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임의 묘갈명(墓碣銘) 저자 정경세(鄭經世) 이명 자 : 중보(重甫) 호 : 소고(嘯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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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0회 작성일 22-07-04 05:13본문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22 명류(名流)
나 정경세가 소시에 고(故) 교관(敎官) 전공(田公, 전극례(田克禮))에게 ≪한서(漢書)≫를 배울 적에 가르치고 난 여가에 고(故) 대사간(大司諫) 소고공(嘯皐公, 소고는 박승임의 호(號))의 일에 대해 껄껄 웃으며 싫증이 나지 않게 이야기하였는데, 그의 말씀에 의하면 ‘장인(丈人)께서는 사람됨이 차분하고 담담하여 사물을 좋아한 바가 없었으나 유독 글만 음식처럼 좋아하여 잠시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무릇 책을 사다가 혹시 임금이 하사한 것을 얻으면 구절마다 주묵(朱墨)을 찍으면서 하나하나 살피고 넘어갔다. 비록 ≪의례(儀禮)≫, ≪강목(綱目)≫,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처럼 책수가 엄청나게 많은 글도 대부분 수순(數旬)이 지나지 않아 다 읽었다.’고 하였다. 전공은 구차하게 말씀할 분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흠모하면서 선배들의 학문에 힘쓰는 정밀함과 근면함을 후학(後學)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을 거듭 탄식하였다. 그 뒤에 고(故) 학유(學諭) 김천영(金天英) 군과 같이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논하다가 기장(朞章)에 이르러 그가 어려운 글을 매우 쉽게 읽었는가 하면 산대[算]를 펼쳐 놓고 가감승제(加減乘除)를 하면서 손과 입이 상응(相應)하되 법에 맞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그 내력을 물어보았더니, 그가 말하기를, “일찍이 소고 선생에게 배웠다. 선생은 이른바 여기에 정통하여 묘리를 깨달은 분이었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서적에 정신을 쏟을 적에 사장(詞章)의 기억에만 주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그 문하에서 수업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불행으로 여기었다. 그런데 이번에 공의 아들 도사(都事, 박녹(朴漉))군이 공의 글과 김중청(金中淸) 군이 저술한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墓碣銘)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아! 이게 어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결국 굳이 사양하지 못한 것은 그의 부탁이 간곡할 뿐만 아니라 내가 평소 흠모한 마음을 스스로 보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성은 박씨(朴氏), 휘(諱)는 승임(承任), 자(字)는 중보(重甫)이고, 그의 선조(先祖)는 나주(羅州) 사람인데, 고려(高麗)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박상충(朴尙衷)의 후손이자 우리 조선조(朝鮮朝) 좌명 공신(佐命功臣) 좌의정(左議政)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의 6대손이다. 증조 휘 병균(秉鈞)은 사온서 영(司醞署令)으로 좌통례(左通禮)의 벼슬을 추증(追贈)받았고 할아버지 휘 숙(imagefont)은 부사직(副司直)으로 좌승지(左承旨)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아버지 휘 형(珩)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어머니 예안 김씨(禮安金氏)는 정부인(貞夫人)을 추증받았는데, 이는 모두 공의 귀(貴)로 인해 추증된 것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준수하고 남달랐다. 어렸을 때 ≪사략(史略)≫을 배우다가 묻기를, “무왕(武王)이 기왕 천하를 위해 폭군(暴君)을 정벌해 놓고 왜 은(殷)나라 종실 중에 미자(微子)처럼 어진 사람을 택하여 임금으로 세우지 않은 채 스스로 천하를 취하였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참판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었다. 15세가 안 되어 문장을 짓는 재능이 이미 뛰어나 향시(鄕試)를 보려고 하였으나 참판공이 너무나 빠른 것을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공이 변려문(騈儷文) 50여 구절을 지어 자신의 회포를 서술하였는데, 그 글을 보는 사람마다 모두 경탄(驚歎)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명성이 크게 났다. 누차 시험에 합격하여 나이 24세에 태학(太學)에 올라갔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임(選任)되었으며, 그 뒤 몇 년간 예문관(藝文館),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에 추천되어 대저 참하관(參下官)으로서 유명한 직책을 모두 역임하였고 심지어 정자(正字)에 임명되어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다.
가정(嘉靖)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에 성스러운 덕을 지닌 인종(仁宗)이 왕위에 오르자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만여 마디나 되는 차자(箚子)를 올려 ‘정치를 하는 기본과 시작을 바르게 하는 도리와 교화를 바꾸어 개혁하는 임무’에 대해 극도로 논하였는데, 공이 초안한 것이었다.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전직되었는데, 동료들이 어느 사람답지 않은 자를 전형(銓衡)의 자리로 끌어올리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반대하자, 곧바로 공을 정언으로 전직시키고 그 사람을 이조 좌랑에 앉히었다. 이보다 앞서 진복창(陳復昌)이 공이 중대한 명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끌어들이려고 매우 간절하게 요청하였으나 공이 끝내 만나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진복창이 지평(持平)이 되어 기세가 대단히 왕성하였으므로 공이 탄핵하려고 하자, 동료들이 놀라서 똑바로 쳐다보며 따르지 않았다. 그 이튿날 어버이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휴가를 요청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안 되어 체직되었는데, 진복창이 이기(李芑)를 사주하여 공에게 중죄(重罪)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다가 이항록(李亢祿)이 극력 구원하자, 예조 정랑의 벼슬만 파직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그 이듬해에 거듭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현풍 현감(玄風縣監)에 임명되었는데, 흉년이 든데다가 돌림병까지 유행하여 백성들이 많이 죽어갔다. 감사(監司)가 공이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고 하여 여러 고을을 구휼하는 일을 맡겼으므로, 공이 시체 속을 드나들면서 마음을 다해 구제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정사년(丁巳年, 1557년 명종 12년)에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로 전직되었다. 그때 윤원형(尹元衡)이 바야흐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공이 한직(閒職)에서 놀며 지내다가 문을 닫고 독서하면서 절대로 물들지 않았다. 그 이듬해에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나갔는데, 고을이 피폐하여 창고가 텅텅 비어 있었다. 더러 공에게 ‘마땅히 어사대(御史臺)에게 보고하여 축난 것을 전임(前任)에게 징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권하였으나, 공은 의리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자신의 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쓸데없는 경비를 줄여 충당하고 나서 적체된 곡물의 문건을 불태워버렸다. 임기가 차서 교감(校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는데, 그 뒤 얼마 안 되어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었다가 판교(判校)로 옮기었다.
을축년(乙丑年, 1565년 명종 20년)에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승진하고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전직되어 반년 있다가 체직되었으며, 그 뒤 얼마 안 되어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되었는데, 정사를 청정하게 보아 곤장을 때리지 않아도 호족이나 교활한 자들이 두려워서 움츠러들었다. 융경(隆慶) 기사년(己巳年, 1569년 선조 2년)에 공이 진하사(陳賀使)를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 고사(故事)에 사신이 예부(禮部)를 찾아가 인사하는 예절이 있었으나 홍로(鴻臚)에는 없었다. 목종(穆宗) 초기에 비로소 문관(文官)으로 홍로 경(鴻臚卿)을 삼아 그 임무를 중시하였으므로 예의상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신이 옛날의 관례만 따라 하였다. 홍로가 노하여 사신의 위치를 낮추어 승도(僧道) 등 잡류(雜流)의 서열 밑에 서도록 하였으나 사신이 머리를 숙이고 반열에 나간 채 변론하지도 않고 돌아왔다. 공이 도착하자 예부에 공문을 올려 왕복해 논변한 끝에 처음처럼 그 반열에 서게 되었다. 그 뒤에 주상이 명(明)나라의 통보를 보니, ‘조선의 사신이 실례하여 반열을 뛰어넘어 섰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므로 전후 역관(譯官)에게 염탐해 보라고 명하였는데, 그들이 모두 뒤에 간 사신 일행이 그렇게 하였다고 말하였으나 공이 끝내 밝히지 않았다. 주상이 연도(年度)를 상고하여 전에 간 사신 일행을 처벌하니, 사람들이 모두 선왕(先王)의 명철을 위대하게 여기고 공의 아량에 감복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년)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에 조정으로 들어와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도승지(都承旨)로 전직되었다가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에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경주에 태조(太祖)의 초상화를 모신 집경전(集慶殿)이 있었는데, 대소의 사람을 막론하고 보고 싶으면 곧바로 문을 열었다. 공이 ‘이처럼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알현하는 이외에는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하였다. 신라(新羅)의 폐원(廢苑)이 매우 광활하여 수백 말의 곡식을 파종할 수 있었는데도 그곳에다 채소를 심어 관용(官用)을 공급하기 때문에 참외가 질펀하였고 따라서 백성을 적지 않게 부렸다. 공이 그 땅 10에 9할을 떼어 둔전(屯田)을 만드니, 백성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기었다.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에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고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에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나갔다가 어떤 일로 인해 해직되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가 서원(書院)과 사당(祠堂)을 지어 모재(慕齋) 김공(金公, 김안국(金安國))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어떤 백성이 재산을 많이 축적해 놓고 어머니의 봉양을 박하게 하였는데, 공이 그를 붙잡아다 비유하여 타이르니, 그 사람이 이마를 조아리며 죄를 인정하고 그 뒤로 어머니를 신중히 섬기어 효성으로 이름이 났다.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병환이 나 사직하고 돌아왔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있다가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어 각자가 자신의 무리를 위해 배제하거나 지원하였다. 공이 어떤 일을 논하였다가 주상의 비위를 거슬려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임기가 차기 전에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허락하였는데, 모두 특별히 명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에 병환이 나 향년 70세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 공이 살던 영천군(榮川郡) 동쪽 임구촌(林丘村) 동향(東向)의 자리에 묻히었는데, 그곳은 공의 외할아버지 김만일(金萬鎰)의 묘소 아래였다. 그 뒤에 그 고장의 사람들이 공의 덕을 사모하여 지역에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공은 풍채가 준수하고 국량이 넓었으며 묵중하여 말이 적었고 희노(喜怒)를 드러내지 않았다. 병환이 나지 않으면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사람들이 오래도록 같이 있어도 그 한계를 엿보지 못하였다. 서책 중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특히 ≪논어(論語)≫ 및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주력하여 의문점이 있을 때마다 기록해 놓고 반복해 자세히 연구하여 반드시 시원하게 알려고 하였는데, 일찍이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에게 질의하였을 적에 인정해 준 바가 많았다. 퇴계 이 선생이 편찬한 ≪계몽전의(啓蒙傳疑)≫는 제가(諸家)가 논한 상수(象數)를 수취(收聚)한 것이어서 그 뜻이 은미하여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하나하나 연구하여 각각 그 뜻을 꿰뚫었는가 하면 성위(星緯), 산수(算數) 등의 일에 있어서도 모두 이해하여 정밀 숙달하였는데, 이처럼 한 가지 기예(技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성품이 담박한 것을 좋아하여 따뜻하고 배부르면 만족하였으므로 거처하는 집안이 쓸쓸하였다. 도성에 있을 적에는 남의 집을 임대하여 거처하였으나 태연히 의식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경솔하게 논평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할 적에도 공무가 끝나면 바로 돌아왔고 돌아오면 문을 닫고서 학문에 마음을 쏟았다. 자제들이 혹시 시사(時事)에 대해 물어보면 ‘너희들이 간여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였고, 후학들이 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정성을 쏟아 가르쳤다.
문장을 지음에 있어 뛰어나서 남들이 놀라게끔 꾸미지 않고 도도(滔滔)하게 써 내려가 유의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정밀하고 굳건하고 전중하고 진실하여 자연히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었지만 또한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부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경유하는 객사(客舍)에 대해 시를 짓지 않았고 가끔 화답하는 시를 지어도 현판(懸板)을 만들어 걸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다. 중년(中年) 이후로 더욱더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뜨고 경박하게 하므로 유의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공문심법(孔門心法)≫, ≪유취강목(類聚綱目)≫, ≪심법(心法)≫ 등이 있었으나 탈고(脫稿)되지 않았고 문집(文集) 네 권만 세상에 간행되었다.
공의 부인 정부인(貞夫人) 예천 권씨(醴泉權氏)는 집의(執義) 권오기(權五紀)의 딸인데, 효성스럽고 근검하여 매우 부도(婦道)가 있었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다가 야위어 병환이 나 53세에 세상을 떠나 다른 곳에 장사를 치렀다가 공이 죽은 뒤에 곁에다 이장하였다. 큰아들 박어(朴漁)는 요사(夭死)하고 둘째 아들 박녹(朴漉)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고 셋째 아들 박조(朴澡)는 진사(進士)이고, 박개(朴漑)는 측실(側室)의 소생이다. 큰딸은 증(贈) 판결사(判決事) 이복원(李復元)에게 시집가고 막내딸은 전극례(田克禮)에게 시집갔는데, 전극례는 바로 공의 일에 대하여 싫증나지 않게 이야기한 사람이다. 도사(박녹)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박회무(朴檜茂)는 의금부 도사이고 둘째 아들 박종무(朴樅茂)는 진사(進士)이며, 딸은 찰방(察訪) 김기선(金幾善)에게 시집갔다. 진사(박조)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재무(朴梓茂)이고 딸은 주부(主簿) 이경윤(李慶胤)에게 시집갔다. 판결사(이복원)는 5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이지(李遲)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둘째 아들 이준(李遵), 셋째 아들 이적(李適)은 모두 참봉(參奉)이고 넷째 아들은 이형(李逈)이고 다섯째 아들 이건(李建)은 첨정(僉正)이고, 큰딸은 증(贈) 도승지(都承旨) 고종후(高從厚)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이근곤(李根坤)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김극전(金克銓)에게 시집갔다. 교관(敎官, 전극례(田克禮))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전현룡(田見龍)은 요사(夭死)하고 큰딸은 사인(士人) 홍처약(洪處約)에게 시집가고 막내딸은 선전관(宣傳官) 김기선(金起先)에게 시집갔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또 1백 40여 명이나 된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대아(大雅)의 시대가 멀어지니, 문장이 피폐되어 기교로 변했도다. 지식을 쌓지 않고 주워모아 엮은 것을 공으로 여기었도다. 보고 들은 것을 표절하니, 자신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었도다. 혹은 기특하면서도 어두웠고 혹은 화려하면서도 경박했도다. 오직 공은 학문을 쌓아 날마다 커져나갔도다. 위로 천리를 궁구하고 곁으로 백가(百家)를 탐색했도다. 그것이 문장으로 발휘되니, 혼후하면서도 빛났도다. 저 강물에다 비유하자면 근원이 깊어야 멀리 흘러가도다.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문예는 지엽적인 것이었도다. 집안에서 효도하고 우애하니, 말씀이 정연하고 행실이 깨끗했도다. 큰 근원을 깊이 생각하여 심오한 진리 탐색하였도다. 찾아와 나에게 구하면 수레의 지남철(指南鐵)과 같았도다. 사부(師傅)의 자리를 전담하기도 하고 왕명(王命)의 출납을 관장하기도 했도다. 반드시 임금의 계책을 빛나게 하니, 혜택이 사람들에게 미쳤도다. 밝은 시대에 침체되고 말았으니, 공이 복없는 것이 아니었도다. 후세의 사람들이 상고하려면 여기에 새긴 글을 볼지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승임 [朴承任]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나 정경세가 소시에 고(故) 교관(敎官) 전공(田公, 전극례(田克禮))에게 ≪한서(漢書)≫를 배울 적에 가르치고 난 여가에 고(故) 대사간(大司諫) 소고공(嘯皐公, 소고는 박승임의 호(號))의 일에 대해 껄껄 웃으며 싫증이 나지 않게 이야기하였는데, 그의 말씀에 의하면 ‘장인(丈人)께서는 사람됨이 차분하고 담담하여 사물을 좋아한 바가 없었으나 유독 글만 음식처럼 좋아하여 잠시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무릇 책을 사다가 혹시 임금이 하사한 것을 얻으면 구절마다 주묵(朱墨)을 찍으면서 하나하나 살피고 넘어갔다. 비록 ≪의례(儀禮)≫, ≪강목(綱目)≫,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처럼 책수가 엄청나게 많은 글도 대부분 수순(數旬)이 지나지 않아 다 읽었다.’고 하였다. 전공은 구차하게 말씀할 분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흠모하면서 선배들의 학문에 힘쓰는 정밀함과 근면함을 후학(後學)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을 거듭 탄식하였다. 그 뒤에 고(故) 학유(學諭) 김천영(金天英) 군과 같이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논하다가 기장(朞章)에 이르러 그가 어려운 글을 매우 쉽게 읽었는가 하면 산대[算]를 펼쳐 놓고 가감승제(加減乘除)를 하면서 손과 입이 상응(相應)하되 법에 맞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그 내력을 물어보았더니, 그가 말하기를, “일찍이 소고 선생에게 배웠다. 선생은 이른바 여기에 정통하여 묘리를 깨달은 분이었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서적에 정신을 쏟을 적에 사장(詞章)의 기억에만 주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그 문하에서 수업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불행으로 여기었다. 그런데 이번에 공의 아들 도사(都事, 박녹(朴漉))군이 공의 글과 김중청(金中淸) 군이 저술한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墓碣銘)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아! 이게 어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결국 굳이 사양하지 못한 것은 그의 부탁이 간곡할 뿐만 아니라 내가 평소 흠모한 마음을 스스로 보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성은 박씨(朴氏), 휘(諱)는 승임(承任), 자(字)는 중보(重甫)이고, 그의 선조(先祖)는 나주(羅州) 사람인데, 고려(高麗)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박상충(朴尙衷)의 후손이자 우리 조선조(朝鮮朝) 좌명 공신(佐命功臣) 좌의정(左議政)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의 6대손이다. 증조 휘 병균(秉鈞)은 사온서 영(司醞署令)으로 좌통례(左通禮)의 벼슬을 추증(追贈)받았고 할아버지 휘 숙(imagefont)은 부사직(副司直)으로 좌승지(左承旨)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아버지 휘 형(珩)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어머니 예안 김씨(禮安金氏)는 정부인(貞夫人)을 추증받았는데, 이는 모두 공의 귀(貴)로 인해 추증된 것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준수하고 남달랐다. 어렸을 때 ≪사략(史略)≫을 배우다가 묻기를, “무왕(武王)이 기왕 천하를 위해 폭군(暴君)을 정벌해 놓고 왜 은(殷)나라 종실 중에 미자(微子)처럼 어진 사람을 택하여 임금으로 세우지 않은 채 스스로 천하를 취하였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참판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었다. 15세가 안 되어 문장을 짓는 재능이 이미 뛰어나 향시(鄕試)를 보려고 하였으나 참판공이 너무나 빠른 것을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공이 변려문(騈儷文) 50여 구절을 지어 자신의 회포를 서술하였는데, 그 글을 보는 사람마다 모두 경탄(驚歎)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명성이 크게 났다. 누차 시험에 합격하여 나이 24세에 태학(太學)에 올라갔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임(選任)되었으며, 그 뒤 몇 년간 예문관(藝文館),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에 추천되어 대저 참하관(參下官)으로서 유명한 직책을 모두 역임하였고 심지어 정자(正字)에 임명되어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다.
가정(嘉靖)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에 성스러운 덕을 지닌 인종(仁宗)이 왕위에 오르자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만여 마디나 되는 차자(箚子)를 올려 ‘정치를 하는 기본과 시작을 바르게 하는 도리와 교화를 바꾸어 개혁하는 임무’에 대해 극도로 논하였는데, 공이 초안한 것이었다.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전직되었는데, 동료들이 어느 사람답지 않은 자를 전형(銓衡)의 자리로 끌어올리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반대하자, 곧바로 공을 정언으로 전직시키고 그 사람을 이조 좌랑에 앉히었다. 이보다 앞서 진복창(陳復昌)이 공이 중대한 명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끌어들이려고 매우 간절하게 요청하였으나 공이 끝내 만나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진복창이 지평(持平)이 되어 기세가 대단히 왕성하였으므로 공이 탄핵하려고 하자, 동료들이 놀라서 똑바로 쳐다보며 따르지 않았다. 그 이튿날 어버이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휴가를 요청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안 되어 체직되었는데, 진복창이 이기(李芑)를 사주하여 공에게 중죄(重罪)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다가 이항록(李亢祿)이 극력 구원하자, 예조 정랑의 벼슬만 파직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그 이듬해에 거듭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현풍 현감(玄風縣監)에 임명되었는데, 흉년이 든데다가 돌림병까지 유행하여 백성들이 많이 죽어갔다. 감사(監司)가 공이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고 하여 여러 고을을 구휼하는 일을 맡겼으므로, 공이 시체 속을 드나들면서 마음을 다해 구제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정사년(丁巳年, 1557년 명종 12년)에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로 전직되었다. 그때 윤원형(尹元衡)이 바야흐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공이 한직(閒職)에서 놀며 지내다가 문을 닫고 독서하면서 절대로 물들지 않았다. 그 이듬해에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나갔는데, 고을이 피폐하여 창고가 텅텅 비어 있었다. 더러 공에게 ‘마땅히 어사대(御史臺)에게 보고하여 축난 것을 전임(前任)에게 징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권하였으나, 공은 의리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자신의 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쓸데없는 경비를 줄여 충당하고 나서 적체된 곡물의 문건을 불태워버렸다. 임기가 차서 교감(校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는데, 그 뒤 얼마 안 되어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었다가 판교(判校)로 옮기었다.
을축년(乙丑年, 1565년 명종 20년)에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승진하고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전직되어 반년 있다가 체직되었으며, 그 뒤 얼마 안 되어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되었는데, 정사를 청정하게 보아 곤장을 때리지 않아도 호족이나 교활한 자들이 두려워서 움츠러들었다. 융경(隆慶) 기사년(己巳年, 1569년 선조 2년)에 공이 진하사(陳賀使)를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 고사(故事)에 사신이 예부(禮部)를 찾아가 인사하는 예절이 있었으나 홍로(鴻臚)에는 없었다. 목종(穆宗) 초기에 비로소 문관(文官)으로 홍로 경(鴻臚卿)을 삼아 그 임무를 중시하였으므로 예의상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신이 옛날의 관례만 따라 하였다. 홍로가 노하여 사신의 위치를 낮추어 승도(僧道) 등 잡류(雜流)의 서열 밑에 서도록 하였으나 사신이 머리를 숙이고 반열에 나간 채 변론하지도 않고 돌아왔다. 공이 도착하자 예부에 공문을 올려 왕복해 논변한 끝에 처음처럼 그 반열에 서게 되었다. 그 뒤에 주상이 명(明)나라의 통보를 보니, ‘조선의 사신이 실례하여 반열을 뛰어넘어 섰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므로 전후 역관(譯官)에게 염탐해 보라고 명하였는데, 그들이 모두 뒤에 간 사신 일행이 그렇게 하였다고 말하였으나 공이 끝내 밝히지 않았다. 주상이 연도(年度)를 상고하여 전에 간 사신 일행을 처벌하니, 사람들이 모두 선왕(先王)의 명철을 위대하게 여기고 공의 아량에 감복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년)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에 조정으로 들어와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도승지(都承旨)로 전직되었다가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에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경주에 태조(太祖)의 초상화를 모신 집경전(集慶殿)이 있었는데, 대소의 사람을 막론하고 보고 싶으면 곧바로 문을 열었다. 공이 ‘이처럼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알현하는 이외에는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하였다. 신라(新羅)의 폐원(廢苑)이 매우 광활하여 수백 말의 곡식을 파종할 수 있었는데도 그곳에다 채소를 심어 관용(官用)을 공급하기 때문에 참외가 질펀하였고 따라서 백성을 적지 않게 부렸다. 공이 그 땅 10에 9할을 떼어 둔전(屯田)을 만드니, 백성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기었다.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에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고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에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나갔다가 어떤 일로 인해 해직되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가 서원(書院)과 사당(祠堂)을 지어 모재(慕齋) 김공(金公, 김안국(金安國))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어떤 백성이 재산을 많이 축적해 놓고 어머니의 봉양을 박하게 하였는데, 공이 그를 붙잡아다 비유하여 타이르니, 그 사람이 이마를 조아리며 죄를 인정하고 그 뒤로 어머니를 신중히 섬기어 효성으로 이름이 났다.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병환이 나 사직하고 돌아왔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있다가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어 각자가 자신의 무리를 위해 배제하거나 지원하였다. 공이 어떤 일을 논하였다가 주상의 비위를 거슬려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임기가 차기 전에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허락하였는데, 모두 특별히 명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에 병환이 나 향년 70세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 공이 살던 영천군(榮川郡) 동쪽 임구촌(林丘村) 동향(東向)의 자리에 묻히었는데, 그곳은 공의 외할아버지 김만일(金萬鎰)의 묘소 아래였다. 그 뒤에 그 고장의 사람들이 공의 덕을 사모하여 지역에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공은 풍채가 준수하고 국량이 넓었으며 묵중하여 말이 적었고 희노(喜怒)를 드러내지 않았다. 병환이 나지 않으면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사람들이 오래도록 같이 있어도 그 한계를 엿보지 못하였다. 서책 중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특히 ≪논어(論語)≫ 및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주력하여 의문점이 있을 때마다 기록해 놓고 반복해 자세히 연구하여 반드시 시원하게 알려고 하였는데, 일찍이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에게 질의하였을 적에 인정해 준 바가 많았다. 퇴계 이 선생이 편찬한 ≪계몽전의(啓蒙傳疑)≫는 제가(諸家)가 논한 상수(象數)를 수취(收聚)한 것이어서 그 뜻이 은미하여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하나하나 연구하여 각각 그 뜻을 꿰뚫었는가 하면 성위(星緯), 산수(算數) 등의 일에 있어서도 모두 이해하여 정밀 숙달하였는데, 이처럼 한 가지 기예(技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성품이 담박한 것을 좋아하여 따뜻하고 배부르면 만족하였으므로 거처하는 집안이 쓸쓸하였다. 도성에 있을 적에는 남의 집을 임대하여 거처하였으나 태연히 의식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경솔하게 논평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할 적에도 공무가 끝나면 바로 돌아왔고 돌아오면 문을 닫고서 학문에 마음을 쏟았다. 자제들이 혹시 시사(時事)에 대해 물어보면 ‘너희들이 간여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였고, 후학들이 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정성을 쏟아 가르쳤다.
문장을 지음에 있어 뛰어나서 남들이 놀라게끔 꾸미지 않고 도도(滔滔)하게 써 내려가 유의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정밀하고 굳건하고 전중하고 진실하여 자연히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었지만 또한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부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경유하는 객사(客舍)에 대해 시를 짓지 않았고 가끔 화답하는 시를 지어도 현판(懸板)을 만들어 걸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다. 중년(中年) 이후로 더욱더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뜨고 경박하게 하므로 유의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공문심법(孔門心法)≫, ≪유취강목(類聚綱目)≫, ≪심법(心法)≫ 등이 있었으나 탈고(脫稿)되지 않았고 문집(文集) 네 권만 세상에 간행되었다.
공의 부인 정부인(貞夫人) 예천 권씨(醴泉權氏)는 집의(執義) 권오기(權五紀)의 딸인데, 효성스럽고 근검하여 매우 부도(婦道)가 있었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다가 야위어 병환이 나 53세에 세상을 떠나 다른 곳에 장사를 치렀다가 공이 죽은 뒤에 곁에다 이장하였다. 큰아들 박어(朴漁)는 요사(夭死)하고 둘째 아들 박녹(朴漉)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고 셋째 아들 박조(朴澡)는 진사(進士)이고, 박개(朴漑)는 측실(側室)의 소생이다. 큰딸은 증(贈) 판결사(判決事) 이복원(李復元)에게 시집가고 막내딸은 전극례(田克禮)에게 시집갔는데, 전극례는 바로 공의 일에 대하여 싫증나지 않게 이야기한 사람이다. 도사(박녹)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박회무(朴檜茂)는 의금부 도사이고 둘째 아들 박종무(朴樅茂)는 진사(進士)이며, 딸은 찰방(察訪) 김기선(金幾善)에게 시집갔다. 진사(박조)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재무(朴梓茂)이고 딸은 주부(主簿) 이경윤(李慶胤)에게 시집갔다. 판결사(이복원)는 5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이지(李遲)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둘째 아들 이준(李遵), 셋째 아들 이적(李適)은 모두 참봉(參奉)이고 넷째 아들은 이형(李逈)이고 다섯째 아들 이건(李建)은 첨정(僉正)이고, 큰딸은 증(贈) 도승지(都承旨) 고종후(高從厚)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이근곤(李根坤)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김극전(金克銓)에게 시집갔다. 교관(敎官, 전극례(田克禮))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전현룡(田見龍)은 요사(夭死)하고 큰딸은 사인(士人) 홍처약(洪處約)에게 시집가고 막내딸은 선전관(宣傳官) 김기선(金起先)에게 시집갔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또 1백 40여 명이나 된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대아(大雅)의 시대가 멀어지니, 문장이 피폐되어 기교로 변했도다. 지식을 쌓지 않고 주워모아 엮은 것을 공으로 여기었도다. 보고 들은 것을 표절하니, 자신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었도다. 혹은 기특하면서도 어두웠고 혹은 화려하면서도 경박했도다. 오직 공은 학문을 쌓아 날마다 커져나갔도다. 위로 천리를 궁구하고 곁으로 백가(百家)를 탐색했도다. 그것이 문장으로 발휘되니, 혼후하면서도 빛났도다. 저 강물에다 비유하자면 근원이 깊어야 멀리 흘러가도다.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문예는 지엽적인 것이었도다. 집안에서 효도하고 우애하니, 말씀이 정연하고 행실이 깨끗했도다. 큰 근원을 깊이 생각하여 심오한 진리 탐색하였도다. 찾아와 나에게 구하면 수레의 지남철(指南鐵)과 같았도다. 사부(師傅)의 자리를 전담하기도 하고 왕명(王命)의 출납을 관장하기도 했도다. 반드시 임금의 계책을 빛나게 하니, 혜택이 사람들에게 미쳤도다. 밝은 시대에 침체되고 말았으니, 공이 복없는 것이 아니었도다. 후세의 사람들이 상고하려면 여기에 새긴 글을 볼지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승임 [朴承任]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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