 제수되었다.
무오(戊午1558)년 2월에 통훈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다시 사에(司藝)에 제수되었다. 12월에 풍기 군수에 제수되었는데 풍기는 죽령(竹嶺) 밑에 위치하므로 종전부터 풍기에 부임하는 자는 미신을 믿고 공연히 새재(鳥嶺)를 넘어서 갔던 것인데 유독 선생만이 백운동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직행하여 문성공 회헌 안선생(文成公 晦軒 安先生; 회헌은 안향의 호)을 봉심하였다. 동방 도학(道學:성리학)은 회헌 (晦軒:安珦(裕)1243~1306)이 시작한 것이며 서원(書院)의 성립도 여기서 비롯되었으므로 선생은 더욱 존숭하여 서원에 자주 들러 제생(諸生)들을 講授(講授:講義)하였으며 건물의 미비된 곳을 찾아 수리하고 마손된 회헌의 영정(影幀:초상화)도 조정에 요청하여 다시 손질해서 경건하게 걸어두었다. 원수 (院需:서원운영에 필요한 물자)를 맡은 어염관(魚鹽官)이 태만해서 규정대로 행하지 않은 탓으로 유생이 쓰는 물자(儒供)가 고갈되자 호조(戶曹)에 글을 올리기를 “어염(魚鹽)은 조정이 선비를 기르는 공적인 물자인데 어염에 대한 검사와 감독권은 다만 감사(監司:도지사)에게만 소속되고 그 기록이 호조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 운송을 담당하는 관리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행 동하게 됩니다. 제 생각엔 어장(漁基=어장)과 소금 가마(鹽盆=鹽釜소금가마)에 세금을 부과하고 세금납부 성적을 고적안(考績案=벼슬아치의 성적을 기록한 문서)에 기록하여 전최(殿最:지방 수령의 고과)에 반영하되 그 기준은 일정하게 평 상시 공급의 예(常供之例)를 따른다면 유생을 교육하는 아름다움(樂育之美)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은 나라나 백성들에게는 아예 해가 되는 일은 없으며 몇몇 고을의 부패한 수령들의 사적인 이익이 줄어드는 것뿐입니다.”하였다, 또 창고의 곡식이 태반이 없어진 것을 가지고 징수를 통해 채우자는 것이 조정의 의논이었지만 선생이 수령이 된 (分憂:지방수령)이후로 공적 비용은 넉넉하게 사적 지출은 절약함으로써 결국 완전하게 채우기에 이르렀다.
갑자(甲子:명종19,1564)년 정월에 승문원 교감(承文院 校勘)에 제수되고 12월에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겸 춘추관 편수관 교서관 판교(春秋館 編修官 校書館 判校)에 승진했다. 을축(乙丑1565)년 8월에 윤대비(尹大妃:문정왕후)의 국장도감(國葬都監)으로서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당하관이 당상관에 오름=加資)되어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배되었다. 병인(丙寅 1566)년 정월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지제교(知製敎).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제수되고, 10월에 진주 목사(晋州牧使)로 있던 융경 원년 정묘(丁卯:1567.隆慶은 明나라 목종의 연호)년 등극(登極:明의 황제 목종의 등극)때 조사(詔使:황제의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왔을 때 선생은 제술관(製述官)으로 부름을 받았다. 무진(戊辰:1568.선조1년)년에 병으로 귀향(歸鄕)하였다.
기사(己巳:선조2.1569)년 8월에 부동지사(副冬至使)로 북경에 갔다. 이전에는 홍려시 경(鴻臚寺卿)은 고정된 직이 아니었는데 사황제(嗣皇帝:목종을 가리킴)가 즉위하여 ‘홍려시경은 예(禮)를 관장하는 자라’고 하고 비로소 문관(文官)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신의 사적(私覿:.즉 왕이 외국사신으로부터 개인적인 예물을 받고 면회함. 여기서는 우리 사신이 임금이 보낸 개인적인 예물을 가지고 천자에게 바치고 면회함을 가리킴)은 오직 예부(禮部)에서만 하게 되어 있고 홍려시에서는 사적하지 않는 것이 전례로 되어 있는데 이때 홍려시 관리가 자기에게 사적하지 않는다고 화를 벌컥 내면서 우리나라의 순서를 뒤로 물려서 잡류(雜流)다음으로 강등 시켰다. 당시에 사신인 박근원(朴謹元1525~? )은 항의한 번 못하고 돌아온(拱黙而歸) 일이 있다. 이번 사행(使行)에서도 상사(上使:正使)와 서장관(書狀官)은 그대로 따르려고 하였는데 오직 선생만이 분개하여 역관(譯者)을 예부(禮部)로 보내서 항의 정문(呈文:하급 관청에서 상급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두 번이나 보내서 마침내 이를 바로잡았는데 서장일기(書狀日記)에 기록되지 않은 때문에 정작 임금에게는 전연 보고 되지 않았다. 후일에 사신(使臣)이 가져온 명나라 조정의 조보(皇朝 朝報)에 “조선 배신(朝鮮陪臣:제후국의 신하가 천자 앞에서 자칭하는 말)이 예를 어기고 반열의 차례를 뛰어넘었다.”라고 한 것을 보고 상(上:임금,곧 선조)이 묻기를 “어느 때의 사신이 예를 어겼느냐? 먼젓번에 간 역관이나 이번에 간 역관이나 모조리 잡아드려 국문하라”하였는데 의금부 관원들이 “이번에 간 사신들의 잘못입니다.”고, 속여서 아뢰었다. 다행하게도 상이 밝게 헤아리시고 그 연월일(年月日)을 참고하여 공조 참의 박승임(朴承任) 등이 부경(赴京)하여 예부 주사(禮部主事)에게 글을 올렸다. 그 내용에, ????본국은 동쪽에 접경(接境)해 있어서 황제의 교화(皇化)를 밀접하게 받고 있으니, 뭇 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과 같은 정성이 갈수록 더하고 식는 일이 없으며 조정(朝廷:명나라 조정)에서도 우리의 충성과 순종(忠順)을 알아주시어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특별한 예우로써 대하였습니다.
이번에 저이들(卑職)이 동지를 하례하는 표문(冬至賀表)을 높이 받들고 황제의 대궐에 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홍려시(鴻쪻寺) 관원이 저이들 일행의 반열 차례를 무직 생원(無職生員)과 설의인(褻衣人)들의 뒤로 물렸고, 또 삭망(朔望)에 조현(朝見)할 때에는 황극문(皇極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만 문 밖에서 절(行禮)하도록 하였습니다. 멀리서 온 저이들로서는 황당하여 영문을 몰랐습니다. 비로소 통사(通事:역관의 별칭)를 시켜, 은미한 간청을 집사에게 아뢰도록 하는 한편 정문(呈文)을 올려서 분변해 밝히겠다는 뜻을 품달케 했는데, 집사께서는 번거롭게 호소함을 죄주지 않으시고 특별히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내려주시는가 하면, 또 정문(呈文)을 보낼 필요 없이 해사(該司) 낭중(郞中)에게 말로 품달해도 된다고 분부하였습니다.
낭중 대인(郎中大人)도 경솔한 변역(變易)을 의아해 하고 곧바로 상서 합하(尙書閤下)에게 품의하였으며, 진하(進賀)하는 날에는 따로 하리(下吏)를 보내어 반열의 차례를 친절하고 자세하게 지시함으로써 옛날의 반열 차례대로 서도록 하였습니다. 저이들은 집사가 내려주신 은혜를 받고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옛날 규정대로 따르게 될 테니 근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망일(望日) 조현(朝見)에 홍려시가 또다시 변례(變禮)를 고집하여 극문(戟門) 밖에서 우리를 정지 시키고는 야만스런 오랑캐들과 같이 취급하여 같은 뜰에 나란히 세웠습니다. 우울하게 말없이 물러나왔지요. 조의(朝儀)를 맡은 자는 옛 헌장(憲章)을 금석처럼 굳게 따라야 합니다. 설혹 그 유폐(流弊)가 정치에 방해되어 마땅히 고쳐(加減)해야 될 경우라도 응당 상부에 아뢰어(申奏)고 황제의 결단을 재가 받아 분명하게 선포하여 널리 알림으로써 의아스러움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은 알지도 못하고 해당 부서(該部)는 의논을 거치지도 않았으며 반줄(半行)의 문자도, 한마디의 단서도 없이 갑자기 서반(序班)을 시켜 말로 떠들어대고 팔을 휘두르면서 욱박질러 선조 때 이미 정해진 옛 규정을 무너뜨리고 한번도 폐단이 없던 성법(成法)을 바꿔버렸으니,필시????저 변방의 천한 신하야 아무런 지식이 없으니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갈 일이지 어느 누가 감히 거역하랴.????여기고 마음대로 지시함으로써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조정이 외국을 접대함에 있어 그 호령 하나하나가 실로 체통과 관계되고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것이 곧 등위(等威)와 관계되는 것이거늘, 하루아침에 아무 까닭 없이 반품(班品)을 떨어뜨리고 안팎(內外)을 구분지어 격리시키니, 이 어찌 체통에 구애되고 사모하여 바라는 마음에 서운함이 없겠습니까. 우리 사왕(嗣王)은 천자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조금도 어기지 아니합니다. 배신이 북경(京師:수도)으로부터 돌아가게 되면 틀림없이 앞으로 불러내어 천자의 성수무강(聖壽無彊)하신지를 공경히 물어볼 것이고, 심지어는 진공(進貢)한 물건이 오손(汚損)되지는 않았는지, 배례(拜禮)하는 예의 절차에 실수는 없었는지, 황제 폐하의 존안을 우러러 뵙고 하사하신 잔치나 상(宴賞)은 공손히 받았는지를 모두 물어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신의 반열차례가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대정(大庭) 밖으로 내침을 당했다는 복명을 들으신다면, 반드시 놀랍고 두려운 마음에서 근심에 싸여 침식(寢食)을 편히 하시지 못하시고 장차 그 이유를 구명하시려고 황제 폐하에게 진사(陳謝)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임금(寡君)께서는 조석으로 정무(政務)가 있어 스스로 오실 수 없기에 외랍되게 저희 배신 한두 명으로 하여금 공물(貢篚)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배신(陪臣)이 비록 천한 몸이기는 하지만 실은 우리 임금(寡君)을 대신하여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마땅히 서야 될 반열을 잃고 문밖으로 내려와서 배례(拜禮)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비록 배신이 자리를 잃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임금의 수치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비록 홍려시가 배신을 강재로 축출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조정이 아무 까닭 없이 소방을 욱박질러 내쫓은 것입니다.
황조(皇朝)가 질종(秩宗: 종묘제사를 맡은 관원)의 관아를 설치하고 훌륭한 공경대부를 두어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확실하게 판정하고 있으니, 홍려시는 그저 만들어진 법(成法)대로 받들어 실행하여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개 부서(有司)일 뿐입니다. 그런데 정의(廷儀)를 한마디 말로 갑자기 혁파해버리고는 상서 합하(尙書閤下)나 낭중대인(郎中大人)의 특별하고 간곡하신 유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상쾌하게 시정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굳게 막히(固滯)어 있습니다. 미천(賤品)한 보잘것없는 생명(微命)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황조(皇朝)가 사랑스레 돌보아주시는 융숭한 뜻과 황조를 사모하는 우리 임금(寡君)의 순일한 정 성이 다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이점이 바로 저희들이 구구하게 우러러 하소하여 마지않는 까닭입니다
경오(庚午선조3.1570)년 정월(正月)에 귀국(還朝)하였다. 5월에 우승지(右丞旨)에 제수되고 10월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 되었다. 신미(辛未1571)년에 황해도 관찰사에 제배되었다 .선생은 가혹하고 각박한 종전의 규정을 다 버리고 관대한 길을 열었으며 더욱 억울함을 씻어주고 혜택을 주며 백성들을 교화하여 풍습을 바꾸어놓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고 도민을 다스렸다. 이때 선생은 고양군 원당리(高陽 圓堂里)에 있는 조부 통례공(通禮公)의 묘를 찾아 참배했으며 제문(祭文)도 있다. 통례공은 부인 유씨(柳氏)와 함께 서울 집에서 작고하였으므로 고아가 된 어린 자식들은 의탁할 데가 없어 시골에 사는 백부(伯父)와 숙부(叔父)에게 분담되어, 양육되고 장가들고 시집가게 되었다. ‘집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니 이승과 저승이 멀기도 하다’ 이는 이른바‘남에게 돌봐 달라 부탁에 무덤은 무너지고 깊은 부끄러움은 평소의 게으름이요 극심한 슬픔은 새로 밀려 오네(託人護視 馬鬣崩顚 慚深舊懶 慟劇新煎)’그것이다.
임신(壬申:1572)년 9월에 내직에 들어와 우승지가 되고 조금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만력(萬曆:明나라 神宗의 연호) 원년 계유(癸酉1573)년 정월에 도승지(都承旨)겸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 상서원 정(尙瑞院正)에 제수되고 나머지 겸직은 전례를 따랐다.
당후(堂后:승정원의 정7품인 注書,또는 그가 머물고 있는 방)에 소장된 일기(日記)에 평도공(平度公:朴訔1370~1422)의 정안(政案:관공서의 전.현직 관리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서류)이 기록된 것을 보고 선생은 후손으로서 선공(先公)의 언행을 상세하게 찾을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선생은 평도공에 대한 추모의 정성을 그만둘 수 없었다.
4월에 다시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고 9월에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선생이 영주에 살 때 퇴도 이선생(退陶 李先生:退溪李滉)을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향했는데 이때 선생은 글을 지어 제사했다.
갑술(甲戌:1574)년 2월에 경주분윤(慶州府尹)에 제수되었다. 경주의 집경전(集慶殿)에 테조(太祖:李承桂)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는데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경비(禁防:보호하기 위하여 금지하고 방비함)가 철저하지 못하였다. 선생은 깜짝 놀라 수리하고 특별히 빗장을 잠그고 엄격히 규제를 설치하니 집경전은 드디어 아늑하고 깨끗한 사당(邃穆之一淸廟)으로 바뀌었다.
수박밭(西瓜之田) 같은 것은 신라(新羅)때부터 전해왔는데 옥토가 척박한 땅으로 변한 것이 절반이나 되어서 그 폐단이 너무 크므로 다만 4분의 1만 남기는 것으로써 규정을 만들고 그 나머지 수박밭은, 곡식을 심어서 먹겠다는 백성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을해(乙亥:1575)년에 귀거래를 읊었(賦歸:사직을 의미함)으나 방백(方伯)들의 복직(還治)을 건의하는 주청(啓請)에 따라 어쩔 수없이 다시 부임하였다.
7월에 부인 권씨(權氏)가 죽자 부인을 위해 몽상(解竈: 조앙신에게 제사한다는 말인데, 부인을 위한 蒙喪을 의미한다)을 입었다.
병자(丙子:1576)년 8월에 전라 감사(全羅 監司)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체직되었다. 11월에 다시 병조참지에 제수되고 12월에 또 도승지(都承旨)에 제수되었다. 병자(丙子)년에 강계부(江界府)의 ‘회재 이선생(晦齋 李彦迪1491~1553)의사당기문(祠堂記)’을 짓기를, “선생은 동남지방의 걸출한 인물로 학문에 뛰어났으며 깊이 연구하고 힘써 실천했으며 체와 용(體用)을 두루 갖추었지만 불행하게도 운수가 비색하여 본부(府:강계부)에 유배 된지 7년 만에 객지에 묻혔지만 서쪽변방(西塞:평안도를 의미함)의 인심이 감복되어 향불을 받들 곳을 설치할 것을 원했다.”고 하였다. 이 어찌 선생에 대한 감복하는 마음이 깊지 않고야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정축(丁丑:1577)년 7월에 강화부사(江華府使)에 제수되고 9월에 여주 목사(驪州 牧使)로 전직되었다. 기묘(己卯:1579)년 가을에 어사(御使)의 지방수령 치적 실적 보고에 1등을 차지하여 표리(表裏:옷감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받았다. 또 전지가 내리기를 “이제 어사의 서계(書啓)를 보고 야 너의 시정(施政)이 간편하고 세금징수가 가벼울 뿐만 아니라 흉년에 진휼책(賑恤: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도와줌)에 있는 힘을 다한 때문에 온 고을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칭송하기를 말지 않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겨 특별히 당표리(唐表裏) 한 벌을 하사하니 너는 그렇게 알아라” 고 하였다. 임지강가에 8군데의 커다란 하천 초지(藪:草地)가 있는데, 나라에 진공(進貢)할 마(薯)를 생산하고 있었다. 전임 목사가 그 땅을 개간하여 곡식 수백 섬(斛)을 수확했다. 목사 부임 초에 그곳이 황폐해 있었고 고을 선비(邑子)들이 와서 이곳을 활용하여 공적 비용(官資)에 보태자고 권유하였지만 선생은 준엄하게 거절하였다. 위를 섬기는 선생의 근엄함이 이와 같다.
고을 백성 하나가 많은 곡식을 쌓아(積穀數千)놓고도 어머니를 배고프게 한 사람이 있었다. 선생은 직접 그 집으로 가서 그 백성을 결박하여 앉히고 불효죄를 들어서 엄하게 꾸짖고 인간의 본연성(本然之天:인간의 본성은 본시 착하여 누구나 효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여 감동 시키자 그 백성은 머리를 조아려 죄를 청하고 지난 잘못을 뼈아프게 뉘우쳤다. 선생은 그와 함께 술잔을 나누면서 그를 깨우치고 격려하였으며 뒤에 그는 효자가 되었다.
모재 김선생(慕齋 金安國1478~1543)이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로 이곳 여주의 천녕현(川寧縣)에 19년 동안 있었는데 우리 선사(先師:소고 박승임)께서는 그를 흠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이곳(여주)목사로 있는 동안 더욱 독실해져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서원(書院)을 세우고 받들었다.
선생은 증조부의 묘를 개수하고 묘갈문(墓碣文)을 쓰기를, “자손들이 못나 제대로 보살펴드리지 못하여 허물어지려고 합니다. 조상 묘 수호에 태만했던 죄를 생각하면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하였다.
경진(庚辰:1580)년 가을에 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선생은 늘 향교(鄕校)의 쇠퇴를 염려하여 이르기를, “지방관이 장부나 서류(簿書),쌀과 소금(米鹽)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풍화(風化:교육과 정치의 힘으로 민풍을 개량함)의 근본은 도외시되게 되어, 이른바 향학(鄕學)은 참으로 그 고을의 한 개 혹 덩어리(贅疣: 쓸데없는 혹 덩어리)가 되고 만다.향교 건물이 퇴락하고 잡초만 무성 한체 세월이 간다면 이야말로 도를 배우는 군자로서는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향교를 진흥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수(郡守) 이희득(李希得)이 향교를 중수하여 완비하자 선생은 그 전말을 기록하여 찬미하였다.
신사(辛巳:1581)년 8월에 춘천 부사(春川府使)에 제수되고 임오(壬午:1582)년에 병으로 체직되었는데 날씨가 추워서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자 날씨가 따스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심 정승 희수(沈喜壽:1548~1622)가 홍천(洪川) 봉고(封庫:어사나 감사가 부정이 많은 고을 원을 파면시키고 관가의 창고를 잠그는 일)의 일로 왔다가 이곳에 들러 선생에게 노자를 주자 선생은 받지 않고 물리쳤다. 심 정승이 ‘서울에서 겨울을 지나려면 준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권했지만 선생이 끝내 받지 않자 심정승은 탄복하였다.
이해 가을에 명나라 사신 황홍헌(黃洪憲)과 주경민(主敬民)이 와서 태자(皇子)탄생조문(誕生詔文)을 전달하였는데 선생이 제술관(製述官)으로 불리어갔다. 10월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이해에 선조 직제학(直提學)공의 신도비문을 찬하였다. 계미(癸未:1583)년 7월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영의정 박순(朴淳:1523~1589.)과 병조판서 이이(李珥:1536~1584)가 청의(淸議:언론)에 죄를 얻어서 사직하는 바람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몇 달 동안 의정부(黃閣 : 의정부의 별칭)가 텅텅 비고 언관(言官)들은 다 이매(魑魅: 인면수심. 도깨비.)들에게 막히어 시사(時事)에 대하여 도저히 할 래야 할 수 없는 것이 이었으므로 두 번씩이나 사직소를 올렸다. “신은 학문이 다 잊혀지고 거칠어 저(學業荒廢:공부를 계속하지 않기 때문에 알던 것도 잊어먹었다는 뜻. 학업과 학문은 같은 말임) 임금을 보좌하여 성군으로 만들 자격이 없으며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여 시의에 합당한 논의를 할 줄 모릅니다 .하물며 지금 조정(朝端:조정, 또는 판서이상의 대신)은 동료(同寅=동료)간의 화목을 잃고 사림(士林)은 소인이 득세할 염려(剝陽之虞:주역에서 剝괘는 모두가 음효요 맨 위의 한 효만 양효다.
소인이 득세한다는 뜻이다)가 있나이다.”하였는데, 위로는 임금의 위엄이 지엄하고 아래로는 공론(公論)이 아직 펼쳐지지 못하여 윤허를 받지 못했으므로 일부러 출근(就職:벼슬아치가 출근함)하여 항소(抗疏)를 올렸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나라가 흥하고 쇠하는 것이 대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수상(首相:영의정)이답지 못한 사람(匪人: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 임금이나 아비를 시해하는 사람.<주역.비>)이면 공국지화(空國之禍:임금이 좋은 정치를 펴지 못하고 신하가 좋은 보좌를 하지 못하는 나라가 겪는 재앙)이 곧 임박 하였는데 여전히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온종일 간절히 바라고 있다가 결국 ‘윤허하지 않는다(不允)’는 비답을 받고 나오니 신의 마음은 더욱 우울하고 답답하여 한번 다시 그(영상 박순을 지칭함)의 죄를 청하는 바입니다 .
순(淳)은 처음 조정에 설 때부터 지금까지 좋은 말씀 한번 아뢴 적이 없고 간사한 꾀만 늘어놓았습니다. 몸을 척리(戚里:임금의 내척과 외척)에게 의탁하여 환관들의 조롱을 받았으며 세력가들과 줄줄이 혼인을 맺어 군자의 수치거리가 되었습니다. 원로(元老)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미워하였고 옛 신하(舊臣)가 이미 오른 지위를 차지하려고 도모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 가지 허물만 있다 해도 어떻게 백관(百官)의 윗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 그는 자기의 심복 당파가 공의(公議)의 배척을 받으면 그를 붓들어 주는 일을 꾸미는데 사력(死力)을 다하고, 친한 친구가 먼 지방에 보직되면 많은 입을 번갈아 동원하여 보내지 말도록 청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의 종적이 비밀스럽지만 그 내심을 환하게 알 수 있(如見肺肝:大學에 人之視己如見其肺肝; 마치 폐와 간을 들여다보듯 남이 나를 환하게 아 는 것)으며 그의 꾀가 간사하고 교활하지만 옆 사람은 냉철하게 봅니다. 이러고도 백관의 모범이 되는 대신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이(李珥)는 문예(文藝)의 재능이 있고 성혼(成渾:1535~1598)은 재야에 명망이 있으니 그들과 깊이 사귀어 주거니 받거니 어울려서 우익을 형성 하므로써 따르는 무리들이 날로 늘어나지만 겉으로는 사제간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속으론 학문을 강론한 실적이 없습니다. 출세의 길(榮進之路)부터 먼저 열어놓고 후안무치한 무리들(無恥之類)을 꾀서 인물을 헐떧고 조정을 평론하는 자들이 모두 그의 문중에서 나왔습니다. 공론(公論)이 이미 형성된 오늘에 와서도 오히려 기탄없이 근거 없는 논의를 고무 선동하고 저희들끼리 서로 건저 주는 등,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런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한 자는 모두 박순(朴淳)이며 순의 무례함이 공론에 자주 떠오른 지는 이미 오래인데도 유독 전하께서만 아시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요즘 그가 어전에서 아뢴 내용을 보면 가슴 속에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저의 당을 힘껏 옹호하며 그 자신이 성혼의 소(渾䟽)를 증거삼아서 언관(言官)을 죄줄 것을 청하였으니 그의 간교한 계책은 사심 없는 해달의 비침(日月無私之照: 공정무사한 임금의 눈이란 뜻도 있음)에서 도망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은 또 아뢰기를 “신이 실성하여 헛소리를 하지 않는 한(病風喪心:病狂喪心의 잘못인 듯) 어떻게 무고하게 대신의 행위를 감이 공격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평상심을 가지시고 굽어 살피신다면 신등이 부득이 항론(抗論)을 편다는 사실을 반드시 환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언관(言官)이 전하의 위엄(一威之施)에 겁을 먹고 당장 항의 언론(抗論)을 중단한다면 신등에게 일신상의 이익은 되겠지만 국가와 사직을 위해서는 무슨 복이 되겠나이까? 근래(近日)에 전하의 노여움이 바야흐로 높(天怒方震)아서 대신이 배척되고 경악(經幄:경연청)에서 간쟁을 맡은 신하가 잇달아 바깥으로 내쫓겨났고 오늘에 와서는 승정원(喉舌之司:승정원의 별칭)이 일시에 혁퇴(革退)되었습니다. 이러한 실정을 목도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저의 몸에 이로운 줄 모르는 바 결코 아니지만 감히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실은 전하께서 신에게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국사의 위험을 거두고저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의 견마지성(犬馬之誠)을 살피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사심이 있다고 의심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명기(名器:벼슬자리의 다른 이름)를 욕되게 할 수 있습니까? 빨리 신의 직을 파직 하소서“하였다.
조정을 향해 억울함을 하소연안 지 열흘이 넘자 선생은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좌천되니 때는 8월이었다. 어느 선비가 한강에서 선생을 전별하면서 다음과 같은 송별시를 지어 주었다.
임금이 전호(殿虎)의 참뜻 알아주지 않는데
세상이 어찌 수주(隋珠)의 진가를 알아줄까
전호(殿虎: 왕의 실책을 집요하게 간쟁하는 신하.宋의 간의대부 劉安世의 별명이 붙혀진 고사에서 생긴 말.) 수후의 진주(隋珠:춘추시대 수나라제후가 가졌던 진주 .매우 진귀한 보물을 가리킴. 비슷한 말:화씨의 구슬(和璧).수주화벽(隋珠和璧)이라는 술어도 있다.)
을유(乙酉 )년 2월에 체직되어 귀향하였다. 수헌(睡軒) 권공(權公:이름은 五福1467~1498) 유고(遺稿:睡軒集)에 서문을 썼다. 병술(丙戌)년 정월 6일 신축(辛丑) 해시(亥時)에 영천군 반곡(榮川郡 蟠谷) 정침(正寢:거처하는 곳이 아닌, 주로 집무하는 몸채 방)에서 작고했으니 향년 70세였다. 선생은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기가 고르지 못한 듯하였는데 선생은 이날 술을 달라고 해서 많이 마시고 며칠동안 진정되어 있었는데, 그길로 부터 차츰 위독해졌다. 의원이 오면 웃으면서 말하기를, “병이 이미 위독해 졌는데 어떻게 한두 첩의 약을 먹는다고 금방 낫겠는냐?” 고 하였는데. 조금도 슬퍼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해 5월 2일 병신(丙申)에 군의 동쪽 임고(林皐)의 태좌진향(兌坐震向)의 자리에 장사 지냈는데 이날 장례에 모인 사람들이 4백여 인이었다.
삼가 퇴도 선생(退陶先生:퇴계 이황)이 지은 묘지(墓誌)를 상고해보면 다음과 같다.
“진사군(進士君:소고선생의 부친이 성균진사 였다)은 평소에 조용하고 차분 하였다.오로지 학문에 전심하고 가사(家事)엔 소흘 했으며, 숙인(淑人:소고 선생의 모친)이 근검(勤儉)으로써 유지했다. 숙인은 천성이 영명하고 현숙하였다. 진사군이 그렇게 수신(修身)하여 자기의 뜻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나 자식을 교육하여 성가(成家:그 방면에서 일가를 이룸)할 수 있었던 것은 숙인의 내조의 공이 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런 아버지와 그런 어머니가 있으면 그런 자식이 있게 마련이며 또 선조의 훌륭한 점이 모아저서 선생에게서 피어난 모양이다.
선생은 천품이 매우 고상하고 재덕(才德)이 있으며 풍골(風骨:풍채와 골격)이 잘 짜이고 이마와 눈섭(眉宇:이마와 눈섭)이 준수하게 생기고 눈빛이 가을물 처럼 반짝 이었다.소년 (羈丱:소년시절의 머리 양식.소년=羈角)시절부터 보는 사람들에게 대인의 기상이 있다고 칭송 받았으나 기가 너무 세다는 이유로 소년 시절부터 선생에게 가해지는 가정교육은 다른 형제들보다 특히 엄격하였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한결같이 탁마(淬琢:강도를 높혀 열심히 공부함)하여 글의 종지와 핵심을 파악하여 자신의 문장에 거침없이 반영하였다.
언젠가 漢城(한성=한양=서울)애 가서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시 험 과목이 난해한 삼재에 대한 대책(三才之策:天道와 地理.人事에 대해 聖 君의 정치 방도를 논술한 논문. 본서 제4권에 게재됨.三才는 天.地.人이다)이었다. 과장에 참여한 유생(章甫)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제목이어서 모두가 붓을 던지고 백지로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만은 일필휘지로 시험지를 가득히 채었는데 이론이 좋고 문장이 힘차서 마치 천길 구렁에 물이 쏟아지는 듯하여 노숙(宿艾)한 원로들도 놀라 탄복하였다.
3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모두 급제하니 연꽃과 계수나무는 영광을 다투었고 청운(靑雲)을 밟으니 모두가 신선을 바라보듯 명망이 높았지만 처신은 더욱 공순하였고 직무 수행은 더욱 정성스러웠으며, 청현지직(淸顯之職)에 있을 적에도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을 한번도 늦춘 적이 없었으므로 당시의 월조평(月朝評)에서도 그의 품제(品題)를 높혀서 국기(國器:나라를 다스릴만한 기량이 있는 사람)로 인정하였다. 명묘(明廟:명종의 묘호)가 등극하자 모후(母后:이때 모후는 문정왕후임)가 수렴청정을 하고 국구(國舅:임금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에게 태아검을 거꾸로 쥐어주고[倒持太阿:남에게 칼자루를 쥐어주었다가 도리어 그 화를 입음. 왕권의 보호를 위해서 윤원형에게 권력을 맡겼는데 윤원형은 권력을 이용하여 100여명이 살상되는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 小尹 尹元衡이 大尹 尹任을 몰아낸 士禍)를 일으켜 당쟁의 불씨를 만든 일을 비유하여 한 말임]사림을 불태울 때 일국의 명사들이 죽거나 구금되었지만 선생만이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일망타진 그물에서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선생의 근신 덕분(勤愼之效)일 것이다. 선생도 묘신의 대열(卯申之列:)엔 들어있었지만 벼슬에서 물러난 뒤로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손님을 사절하였으며 일년 내내 들어앉아 주역을 읽고 한번도 출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화근이 미치지 못한 것뿐이지 결코 구차하게 화를 면한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화려함을 거두어 실답(斂華歸實)하고 찌거기를 변화시켜 정하게 만들었(化滓爲精)으므로 덕성이 조화롭고 순수하며 가슴이 넓고 의지가 굳세며 간이 하되 진중하고 과묵하였다. 천성이 책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밥을 먹을 때는 책을 곁에 두고 보았고 아플 때는 누워서 책을 보았다. 안본 책이 거의 없었고 보았다하면 반드시 점을 찍고 줄을 쳐서 알뜰히 연구했으므로 천지 사물의 이치가 머리 속에 환했다. 젊을 적부터 시에 능하여 시흥(詩興)이 일어나서 붓을 휘두르면 줄줄이 나오는 아름다운 시구는 끊일 줄 몰랐다. 하지만 시를 짓는 재능을 자랑하기 싫어서 누각이나 정자에 시를 내건 적이 없었다. 늘그막엔 시를 짓기 싫어하여 “시는 사람을 부화하고 경박하게 만들기 때문에 절대로 시 짓기를 일삼아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낙봉(駱峰 : 申光漢의 호.企齋 또는 石仙齋라고도 함) 신상국(相國:) 광한(光漢:성종15년 -명종10년 1484-1555.양관대제학 지냄. 이름난 문장가)이 언젠가 말하기를 “후진(後進:후배)중에 오직 박모(朴某:박승임을 암시함)는 시문을 끝까지 잘 공부한다면 그 역량은 거의 헤아릴 수 없을 텐데”라고 하였다.
선생은 청빈한 생활 속에 굳게 지킨 지조(冰蘖)를 처음부터 끝까지 더럽히지 않았다. 벼슬 생활 40여 년 동안 시골 집은 허름한 집에 척박한 땅이었고 서울 생활은 여기저기 셋집을 얻어서 가난 한 살림을 꾸려갔다. 간혹 봉급(祿俸)이 좀 저축되면 즉시 서적과 바꾸었다. 천성이 본시 사치스런 풍악이나 여색에는 담담하였다. 음식에 대해서 특별하게 즐겨 먹는 것이 없었고 옷에 대해서도 특별히 좋아하는 옷이 없었으며 입에 맞으면 그뿐이요 몸에 맞으면 그뿐이었다. 선생은 늘 “우리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너무 사치하여 허비가 많다”고 한탄하였다.
선생은 평상시에 말을 빨리하거나 당황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으며 온종일 앉아 있어도 마치 소상(塑像)처럼 단정하였다. 말끔한 책상과 따스한 난로가 있고 온 벽은 온통 책으로 가득 채워졌으며 고개 숙여 글을 읽고 머리 들어 생각하면서 언제나 정중하고 공손하여 털끝만한 동요도 없었다. 마을에 집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재상 댁(宰相宅)인 줄 아무도 모를 정도로 문 앞이 조용하였다. 후생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이제 겨우 구두(句讀)를 뗄 줄 아는 사람이라도 가르쳐 주기를 청하면 친절하고 꼼꼼하게 정성을 기우려 가르쳤다.
언젠가 국풍과 초사(風騷:시경의 風과 楚辭.또는 詩文)를 뽑아서 학도들을 가르칠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여러 학자(學子=學人)들은 공연히 열흘씩, 보름씩 허비해 가면서 작시법(作詩法)을 배우고 있지만 시를 배우는 것은 실로 공자께서 말씀하신‘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장기 .바둑이라도 두는 것이 낫다(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논어.양화-”)는 수준일 뿐, 어찌 대가들(大方家)에게 가르칠 수준인가? 그러나 시를 통하여 권선징악을 배우는 것은 선왕(先王)의 교육 방법이며 운문(韻文:시문)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선유(先儒)들께서도 가르친 적이 있다 .후세의 술작(述作:저작)들이 비록 고인(古人=주로 옛 성현을 가르킴)의 순준을 따를 수는 없지만 그 원류를 찾아서 한 단계씩 올라가는 길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여러 학자들이 만약 작자의 본의(本意)를 탐구하는데 힘쓰지 않고 지엽 말단적인 문자에 구애되는 행위는 족히 취할 행위가 아니거늘 하물며 자기 단속을 게을리하고 조이 쓸고 먼지 가득한 시문이나 뒤적이며 처음 세운 계획을 저버리는 자야 말해서 무엇 하랴!‘ 밥주머니(飯囊:밥만 먹을 줄아는 바보)다’.‘ 사람 옷을 입은 짐승(牛襟: 옷을 입힌 말이나 소 .무식한 자를 비웃는 말)이다’라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힘쓸지 어다.! 그때그때 가르쳐주고 깨우쳐주기를 이와 같이 한 때문에 가까운 곳이나 먼 곳에서 찾아온 선비들이 모두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었다. 선생의 행실을 보자. 가정에서 어버이를 섬길 때는 언제나 정성과 효도를 다했으며 형제간에는 언제나 공순함과 우애를 다했으며 손님에게는 예를 갖춰 대접했으며 하인들에게는 은혜로써 어루만져 주었다.
조정에 벼슬살이할 때 친서(親書:부모에게서 온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며 대왕대비의 격문을 받들기(奉檄: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지방관을 청한데 대한 전교)를 매번 목마르게 기다리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제가 된(銜恤:부모상을 입음)뒤에 여러 번 지방관을 나갔지만 누구에게 효를 할 수 있었겠는가?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중씨(仲氏)도 고을살이를 했지만 부모봉양에 매우 군색하였다. 선생은 작란 삼아 늘 이렇게 말했다. “부모 봉양을 위해서 지방관을 자청하였는데 염치없을 것이 무엇이요? 채소류나 과일류라도 끊지 않고 대야 합니다.” 상중(喪中)에 있을 때를 보면 선생은 상례(喪禮)면이나 애도면 이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상제의 거소(廬)를 벗어나지 않았고 수질과 요대(絰帶:상제의 복색. 머리에 쓰는 질과 허리에 두르는 띠로, 짚과 삼으로 만듬)를 벗은 적이 없었으며 오직 예기(禮)만 읽었다.
장조카(宗姪)가 제사를 잘 못 모실 때는 그 태만함을 깨우쳐 주고 결점을 채워 줌으로써 제사를 궐사(廢闕)하지 않게 했으며 선려(先廬:조상 때부터 살아온 집)가 낡아서 기울자 선생은 “선인(先人:돌아간 아버지)께서 주무시던 곳이 이래서야. 차마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자비를 들여 수리하고 지붕을 이었다. 선생이 지은 선비(先妣:죽은 어머니)의 제문을 보면 글자마다 눈물이요 구절마다 슬픔이라 올빼미 같은 잔악한 사람(梟獍之徒)이라도 어버이를 사랑하는 선생의 지극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에 실수로 칼날에 손가락 하나를 다쳤는데, 다 자란 뒤에도 손가락이 다 성하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여 반드시 다른 손가락으로 흉터를 덮어서 손을 펼 때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를 언제나 한결같이 하였다. 두 형이 일찍 세상을 버렸으므로, 형수는 살림은 가난하고 자식은 많아 장가보내고 시집보낼 형편이 못되었는데 선생은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어 혼기를 놓지는 탄식을 없도록 하였다. 막내아우도 생활이 어려웠는데 선생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서 힘껏 돌보기를 끝까지 잘하였으며 나라에 대해 선생이 행한 것을 보면, 임금을 섬길 적엔 충성과 곧은 마음으로 ,백성에 대해서는 은혜와 위엄을 행하였다.
재임 시절에 비록 혁혁한 명성은 없었으나 구관(舊官:전임 관원)을 생각하는 고을 백성들의 그리운 정(去後之思=去思:재임 시절의 선정을 떠난 뒤에 생각하는 그 고을 백성들의 마음)은 늘 있었으며 선생이 돌아 가시(易簀)자 여주 백성 중엔 와서 곡하는 사람도 있었다.(선생은 여주목사를 역임했기 때문이다) 언사(言事: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여 간하는 일)엔, 보습(補拾:補闕拾遺의 줄인 말. 임금의 결점이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침)을 기약했으며 척사(斥邪:사특한 무리를 내침)엔 권세를 용납하지 않았다. 선생은 을사공신(乙巳功臣)녹훈 삭제를 청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직한 말(忠言)과 바른 의론(讜論)이 빗발치듯 일어난 지가 벌써 5개월째며 대신(大臣)이 백관들을 이끌고 전하의 면전에서 간하여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은 온 나라가 한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이니 이는 국가의 존망(存亡)이 인심의 향배(人心之向背)에 달려있지 않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직도 전하께서 굳게 닫고 계시니 실로 신들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국경지대 백성들의 고달픔을 근심하고 존왕양이(尊攘:尊王攘夷의 준말. 천자를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침. 곧 춘추대의의 핵심내용임)의 어려움을 근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안도. 함경도 양도의 국경지대의 백성들은 근래에 든 흉년으로 인하여 내지(內地)로 들어 오(流入)고 있는데 금년은 더욱 심하여 변방이 온통 텅빈곳 마저 생겨납니다. 쇄환법(刷還法:유랑민을 되돌려 보냄을 규정한 법)이 있기는 하지만 수령들이 태만해서 거행하지 아니합니다. 본도 감사에게 별도로 엄명을 내리시기를‘유랑민이 지나는 곳의 수령들은 우선 그들을 맞아 위로하고 안정을 찾도록 도와준 뒤에 가을이 되거든 도로 보내(刷還)도록 하라’고 하소서. 평안도와 황해도의 도로(道路)부근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사신들의 뒷바라지가 잦은 탓으로 피폐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또 중국 사신(天使)들을 겪게 되어 지치고 쪼들림이 더욱 심합니다. 이번에 성절사(聖節使)와 사은사(謝恩使) 두 사절을 아울러 행하신다면 더욱 지탱할 수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주문사가 사은사를 겸하도록 하소서. 우리나라가 대국을 섬기(事大)는 일은 진실로 성의를 다해야 마땅한 일이나, 만약 계속할 수 없다면 참고해서 자문(咨文:중국에 보내는 공문서)을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종이를 만드는 공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일을 관장한 부서가 1년에 봄가을로 만드는 종이의 수량은 많지 않습니다. 이번에 중국에 바칠 종이의 양은 수가 1천장이나 됩니다. 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따로 만들고 또 지방에 명하여 분담해 만들게 하신다면 그 폐단이 또한 큽니다. 진헌사(進獻使) 이기(李山+蘷)가 이미 중국의 상서주사(尙書主事)등에게 종이 만드는 어려움을 말했으므로 종이의 수량이 전에 바친 수량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견책은 없을 듯하다 하니 다시 감량을 의논하소서.“
임금이 편견을 국집 하다가 간계에 떨어진 것을 선생은 다음과 같이 간쟁하였다.
“근자에 근거 없는 말이 중외(中外)에 유포되자 공경(公卿:본래는 三公과 九卿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벼슬 높은 신하란 뜻으로 쓰임)들과 대간(臺諫)들이 반복하여 극론(極論:극단적인 논의)하다가 대권 안에까지 들어가서 간쟁하려고 하였지만 전하께서는 아래의 실정을 살피지 않으시고 더욱 굳게 고집하시니 전하께서 외부의 동요(外撓)를 이렇듯 가볍게 받아들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간사한 무리가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임금의 마음이 허와 실을 구분하지 못하여 헷갈리는 데 있는 것인데 도리어 전하께서는 그 처치가 마땅하다고 여겨서, 저들에게 선동의 기회를 열어주었으므로 조정신하들이 합사(合辭=合啓:임금에게 합동으로 아룀),교장(交章 : 임금에게 번갈아 장계를 올림)하여 전하의 잘못을 미연에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 뜻은 간절하였으며 그말은 공정하였는데도 전하께서 조금도 깨닫지 못하셨으므로 드디어 전하의 면전에서 직접 아뢰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지만 윤허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알지 못하겠나이다. 전하께서 떠도는 말에 미혹되어 두사람을 죄주려고 한 것은 무슨 일이며 중론(物論=衆論)을 굳게 거부하고 면계(面啓:임금의 면전에서 아룀)를 윤허하지 않은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앞자리가 빈 것을 꺼려하지 마시고 지척간의 하정(咫尺之下情)을 활짝 펴서 합당(得中:적중함)하게 처리하시어 사뙨 논의들이 전하의 신비한 교화(神化:임금의 좋은 정치로 인하여 백성이 교화됨) 안에서 절로 사라지도록 하신다면 종묘사직을 위하여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영정대왕(榮靖大王:仁宗의 존호) 즉위 초에 십점소(十漸疏)를 올려 순 임금을 따르라고 경계한 뜻이었는데 대략에 이르기를,“이제 새로 보위에 오르사 한 나라를 향유하시니 앞으론 조종(朝宗)의 어렵고도 큰 대통(祖宗艱大之緖)을 이으시고 뒤로는 만세토록 다함이 없는 업적(萬世無彊之業)을 연 것입니다. 위에는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세상이 있고 사랑해야할 백성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을 두려워한 임금은 나라를 보존했고 방종한 임금은 나라를 뒤 엎었습니다 .막중한 그릇(重器: 정권,또는 나라를 가리킴)이 하루아침에 전하의 손으로 들어왔으니 그 맡으심이 더없이 크고 그 책임이 더없이 어려우며 힘쓸 일이 더없이 번거롭고 그 근심됨이 더없이 깊습니다. 신은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실 줄을! 장차 헛된 것을 숭상하고 먼 것을 추구(崇虛騖遠)하다가 변란이 어지럽게 생겨, 나라(邦家:임금의 邦과 大夫의 家)를 문란(板蕩:국정이 문란함. 판과 탕은 시경의 편명)하게 하시렵니까? 아니면 우유부단하고 게을러(委靡怠惰)서 구습을 못 버리고 현실에 안주(因循姑息)하다가 스스로 멸망을 감수하시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끝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전적으로 시작에 달려있는 법이거늘 하물며 전하께서는 저렇듯 책임이 막중하신데 시작을 이렇게 조심하지 않고 계시니 그 나중이 잘될 리가 행여 있겠나이까? 비록 성신(聖神)의 성헌(成憲)이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것이라서 변경하거나 분란 스럽게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태평한 날들이 오래되어 습관에 익숙하고 폐단을 즐기게 되면 또한 답습[因循]하고 안주[姑息]하는 폐단을 완전하게 제거하기 어렵게 됩니다. 당저(當宁)께서 등극하신 지가 이미 몇 개월이 되었는데, 아직도 함양(涵養)의 공부를 미루어 넓히고 책려(策勵)하는 방도를 강구하여, 구방(舊邦)을 새롭게 하려고 생각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전하께서 양암(諒闇)하시던 초기에 차라리 애척(哀戚)을 중도에 지나치게 할지언정 명계(命戒) 같은 여사(餘事)에는 겨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니, 이는 나라가 나라가 되는 것[國之爲國]은 그 주인이 있기 때문이요, 인군의 몸은 필부(匹夫)와 다르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더구나 잠시의 느긋함이 혹여 만세의 근심을 끼칠 수 있고 호리(毫釐)의 차이가 반드시 천리(千里)의 어긋남을 초래하는 것처럼 근본을 단정히 할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되고 규모를 결정하는 것이 마땅히 조기에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이겠습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와 정사를 하는 초기에 마땅히 거행해야 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사세(事勢)의 경중(輕重)과 폐단이 쌓인 원위(源委)의 천심(深淺)에 대해서는 또 언관(言官)이 집어내고 추론해 주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신들이 전하를 위하여 계책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호오(好惡)를 마땅히 살펴야 하는 것은 소인의 도가 자라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인재를 마땅히 등용해야 하는 것은 조정[國]을 공허하게 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궁금(宮禁)을 마땅히 엄하게 해야 하는 것은 정사가 다양한 경로로 나오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기강(紀綱)을 마땅히 세워야 하는 것은 스러져서 진작되지 못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절의(節義)를 마땅히 숭상해야 하는 것은 사풍(士風)을 훼손시키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염치(廉恥)를 마땅히 권면해야 하는 것은 상하(上下)가 이익만을 추구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언로(言路)를 마땅히 넓혀야 하는 것은 인주(人主)가 고립(孤立)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상벌(賞罰)을 마땅히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은 정령(政令)이 전도(顚倒)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사치를 마땅히 억제해야 하는 것은 민력(民力)이 헛되이 고갈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무비(武備)를 마땅히 정비해야 하는 것은 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이 열 가지는 모두 시무(時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근본은 또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여 출치(出治)의 근원을 맑게 하고 도학(道學)을 밝혀서 왕화(王化)의 머리를 성대하게 여시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이 두 가지를 먼저 힘쓰고 겸하여 열 가지 조짐의 폐단을 막은 연후에야 전하께서 전대를 잇고 후대를 열어주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실제에 본말(本末)이 모두 극진하고 표리(表裏)가 서로 닦여질 것입니다.
신들이 심술을 바르게 하는 것을 시작을 바르게 하는 첫머리로 삼은 것은, 대개 국가의 근본은 일신(一身)에 달려 있고 일신의 근본은 또 일심(一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일심이 바르면 일신이 바르게 되니, 집안과 국가가 감히 한결같이 바르게 되지 않을 수 없고, 일심이 바르지 못하면 일신조차도 바르게 될 수가 없으니, 하물며 집안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바르게 할 것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바르게 하는 방도는 애초에 매우 높고 지극히 어려운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하늘이 부여한 처음 상태를 따르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한 치 마음속을 허령(虛靈)하게 하여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 하늘이 애초에 나에게 부여한 명덕(明德)이니, 발(發)하지 않았을 때는 중(中)하고 발하고 나서는 화(和)하여 겉으로 드러난 것이 수연(粹然)히 하나같이 바른 것에서 나오므로 일신과 가국이 절로 바른 것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위미(危微)한 즈음에는 쉽게 가려지고 구애되는 바람에 끝내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저 천리(天理)의 공연함을 이겨서, 지극히 밝고 지극히 바른 본원(本原)이 하루아침에 흙이나 돌처럼 굳어져서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니, 그 밖의 일은 미루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군이 된 자가 그 나라를 바르게 하려고 해도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서 하루에도 만 가지[萬幾]나 되는 바람에 그 호번(浩繁)함을 감당할 수 없고, 그 집안을 바르게 하려고 해도 집안이 친하고 정이 우세하여 은혜가 의리를 가리는 바람에 쉽게 설만(褻慢)한 지경에 이르게 되니, 이미 바르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끝내 바름을 얻을 때가 없게 됩니다. 오직 흐리게 만드는 먼지를 제거하고 한 조각의 본체를 드러내어,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지키며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방정하게 하여, 느껴서 통하고 움직여서 변화하게 하는 묘용(妙用)으로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느라[風動草偃교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구중(九重)의 깊은 궁궐에 거처하시기에 그 음성과 기색을 한 번도 외인의 이목에 접하게 하신 적이 없으시니, 엿보아 추측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한 번 호령(號令)하고 한 번 정교(政敎)를 내리는 사이에 이미 전하의 심술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오히려 다시 옥루(屋漏남에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를 소홀히 할 수 있고 한거(閑居)에 방종(放縱)할 수 있다고 여기시고, 스스로 다스리는 것을 게을리 하신다면, 지난날 더러 다 바로잡지 못했던 심술이 마침내 끊어지고 막혀서, 삿되고 부정한 것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들이 전하께서 먼저 심술을 바르게 하여 다스림이 나오는 근원을 맑게 하시고 특히 근독(謹獨)의 공부에 정성을 쏟으시게 하려는 이유입니다.
도학(道學)을 밝히는 것을 시작을 바르게 하는 첫머리로 삼은 것은, 대개 하늘에서 나온 도의 큰 근원과 자기에게 구비된 도의 실체가 곧 인륜(人倫)과 일용사물(日用事物)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이(理)로서, 잠깐 동안이나 다급한 중에도 떨어질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오직 이 몸이 솔성(率性)의 그릇이 되고 이 도가 교민(敎民)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한 사람이?
2. 조선국 고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겸 지재교 소고선생 행장 [朝鮮國 故 通政大夫 司諫院 大司諫 兼 知製敎 嘯皐 朴先生 行狀] 門人(문인) - 任屹(임흘) 撰(찬) -
선생의 성(姓)은 박(朴)씨요 휘(諱) 는 승임(承任)이다.자(字:어릴 적에 짓는 또 하나의 이름, 장가든 뒤에는 본이름 대신 자를 불렀다)는 중보(重甫)며, 본관은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이다.
고려 때 급제한 휘 의(宜)가 바로 선생의 비조(鼻祖=시조)다. 고려말에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을 지낸 휘 상충(尙衷:1332년~1375년)은 북원(北元)을 섬기야 한다는 주장에 맞서 대의(大義)를 내세워 이를 꺾으려다가 마침내 유배 도중에 죽었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휘 규(葵?~1437,세종19)는 선생의 고조가 되며 증조인 휘 병균(秉鈞)은 사온서령(司醞署令)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되었고 증조비 유씨(柳氏)는 숙인(淑人)에 증직되었다. 조부인 휘 숙(塾+石)은 충의위 부사직(忠義衛副司直)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증직되었고, 조모 구씨(具氏)는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형(珩)은 성균진사 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니 이렇게 삼대가 추증된 것은 선생이 귀하게 된 때문이다.
영천(榮川:영주의 옛 이름)에 우거하여 살게 된 것은 공의 아버지 참판공 때부터 였다 .공(公:참판공)이야말로 영주의 숨은 군자다 .어머니는 예안김씨 (禮安 金氏)인데 곧 가선대부 호조참판 김로(金輅)의 후손으로 벼슬하지 않고 마을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순후한 장자로 지칭 받는 김만일(金萬鎰)의 따님인데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정부인은 정덕(正德)12년 정축(丁丑:중종12년 1517) 11월19일 인시(寅時:새벽3시- 5시 사이)영주의 두서리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나자 총명하였고 점점 자라남에 재능이 출중하였다. 언젠가 훈장에게 사략(史略)을 배우는데 “무왕이 주임금을 치다(武王伐紂)”라는 대목에 이르자 질문하기를 "무왕이 천하를 위해 한 사나이를 쳤다면 어찌하여 은(殷)나라 종실(宗室)중에서 미자(微子) 같은 사람을 골라서 천자로 세우지 않고 스스로 은나라를 취한단 말이요?“라고 말하여 듣는 사람들을 누구나 놀랍고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겨우 14세에 재능이 활짝 피어서 시험에 응시코자 하였지만 아버지 참판공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啓)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가정 19년 경자(庚子:중종35년 1540)년 봄에 사마시(司馬試)의 두 차례 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또 문과(文科)에 응시, 병과(丙科:과거 시혐 합격의 세번째 합격 그뤂)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정자(權知 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중씨(仲氏) 승간(承侃)도 함께 급제하였는데 선생은 회시(會試)에 서 갑과로 급제한 때문에 판서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1491~1570)이 아버지 참판공 에게 편지로 축하하기를 “형제간에 나란히 같은 방(榜:과거합격자명단)에 기록되고 여려 선비 중에 으뜸으로 크게 이겼으니 이는 국조(國朝)이래로 전에 없던 큰 경사인데 마침내 병과(丙科)의 대열을 스스로 선택하고 장원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하였다.
임인(壬寅 중종37년1542)년에 예문관 검열 (藝文館檢閱)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보선(補選)되었고 이해 시월(十月)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겼다. 갑진(甲辰:1544)년 오월(五月)엔 선교랑(宣敎郞)으로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겸 경연 전경(經筵 典經)에 임명되어 호당(湖堂=독서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함으로써 학업 연마에 더욱 정진하였다. 을사(乙巳:1545)년 2월에 형편대로 따르기를 청하는(從權:원칙을 접소 방편을 행사함. 생전에 왕권을 물려주는 것은 원칙은 아니며 부득이한 형편에 따르는 것임) 상소를 올리기를,
“지금 성체(聖體:임금의 몸, 仁宗을 가리킴)가 오랫동안 상하셨고 기맥(氣脈)이 이미 병드셨다는 둥 진맥한 의원이 밖에 나와 하는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지경이오며 종묘 제사 때 천안(天顔=용안)을 직접 본 신료들은 모두 아연실색 하여 눈물을 글썽이면서 서로 바라보는 실정이며 조정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결코 일적인 간절한 정의에 구애되어 선왕께서 물려주신 중대한 보위를 가볍게 생각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감히 형편에 따르자는 청을 고집한 것이오며, 여려날 동안 간절하게 아뢰자 유음(兪音:신하의 아룀에 대한 임금의 하답)을 비로소 내려 주셨으며 조정이나 지방이나 모두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실지로 따르셨다는 말씀은 듣지 못했습니다. 소문은 이미 전해졌는데 겉으로는 받아들였음을 보이시고 속으론 의견을 고집하심은 작은 일이라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거늘 하물며 국가가 관련 된 그만둘 수 없는 일이겠나이까? 만약 아직도 그 중요도를 알지 못해서 잘못 처리한 것이라면 어찌 정의(情意)가 미덥지 못하다는 혐의뿐이겠나이까? 용납될 수 없는 후회가 뒤따를 것입니다. 저로서는 대왕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하였다.
중종대왕은 갑진(甲辰)년 동짓달에 승하하셨다. 인종대왕(仁宗大王)의 효성은 어찌나 지극한지 부왕의 병을 간호하는 동안 몹시 애를 태웠으며 상중에서 애도가 지나쳐서 옥체가 너무도 수척하였으므로 서울이나 지방할 것 없이 걱정이 태산이었다. 보다 못한 대신들이 방편을 따라 처리(從權)할 것을 애써 청하기 위해 백관들을 거느리고 가서 극구 진언하였으므로 선생이 이 소를 올린 것이다.
유월(六月) 달에 저작(著作:저작랑)겸 경연(經筵)설경(說經:경연청의 정8품 벼슬)에 제수되고 이해 칠월(七月)에 봉훈랑(奉訓郞)의 품계에 올라, 박사(博士) 겸경연사경(司經:경연처의 정7품 벼슬)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이어서 수찬 지제교 겸경연 검토관(修撰 知製敎 兼經筵檢討官)에 제수되고 승의랑(承議郞)의 품계에 올라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다.
병오(丙午:명종1,1546)년 정월에 조사(詔使:명나라 사신)가 왔을 때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옷 한 벌을 받아와서 어머니에게 바치면서 말하기를, “선물 받은 옷인데 마음 같아서는 즉시 돌려주고 싶었지만 동료들은 사양하지 않는데 유독 저만 거절하기가 형편상 난처한 때문에 할 수 없이 뜻을 굽히고 받아왔습니다.” 하였다. 삼월(三月)에 조산대부(朝散大夫)의 품계에 올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이때 권간(權奸:권세를 가진 간신) 진복창(陳復昌).이기(李芑)가 몰래 권력에 아부하여 세력을 휘두르니 그세력의 불꽃이 하늘을 달구었지만 선생은 더욱 꿋꿋하고 확실하게 자신을 지키었다. 사람들이 간혹 처변지도(處變之道:변하는 상황에 잘 대처하는 방법, 곧 그들과 친 하는 것)를 권하고, 그들 권신 또한 한패가 될 것을 부추겼지만 일체 응답하지 않았다. 복창이 관북(關北)으로 출사(出使)할 적에 만조백관들이 모두 물결처럼 문밖까지 몰려나가 앞 다투어 전송했지만 선생은 철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으므로 복창이 감정을 품고 크게 별렀다.
선생이 전랑(銓郞;전조의 낭관, 특히 이조 전랑)으로 있을 적에 동료가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을 이조에 천거했는데 선생은 동의하지 않았다. 선생이 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 벼슬)으로 있을 적에 복창(復昌)이 사헌부 대사헌이었는데 선생의 강직성을 매우 미워하였으며 선생 또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를 탄핵하려고 하다가 동료들의 만류로 뜻대로 하지 못하고 즉시 이고(移告)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창(昌:진복창)과 기(芑:이기)가 또 죄를 얽으려고 하였는데 기의 조카 원록이 적극적으로 말린 까닭에 겨우 면하고 체직(遞職)되는데 그쳤다.
오월(五月)달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고 6월에 직강(直講)에 제수되었으며 이달에 다시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무신(戊申:명종3,1548)년 10월에 내간상(內憂:어머니 상)을 당하고 기유(己酉1549)년 6월에 외간상(外憂: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신해(辛亥1551)년에 3년 상을 마치고 팔월(八月)에 현풍 현감(玄風縣監)이 되었는데 전임 현감이 자리를 비웠고 창고가 고갈되었지만 담담하게 처리하여 마땅한 조처를 하여 수년에 걸처 대개 다 채웠다. 균등한 부담을 싫어한 토호들이 황당한 말을 꾸며 감사 정언각(鄭彦慤)에게 청하여 선생을 밀어제치려고 하였으나 끝내는 공론의 저지를 받아서 그들의 간계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정사(丁巳:명종12,1557)년 정월에 봉열대부(奉列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직강(直講)에 제수되었다. 7월에 중훈대부(中訓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사예(司藝:성균관의 정4품 벼슬)가 되었고 이달에 특별히 경상도 재상어사(災傷御史)에 제수되었다.
무오(戊午1558)년 2월에 통훈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다시 사에(司藝)에 제수되었다. 12월에 풍기 군수에 제수되었는데 풍기는 죽령(竹嶺) 밑에 위치하므로 종전부터 풍기에 부임하는 자는 미신을 믿고 공연히 새재(鳥嶺)를 넘어서 갔던 것인데 유독 선생만이 백운동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직행하여 문성공 회헌 안선생(文成公 晦軒 安先生; 회헌은 안향의 호)을 봉심하였다. 동방 도학(道學:성리학)은 회헌 (晦軒:安珦(裕)1243~1306)이 시작한 것이며 서원(書院)의 성립도 여기서 비롯되었으므로 선생은 더욱 존숭하여 서원에 자주 들러 제생(諸生)들을 講授(講授:講義)하였으며 건물의 미비된 곳을 찾아 수리하고 마손된 회헌의 영정(影幀:초상화)도 조정에 요청하여 다시 손질해서 경건하게 걸어두었다. 원수 (院需:서원운영에 필요한 물자)를 맡은 어염관(魚鹽官)이 태만해서 규정대로 행하지 않은 탓으로 유생이 쓰는 물자(儒供)가 고갈되자 호조(戶曹)에 글을 올리기를 “어염(魚鹽)은 조정이 선비를 기르는 공적인 물자인데 어염에 대한 검사와 감독권은 다만 감사(監司:도지사)에게만 소속되고 그 기록이 호조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 운송을 담당하는 관리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행 동하게 됩니다. 제 생각엔 어장(漁基=어장)과 소금 가마(鹽盆=鹽釜소금가마)에 세금을 부과하고 세금납부 성적을 고적안(考績案=벼슬아치의 성적을 기록한 문서)에 기록하여 전최(殿最:지방 수령의 고과)에 반영하되 그 기준은 일정하게 평 상시 공급의 예(常供之例)를 따른다면 유생을 교육하는 아름다움(樂育之美)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은 나라나 백성들에게는 아예 해가 되는 일은 없으며 몇몇 고을의 부패한 수령들의 사적인 이익이 줄어드는 것뿐입니다.”하였다, 또 창고의 곡식이 태반이 없어진 것을 가지고 징수를 통해 채우자는 것이 조정의 의논이었지만 선생이 수령이 된 (分憂:지방수령)이후로 공적 비용은 넉넉하게 사적 지출은 절약함으로써 결국 완전하게 채우기에 이르렀다.
갑자(甲子:명종19,1564)년 정월에 승문원 교감(承文院 校勘)에 제수되고 12월에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겸 춘추관 편수관 교서관 판교(春秋館 編修官 校書館 判校)에 승진했다. 을축(乙丑1565)년 8월에 윤대비(尹大妃:문정왕후)의 국장도감(國葬都監)으로서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당하관이 당상관에 오름=加資)되어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배되었다. 병인(丙寅 1566)년 정월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지제교(知製敎).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제수되고, 10월에 진주 목사(晋州牧使)로 있던 융경 원년 정묘(丁卯:1567.隆慶은 明나라 목종의 연호)년 등극(登極:明의 황제 목종의 등극)때 조사(詔使:황제의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왔을 때 선생은 제술관(製述官)으로 부름을 받았다. 무진(戊辰:1568.선조1년)년에 병으로 귀향(歸鄕)하였다.
기사(己巳:선조2.1569)년 8월에 부동지사(副冬至使)로 북경에 갔다. 이전에는 홍려시 경(鴻臚寺卿)은 고정된 직이 아니었는데 사황제(嗣皇帝:목종을 가리킴)가 즉위하여 ‘홍려시경은 예(禮)를 관장하는 자라’고 하고 비로소 문관(文官)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신의 사적(私覿:.즉 왕이 외국사신으로부터 개인적인 예물을 받고 면회함. 여기서는 우리 사신이 임금이 보낸 개인적인 예물을 가지고 천자에게 바치고 면회함을 가리킴)은 오직 예부(禮部)에서만 하게 되어 있고 홍려시에서는 사적하지 않는 것이 전례로 되어 있는데 이때 홍려시 관리가 자기에게 사적하지 않는다고 화를 벌컥 내면서 우리나라의 순서를 뒤로 물려서 잡류(雜流)다음으로 강등 시켰다. 당시에 사신인 박근원(朴謹元1525~? )은 항의한 번 못하고 돌아온(拱黙而歸) 일이 있다. 이번 사행(使行)에서도 상사(上使:正使)와 서장관(書狀官)은 그대로 따르려고 하였는데 오직 선생만이 분개하여 역관(譯者)을 예부(禮部)로 보내서 항의 정문(呈文:하급 관청에서 상급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두 번이나 보내서 마침내 이를 바로잡았는데 서장일기(書狀日記)에 기록되지 않은 때문에 정작 임금에게는 전연 보고 되지 않았다. 후일에 사신(使臣)이 가져온 명나라 조정의 조보(皇朝 朝報)에 “조선 배신(朝鮮陪臣:제후국의 신하가 천자 앞에서 자칭하는 말)이 예를 어기고 반열의 차례를 뛰어넘었다.”라고 한 것을 보고 상(上:임금,곧 선조)이 묻기를 “어느 때의 사신이 예를 어겼느냐? 먼젓번에 간 역관이나 이번에 간 역관이나 모조리 잡아드려 국문하라”하였는데 의금부 관원들이 “이번에 간 사신들의 잘못입니다.”고, 속여서 아뢰었다. 다행하게도 상이 밝게 헤아리시고 그 연월일(年月日)을 참고하여 공조 참의 박승임(朴承任) 등이 부경(赴京)하여 예부 주사(禮部主事)에게 글을 올렸다. 그 내용에, ????본국은 동쪽에 접경(接境)해 있어서 황제의 교화(皇化)를 밀접하게 받고 있으니, 뭇 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과 같은 정성이 갈수록 더하고 식는 일이 없으며 조정(朝廷:명나라 조정)에서도 우리의 충성과 순종(忠順)을 알아주시어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특별한 예우로써 대하였습니다.
이번에 저이들(卑職)이 동지를 하례하는 표문(冬至賀表)을 높이 받들고 황제의 대궐에 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홍려시(鴻쪻寺) 관원이 저이들 일행의 반열 차례를 무직 생원(無職生員)과 설의인(褻衣人)들의 뒤로 물렸고, 또 삭망(朔望)에 조현(朝見)할 때에는 황극문(皇極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만 문 밖에서 절(行禮)하도록 하였습니다. 멀리서 온 저이들로서는 황당하여 영문을 몰랐습니다. 비로소 통사(通事:역관의 별칭)를 시켜, 은미한 간청을 집사에게 아뢰도록 하는 한편 정문(呈文)을 올려서 분변해 밝히겠다는 뜻을 품달케 했는데, 집사께서는 번거롭게 호소함을 죄주지 않으시고 특별히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내려주시는가 하면, 또 정문(呈文)을 보낼 필요 없이 해사(該司) 낭중(郞中)에게 말로 품달해도 된다고 분부하였습니다.
낭중 대인(郎中大人)도 경솔한 변역(變易)을 의아해 하고 곧바로 상서 합하(尙書閤下)에게 품의하였으며, 진하(進賀)하는 날에는 따로 하리(下吏)를 보내어 반열의 차례를 친절하고 자세하게 지시함으로써 옛날의 반열 차례대로 서도록 하였습니다. 저이들은 집사가 내려주신 은혜를 받고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옛날 규정대로 따르게 될 테니 근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망일(望日) 조현(朝見)에 홍려시가 또다시 변례(變禮)를 고집하여 극문(戟門) 밖에서 우리를 정지 시키고는 야만스런 오랑캐들과 같이 취급하여 같은 뜰에 나란히 세웠습니다. 우울하게 말없이 물러나왔지요. 조의(朝儀)를 맡은 자는 옛 헌장(憲章)을 금석처럼 굳게 따라야 합니다. 설혹 그 유폐(流弊)가 정치에 방해되어 마땅히 고쳐(加減)해야 될 경우라도 응당 상부에 아뢰어(申奏)고 황제의 결단을 재가 받아 분명하게 선포하여 널리 알림으로써 의아스러움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은 알지도 못하고 해당 부서(該部)는 의논을 거치지도 않았으며 반줄(半行)의 문자도, 한마디의 단서도 없이 갑자기 서반(序班)을 시켜 말로 떠들어대고 팔을 휘두르면서 욱박질러 선조 때 이미 정해진 옛 규정을 무너뜨리고 한번도 폐단이 없던 성법(成法)을 바꿔버렸으니,필시????저 변방의 천한 신하야 아무런 지식이 없으니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갈 일이지 어느 누가 감히 거역하랴.????여기고 마음대로 지시함으로써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조정이 외국을 접대함에 있어 그 호령 하나하나가 실로 체통과 관계되고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것이 곧 등위(等威)와 관계되는 것이거늘, 하루아침에 아무 까닭 없이 반품(班品)을 떨어뜨리고 안팎(內外)을 구분지어 격리시키니, 이 어찌 체통에 구애되고 사모하여 바라는 마음에 서운함이 없겠습니까. 우리 사왕(嗣王)은 천자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조금도 어기지 아니합니다. 배신이 북경(京師:수도)으로부터 돌아가게 되면 틀림없이 앞으로 불러내어 천자의 성수무강(聖壽無彊)하신지를 공경히 물어볼 것이고, 심지어는 진공(進貢)한 물건이 오손(汚損)되지는 않았는지, 배례(拜禮)하는 예의 절차에 실수는 없었는지, 황제 폐하의 존안을 우러러 뵙고 하사하신 잔치나 상(宴賞)은 공손히 받았는지를 모두 물어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신의 반열차례가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대정(大庭) 밖으로 내침을 당했다는 복명을 들으신다면, 반드시 놀랍고 두려운 마음에서 근심에 싸여 침식(寢食)을 편히 하시지 못하시고 장차 그 이유를 구명하시려고 황제 폐하에게 진사(陳謝)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임금(寡君)께서는 조석으로 정무(政務)가 있어 스스로 오실 수 없기에 외랍되게 저희 배신 한두 명으로 하여금 공물(貢篚)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배신(陪臣)이 비록 천한 몸이기는 하지만 실은 우리 임금(寡君)을 대신하여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마땅히 서야 될 반열을 잃고 문밖으로 내려와서 배례(拜禮)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비록 배신이 자리를 잃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임금의 수치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비록 홍려시가 배신을 강재로 축출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조정이 아무 까닭 없이 소방을 욱박질러 내쫓은 것입니다.
황조(皇朝)가 질종(秩宗: 종묘제사를 맡은 관원)의 관아를 설치하고 훌륭한 공경대부를 두어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확실하게 판정하고 있으니, 홍려시는 그저 만들어진 법(成法)대로 받들어 실행하여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개 부서(有司)일 뿐입니다. 그런데 정의(廷儀)를 한마디 말로 갑자기 혁파해버리고는 상서 합하(尙書閤下)나 낭중대인(郎中大人)의 특별하고 간곡하신 유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상쾌하게 시정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굳게 막히(固滯)어 있습니다. 미천(賤品)한 보잘것없는 생명(微命)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황조(皇朝)가 사랑스레 돌보아주시는 융숭한 뜻과 황조를 사모하는 우리 임금(寡君)의 순일한 정 성이 다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이점이 바로 저희들이 구구하게 우러러 하소하여 마지않는 까닭입니다
경오(庚午선조3.1570)년 정월(正月)에 귀국(還朝)하였다. 5월에 우승지(右丞旨)에 제수되고 10월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 되었다. 신미(辛未1571)년에 황해도 관찰사에 제배되었다 .선생은 가혹하고 각박한 종전의 규정을 다 버리고 관대한 길을 열었으며 더욱 억울함을 씻어주고 혜택을 주며 백성들을 교화하여 풍습을 바꾸어놓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고 도민을 다스렸다. 이때 선생은 고양군 원당리(高陽 圓堂里)에 있는 조부 통례공(通禮公)의 묘를 찾아 참배했으며 제문(祭文)도 있다. 통례공은 부인 유씨(柳氏)와 함께 서울 집에서 작고하였으므로 고아가 된 어린 자식들은 의탁할 데가 없어 시골에 사는 백부(伯父)와 숙부(叔父)에게 분담되어, 양육되고 장가들고 시집가게 되었다. ‘집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니 이승과 저승이 멀기도 하다’ 이는 이른바‘남에게 돌봐 달라 부탁에 무덤은 무너지고 깊은 부끄러움은 평소의 게으름이요 극심한 슬픔은 새로 밀려 오네(託人護視 馬鬣崩顚 慚深舊懶 慟劇新煎)’그것이다.
임신(壬申:1572)년 9월에 내직에 들어와 우승지가 되고 조금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만력(萬曆:明나라 神宗의 연호) 원년 계유(癸酉1573)년 정월에 도승지(都承旨)겸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 상서원 정(尙瑞院正)에 제수되고 나머지 겸직은 전례를 따랐다.
당후(堂后:승정원의 정7품인 注書,또는 그가 머물고 있는 방)에 소장된 일기(日記)에 평도공(平度公:朴訔1370~1422)의 정안(政案:관공서의 전.현직 관리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서류)이 기록된 것을 보고 선생은 후손으로서 선공(先公)의 언행을 상세하게 찾을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선생은 평도공에 대한 추모의 정성을 그만둘 수 없었다.
4월에 다시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고 9월에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선생이 영주에 살 때 퇴도 이선생(退陶 李先生:退溪李滉)을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향했는데 이때 선생은 글을 지어 제사했다.
갑술(甲戌:1574)년 2월에 경주분윤(慶州府尹)에 제수되었다. 경주의 집경전(集慶殿)에 테조(太祖:李承桂)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는데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경비(禁防:보호하기 위하여 금지하고 방비함)가 철저하지 못하였다. 선생은 깜짝 놀라 수리하고 특별히 빗장을 잠그고 엄격히 규제를 설치하니 집경전은 드디어 아늑하고 깨끗한 사당(邃穆之一淸廟)으로 바뀌었다.
수박밭(西瓜之田) 같은 것은 신라(新羅)때부터 전해왔는데 옥토가 척박한 땅으로 변한 것이 절반이나 되어서 그 폐단이 너무 크므로 다만 4분의 1만 남기는 것으로써 규정을 만들고 그 나머지 수박밭은, 곡식을 심어서 먹겠다는 백성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을해(乙亥:1575)년에 귀거래를 읊었(賦歸:사직을 의미함)으나 방백(方伯)들의 복직(還治)을 건의하는 주청(啓請)에 따라 어쩔 수없이 다시 부임하였다.
7월에 부인 권씨(權氏)가 죽자 부인을 위해 몽상(解竈: 조앙신에게 제사한다는 말인데, 부인을 위한 蒙喪을 의미한다)을 입었다.
병자(丙子:1576)년 8월에 전라 감사(全羅 監司)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체직되었다. 11월에 다시 병조참지에 제수되고 12월에 또 도승지(都承旨)에 제수되었다. 병자(丙子)년에 강계부(江界府)의 ‘회재 이선생(晦齋 李彦迪1491~1553)의사당기문(祠堂記)’을 짓기를, “선생은 동남지방의 걸출한 인물로 학문에 뛰어났으며 깊이 연구하고 힘써 실천했으며 체와 용(體用)을 두루 갖추었지만 불행하게도 운수가 비색하여 본부(府:강계부)에 유배 된지 7년 만에 객지에 묻혔지만 서쪽변방(西塞:평안도를 의미함)의 인심이 감복되어 향불을 받들 곳을 설치할 것을 원했다.”고 하였다. 이 어찌 선생에 대한 감복하는 마음이 깊지 않고야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정축(丁丑:1577)년 7월에 강화부사(江華府使)에 제수되고 9월에 여주 목사(驪州 牧使)로 전직되었다. 기묘(己卯:1579)년 가을에 어사(御使)의 지방수령 치적 실적 보고에 1등을 차지하여 표리(表裏:옷감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받았다. 또 전지가 내리기를 “이제 어사의 서계(書啓)를 보고 야 너의 시정(施政)이 간편하고 세금징수가 가벼울 뿐만 아니라 흉년에 진휼책(賑恤: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도와줌)에 있는 힘을 다한 때문에 온 고을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칭송하기를 말지 않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겨 특별히 당표리(唐表裏) 한 벌을 하사하니 너는 그렇게 알아라” 고 하였다. 임지강가에 8군데의 커다란 하천 초지(藪:草地)가 있는데, 나라에 진공(進貢)할 마(薯)를 생산하고 있었다. 전임 목사가 그 땅을 개간하여 곡식 수백 섬(斛)을 수확했다. 목사 부임 초에 그곳이 황폐해 있었고 고을 선비(邑子)들이 와서 이곳을 활용하여 공적 비용(官資)에 보태자고 권유하였지만 선생은 준엄하게 거절하였다. 위를 섬기는 선생의 근엄함이 이와 같다.
고을 백성 하나가 많은 곡식을 쌓아(積穀數千)놓고도 어머니를 배고프게 한 사람이 있었다. 선생은 직접 그 집으로 가서 그 백성을 결박하여 앉히고 불효죄를 들어서 엄하게 꾸짖고 인간의 본연성(本然之天:인간의 본성은 본시 착하여 누구나 효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여 감동 시키자 그 백성은 머리를 조아려 죄를 청하고 지난 잘못을 뼈아프게 뉘우쳤다. 선생은 그와 함께 술잔을 나누면서 그를 깨우치고 격려하였으며 뒤에 그는 효자가 되었다.
모재 김선생(慕齋 金安國1478~1543)이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로 이곳 여주의 천녕현(川寧縣)에 19년 동안 있었는데 우리 선사(先師:소고 박승임)께서는 그를 흠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이곳(여주)목사로 있는 동안 더욱 독실해져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서원(書院)을 세우고 받들었다.
선생은 증조부의 묘를 개수하고 묘갈문(墓碣文)을 쓰기를, “자손들이 못나 제대로 보살펴드리지 못하여 허물어지려고 합니다. 조상 묘 수호에 태만했던 죄를 생각하면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하였다.
경진(庚辰:1580)년 가을에 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선생은 늘 향교(鄕校)의 쇠퇴를 염려하여 이르기를, “지방관이 장부나 서류(簿書),쌀과 소금(米鹽)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풍화(風化:교육과 정치의 힘으로 민풍을 개량함)의 근본은 도외시되게 되어, 이른바 향학(鄕學)은 참으로 그 고을의 한 개 혹 덩어리(贅疣: 쓸데없는 혹 덩어리)가 되고 만다.향교 건물이 퇴락하고 잡초만 무성 한체 세월이 간다면 이야말로 도를 배우는 군자로서는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향교를 진흥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수(郡守) 이희득(李希得)이 향교를 중수하여 완비하자 선생은 그 전말을 기록하여 찬미하였다.
신사(辛巳:1581)년 8월에 춘천 부사(春川府使)에 제수되고 임오(壬午:1582)년에 병으로 체직되었는데 날씨가 추워서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자 날씨가 따스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심 정승 희수(沈喜壽:1548~1622)가 홍천(洪川) 봉고(封庫:어사나 감사가 부정이 많은 고을 원을 파면시키고 관가의 창고를 잠그는 일)의 일로 왔다가 이곳에 들러 선생에게 노자를 주자 선생은 받지 않고 물리쳤다. 심 정승이 ‘서울에서 겨울을 지나려면 준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권했지만 선생이 끝내 받지 않자 심정승은 탄복하였다.
이해 가을에 명나라 사신 황홍헌(黃洪憲)과 주경민(主敬民)이 와서 태자(皇子)탄생조문(誕生詔文)을 전달하였는데 선생이 제술관(製述官)으로 불리어갔다. 10월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이해에 선조 직제학(直提學)공의 신도비문을 찬하였다. 계미(癸未:1583)년 7월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영의정 박순(朴淳:1523~1589.)과 병조판서 이이(李珥:1536~1584)가 청의(淸議:언론)에 죄를 얻어서 사직하는 바람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몇 달 동안 의정부(黃閣 : 의정부의 별칭)가 텅텅 비고 언관(言官)들은 다 이매(魑魅: 인면수심. 도깨비.)들에게 막히어 시사(時事)에 대하여 도저히 할 래야 할 수 없는 것이 이었으므로 두 번씩이나 사직소를 올렸다. “신은 학문이 다 잊혀지고 거칠어 저(學業荒廢:공부를 계속하지 않기 때문에 알던 것도 잊어먹었다는 뜻. 학업과 학문은 같은 말임) 임금을 보좌하여 성군으로 만들 자격이 없으며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여 시의에 합당한 논의를 할 줄 모릅니다 .하물며 지금 조정(朝端:조정, 또는 판서이상의 대신)은 동료(同寅=동료)간의 화목을 잃고 사림(士林)은 소인이 득세할 염려(剝陽之虞:주역에서 剝괘는 모두가 음효요 맨 위의 한 효만 양효다.
소인이 득세한다는 뜻이다)가 있나이다.”하였는데, 위로는 임금의 위엄이 지엄하고 아래로는 공론(公論)이 아직 펼쳐지지 못하여 윤허를 받지 못했으므로 일부러 출근(就職:벼슬아치가 출근함)하여 항소(抗疏)를 올렸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나라가 흥하고 쇠하는 것이 대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수상(首相:영의정)이답지 못한 사람(匪人: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 임금이나 아비를 시해하는 사람.<주역.비>)이면 공국지화(空國之禍:임금이 좋은 정치를 펴지 못하고 신하가 좋은 보좌를 하지 못하는 나라가 겪는 재앙)이 곧 임박 하였는데 여전히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온종일 간절히 바라고 있다가 결국 ‘윤허하지 않는다(不允)’는 비답을 받고 나오니 신의 마음은 더욱 우울하고 답답하여 한번 다시 그(영상 박순을 지칭함)의 죄를 청하는 바입니다 .
순(淳)은 처음 조정에 설 때부터 지금까지 좋은 말씀 한번 아뢴 적이 없고 간사한 꾀만 늘어놓았습니다. 몸을 척리(戚里:임금의 내척과 외척)에게 의탁하여 환관들의 조롱을 받았으며 세력가들과 줄줄이 혼인을 맺어 군자의 수치거리가 되었습니다. 원로(元老)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미워하였고 옛 신하(舊臣)가 이미 오른 지위를 차지하려고 도모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 가지 허물만 있다 해도 어떻게 백관(百官)의 윗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 그는 자기의 심복 당파가 공의(公議)의 배척을 받으면 그를 붓들어 주는 일을 꾸미는데 사력(死力)을 다하고, 친한 친구가 먼 지방에 보직되면 많은 입을 번갈아 동원하여 보내지 말도록 청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의 종적이 비밀스럽지만 그 내심을 환하게 알 수 있(如見肺肝:大學에 人之視己如見其肺肝; 마치 폐와 간을 들여다보듯 남이 나를 환하게 아 는 것)으며 그의 꾀가 간사하고 교활하지만 옆 사람은 냉철하게 봅니다. 이러고도 백관의 모범이 되는 대신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이(李珥)는 문예(文藝)의 재능이 있고 성혼(成渾:1535~1598)은 재야에 명망이 있으니 그들과 깊이 사귀어 주거니 받거니 어울려서 우익을 형성 하므로써 따르는 무리들이 날로 늘어나지만 겉으로는 사제간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속으론 학문을 강론한 실적이 없습니다. 출세의 길(榮進之路)부터 먼저 열어놓고 후안무치한 무리들(無恥之類)을 꾀서 인물을 헐떧고 조정을 평론하는 자들이 모두 그의 문중에서 나왔습니다. 공론(公論)이 이미 형성된 오늘에 와서도 오히려 기탄없이 근거 없는 논의를 고무 선동하고 저희들끼리 서로 건저 주는 등,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런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한 자는 모두 박순(朴淳)이며 순의 무례함이 공론에 자주 떠오른 지는 이미 오래인데도 유독 전하께서만 아시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요즘 그가 어전에서 아뢴 내용을 보면 가슴 속에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저의 당을 힘껏 옹호하며 그 자신이 성혼의 소(渾䟽)를 증거삼아서 언관(言官)을 죄줄 것을 청하였으니 그의 간교한 계책은 사심 없는 해달의 비침(日月無私之照: 공정무사한 임금의 눈이란 뜻도 있음)에서 도망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은 또 아뢰기를 “신이 실성하여 헛소리를 하지 않는 한(病風喪心:病狂喪心의 잘못인 듯) 어떻게 무고하게 대신의 행위를 감이 공격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평상심을 가지시고 굽어 살피신다면 신등이 부득이 항론(抗論)을 편다는 사실을 반드시 환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언관(言官)이 전하의 위엄(一威之施)에 겁을 먹고 당장 항의 언론(抗論)을 중단한다면 신등에게 일신상의 이익은 되겠지만 국가와 사직을 위해서는 무슨 복이 되겠나이까? 근래(近日)에 전하의 노여움이 바야흐로 높(天怒方震)아서 대신이 배척되고 경악(經幄:경연청)에서 간쟁을 맡은 신하가 잇달아 바깥으로 내쫓겨났고 오늘에 와서는 승정원(喉舌之司:승정원의 별칭)이 일시에 혁퇴(革退)되었습니다. 이러한 실정을 목도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저의 몸에 이로운 줄 모르는 바 결코 아니지만 감히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실은 전하께서 신에게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국사의 위험을 거두고저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의 견마지성(犬馬之誠)을 살피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사심이 있다고 의심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명기(名器:벼슬자리의 다른 이름)를 욕되게 할 수 있습니까? 빨리 신의 직을 파직 하소서“하였다.
조정을 향해 억울함을 하소연안 지 열흘이 넘자 선생은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좌천되니 때는 8월이었다. 어느 선비가 한강에서 선생을 전별하면서 다음과 같은 송별시를 지어 주었다.
임금이 전호(殿虎)의 참뜻 알아주지 않는데
세상이 어찌 수주(隋珠)의 진가를 알아줄까
전호(殿虎: 왕의 실책을 집요하게 간쟁하는 신하.宋의 간의대부 劉安世의 별명이 붙혀진 고사에서 생긴 말.) 수후의 진주(隋珠:춘추시대 수나라제후가 가졌던 진주 .매우 진귀한 보물을 가리킴. 비슷한 말:화씨의 구슬(和璧).수주화벽(隋珠和璧)이라는 술어도 있다.)
을유(乙酉 )년 2월에 체직되어 귀향하였다. 수헌(睡軒) 권공(權公:이름은 五福1467~1498) 유고(遺稿:睡軒集)에 서문을 썼다. 병술(丙戌)년 정월 6일 신축(辛丑) 해시(亥時)에 영천군 반곡(榮川郡 蟠谷) 정침(正寢:거처하는 곳이 아닌, 주로 집무하는 몸채 방)에서 작고했으니 향년 70세였다. 선생은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기가 고르지 못한 듯하였는데 선생은 이날 술을 달라고 해서 많이 마시고 며칠동안 진정되어 있었는데, 그길로 부터 차츰 위독해졌다. 의원이 오면 웃으면서 말하기를, “병이 이미 위독해 졌는데 어떻게 한두 첩의 약을 먹는다고 금방 낫겠는냐?” 고 하였는데. 조금도 슬퍼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해 5월 2일 병신(丙申)에 군의 동쪽 임고(林皐)의 태좌진향(兌坐震向)의 자리에 장사 지냈는데 이날 장례에 모인 사람들이 4백여 인이었다.
삼가 퇴도 선생(退陶先生:퇴계 이황)이 지은 묘지(墓誌)를 상고해보면 다음과 같다.
“진사군(進士君:소고선생의 부친이 성균진사 였다)은 평소에 조용하고 차분 하였다.오로지 학문에 전심하고 가사(家事)엔 소흘 했으며, 숙인(淑人:소고 선생의 모친)이 근검(勤儉)으로써 유지했다. 숙인은 천성이 영명하고 현숙하였다. 진사군이 그렇게 수신(修身)하여 자기의 뜻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나 자식을 교육하여 성가(成家:그 방면에서 일가를 이룸)할 수 있었던 것은 숙인의 내조의 공이 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런 아버지와 그런 어머니가 있으면 그런 자식이 있게 마련이며 또 선조의 훌륭한 점이 모아저서 선생에게서 피어난 모양이다.
선생은 천품이 매우 고상하고 재덕(才德)이 있으며 풍골(風骨:풍채와 골격)이 잘 짜이고 이마와 눈섭(眉宇:이마와 눈섭)이 준수하게 생기고 눈빛이 가을물 처럼 반짝 이었다.소년 (羈丱:소년시절의 머리 양식.소년=羈角)시절부터 보는 사람들에게 대인의 기상이 있다고 칭송 받았으나 기가 너무 세다는 이유로 소년 시절부터 선생에게 가해지는 가정교육은 다른 형제들보다 특히 엄격하였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한결같이 탁마(淬琢:강도를 높혀 열심히 공부함)하여 글의 종지와 핵심을 파악하여 자신의 문장에 거침없이 반영하였다.
언젠가 漢城(한성=한양=서울)애 가서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시 험 과목이 난해한 삼재에 대한 대책(三才之策:天道와 地理.人事에 대해 聖 君의 정치 방도를 논술한 논문. 본서 제4권에 게재됨.三才는 天.地.人이다)이었다. 과장에 참여한 유생(章甫)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제목이어서 모두가 붓을 던지고 백지로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만은 일필휘지로 시험지를 가득히 채었는데 이론이 좋고 문장이 힘차서 마치 천길 구렁에 물이 쏟아지는 듯하여 노숙(宿艾)한 원로들도 놀라 탄복하였다.
3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모두 급제하니 연꽃과 계수나무는 영광을 다투었고 청운(靑雲)을 밟으니 모두가 신선을 바라보듯 명망이 높았지만 처신은 더욱 공순하였고 직무 수행은 더욱 정성스러웠으며, 청현지직(淸顯之職)에 있을 적에도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을 한번도 늦춘 적이 없었으므로 당시의 월조평(月朝評)에서도 그의 품제(品題)를 높혀서 국기(國器:나라를 다스릴만한 기량이 있는 사람)로 인정하였다. 명묘(明廟:명종의 묘호)가 등극하자 모후(母后:이때 모후는 문정왕후임)가 수렴청정을 하고 국구(國舅:임금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에게 태아검을 거꾸로 쥐어주고[倒持太阿:남에게 칼자루를 쥐어주었다가 도리어 그 화를 입음. 왕권의 보호를 위해서 윤원형에게 권력을 맡겼는데 윤원형은 권력을 이용하여 100여명이 살상되는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 小尹 尹元衡이 大尹 尹任을 몰아낸 士禍)를 일으켜 당쟁의 불씨를 만든 일을 비유하여 한 말임]사림을 불태울 때 일국의 명사들이 죽거나 구금되었지만 선생만이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일망타진 그물에서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선생의 근신 덕분(勤愼之效)일 것이다. 선생도 묘신의 대열(卯申之列:)엔 들어있었지만 벼슬에서 물러난 뒤로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손님을 사절하였으며 일년 내내 들어앉아 주역을 읽고 한번도 출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화근이 미치지 못한 것뿐이지 결코 구차하게 화를 면한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화려함을 거두어 실답(斂華歸實)하고 찌거기를 변화시켜 정하게 만들었(化滓爲精)으므로 덕성이 조화롭고 순수하며 가슴이 넓고 의지가 굳세며 간이 하되 진중하고 과묵하였다. 천성이 책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밥을 먹을 때는 책을 곁에 두고 보았고 아플 때는 누워서 책을 보았다. 안본 책이 거의 없었고 보았다하면 반드시 점을 찍고 줄을 쳐서 알뜰히 연구했으므로 천지 사물의 이치가 머리 속에 환했다. 젊을 적부터 시에 능하여 시흥(詩興)이 일어나서 붓을 휘두르면 줄줄이 나오는 아름다운 시구는 끊일 줄 몰랐다. 하지만 시를 짓는 재능을 자랑하기 싫어서 누각이나 정자에 시를 내건 적이 없었다. 늘그막엔 시를 짓기 싫어하여 “시는 사람을 부화하고 경박하게 만들기 때문에 절대로 시 짓기를 일삼아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낙봉(駱峰 : 申光漢의 호.企齋 또는 石仙齋라고도 함) 신상국(相國:) 광한(光漢:성종15년 -명종10년 1484-1555.양관대제학 지냄. 이름난 문장가)이 언젠가 말하기를 “후진(後進:후배)중에 오직 박모(朴某:박승임을 암시함)는 시문을 끝까지 잘 공부한다면 그 역량은 거의 헤아릴 수 없을 텐데”라고 하였다.
선생은 청빈한 생활 속에 굳게 지킨 지조(冰蘖)를 처음부터 끝까지 더럽히지 않았다. 벼슬 생활 40여 년 동안 시골 집은 허름한 집에 척박한 땅이었고 서울 생활은 여기저기 셋집을 얻어서 가난 한 살림을 꾸려갔다. 간혹 봉급(祿俸)이 좀 저축되면 즉시 서적과 바꾸었다. 천성이 본시 사치스런 풍악이나 여색에는 담담하였다. 음식에 대해서 특별하게 즐겨 먹는 것이 없었고 옷에 대해서도 특별히 좋아하는 옷이 없었으며 입에 맞으면 그뿐이요 몸에 맞으면 그뿐이었다. 선생은 늘 “우리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너무 사치하여 허비가 많다”고 한탄하였다.
선생은 평상시에 말을 빨리하거나 당황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으며 온종일 앉아 있어도 마치 소상(塑像)처럼 단정하였다. 말끔한 책상과 따스한 난로가 있고 온 벽은 온통 책으로 가득 채워졌으며 고개 숙여 글을 읽고 머리 들어 생각하면서 언제나 정중하고 공손하여 털끝만한 동요도 없었다. 마을에 집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재상 댁(宰相宅)인 줄 아무도 모를 정도로 문 앞이 조용하였다. 후생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이제 겨우 구두(句讀)를 뗄 줄 아는 사람이라도 가르쳐 주기를 청하면 친절하고 꼼꼼하게 정성을 기우려 가르쳤다.
언젠가 국풍과 초사(風騷:시경의 風과 楚辭.또는 詩文)를 뽑아서 학도들을 가르칠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여러 학자(學子=學人)들은 공연히 열흘씩, 보름씩 허비해 가면서 작시법(作詩法)을 배우고 있지만 시를 배우는 것은 실로 공자께서 말씀하신‘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장기 .바둑이라도 두는 것이 낫다(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논어.양화-”)는 수준일 뿐, 어찌 대가들(大方家)에게 가르칠 수준인가? 그러나 시를 통하여 권선징악을 배우는 것은 선왕(先王)의 교육 방법이며 운문(韻文:시문)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선유(先儒)들께서도 가르친 적이 있다 .후세의 술작(述作:저작)들이 비록 고인(古人=주로 옛 성현을 가르킴)의 순준을 따를 수는 없지만 그 원류를 찾아서 한 단계씩 올라가는 길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여러 학자들이 만약 작자의 본의(本意)를 탐구하는데 힘쓰지 않고 지엽 말단적인 문자에 구애되는 행위는 족히 취할 행위가 아니거늘 하물며 자기 단속을 게을리하고 조이 쓸고 먼지 가득한 시문이나 뒤적이며 처음 세운 계획을 저버리는 자야 말해서 무엇 하랴!‘ 밥주머니(飯囊:밥만 먹을 줄아는 바보)다’.‘ 사람 옷을 입은 짐승(牛襟: 옷을 입힌 말이나 소 .무식한 자를 비웃는 말)이다’라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힘쓸지 어다.! 그때그때 가르쳐주고 깨우쳐주기를 이와 같이 한 때문에 가까운 곳이나 먼 곳에서 찾아온 선비들이 모두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었다. 선생의 행실을 보자. 가정에서 어버이를 섬길 때는 언제나 정성과 효도를 다했으며 형제간에는 언제나 공순함과 우애를 다했으며 손님에게는 예를 갖춰 대접했으며 하인들에게는 은혜로써 어루만져 주었다.
조정에 벼슬살이할 때 친서(親書:부모에게서 온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며 대왕대비의 격문을 받들기(奉檄: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지방관을 청한데 대한 전교)를 매번 목마르게 기다리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제가 된(銜恤:부모상을 입음)뒤에 여러 번 지방관을 나갔지만 누구에게 효를 할 수 있었겠는가?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중씨(仲氏)도 고을살이를 했지만 부모봉양에 매우 군색하였다. 선생은 작란 삼아 늘 이렇게 말했다. “부모 봉양을 위해서 지방관을 자청하였는데 염치없을 것이 무엇이요? 채소류나 과일류라도 끊지 않고 대야 합니다.” 상중(喪中)에 있을 때를 보면 선생은 상례(喪禮)면이나 애도면 이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상제의 거소(廬)를 벗어나지 않았고 수질과 요대(絰帶:상제의 복색. 머리에 쓰는 질과 허리에 두르는 띠로, 짚과 삼으로 만듬)를 벗은 적이 없었으며 오직 예기(禮)만 읽었다.
장조카(宗姪)가 제사를 잘 못 모실 때는 그 태만함을 깨우쳐 주고 결점을 채워 줌으로써 제사를 궐사(廢闕)하지 않게 했으며 선려(先廬:조상 때부터 살아온 집)가 낡아서 기울자 선생은 “선인(先人:돌아간 아버지)께서 주무시던 곳이 이래서야. 차마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자비를 들여 수리하고 지붕을 이었다. 선생이 지은 선비(先妣:죽은 어머니)의 제문을 보면 글자마다 눈물이요 구절마다 슬픔이라 올빼미 같은 잔악한 사람(梟獍之徒)이라도 어버이를 사랑하는 선생의 지극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에 실수로 칼날에 손가락 하나를 다쳤는데, 다 자란 뒤에도 손가락이 다 성하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여 반드시 다른 손가락으로 흉터를 덮어서 손을 펼 때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를 언제나 한결같이 하였다. 두 형이 일찍 세상을 버렸으므로, 형수는 살림은 가난하고 자식은 많아 장가보내고 시집보낼 형편이 못되었는데 선생은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어 혼기를 놓지는 탄식을 없도록 하였다. 막내아우도 생활이 어려웠는데 선생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서 힘껏 돌보기를 끝까지 잘하였으며 나라에 대해 선생이 행한 것을 보면, 임금을 섬길 적엔 충성과 곧은 마음으로 ,백성에 대해서는 은혜와 위엄을 행하였다.
재임 시절에 비록 혁혁한 명성은 없었으나 구관(舊官:전임 관원)을 생각하는 고을 백성들의 그리운 정(去後之思=去思:재임 시절의 선정을 떠난 뒤에 생각하는 그 고을 백성들의 마음)은 늘 있었으며 선생이 돌아 가시(易簀)자 여주 백성 중엔 와서 곡하는 사람도 있었다.(선생은 여주목사를 역임했기 때문이다) 언사(言事: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여 간하는 일)엔, 보습(補拾:補闕拾遺의 줄인 말. 임금의 결점이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침)을 기약했으며 척사(斥邪:사특한 무리를 내침)엔 권세를 용납하지 않았다. 선생은 을사공신(乙巳功臣)녹훈 삭제를 청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직한 말(忠言)과 바른 의론(讜論)이 빗발치듯 일어난 지가 벌써 5개월째며 대신(大臣)이 백관들을 이끌고 전하의 면전에서 간하여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은 온 나라가 한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이니 이는 국가의 존망(存亡)이 인심의 향배(人心之向背)에 달려있지 않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직도 전하께서 굳게 닫고 계시니 실로 신들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국경지대 백성들의 고달픔을 근심하고 존왕양이(尊攘:尊王攘夷의 준말. 천자를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침. 곧 춘추대의의 핵심내용임)의 어려움을 근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안도. 함경도 양도의 국경지대의 백성들은 근래에 든 흉년으로 인하여 내지(內地)로 들어 오(流入)고 있는데 금년은 더욱 심하여 변방이 온통 텅빈곳 마저 생겨납니다. 쇄환법(刷還法:유랑민을 되돌려 보냄을 규정한 법)이 있기는 하지만 수령들이 태만해서 거행하지 아니합니다. 본도 감사에게 별도로 엄명을 내리시기를‘유랑민이 지나는 곳의 수령들은 우선 그들을 맞아 위로하고 안정을 찾도록 도와준 뒤에 가을이 되거든 도로 보내(刷還)도록 하라’고 하소서. 평안도와 황해도의 도로(道路)부근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사신들의 뒷바라지가 잦은 탓으로 피폐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또 중국 사신(天使)들을 겪게 되어 지치고 쪼들림이 더욱 심합니다. 이번에 성절사(聖節使)와 사은사(謝恩使) 두 사절을 아울러 행하신다면 더욱 지탱할 수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주문사가 사은사를 겸하도록 하소서. 우리나라가 대국을 섬기(事大)는 일은 진실로 성의를 다해야 마땅한 일이나, 만약 계속할 수 없다면 참고해서 자문(咨文:중국에 보내는 공문서)을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종이를 만드는 공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일을 관장한 부서가 1년에 봄가을로 만드는 종이의 수량은 많지 않습니다. 이번에 중국에 바칠 종이의 양은 수가 1천장이나 됩니다. 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따로 만들고 또 지방에 명하여 분담해 만들게 하신다면 그 폐단이 또한 큽니다. 진헌사(進獻使) 이기(李山+蘷)가 이미 중국의 상서주사(尙書主事)등에게 종이 만드는 어려움을 말했으므로 종이의 수량이 전에 바친 수량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견책은 없을 듯하다 하니 다시 감량을 의논하소서.“
임금이 편견을 국집 하다가 간계에 떨어진 것을 선생은 다음과 같이 간쟁하였다.
“근자에 근거 없는 말이 중외(中外)에 유포되자 공경(公卿:본래는 三公과 九卿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벼슬 높은 신하란 뜻으로 쓰임)들과 대간(臺諫)들이 반복하여 극론(極論:극단적인 논의)하다가 대권 안에까지 들어가서 간쟁하려고 하였지만 전하께서는 아래의 실정을 살피지 않으시고 더욱 굳게 고집하시니 전하께서 외부의 동요(外撓)를 이렇듯 가볍게 받아들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간사한 무리가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임금의 마음이 허와 실을 구분하지 못하여 헷갈리는 데 있는 것인데 도리어 전하께서는 그 처치가 마땅하다고 여겨서, 저들에게 선동의 기회를 열어주었으므로 조정신하들이 합사(合辭=合啓:임금에게 합동으로 아룀),교장(交章 : 임금에게 번갈아 장계를 올림)하여 전하의 잘못을 미연에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 뜻은 간절하였으며 그말은 공정하였는데도 전하께서 조금도 깨닫지 못하셨으므로 드디어 전하의 면전에서 직접 아뢰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지만 윤허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알지 못하겠나이다. 전하께서 떠도는 말에 미혹되어 두사람을 죄주려고 한 것은 무슨 일이며 중론(物論=衆論)을 굳게 거부하고 면계(面啓:임금의 면전에서 아룀)를 윤허하지 않은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앞자리가 빈 것을 꺼려하지 마시고 지척간의 하정(咫尺之下情)을 활짝 펴서 합당(得中:적중함)하게 처리하시어 사뙨 논의들이 전하의 신비한 교화(神化:임금의 좋은 정치로 인하여 백성이 교화됨) 안에서 절로 사라지도록 하신다면 종묘사직을 위하여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영정대왕(榮靖大王:仁宗의 존호) 즉위 초에 십점소(十漸疏)를 올려 순 임금을 따르라고 경계한 뜻이었는데 대략에 이르기를,“이제 새로 보위에 오르사 한 나라를 향유하시니 앞으론 조종(朝宗)의 어렵고도 큰 대통(祖宗艱大之緖)을 이으시고 뒤로는 만세토록 다함이 없는 업적(萬世無彊之業)을 연 것입니다. 위에는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세상이 있고 사랑해야할 백성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을 두려워한 임금은 나라를 보존했고 방종한 임금은 나라를 뒤 엎었습니다 .막중한 그릇(重器: 정권,또는 나라를 가리킴)이 하루아침에 전하의 손으로 들어왔으니 그 맡으심이 더없이 크고 그 책임이 더없이 어려우며 힘쓸 일이 더없이 번거롭고 그 근심됨이 더없이 깊습니다. 신은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실 줄을! 장차 헛된 것을 숭상하고 먼 것을 추구(崇虛騖遠)하다가 변란이 어지럽게 생겨, 나라(邦家:임금의 邦과 大夫의 家)를 문란(板蕩:국정이 문란함. 판과 탕은 시경의 편명)하게 하시렵니까? 아니면 우유부단하고 게을러(委靡怠惰)서 구습을 못 버리고 현실에 안주(因循姑息)하다가 스스로 멸망을 감수하시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끝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전적으로 시작에 달려있는 법이거늘 하물며 전하께서는 저렇듯 책임이 막중하신데 시작을 이렇게 조심하지 않고 계시니 그 나중이 잘될 리가 행여 있겠나이까? 비록 성신(聖神)의 성헌(成憲)이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것이라서 변경하거나 분란 스럽게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태평한 날들이 오래되어 습관에 익숙하고 폐단을 즐기게 되면 또한 답습[因循]하고 안주[姑息]하는 폐단을 완전하게 제거하기 어렵게 됩니다. 당저(當宁)께서 등극하신 지가 이미 몇 개월이 되었는데, 아직도 함양(涵養)의 공부를 미루어 넓히고 책려(策勵)하는 방도를 강구하여, 구방(舊邦)을 새롭게 하려고 생각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전하께서 양암(諒闇)하시던 초기에 차라리 애척(哀戚)을 중도에 지나치게 할지언정 명계(命戒) 같은 여사(餘事)에는 겨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니, 이는 나라가 나라가 되는 것[國之爲國]은 그 주인이 있기 때문이요, 인군의 몸은 필부(匹夫)와 다르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더구나 잠시의 느긋함이 혹여 만세의 근심을 끼칠 수 있고 호리(毫釐)의 차이가 반드시 천리(千里)의 어긋남을 초래하는 것처럼 근본을 단정히 할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되고 규모를 결정하는 것이 마땅히 조기에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이겠습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와 정사를 하는 초기에 마땅히 거행해야 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사세(事勢)의 경중(輕重)과 폐단이 쌓인 원위(源委)의 천심(深淺)에 대해서는 또 언관(言官)이 집어내고 추론해 주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신들이 전하를 위하여 계책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호오(好惡)를 마땅히 살펴야 하는 것은 소인의 도가 자라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인재를 마땅히 등용해야 하는 것은 조정[國]을 공허하게 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궁금(宮禁)을 마땅히 엄하게 해야 하는 것은 정사가 다양한 경로로 나오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기강(紀綱)을 마땅히 세워야 하는 것은 스러져서 진작되지 못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절의(節義)를 마땅히 숭상해야 하는 것은 사풍(士風)을 훼손시키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염치(廉恥)를 마땅히 권면해야 하는 것은 상하(上下)가 이익만을 추구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언로(言路)를 마땅히 넓혀야 하는 것은 인주(人主)가 고립(孤立)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상벌(賞罰)을 마땅히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은 정령(政令)이 전도(顚倒)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사치를 마땅히 억제해야 하는 것은 민력(民力)이 헛되이 고갈되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무비(武備)를 마땅히 정비해야 하는 것은 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조짐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이 열 가지는 모두 시무(時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근본은 또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여 출치(出治)의 근원을 맑게 하고 도학(道學)을 밝혀서 왕화(王化)의 머리를 성대하게 여시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이 두 가지를 먼저 힘쓰고 겸하여 열 가지 조짐의 폐단을 막은 연후에야 전하께서 전대를 잇고 후대를 열어주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실제에 본말(本末)이 모두 극진하고 표리(表裏)가 서로 닦여질 것입니다.
신들이 심술을 바르게 하는 것을 시작을 바르게 하는 첫머리로 삼은 것은, 대개 국가의 근본은 일신(一身)에 달려 있고 일신의 근본은 또 일심(一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일심이 바르면 일신이 바르게 되니, 집안과 국가가 감히 한결같이 바르게 되지 않을 수 없고, 일심이 바르지 못하면 일신조차도 바르게 될 수가 없으니, 하물며 집안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바르게 할 것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바르게 하는 방도는 애초에 매우 높고 지극히 어려운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하늘이 부여한 처음 상태를 따르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한 치 마음속을 허령(虛靈)하게 하여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 하늘이 애초에 나에게 부여한 명덕(明德)이니, 발(發)하지 않았을 때는 중(中)하고 발하고 나서는 화(和)하여 겉으로 드러난 것이 수연(粹然)히 하나같이 바른 것에서 나오므로 일신과 가국이 절로 바른 것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위미(危微)한 즈음에는 쉽게 가려지고 구애되는 바람에 끝내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저 천리(天理)의 공연함을 이겨서, 지극히 밝고 지극히 바른 본원(本原)이 하루아침에 흙이나 돌처럼 굳어져서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니, 그 밖의 일은 미루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군이 된 자가 그 나라를 바르게 하려고 해도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서 하루에도 만 가지[萬幾]나 되는 바람에 그 호번(浩繁)함을 감당할 수 없고, 그 집안을 바르게 하려고 해도 집안이 친하고 정이 우세하여 은혜가 의리를 가리는 바람에 쉽게 설만(褻慢)한 지경에 이르게 되니, 이미 바르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끝내 바름을 얻을 때가 없게 됩니다. 오직 흐리게 만드는 먼지를 제거하고 한 조각의 본체를 드러내어,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지키며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방정하게 하여, 느껴서 통하고 움직여서 변화하게 하는 묘용(妙用)으로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느라[風動草偃교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구중(九重)의 깊은 궁궐에 거처하시기에 그 음성과 기색을 한 번도 외인의 이목에 접하게 하신 적이 없으시니, 엿보아 추측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한 번 호령(號令)하고 한 번 정교(政敎)를 내리는 사이에 이미 전하의 심술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오히려 다시 옥루(屋漏남에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를 소홀히 할 수 있고 한거(閑居)에 방종(放縱)할 수 있다고 여기시고, 스스로 다스리는 것을 게을리 하신다면, 지난날 더러 다 바로잡지 못했던 심술이 마침내 끊어지고 막혀서, 삿되고 부정한 것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들이 전하께서 먼저 심술을 바르게 하여 다스림이 나오는 근원을 맑게 하시고 특히 근독(謹獨)의 공부에 정성을 쏟으시게 하려는 이유입니다.
도학(道學)을 밝히는 것을 시작을 바르게 하는 첫머리로 삼은 것은, 대개 하늘에서 나온 도의 큰 근원과 자기에게 구비된 도의 실체가 곧 인륜(人倫)과 일용사물(日用事物)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이(理)로서, 잠깐 동안이나 다급한 중에도 떨어질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오직 이 몸이 솔성(率性)의 그릇이 되고 이 도가 교민(敎民)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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