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박승임(1517~86) [不遷位 기행 ] 소고 박승임(1517~1586) > 소고선생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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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박승임(1517~86) [不遷位 기행 ] 소고 박승임(1517~1586) > 소고선생 발자취

소고 박승임(1517~86) [不遷位 기행 ] 소고 박승임(1517~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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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4회 작성일 22-07-03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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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宰相宅 문앞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소고의 대표적 저서인 '강목심법(綱目心法·왼쪽)’과 '성리유선(性理類選)’.
'천지가 어두워지더니 시월인데 서리 내리고/찬바람은 비 머금고 높은 고갯길에 불어오네/낙엽은 방자하게 뒹굴기를 반복하며/바람소리는 섬돌을 치고 깎는 듯/궁한 선비 가난하여 단벌 옷뿐이라/한 해가 저물어 가니 심정은 더욱 어려운 지경일세/반 칸 방에 불 못 때니 얼음장 같고/깨진 잔에 거미줄 친 것 민망스레 보노라/어리석은 아내 나의 생계 소홀함 꾸짖고/헛되이 밝은 창 향해 좀 먹은 책 펼치노라/아녀자들이 어떻게 궁달의 이치를 알까/만사가 하늘에 달렸으니 한 번 빙그레 웃노라/봄은 응당 심한 추위 뒤에 오나니/잠깐 동안 눈을 감고 인내하는 것 뿐이네’

조선중기문신이자 학자인 소고(嘯皐) 박승임(1517∼86)의 시 '시월에 오는 비(十月雨)’다. 지조 있는 선비, 가난한 선비, 청렴한 선비였던 그의 내면과 삶을 엿보게 하는 시다.


40여년 벼슬생활 동안 청빈한 삶 일관

권력층의 청탁에 털끝만한 동요도 없어

퇴계문하서 학습…천문·수학에도 조예


◆30년 서울 벼슬생활 동안 셋방 전전

소고는 청빈한 생활 속에 굳게 지킨 지조를 끝까지 더럽히지 않았다. 벼슬생활을 40여년 동안 했지만, 고향에는 기와집 하나 남기지 않았고, 약간의 척박한 땅이 있을 뿐이었다. 서울 벼슬 30여년 동안에도 여기저기 셋집을 얻어서 가난한 살림을 꾸려갔다. 간혹 봉급이 좀 저축되면 즉시 서적과 바꾸었다.

천성이 사치스러운 풍악이나 여색에는 담담하였다. 음식에 대해서도 특별하게 즐기는 것이 없었으며, 맛나고 맛없는 것을 따지지 않고 차리는 대로 먹었다. 그 맛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입에 맞지 않더라도 굶주림을 모면하는 정도로 먹는 것을 편안하게 여겼다. 입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몸에 맞으면 그뿐이었다. 그는 늘 “우리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너무 사치하여 허비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평상시에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으며, 온종일 앉아 있어도 마치 소상(塑像)처럼 단정했다. 말끔한 책상과 따스한 난로가 있고, 온 벽은 책으로 가득 채워졌으며, 고개 숙여 글을 읽고 머리 들어 생각하면서 언제나 정중해 털끝만한 동요도 없었다.

마을에 집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재상댁(宰相宅)인 줄 아무도 모를 정도로 문 앞이 항상 조용했다.

중앙의 요직에 있는 인사들이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바가 있어도 조금도 생각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과 칭찬이 분분하였고, 사람들이 간혹 그의 고루하고 막힌 것을 경계하면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리고 지역유지로 교활하게 굴며 권세에 기대는 자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과 다른 비난을 불러들이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움직일 수 없었다.

효심도 지극해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지방관으로 근무할 것을 임금께 청하고 애타게 기다렸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버이를 여의게 되며, 그 후에 지방관을 나갔지만 효도를 할 부모는 이미 이 세상에 없어 애통해할 뿐이었다.

◆대사간 사직을 요청하며 왕에게 항소

1583년(선조 16년) 7월에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당시 삼사(三司)와 정원(政院)이 영의정 박순과 병조판서 이이를 논척(論斥)하는 상황이었다.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이이가 병권을 농단했다는 죄목으로 공격을 받았는데, 박순·성혼이 이이를 변호하다 함께 대사간의 공격을 받았다. 이 해 7월16일 대사간 송응개가 이이의 잘못을 극론(極論)하다가 이이를 두둔하는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물러나게 되고, 소고가 그날로 대사간이 되었다.

당시 관례는 전 대사간이 파직되었지만, 그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동료들의 지지를 받을 경우 신임 대사간도 전임자의 주장을 고집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따라서 소고를 비롯한 대사간이 출사를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고집하자, 한 달 뒤 소고는 대사간에서 파직되고 창원부사로 좌천되었다.

소고는 동료들과 함께 그들을 논박하며 여러번 임금께 사퇴를 요청했다. 당시 소고가 임금께 올린 항소(抗疏) 중 일부다.

'신이 실성하여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무고하게 대신의 행위를 감히 공격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평상심을 가지시고 굽어 살피신다면 신 등이 부득이 항론(抗論)을 편다는 사실을 반드시 훤하게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언관(言官)이 전하의 위엄에 겁을 먹고 당장 항론을 중단한다면 신 등에게 일신상의 이익은 되겠지만, 사직을 위해서는 무슨 복이 되겠습니까. 근래에 전하의 노여움이 바야흐로 높아서 대신이 배척되고 경연에서 간쟁을 맡은 신하가 잇따라 바깥으로 내쫓겼고, 오늘에 와서는 승정원이 일시에 혁퇴(革退)되었습니다. 이러한

소고 박승임 사후(死後)에 영주지역 유림이 세운 소고 사당. 현재의 사당(영주시 고현동)은 광복 이후 이건한 것이며, 사당에는 소고 부부신주만 봉안돼 있다.

소고 사당 내부 모습. 소고 불천위 제사는 다른 종가와 달리 사당에서 지낸다. 그래서 신주 감실 앞에 제수 진설을 위한 큰 제사상이 마련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정을 목도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저의 몸에 이로운 줄 결코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감히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전하께서 신에게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국사의 위험을 거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의 견마지성(犬馬之誠)을 살피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사심이 있다고 의심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벼슬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빨리 신의 직을 파하소서.’

그의 성품과 지조를 엿보게 하는 항소문이다.

◆퇴계 이황이 소고의 가문에 '淸白傳家’ 글 선물

13세에 대학과 논어를, 15세에 서전(書傳)을 읽고 여러 차례 향시에 장원한 그는 1537년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운다. 그 후 1540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이조 좌랑, 사간원 정언, 현풍 현감, 진주 목사 등을 역임했다. 1544년에는 호당(湖堂: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촉망되는 젊은 문사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게 한 제도)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당시 함께 사가독서의 특전을 받은 이는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소재 노수신 등이었다.

자신의 서재에 천문도를 붙여두고 수시로 우러러보며 관찰한 소고는 천문학에도 밝았고, 수학에도 뛰어났다. 이런 그는 1545년(인종 원년) 왕으로부터 역법을 교정하라는 특명을 받기도 했다.

1569년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명나라 수도(베이징)에 갔다. 그런데 우리나라 축하 사신의 자리 배치를 승려와 도사(道士) 등 잡류 아래에 두었다. 명나라 관리의 농간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함께 간 상사(上使)와 서장관은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소고는 분개하며 항의 공문을 작성해 역관을 관할 관청인 예부(禮部)에 두 번이나 보내 결국 이를 바로잡았다. 이같은 성과에는 그의 탁월한 문장과 논리가 큰 뒷받침이 되었다.

퇴계는 이러한 소고의 인품과 학문을 높이 평가해 '영유소고 풍유금계(榮有嘯皐 豊有錦溪)’라고 표현했다. 영주와 풍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소고 박승임과 금계 황준량을 각각 꼽은 것이다. 그리고 퇴계는 또한 소고의 아우인 박승륜에게 소고의 청백리 정신을 기려 '청백전가(淸白傳家)’라는 글을 써 주기도 했다.

소고는 별세 이틀 전인 1586년 1월4일 제자들을 불러들여 말했다. “나의 학문이 본래 매우 엉성하고 나약한데도 제군들이 낮밤으로 상종하였으니, 부끄러움이 많다."

저서로 '소고집’ '성리유선(性理類選)’'강목심법(綱目心法)’'천문도(天文圖)’ 등을 남겼다.


■박승임 약력

△1517년 영주 본가에서 출생 △1522년 모친에게 '효경’ 배움 △1525년 64괘와 효사(爻辭) 작성 △1534년 한성시(漢城試) 장원 △1540년 생원시·진사시 합격, 문과 급제 △1544년 호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1547년 사헌부 지평, 임금을 모시고 '春秋’ 강의 △1558년 풍기군수 겸 춘추관편수관 △1560년 성주목사 △1561년 소백산 유람 △1583년 사간원 대사간, 창원부사 △1586년 영주 자택에서 별세 △1600년 문집 발간


■'소고 불천위’이야기

이것이 선비…소고의 제자 9명 모두 壬亂 참전

소고 불천위는 그의 사후 20여년 후인 1600년대 초반에 지역 유림이 공의를 모아 결정한 것으로 후손들은 보고 있다.

소고 종택(영주시 고현동)은 한옥이 아니라, 경북지역 종택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양옥 2층 건물이다. 물론 오래전부터 양옥이었던 것은 아니고, 근래 지은 건물이다. 종택 옆에 있는 사당은 한옥이다. 사당도 유림이 불천위로 받들면서 마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당이 당초에는 부근의 다른 곳에 있었으나 수해로 터가 훼손되면서, 광복 후 현재 위치로 옮겼다.

소고 불천위 제사(음력 1월5일)는 합설로 지내며, 자시(子時)에 시작된다. 제관은 20∼30명. 제사는 대부분의 다른 종가와 달리 사당에서 지낸다.

소고의 15대 종손 박찬우씨(1955년생)는 대구에서사업을 하다 지난 연말 종택으로 들어왔다.

소고의 후손인 박찬극 영주문화원장은 소고에 대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청렴했던 소고 선생은 재물이나 재산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돌리며 응대 안할 정도였고, 글을 잘 해도 글 자랑를 절대 하지 않고 글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후손들도 선조의 그런 정신을 이어받아 가난해도 곧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고 들려줬다. 그리고 소고는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정성을 다했는데, 많은 제자들이 서울까지 찾아와서 공부를 배웠고, 그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받은 대표적 제자 9인 모두 임란에 참전하는 모범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출처] 소고 박승임(1517~86) |작성자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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