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78] 삼판서고택의 두 번째 판서 황유정 기자명 이원식 기자 입력 202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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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3-09-03 05:44본문
삼판서고택의 두 번째 판서는 고려말 판서를 지낸 ‘황유정’
황유정이 살던 초곡마을(휴천3동 속칭 사일)
황유정은 정운경의 사위로 한성판윤·공조·형조·예조 판서 지내
호 미균은 ‘먹을 것이 하늘’이라는 말을 정책에 반영한 목민관
내외직 벼슬 두루 거친 후 영주로 낙향해 ‘소쇄헌’ 현판 걸어
삼판서고택의 첫 번째 판서는 정도전의 아버지로 고려말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이고, 두 번째 판서는 고려말 한성판윤‧공조‧형조‧예조 판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이다. 그는 첫 번째 판서인 정운경의 사위이면서 정도전의 여동생 남편이기도 하다.
영주의 평해 황씨
황유정(1343~1421)은 평해 황씨다. 영주의 평해 황씨는 고려말 문과 급제로 영해 부사를 지낸 황원로(黃原老, 6세, 1260~?)가 본향 평해(平海)로부터 이곳 영주의 남쪽 초곡(草谷, 지금 사일)에 첫 터전을 열었다고 전한다.
원로의 아들 근(瑾, 1302~?)이 공민왕 때 문과 급제로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내고, 손자 유정(有定)은 공민왕 때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의 사위로, 문과에 올라 예조‧공조‧형조전서에 이르렀으며, 그는 장인의 가장(家庄)을 물려받아 영주 읍내로 옮겨 살았으니, 바로 그 집이 유명한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다.
유정의 맏아들 전(銓)이 학행으로 사헌부지평‧청도군수를 지냈고, 둘째 현(鉉)이 조선조에 생원-문과 중시(重試)에 뽑혀 대사성을 지냈으며, 셋째 연(鋋)이 생원으로 순흥훈도를 지냈다.
황유정의 묘-이산면 두월리(黃墳土, 덕동)
황유정의 선대
황유정은 고려 예문관제학을 지낸 황근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흥 안씨로 문정공 안축(安軸)의 딸이다. 선생은 휘(諱)가 유정(有定)이고 호(號)는 미균(米囷)이며 본관은 평해이다. 그의 호(米囷)에는 쌀 미(米)자가 들어가 있다. 백성들에게 ‘먹을 것이 하늘’이라는 말을 정책에 반영하고 실천한 ‘목민관’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영주의 평해 황씨는 시조(黃洛)의 장남 갑고(甲古) 기성군(箕城君)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그 후 계대가 분명치 않아 갑고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금오장군과 태자검교를 지낸 황온인(黃溫仁)을 기세조(起世祖, 중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2세 황우정이 군기서윤, 3세 황유중이 문하시중, 4세 황진이 검교군기감을 각각 지냈다.
5세는 황지정이고, 6세 황원로(黃原老)가 문과에 급제해 영해부사를 지냈다. 그가 이곳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 초곡리(草谷里, 현 휴천3동 속칭 사일)로 옮겨와 터를 열었는데 이분이 바로 황유정의 할아버지이다. 황원로(1260生)가 영해부사를 마치고 영주로 옮겨 왔다고 하니 그때가 아마도 1310년~1320년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미균 황선생을 기리기 위한 추원재(追遠齋, 덕동)
황유정의 외가
황유정의 성장과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그의 외가(外家)라 할 수 있다.
황유정의 외가는 순흥 안씨로 외조부가 「관동별곡」을 지은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2~1348)이고, 안헌(安軒)‧안보(安輔)‧안집(安輯)은 외종조부들이며, 외삼촌이 안종원(安宗源)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의 배움을 받으면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안축은 고향 죽계에서 기반을 다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 유학층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근재는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한 순흥이 배출한 인물로 안향에 이어 소수서원 문성공묘에 배향됐다.
황유정의 처가
황유정은 조선 개국의 1등 공신인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을 처남으로 두었다.
그의 처가는 봉화정씨로 장인은 공민왕 때 형부상서를 지낸 염의(廉義) 정운경(鄭云敬)이다. 봉화정씨는 고려 시대 호부령(戶部令)을 지낸 정공미(鄭公美)를 시조로 한다. 2세인 정영찬(鄭英粲)은 비서랑동정(祕書郞同正)을 지냈고, 3세 정균(鄭均)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으며, 4세인 정운경(鄭云敬, 1305∼1366)은 정도전의 아버지이며, 황유정의 장인이다.
정운경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삼봉 정도전이고, 둘째는 정도존, 셋째가 정도복이며, 딸은 황유정에 시집보냈다.
정도전이 부모상을 당해 4년여 동안 시묘살이를 마치고 삼각산으로 돌아갈 때(1369년)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을 동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고 전한다. 이때 구산 아래 살던 고향집(지금의 삼판서고택)은 여동생에게 주고 떠남으로써 나중에 「삼판서고택」이란 이름이 태어나게 한 단초(端初)가 됐다.
황유정의 어린시절
황유정은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겸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낸 황근(黃瑾, 1302生)과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딸인 순흥 안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황유정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할아버지(황원로, 1260生) 대에 본향 평해로부터 영주로 옮겨 왔다는 기록에 근거할 때 영주 초곡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유정이 12세인 1355년(고려 공민왕 4년) 안동도회(安東都會)에서 시를 지었고 이를 본 시관이 과거 응시를 권유했다. 그 후 과거에 급제했지만, 벼슬에는 나가지 않고 오직 글 읽기만 즐겼다. 특히 논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공조판서 미균 황선생 신도비(덕동)
문과(文科)에 오르다
황유정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글 읽기만을 좋아해 잠들기 전에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미균의 과거급제는 〈평해황씨대동보〉에는 고려조에, 〈풍기구보〉에는 조선 초에 등제(登第)했다고 적었다.
공양왕 2년 경오(庚午, 1390)에 작성된 영천(지금의 영주) 장적(帳籍, 호적대장)에는 의하면, 당시 황유정은 48세에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낼 때 단정 청렴해 백성들이며 아전들이 오래도록 그 덕을 기렸다고 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논어(論語)를 즐겨 읽었으며, 시문에 뛰어나 당인(唐人, 중국인)의 풍조가 있었다.
그가 12살에 안동 도회(都會:유림의 모임)에 나가 지은 「병서(病署)」라는 제(題)의 시(詩)에 「先秋後夏天若問(선추후하천약문) 朝三暮四吾從狙(조삼모사오종저)」라고 썼다. [가을을 먼저, 여름을 뒤에 둘까 하늘이 묻는다면, 조삼모사라, 나는 원숭이를 따르련다.] 이 시를 보고 고관(考官)이 놀라 장원으로 뽑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후 미균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예조전서와 공조전서, 형조전서를 지냈다. 그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다고 하며, 이후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나이가 들어 병(病)을 이유로 사직하고 낙향해 영주의 구성 아래 자택에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이것이 곧 삼판서고택이다.
위선사업 헌성비와 헌성록(덕동)
황유정의 유적 찾기
황유정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외적으로 원명(元明) 교체기였으며, 대내적으로는 려말선초의 혼란한 시대였다. 그 후 수많은 난리와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선생에 관한 문헌은 보존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후손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삼판서고택이 이전 복원되고, 덕동에 묘소를 관리할 추원재가 건립되는 등 역사의 흔적을 모아 선생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초곡 본가에 살다가 장인(정운경) 장모(영주우씨)가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치른 후 삼판서고택을 이어받았으니 그때가 공민왕 14년(1365)이다. 그 후 문과 급제 후 벼슬길로 나가 초계군수를 비롯한 여러 판서직과 목민관을 두루 거친 후 나이 들어 영주로 낙향해 자택(삼판서고택)에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을 걸었다고 하니 이때는 1400년대 초로 추정된다.
그 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판서고택을 사위 김소량(金小良, 김담의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초곡 본가로 가서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선생이 나이 들어 80세이던 1422년(세종14) 어느 날 지팡이를 짚고 사위집을 찾았는데 그날 외손자 김담(金淡)을 만나 지은 시(詩)가 지금 삼판서고택 대청 벽에 걸려 있다.
황유정의 묘역은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을좌지원(乙坐之原)으로 황분토(黃墳土, 덕동)에 있다.
이산면 덕동마을 위쪽 묘역 초입에는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추원재(追遠齋)’와 ‘공조판서미균선생신도비’, 위선사업헌성비(헌성록) 등이 있다.
동편 앞산 중턱에 있는 황유정의 묘에는 ‘자헌대부 공조판서 평해황공‧정부인 봉화정씨 지묘’비가 있고 왼쪽 옆에는 사헌부 지평을 지낸 장남 전(銓),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차남 현(鉉), 승의랑 순흥훈도를 지낸 3남 연(鋋)의 제단비가 나란히 서 있다.
황유정이 살던 초곡마을(휴천3동 속칭 사일)
황유정은 정운경의 사위로 한성판윤·공조·형조·예조 판서 지내
호 미균은 ‘먹을 것이 하늘’이라는 말을 정책에 반영한 목민관
내외직 벼슬 두루 거친 후 영주로 낙향해 ‘소쇄헌’ 현판 걸어
삼판서고택의 첫 번째 판서는 정도전의 아버지로 고려말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이고, 두 번째 판서는 고려말 한성판윤‧공조‧형조‧예조 판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이다. 그는 첫 번째 판서인 정운경의 사위이면서 정도전의 여동생 남편이기도 하다.
영주의 평해 황씨
황유정(1343~1421)은 평해 황씨다. 영주의 평해 황씨는 고려말 문과 급제로 영해 부사를 지낸 황원로(黃原老, 6세, 1260~?)가 본향 평해(平海)로부터 이곳 영주의 남쪽 초곡(草谷, 지금 사일)에 첫 터전을 열었다고 전한다.
원로의 아들 근(瑾, 1302~?)이 공민왕 때 문과 급제로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내고, 손자 유정(有定)은 공민왕 때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의 사위로, 문과에 올라 예조‧공조‧형조전서에 이르렀으며, 그는 장인의 가장(家庄)을 물려받아 영주 읍내로 옮겨 살았으니, 바로 그 집이 유명한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다.
유정의 맏아들 전(銓)이 학행으로 사헌부지평‧청도군수를 지냈고, 둘째 현(鉉)이 조선조에 생원-문과 중시(重試)에 뽑혀 대사성을 지냈으며, 셋째 연(鋋)이 생원으로 순흥훈도를 지냈다.
황유정의 묘-이산면 두월리(黃墳土, 덕동)
황유정의 선대
황유정은 고려 예문관제학을 지낸 황근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흥 안씨로 문정공 안축(安軸)의 딸이다. 선생은 휘(諱)가 유정(有定)이고 호(號)는 미균(米囷)이며 본관은 평해이다. 그의 호(米囷)에는 쌀 미(米)자가 들어가 있다. 백성들에게 ‘먹을 것이 하늘’이라는 말을 정책에 반영하고 실천한 ‘목민관’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영주의 평해 황씨는 시조(黃洛)의 장남 갑고(甲古) 기성군(箕城君)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그 후 계대가 분명치 않아 갑고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금오장군과 태자검교를 지낸 황온인(黃溫仁)을 기세조(起世祖, 중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2세 황우정이 군기서윤, 3세 황유중이 문하시중, 4세 황진이 검교군기감을 각각 지냈다.
5세는 황지정이고, 6세 황원로(黃原老)가 문과에 급제해 영해부사를 지냈다. 그가 이곳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 초곡리(草谷里, 현 휴천3동 속칭 사일)로 옮겨와 터를 열었는데 이분이 바로 황유정의 할아버지이다. 황원로(1260生)가 영해부사를 마치고 영주로 옮겨 왔다고 하니 그때가 아마도 1310년~1320년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미균 황선생을 기리기 위한 추원재(追遠齋, 덕동)
황유정의 외가
황유정의 성장과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그의 외가(外家)라 할 수 있다.
황유정의 외가는 순흥 안씨로 외조부가 「관동별곡」을 지은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2~1348)이고, 안헌(安軒)‧안보(安輔)‧안집(安輯)은 외종조부들이며, 외삼촌이 안종원(安宗源)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의 배움을 받으면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안축은 고향 죽계에서 기반을 다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 유학층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근재는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한 순흥이 배출한 인물로 안향에 이어 소수서원 문성공묘에 배향됐다.
황유정의 처가
황유정은 조선 개국의 1등 공신인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을 처남으로 두었다.
그의 처가는 봉화정씨로 장인은 공민왕 때 형부상서를 지낸 염의(廉義) 정운경(鄭云敬)이다. 봉화정씨는 고려 시대 호부령(戶部令)을 지낸 정공미(鄭公美)를 시조로 한다. 2세인 정영찬(鄭英粲)은 비서랑동정(祕書郞同正)을 지냈고, 3세 정균(鄭均)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으며, 4세인 정운경(鄭云敬, 1305∼1366)은 정도전의 아버지이며, 황유정의 장인이다.
정운경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삼봉 정도전이고, 둘째는 정도존, 셋째가 정도복이며, 딸은 황유정에 시집보냈다.
정도전이 부모상을 당해 4년여 동안 시묘살이를 마치고 삼각산으로 돌아갈 때(1369년)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을 동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고 전한다. 이때 구산 아래 살던 고향집(지금의 삼판서고택)은 여동생에게 주고 떠남으로써 나중에 「삼판서고택」이란 이름이 태어나게 한 단초(端初)가 됐다.
황유정의 어린시절
황유정은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겸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낸 황근(黃瑾, 1302生)과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딸인 순흥 안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황유정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할아버지(황원로, 1260生) 대에 본향 평해로부터 영주로 옮겨 왔다는 기록에 근거할 때 영주 초곡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유정이 12세인 1355년(고려 공민왕 4년) 안동도회(安東都會)에서 시를 지었고 이를 본 시관이 과거 응시를 권유했다. 그 후 과거에 급제했지만, 벼슬에는 나가지 않고 오직 글 읽기만 즐겼다. 특히 논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공조판서 미균 황선생 신도비(덕동)
문과(文科)에 오르다
황유정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글 읽기만을 좋아해 잠들기 전에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미균의 과거급제는 〈평해황씨대동보〉에는 고려조에, 〈풍기구보〉에는 조선 초에 등제(登第)했다고 적었다.
공양왕 2년 경오(庚午, 1390)에 작성된 영천(지금의 영주) 장적(帳籍, 호적대장)에는 의하면, 당시 황유정은 48세에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낼 때 단정 청렴해 백성들이며 아전들이 오래도록 그 덕을 기렸다고 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논어(論語)를 즐겨 읽었으며, 시문에 뛰어나 당인(唐人, 중국인)의 풍조가 있었다.
그가 12살에 안동 도회(都會:유림의 모임)에 나가 지은 「병서(病署)」라는 제(題)의 시(詩)에 「先秋後夏天若問(선추후하천약문) 朝三暮四吾從狙(조삼모사오종저)」라고 썼다. [가을을 먼저, 여름을 뒤에 둘까 하늘이 묻는다면, 조삼모사라, 나는 원숭이를 따르련다.] 이 시를 보고 고관(考官)이 놀라 장원으로 뽑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후 미균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예조전서와 공조전서, 형조전서를 지냈다. 그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다고 하며, 이후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나이가 들어 병(病)을 이유로 사직하고 낙향해 영주의 구성 아래 자택에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이것이 곧 삼판서고택이다.
위선사업 헌성비와 헌성록(덕동)
황유정의 유적 찾기
황유정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외적으로 원명(元明) 교체기였으며, 대내적으로는 려말선초의 혼란한 시대였다. 그 후 수많은 난리와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선생에 관한 문헌은 보존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후손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삼판서고택이 이전 복원되고, 덕동에 묘소를 관리할 추원재가 건립되는 등 역사의 흔적을 모아 선생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초곡 본가에 살다가 장인(정운경) 장모(영주우씨)가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치른 후 삼판서고택을 이어받았으니 그때가 공민왕 14년(1365)이다. 그 후 문과 급제 후 벼슬길로 나가 초계군수를 비롯한 여러 판서직과 목민관을 두루 거친 후 나이 들어 영주로 낙향해 자택(삼판서고택)에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을 걸었다고 하니 이때는 1400년대 초로 추정된다.
그 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판서고택을 사위 김소량(金小良, 김담의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초곡 본가로 가서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선생이 나이 들어 80세이던 1422년(세종14) 어느 날 지팡이를 짚고 사위집을 찾았는데 그날 외손자 김담(金淡)을 만나 지은 시(詩)가 지금 삼판서고택 대청 벽에 걸려 있다.
황유정의 묘역은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을좌지원(乙坐之原)으로 황분토(黃墳土, 덕동)에 있다.
이산면 덕동마을 위쪽 묘역 초입에는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추원재(追遠齋)’와 ‘공조판서미균선생신도비’, 위선사업헌성비(헌성록) 등이 있다.
동편 앞산 중턱에 있는 황유정의 묘에는 ‘자헌대부 공조판서 평해황공‧정부인 봉화정씨 지묘’비가 있고 왼쪽 옆에는 사헌부 지평을 지낸 장남 전(銓),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차남 현(鉉), 승의랑 순흥훈도를 지낸 3남 연(鋋)의 제단비가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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