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선생문집(嘯皐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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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2회 작성일 22-07-22 08:32본문
유물명 소고선생문집(嘯皐先生文集) 유물형태 고도서
기탁자 크기 28.2×18.9
『소고선생문집(嘯皐先生文集)』은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문집이다. 박승임은 본관이 반남(潘南),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로 경상북도 영주출신이다. 형(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만일(萬鎰)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0년(중종 35) 24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을 역임하고, 정자(正字)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어 수찬에 승진되고,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당시 세도가인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고, 1557년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하여 벼슬에서 은퇴,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힘썼다. 이어 다시 벼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치다 1583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언사(言事)에 연루, 왕의 뜻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 얼마 뒤 중앙에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한때 많은 시작활동이 있었으나, 중년 이후로는 사람을 부박(浮薄)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를 중지하고 심학(心學)에 주력하며 실천적 수행에 힘썼다. 또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이에 관한 여러 선현들의 설을 모아 책으로 엮어내는 등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성리학적 견해는 주로 스승 이황의 학설을 따라 주리론(主理論)의 경향을 보였다. 경상북도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경상북도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집 외에 『성리유선(性理類選)』, 『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 『강목심법(綱目心法)』 등이 있다.
권1에는 賦와 詩, 권2에는 詩가 실려있다. 권1에는 4편의 賦와 1541년 豐基 郡守로 부임하는 周世鵬을 전송하는 詩로 시작하여 권2에는 1569년 使行 때의 詩作인 觀光錄이 있으며 1576년에 졸한 鄭惟一의 挽詞를 끝으로 하고 있다. 挽詞가 여러 편 실려있는데 仁宗大王挽章과 退溪先生挽詞도 눈의 뜨인다. 권3에는 序2편, 跋 1편, 記 2편, 書 4편, 雜著 8편, 祭文 6편, 권4에는 碑銘, 墓誌가 13편 실려있다. 산문의 내용은 「江界府晦齋先生祠堂記」, 「榮川鄕校重修記」, 「上左相安玹書」, 「代紹修書院有司上戶曹書」, 「答星州牧使盧慶麟書」, 「紹修書院畫像改修識」, 「鄕校歌謠」 등 모두 書院을 비롯한 교육과 관련된 글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기탁자 크기 28.2×18.9
『소고선생문집(嘯皐先生文集)』은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문집이다. 박승임은 본관이 반남(潘南),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로 경상북도 영주출신이다. 형(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만일(萬鎰)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0년(중종 35) 24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을 역임하고, 정자(正字)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어 수찬에 승진되고,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당시 세도가인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고, 1557년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하여 벼슬에서 은퇴,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힘썼다. 이어 다시 벼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치다 1583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언사(言事)에 연루, 왕의 뜻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 얼마 뒤 중앙에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한때 많은 시작활동이 있었으나, 중년 이후로는 사람을 부박(浮薄)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를 중지하고 심학(心學)에 주력하며 실천적 수행에 힘썼다. 또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이에 관한 여러 선현들의 설을 모아 책으로 엮어내는 등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성리학적 견해는 주로 스승 이황의 학설을 따라 주리론(主理論)의 경향을 보였다. 경상북도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경상북도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집 외에 『성리유선(性理類選)』, 『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 『강목심법(綱目心法)』 등이 있다.
권1에는 賦와 詩, 권2에는 詩가 실려있다. 권1에는 4편의 賦와 1541년 豐基 郡守로 부임하는 周世鵬을 전송하는 詩로 시작하여 권2에는 1569년 使行 때의 詩作인 觀光錄이 있으며 1576년에 졸한 鄭惟一의 挽詞를 끝으로 하고 있다. 挽詞가 여러 편 실려있는데 仁宗大王挽章과 退溪先生挽詞도 눈의 뜨인다. 권3에는 序2편, 跋 1편, 記 2편, 書 4편, 雜著 8편, 祭文 6편, 권4에는 碑銘, 墓誌가 13편 실려있다. 산문의 내용은 「江界府晦齋先生祠堂記」, 「榮川鄕校重修記」, 「上左相安玹書」, 「代紹修書院有司上戶曹書」, 「答星州牧使盧慶麟書」, 「紹修書院畫像改修識」, 「鄕校歌謠」 등 모두 書院을 비롯한 교육과 관련된 글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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