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씨왕조에서 이씨조선 개국과정 역사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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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85회 작성일 22-03-19 09:51본문
고려멸망,조선건국과정-태조 이성계 가계도,부인,아버지-정몽주 단심가,삼봉 정도전,이방원 하여가,목은 이색-금속활자,최무선화약,위화도회군배경,철령위설치,정몽주 정도전,정몽주 이방원
고려를 생각하면 무신정권아래서도 원나라에 대항도 하고 공민왕때는 금속활자 인쇄본을 만들고, 최무선(1325~1395)이 화약을 만들 정도로 과학도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신정권에 이은 왕들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호족출신 관료들도 부패를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유럽에서는 왕만 바꾸기에 왕조의 이름만 바뀝니다, 그런데 고려는 국가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을 본뜬 것일 수도 있지만 중국은 지배층 종족이 바뀌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여 왕조이름만 바꾸고 나라명은 그대로 이어갔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봅니다, 그래서 정몽주의 생각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왕의 계승도 서로 치열한 싸움을 통하여 이루어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적자가 이을 질 경우에는 반역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영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랭커스터가와 요크가가 그렇고 웨일스 출신인 헨리7세도 해당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왕조는 귀족 의회가 없었던 프랑스와 유사하다고 하지만 프랑스도 왕조명만 바뀝니다,
고려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새로 만들어서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것은 루이 14세(1638,1643~1715)가 낭트 칙령(종교자유인정,앙리4세 1598년)을 1685년에 폐지하여 개신교를 믿었던 우수한 인재들이 스위스 등지로 떠나게 한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고려 왕씨왕조에서 이성계 등극과정
이성계(1335,1392~1398,1408)의 아버지 이자춘(1315~1361?)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고려 동북면 알동천호소에서 출생하였고, 아버지는 이춘(?~1342)이었으며 자신은 원나라의 다루가치(고려 후기에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민정(民政) 담당자)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려 공민왕이 1356년에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부원세력이였던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으라하며 고려에 동조하여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어 고려의 조정에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 가계도 /이성계는 이자춘의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임/ 이성계 아버지와 자식들
이자춘은 첫 번째 부인은 한산 이씨(생몰년 미상)로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1330~1388) 차남(생몰년미상) 장녀(생몰년 미상)입니다,
이자춘의 두 번째 부인이 이성계의 친어머니로 의혜왕후 최씨로 출생년도는 미상이며, 자식으로는 1남1녀를 두었는데, 이성계(1335,1392~1398,1408)가 첫아들이며, 여동생인 정화공주(생몰년 미상)입니다,
이자춘의 세 번째부인이 정빈 김씨이며 4남 의안대군(1348~1408)을 두었습니다, 이자춘의 네 번째부인은 미상이며 아들도 있었지만 1394년에 죽었습니다,
공민왕 몽골점령지 /쌍성총관부 공격 (1356년)/ 이성계와 아버지 이자춘 / 고려 조정에 등장/ 쌍성총관부
1356년 5월 공민왕(즉위 5년)은 유인우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지금 함경남도 남부)의 공격을 명령했는데,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당시 고려인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고 있던 공민왕보다 5살이 어린 21살 이성계(1335,1392~1398,1408)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5년뒤 46살에 죽음,1315~1361?)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는데, 이를 계기로 이자춘 부자와,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 등이 고려 정계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성계 가계도/ 부인과 아들,딸/ 이성계의 부인과 자식들
이성계(1335,1392~1398,1408)의 첫 번째 부인은 나중에 신의왕후로 추존되는 한씨(1337,결혼1351,1391)로 6남2녀를 낳았는데, 장남 진안대군 방우(1354~1393), 차남 방과 정종(1357,1398~1400,1419), 3남 익안대군 방의(1360~1404), 4남 회안대군 방간(1364~1421, 2차 왕자의 난), 5남 태종 이방원(1367,1400~1418,1422), 6남 덕안대군(?), 장녀 경신공주(?~1426), 차녀 경선공주(?)입니다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은 권문세가 출신 규수로 후에 조선의 첫왕비 신덕왕후(결혼날짜 미상,추측 1377?)가 되는 강씨(1356,1392~1396)로 1녀 2남을 낳았는데, 장녀 경순공주(?~1407), 장남 무안대군 방번(1381~1398.9,1차 왕자의 난 죽음), 차남 첫왕세자 의안대군 방석(1382,1392.8~1398.9, 1차 왕자의 난에서 죽음)입니다,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는 시기가 1392년 8월인데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의 차남인 10살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도 1392년 8월입니다, 첫부인사이에서 장남인 38살 방우도 살아있고 이성계 등극의 1등공신인 5남 25살 방원마저 제외하고서 등극하자말자 10살의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이 드는 이성계의 처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방석의 어머니 신덕왕후가 이성계가 등극하고 4년만에 죽는 바람에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이고 정권을 잡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운명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포은 정몽주/ 과거 장원급제(1360)
포은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년) 19살에 어사대부 신군평이 주관하는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 9년) 22살에 문과에서 세 번의 시험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포은 정몽주 (1338~1392) /정몽주와 조선의 성리학 계보/ 정몽주 아버지 정운관(?~1355)/ 정몽주 어머니:변한국대부인 영천 이씨/ 동생: 정과 예조판서(? - 1392)/ 동생: 정후(鄭厚)/ 동생: 정도(鄭蹈)
정몽주 부인: 경순택주경주 이씨 (?~1392.12, 판사사 이사약의 딸)/ 장남 정종성(1374~1442)/ 차남 정종본(1377~1443)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년) 19살에 어사대부 신군평이 주관하는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 9년) 22살에 문과에서 세 번의 시험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였으며, 예문관 검열·수찬 등을 거쳐 1362년 다시 예문관검열, 직한림원이 되었습니다,
1364년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치는 데 종군하고 돌아왔는 데, 이때 정몽주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나 후일 혁명방법을 놓고 갈등하게 됩니다,
1368년 정몽주가 30살에 명나라가 건국되자, 그는 명나라가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임을 들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명나라와 국교를 체결하게 됩니다
대사성 이색(1328~1396)이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칭하였고,훗날 조선시대에 가서 중국에서 들어온 다른 유교의 경전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을 비교할 때 틀린 곳이 없어 사람들이 정몽주를 동방 성리학의 실질적인 창시자 또는 성리학의 시조로 보게 됩니다,
신돈(1323,1365~1369,1371)이 신진사류를 발탁하게 되면서 정몽주 역시 요직에 앉게 되나, 신돈 등이 몰락하고 그의 일파들이 처형될 때 정몽주도 신돈의 일파라는 누명이 나돌게 됩니다,
1371년 신진사류의 정치적 성장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신돈이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는 커다란 정세 변화가 있었지만, 정몽주를 비롯한 그들은 중국대륙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몽주는 신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신돈 암살 이후 신돈이 신진사류를 적극 채용한 일로 엮여져서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후에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모략을 하는데 가담, 협력하는데 동참하게 되지만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에는 반대하다 54살에 25살 이방원(1367,1400~1418,1422)에게 죽습니다,
공민왕 암살 진압 (1363년)/ 최영,이성계
1363년(공민왕 12년) 김용이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공민왕의 할아버지인 충선왕 3째 얼자아들, 공민왕의 삼촌뻘)과 내응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장군에 의해 진압되자, 덕흥군은 1364년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하지만, 이들은 최영장군(1316~1388)과 이성계(1335,1392~1398,1408)에 의해 섬멸됩니다,
삼봉 정도전 문과 급제(1363년)/ 정도잔과 그의 글씨
정도전(1342~1398)은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18살에 성균시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 1362년 20살에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21살에 관직에 나갔습니다.
신돈(1323,1365~1369,1371)이 공민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가 1365년에서 1369년사이이기에, 정도전도 신돈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에 등용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진족 격퇴(1364년)/ 이성계 장군/ 여진족 격퇴
1364년(공민왕 13년)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 김삼개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29살 이성계(1335,1392~1398,1408)와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습니다,
이 때 26살 정몽주(1338~1392)도 이성계를 따라 여진을 치는 데 종군하고 돌아왔는 데, 이때 정몽주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나 후일 이성계가 고려개혁과정을 거쳐 왕으로 등극을 하려고 하자 이성계측과 갈등하게 됩니다,
원나라 공격 방어(1364년)/ 최영장군/ 연주 위치
1364년(공민왕 13년)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는데,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48살 최영장군(1316~1388)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습니다,
노국공주 난산 죽음(1365)/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
1365년 공민왕(즉위14년)이 35살이 되는 해에 자신이 즉위하기 2년 전에 결혼했던 노국공주가 난산 중에 사망을 하자 모든 일을 놓고 술과 여자에 빠지게 됩니다.
공민왕 아들/ 우왕 출생(1365년)
공민왕이 신돈에게 정사 맡김(1365~1369)
공민왕은 자신보다 7살이 많은 신돈(1323~1371)의 시녀인 반야를 좋아하게 되어 우왕(1365,1374~1388,1389)을 낳게 됩니다(고려사 기술, 공민왕은 후궁 한씨의 소생이라고 선언). 이 후 공민왕은 신돈
(1323,1365~1369,1371)에게 모든 정사를 맡깁니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말도 이성계 이후 조선에서 기술한 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이기에 신빙성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다만 공민왕이 우왕은 후궁의
소생이라고 말한 기록은 있습니다,
신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을 보시길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hongyw/222460897531
공민왕 가계도,공민왕릉-부인 노국공주,아들 우왕,손자 창왕,아버지 충숙왕,어머니 홍씨 공원왕후,명덕태후,형 충혜왕,조카 충정왕,충목왕-신돈,반야,전민변정도감-고려 마지막왕,공양왕
공민왕은 무신정권이 끝이나고 원종이 원나라에 기울면서 원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집니다, 그리고 원종의 ...
신돈에 의한 전민변정도감 설치 (1366년) /토지환수 분배/ 노비 양민환원
1366년 5월 신돈(1323,1365~1369,1371)이 토지개혁을 주관하는 관청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부당하게 겸병(남의 토지를 합쳐서 가짐)당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강압 탓에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되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신돈이 성리학 우대 /성균관 중건 개축 보수(1367년)
신돈이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 정몽주,정도전 중용
1367년 공민왕에게 명령받아 성균관을 중건, 개축, 보수하였으며, 신진사대부의 지도자인 이색을 적극추천하여 성균관 대사성으로 발탁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신돈(1323,1365~1369,1371)은 권문세족과 척신세력들을 제어하였으나 성리학의 이념을 부정하지는 않았고 개혁 성향이 강한 신진 유학자인 이색(1328~1396, 공민왕 개혁 주도자인 이제현 제자),
정몽주(1338~1392), 정도전(1342~1398)이 진출하게끔 후원하여 이 사람들이 성균관을 근거로 삼아 중용합니다,
정도전은 신돈이 정치 전면에 나서자 정계에서 물러났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저도 궁금해집니다, 역사 전문학자들이 발표를 해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목은 이색(1328~1396)
목은 이색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7세 때(1335, 충숙왕 복위4)부터 독서를 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 이곡(1298~1351)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익제 이제현을 찾아가 정주학을 배웠고, 이제현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입니다,
이제현의 문하생 중에 수제자로 이름났던 이색은 14세(1341, 충혜왕 복위2)에 자신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성총(1318~미상)에게 시를 배운 적이 있으며, 같은 해인 1341년 13살 성균시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간을 유학하고 있던 중 1351년에 아버지의 상(喪)을 입자 귀국을 하였습니다,
1352년(공민왕 1) 24살 이색은 학문의 경향과 정견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공민왕에게 제출하였고 25살인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갑과(3등 이내)로 급제하였으며, 다시 정동행성 향시에 장원(1등)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뒤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 지제고가 되었습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김구용 등과 명륜당에서 송나라의 정호와 주자의 학문과 예법에 대한 것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던 것이고, 이때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하륜 등이 그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이색은 권문세족의 전횡을 비판하여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적극 협력하였고, 또한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1371년(공민왕 20년) 정당문학이 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다시 1373년(공민왕 22) 한산군으로 지명되었다가, 다시 1377년(우왕 3)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이라는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1388년 이성계에 의한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 개혁 논의에서 사전 혁파(관료에게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줌, 단 당대에 한함)에 반대했는데, 이것은 많은 토지를 보유한 계층인 이색의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이색은 우왕 폐위 이후 창왕 옹립에 앞장섰기에, 공양왕 옹립 이후 정치적 공격을 받게 되며, 그 뒤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폐가 입진(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말로, 고려 말 이성계등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사건.)을 명분으로 우왕을 폐위하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공양왕 때 함안으로 귀양 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지명되어 예문춘추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귀양지에서 선왕(공민왕)에 대한 그리움과 많은 문인들 중 사랑하는 제자인 유창에게 느낀 심정을 읊은 시가
목은 시고권지35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색은 역성혁명파의 역성 혁명에 협력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인들은 혁명참여파와 절의파로 나누어졌으며, 이 때문에 한 때 제자였던 정도전과 조준, 남은은 그의 정적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이후 정도전은 이색과 우현보, 정몽주에게 격렬한 논조로 비판을 하게 됩니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피살되자 연좌되었으나 정도전은 이색을 구하지 않았으며, 그이색은 이후 다시 금천·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습니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는 이색의 재능을 아껴 1395년(조선 태조 4) 한산백으로 임명하여 예를 다하여 조정에 나오기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한 고려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다음 해인 1396년 68살에 피서차 여주로 가던중 여강(오늘날 섬강)의 배 안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으므로 그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의혹을 남기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설은 정도전이 보낸 부하 자객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명나라 건국(1368년)/ 이인임이 명과 함께 원나라 잔존세력 공략
신돈은 많은 개혁을 하여 권문세력으로부터 온갖 모략을 받지만 결국은 역모가 발각되어 죽습니다, 이 신돈(1323,1365~1369,1371)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기간 중 공민왕(1330,1351~1374)이 38살이 되던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이 되는 데 이때 공민왕은 이인임(나이를 모름)을 요동에 보내어 명나라와 함께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공략합니다,
명나라 건국 (1368) 원나라가 북원으로 존재/ 북원 멸망(1388)
1368년 난징에서 주원장(1328,1368~1398)이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 이와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징)에 육박하자, 몽골인들은 도저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368년 원나라 토곤 테무르는 대도(지금의 베이징)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1320,1333~1370)가 북쪽으로의 이동하기에 원 왕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정권은 이후에도 몽골고원에서 북원으로 존속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왕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 이후의 원 왕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와 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하였는데,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자 쿠빌라이 이래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자, 1271년에 건국한 원나라는 117년만인 1388년에 멸망합니다,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1372년)
1372년(공민왕 21)에 백운화상 경한이 임제종 18대 법손 석옥청공(石屋淸珙) 화상(和尙)으로부터 받아 온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증보하여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은 것입니다,
백운화상이 입적하고 3년 뒤인 1377년에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찍어 낸 것이 초인본(初印本)이며, 이는 현존하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금속활자본은 현재 하권만이 전해지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간본(古刊本)으로는 1378년 백운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 간행한 목판본이 있는데, 목판본은 1992년 4월 20일
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상하권 1책이 각각 소장되어 있습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
구텐베르크는 1440년 경에 금속 활판 인쇄술을 사용한 독일의 금(金) 세공업자입니다,
1448년 마인츠에 인쇄소를 개업하여 가톨릭교회의 면죄부를 찍어 팔았는데, 이후, 고딕 활자를 사용하여 최초로 36행의 라틴어 성서, 즉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하였다고합니다,
1453년경 다시 보다 작고 발전된 활자로 개량한 후, 2회에 걸쳐 42행의 구약 성서를 인쇄하였는데, 이 책에서 나타난 우수한 인쇄 품질로 그는 호평을 받았으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위해 95개조 반박문(1517년)을 써서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문에 붙였는데, 이 글은 활판 인쇄술에 의해 대량으로 인쇄되어 두 주 만에 독일 전역에,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논리를 널리 퍼트려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민왕 죽음 이후(1330,1351~1374) 고려 멸망까지 이인임 섭정(1374~1386)
우왕(1365,1374~1388,1389)은 9살에 등극하여 14년을 통치하는 데 등극하여 9년간은 공민왕의 시해범들을 잡은 공로가 있던 이인임(?~1388)이 1386년까지 섭정을 하고 물러났지만 이인임의 일파였던 임견미, 염흥방 등은 탐학과 부패를 더욱 극악무도하게 일삼아 고려 조정의 몰락을 초래하게 됩니다
최무선 화약 발명(1377)
우왕 3년(1377년) 10월, 화통도감(화약국)이 처음으로 설치되어, 화통도감의 제조로서 52살 최무선(1325~1395)은 총포류를 개발하고, 발사용 화기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였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함포를 실을 수 있도록 전함 개량에도 힘을 쏟았으며, 또한 화기 이용에 대한 교육에도 힘써 화기발사의 전문부대로 보이는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이 편성되었습니다,
이성계 아들 5남 이방원16살 문과 급제(1383년) 이방원글씨
1382년(우왕 9년) 이성계의 5남인 15살 이방원(1367,1400~1418,1422)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16살에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을 당시, 아버지 48살 이성계(1335,1392~1398,1408)와 어머니 46살 한씨 부인(1337,결혼1351,1391)이 매우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첫만남 (1383년) 정도전과 이성계
1383년 가을, 41살 정도전(1342~1398)은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 도지휘사 48살 이성계(1335,1392~1398,1408)를 찾아갑니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출정했던 정몽주(1338~1392)
로부터 이성계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입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됩니다,
삼봉 정도전(1342~1398) 정도전과 그의 글씨
정도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1305년 ~ 1366년)/ 정도전 어머니/ 정경부인 영주 우씨/ 누이 : 봉화 정씨/ 매부 : 황유정(1343~1421)/ 동생 : 정도존(?~1398)/ 동생 : 정도복(1351~1435)
정도전 부인: 경숙택주 경주 최씨 장남 : 형조판서 증 우찬성 희절공 정진(1361~1427) 차남 : 정영(? ~ 1398년)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동 431번지)에서 출생하였고 1347년에서 1348년까지 그 자신의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1년간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정도전의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직위를 지낸 정운경 선생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 선생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조모가 노비 출신이라서 출신 성분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 붙곤 했습니다,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18살에 성균시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 20살인 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21살인 1363년 관직에 나갔습니다
1365년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우 씨가 1366년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습니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고,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습니다,
1367년 공민왕이 신돈에게 정치를 맡기고 있을 때에 신돈이 성균관을 중건하고 그해 목은 이색(1328~1396)이 대사성이 되자, 1370년 정도전은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며,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습니다
신돈의 사리사욕에 치우친 행동에 보고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였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에 정도전은 재등용되었습니다
1374년(공민왕 24)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는데,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나라가 이때는 북원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때 그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으며, 또한 그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문란이 정치 경제 사회의 폐해가 극심함으로 불교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1375년(우왕 1년)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북원)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으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북원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고,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했으나 정도전은 사신영접을 거부했습니다,
이때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임·경복흥 등이 원나라와의 이중 통교를 주장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해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 등 권신의 노여움을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 거평부곡으로 유배되었는데 , 그 유배지에서 정도전은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리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유랑하며 지내다가 ,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가집을 짓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습니다,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후 부평부 남촌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고.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경기도 김포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유배와 유랑 살이를 통하여 향민과 사우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하기도 했는데, 이때 정도전은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고 합니다,
1383년 가을, 정도전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입니다,
이인임 사임(1386년)
우왕(1365,1374~1388,1389)은 9살에 등극하여 14년을 통치하는 데 등극하여 9년간은 공민왕의 시해범들을 잡은 공로가 있던 이인임(?~1388)이 1386년까지 섭정을 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인임파 숙청/ 이인임 병사 (1388)
이인임이 사임한 이후에도 이인임의 일파였던 임견미, 염흥방 등은 탐학과 부패를 더욱 극악무도하게 일삼아 고려 조정의 몰락을 초래하다가 1388년 이러한 횡포에 분격한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하여 그의
일당이 축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인임은 최영의 건의로 경산부에 안치되었으며 곧 병사(1388년 6월, 사임하고 2년 후)하였습니다,
원나라가 북원으로 존재하다/북원 멸망(1388)
북원(北元, 1368년 ~ 1635년)은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밀려 몽골 고원의 초원지대로 돌아간 이후의 원나라를 부르는 말입니다,
1368년 원 순제(토곤 테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상도(上都)로 패주했다. 1370년 토곤 테무르는 응창(應昌)에서 죽었습니다, 이로써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던 것입니다
토곤 테무르의 아들인 원 소종(元昭宗)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이후 코케 테무르가 죽고,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퇴하고, 1388년 브이르 노르의 동북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소종의
뒤를 이은 동생 토구스 테무르도 투울 강 기슭에서 살해되었던 것입니다. 이 후로는 대칸으로 명목으로 1635년까지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성계 위화도회군 (1388년 6월)
고려 조정은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나라와, 안으로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1316~1388.12)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는데,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1335,1392~1398,1408)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1391)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 장군에게 회군을 거듭 청했습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6월 24일 군사를 수도 개경으로 돌려 회군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조민수는 이성계의 전제개혁에 대항하다 서인으로 강등되고,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창녕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1391년에 죽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왕이 등극한지 14년이 되어 23살이 되는 해 1388년 요동을 정벌하러 간 53살의 이성계(1335,1392~1398,1408)가 1388년에 회군을 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1367,1400~1418,1422)은 21살이며 (이방원은 15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 위화도회군을 하는 해인 1388년 이색과 함께 신년축하사절인 정조사로 중국을 다녀 왔음) 위화도 회군 시에는
가족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이 당시 이성계의 첫째부인으로 이방원의 친어머니인 한씨(1337,결혼1351,1391)로 51살이며, 장남 진안대군 방우(1354~1393)는 34살, 차남 방과 정종(1357,1398~1400,1419)은 31살, 3남 익안대군
방의(1360~1404)는 28살, 4남 회안대군 방간(1364~1421, 2차 왕자의 난 유배)은 24살 , 5남 태종 이방원(1367,1400~1418,1422)은 21살이였습니다,
그리고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은 권문세가 출신 규수로 후에 조선의 첫왕비 신덕왕후(결혼날짜 미상,추측 1377?)가 되는 강씨(1356,1392~1396)는 32살, 장녀 경순공주(?~1407), 장남 무안대군
방번(1381~1398.9,1차 왕자의 난 죽음)은 7살, 차남 첫왕세자 의안대군 방석(1382,1392.8~1398.9, 1차 왕자의 난에서 죽음)은 6살이었습니다,
우왕폐위 /최영장군 유배 후 처형(1388년 12월) 묘는 일산 근처에 있습니다
이성계(1335,1392~1398,1408)보다 2살이 적은 51살의 정몽주(1337~1392)와 정몽주보다 5살 아래인 정도전(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서 23살의 우왕을 폐위시키고 72살의 최영장군(1316~1388.12)은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리고 최영장군은 유배된 지 2달 만에 개경으로 불려와서 처형을 당하는데 이 최영장군의 딸이 우왕의 후궁이였습니다,
우왕도 폐위를 당하고 여주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폐위 1년 만에 살해를 당해 24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창왕 폐위 우왕과 창왕을 죽임(1389)
우왕(1365,1374~1388,1389)이 15살에 낳은 아들인 창왕(1380,1388~1389)이 우왕의 뒤를 이어 8살의 나이로 등극하지만 재위 1년 만에 우왕과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하였다는 죄목으로 강화도로
유배가 되어 거기서 살해를 당해 9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이때 우왕과 창왕을 이성계가 죽이면서 이 두 왕은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고 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우왕이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면서 후계자로 선언하였습니다,
공양왕 등극(1389년)
54살 이성계(1335,1392~1398,1408)에 의해 폐위된 9살 창왕(1380,1388~1389)을 이은 44살 공양왕(1345,1389~1392,1394)은 고려의 마지막왕으로 고려 20대 왕인 신종의 둘째아들의 6대손으로 등극을 하여
3년을 통치한 후 1392년 정몽주(1337~1392.4)가 죽고 4개월 후 폐위가 됩니다,
정도전 봉화 유배(1391년)
1391년에 56살 이성계(1335,1392~1398,1408)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49살 정도전(1342~1398)은 삼군도총제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게 됩니다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상소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도로 몰아 제거한 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 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과 우현보 등을 신우와 신창
(우왕과 창왕을 말한다)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합니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했었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정도전은 거듭 그들을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습니다,
1391년 9월 49살 정도전(1342~1398)은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54살 정몽주(1337~1392) 등이 정도전을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하여, 정도전은 봉화로 유배당하게 됩니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정몽주의 탄핵 내용을 접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되고,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을
당해 평민이 되었습니다,
이때 정몽주는 김진양을 사주하여 사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정도전을 처형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공양왕이 이를 듣지 않았고 1392년(공양왕 4년)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정몽주가 1392년에 이방원에 의해 암살되고 난 후 1392년 6월에 유배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복직하였다
정몽주 암살(1392.4)/ 정도전 복직(1392.6) 공양왕폐위(1392.8)/ 공양왕 죽음(1394)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정성군(?~1394)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평양과 개성사이)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의 아들 25살 이방원(1367,1400~1418,1422)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를 합니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하는데,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55살 정몽주(1337~1392)와 25살 이방원(1367,1400~1418,1422)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와 《하여가》입니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습니다,(이 이야기는 모호합니다)
정몽주의 단심가/ 이방원의 하여가
1392년 4월 이성계의 집을 방문,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선죽교
정몽주는 역적으로 단죄되고, 수급과 시신은 바로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베어져 개경의 저잣거리에 매달려졌다. 그의 시신은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우현보와 송악산의 중들에 의해 수습되어 승려들이
염습한 뒤 개경 풍덕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일 경기도 용인 능원리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충성을 뜻하는 대나무가 자랐다고 해서 선죽교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포은 정몽주의 죽음을 놓고 이성계가 이방원을 비토했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책망하였다고도 합니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만은 반대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정몽주를 보면 세조 때 성삼문이 생각납니다, 성상문은 세조가 김종서를 죽인 것에는 동조를 하는데 단종을 몰아내는 것에는
목숨을 걸고 반대합니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좋아했고 정몽주도 이성계에 동조를 하였지만 왕이 되는 것에는 반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리학을 굳게 믿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방원도 태종으로 등극한 후 정몽주를
복원시킨 것을 보면 그의 충절만은 존경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55살 정몽주(1337~1392)가 죽자 공양왕은 47살에 57살의 이성계에 의해 폐위를 당하고,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때 이방원은 25살이며 정도전은 50살입니다,
공양왕은 폐위를 당한 후 강원도 원주와 강릉을 거쳐 삼척으로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폐위된 지 2년 만에 조선 개국하고 2년뒤에 49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이 당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성계도 없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자말자 정도전과 두 번째 부인의 말을 듣고 두 번째 부인의 차남이었던 10살 방석(1382,1392.8~1398.9, 1차 왕자의 난에서 죽음)을 세자로 책봉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이성계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흔히 정도전이 신하들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고 하지만 그 생각에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신하라는 사람들이 백성에 의해 선발되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통해 선발되는 사람들이기에 결국은 그들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정도전이 영국 헨리 3세(1207,1216~1272)시절
헨리 3세의 처남인 시몽드 몽포르(1208~1265)처럼 지방호족들로 구성된 의회를 구성(1265년)하였다면 왕과 귀족이 서로 견제를 할 수가 있었기에 동의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 봉건사회도 강력한 중앙집권형태의 왕이 등장할 때 나라가 성장하였던 것을 보며는 민주제도라는 것이 오늘날의 개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성계등극(1392.8)
고려라는 나라는 이성계(1335,1392~1398,1408)가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한 후 4년 만에, 공민왕이 죽고 18년 만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474년 만인 1392년 8월에공양왕(1345,1389~1392,1394)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은 후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57살 이성계에 의해 그 문이 닫힙니다.
국호 조선으로 개명(1393.2)/ 한양으로 도읍이전(1394)
1393년 2월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치기 시작합니다,
조선왕조
[출처] 고려멸망,조선건국과정-태조 이성계 가계도,부인,아버지-정몽주 단심가,삼봉 정도전,이방원 하여가,목은 이색-금속활자,최무선화약,위화도회군배경,철령위설치,정몽주 정도전,정몽주 이방원|작성자 연우
고려를 생각하면 무신정권아래서도 원나라에 대항도 하고 공민왕때는 금속활자 인쇄본을 만들고, 최무선(1325~1395)이 화약을 만들 정도로 과학도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신정권에 이은 왕들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호족출신 관료들도 부패를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유럽에서는 왕만 바꾸기에 왕조의 이름만 바뀝니다, 그런데 고려는 국가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을 본뜬 것일 수도 있지만 중국은 지배층 종족이 바뀌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여 왕조이름만 바꾸고 나라명은 그대로 이어갔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봅니다, 그래서 정몽주의 생각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왕의 계승도 서로 치열한 싸움을 통하여 이루어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적자가 이을 질 경우에는 반역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영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랭커스터가와 요크가가 그렇고 웨일스 출신인 헨리7세도 해당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왕조는 귀족 의회가 없었던 프랑스와 유사하다고 하지만 프랑스도 왕조명만 바뀝니다,
고려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새로 만들어서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것은 루이 14세(1638,1643~1715)가 낭트 칙령(종교자유인정,앙리4세 1598년)을 1685년에 폐지하여 개신교를 믿었던 우수한 인재들이 스위스 등지로 떠나게 한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고려 왕씨왕조에서 이성계 등극과정
이성계(1335,1392~1398,1408)의 아버지 이자춘(1315~1361?)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고려 동북면 알동천호소에서 출생하였고, 아버지는 이춘(?~1342)이었으며 자신은 원나라의 다루가치(고려 후기에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민정(民政) 담당자)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려 공민왕이 1356년에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부원세력이였던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으라하며 고려에 동조하여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어 고려의 조정에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 가계도 /이성계는 이자춘의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임/ 이성계 아버지와 자식들
이자춘은 첫 번째 부인은 한산 이씨(생몰년 미상)로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1330~1388) 차남(생몰년미상) 장녀(생몰년 미상)입니다,
이자춘의 두 번째 부인이 이성계의 친어머니로 의혜왕후 최씨로 출생년도는 미상이며, 자식으로는 1남1녀를 두었는데, 이성계(1335,1392~1398,1408)가 첫아들이며, 여동생인 정화공주(생몰년 미상)입니다,
이자춘의 세 번째부인이 정빈 김씨이며 4남 의안대군(1348~1408)을 두었습니다, 이자춘의 네 번째부인은 미상이며 아들도 있었지만 1394년에 죽었습니다,
공민왕 몽골점령지 /쌍성총관부 공격 (1356년)/ 이성계와 아버지 이자춘 / 고려 조정에 등장/ 쌍성총관부
1356년 5월 공민왕(즉위 5년)은 유인우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지금 함경남도 남부)의 공격을 명령했는데,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당시 고려인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고 있던 공민왕보다 5살이 어린 21살 이성계(1335,1392~1398,1408)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5년뒤 46살에 죽음,1315~1361?)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는데, 이를 계기로 이자춘 부자와,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 등이 고려 정계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성계 가계도/ 부인과 아들,딸/ 이성계의 부인과 자식들
이성계(1335,1392~1398,1408)의 첫 번째 부인은 나중에 신의왕후로 추존되는 한씨(1337,결혼1351,1391)로 6남2녀를 낳았는데, 장남 진안대군 방우(1354~1393), 차남 방과 정종(1357,1398~1400,1419), 3남 익안대군 방의(1360~1404), 4남 회안대군 방간(1364~1421, 2차 왕자의 난), 5남 태종 이방원(1367,1400~1418,1422), 6남 덕안대군(?), 장녀 경신공주(?~1426), 차녀 경선공주(?)입니다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은 권문세가 출신 규수로 후에 조선의 첫왕비 신덕왕후(결혼날짜 미상,추측 1377?)가 되는 강씨(1356,1392~1396)로 1녀 2남을 낳았는데, 장녀 경순공주(?~1407), 장남 무안대군 방번(1381~1398.9,1차 왕자의 난 죽음), 차남 첫왕세자 의안대군 방석(1382,1392.8~1398.9, 1차 왕자의 난에서 죽음)입니다,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는 시기가 1392년 8월인데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의 차남인 10살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도 1392년 8월입니다, 첫부인사이에서 장남인 38살 방우도 살아있고 이성계 등극의 1등공신인 5남 25살 방원마저 제외하고서 등극하자말자 10살의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이 드는 이성계의 처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방석의 어머니 신덕왕후가 이성계가 등극하고 4년만에 죽는 바람에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이고 정권을 잡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운명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포은 정몽주/ 과거 장원급제(1360)
포은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년) 19살에 어사대부 신군평이 주관하는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 9년) 22살에 문과에서 세 번의 시험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포은 정몽주 (1338~1392) /정몽주와 조선의 성리학 계보/ 정몽주 아버지 정운관(?~1355)/ 정몽주 어머니:변한국대부인 영천 이씨/ 동생: 정과 예조판서(? - 1392)/ 동생: 정후(鄭厚)/ 동생: 정도(鄭蹈)
정몽주 부인: 경순택주경주 이씨 (?~1392.12, 판사사 이사약의 딸)/ 장남 정종성(1374~1442)/ 차남 정종본(1377~1443)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년) 19살에 어사대부 신군평이 주관하는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 9년) 22살에 문과에서 세 번의 시험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였으며, 예문관 검열·수찬 등을 거쳐 1362년 다시 예문관검열, 직한림원이 되었습니다,
1364년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치는 데 종군하고 돌아왔는 데, 이때 정몽주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나 후일 혁명방법을 놓고 갈등하게 됩니다,
1368년 정몽주가 30살에 명나라가 건국되자, 그는 명나라가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임을 들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명나라와 국교를 체결하게 됩니다
대사성 이색(1328~1396)이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칭하였고,훗날 조선시대에 가서 중국에서 들어온 다른 유교의 경전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을 비교할 때 틀린 곳이 없어 사람들이 정몽주를 동방 성리학의 실질적인 창시자 또는 성리학의 시조로 보게 됩니다,
신돈(1323,1365~1369,1371)이 신진사류를 발탁하게 되면서 정몽주 역시 요직에 앉게 되나, 신돈 등이 몰락하고 그의 일파들이 처형될 때 정몽주도 신돈의 일파라는 누명이 나돌게 됩니다,
1371년 신진사류의 정치적 성장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신돈이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는 커다란 정세 변화가 있었지만, 정몽주를 비롯한 그들은 중국대륙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몽주는 신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신돈 암살 이후 신돈이 신진사류를 적극 채용한 일로 엮여져서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후에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모략을 하는데 가담, 협력하는데 동참하게 되지만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에는 반대하다 54살에 25살 이방원(1367,1400~1418,1422)에게 죽습니다,
공민왕 암살 진압 (1363년)/ 최영,이성계
1363년(공민왕 12년) 김용이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공민왕의 할아버지인 충선왕 3째 얼자아들, 공민왕의 삼촌뻘)과 내응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장군에 의해 진압되자, 덕흥군은 1364년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하지만, 이들은 최영장군(1316~1388)과 이성계(1335,1392~1398,1408)에 의해 섬멸됩니다,
삼봉 정도전 문과 급제(1363년)/ 정도잔과 그의 글씨
정도전(1342~1398)은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18살에 성균시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 1362년 20살에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21살에 관직에 나갔습니다.
신돈(1323,1365~1369,1371)이 공민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가 1365년에서 1369년사이이기에, 정도전도 신돈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에 등용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진족 격퇴(1364년)/ 이성계 장군/ 여진족 격퇴
1364년(공민왕 13년)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 김삼개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29살 이성계(1335,1392~1398,1408)와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습니다,
이 때 26살 정몽주(1338~1392)도 이성계를 따라 여진을 치는 데 종군하고 돌아왔는 데, 이때 정몽주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나 후일 이성계가 고려개혁과정을 거쳐 왕으로 등극을 하려고 하자 이성계측과 갈등하게 됩니다,
원나라 공격 방어(1364년)/ 최영장군/ 연주 위치
1364년(공민왕 13년)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는데,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48살 최영장군(1316~1388)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습니다,
노국공주 난산 죽음(1365)/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
1365년 공민왕(즉위14년)이 35살이 되는 해에 자신이 즉위하기 2년 전에 결혼했던 노국공주가 난산 중에 사망을 하자 모든 일을 놓고 술과 여자에 빠지게 됩니다.
공민왕 아들/ 우왕 출생(1365년)
공민왕이 신돈에게 정사 맡김(1365~1369)
공민왕은 자신보다 7살이 많은 신돈(1323~1371)의 시녀인 반야를 좋아하게 되어 우왕(1365,1374~1388,1389)을 낳게 됩니다(고려사 기술, 공민왕은 후궁 한씨의 소생이라고 선언). 이 후 공민왕은 신돈
(1323,1365~1369,1371)에게 모든 정사를 맡깁니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말도 이성계 이후 조선에서 기술한 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이기에 신빙성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다만 공민왕이 우왕은 후궁의
소생이라고 말한 기록은 있습니다,
신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을 보시길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hongyw/222460897531
공민왕 가계도,공민왕릉-부인 노국공주,아들 우왕,손자 창왕,아버지 충숙왕,어머니 홍씨 공원왕후,명덕태후,형 충혜왕,조카 충정왕,충목왕-신돈,반야,전민변정도감-고려 마지막왕,공양왕
공민왕은 무신정권이 끝이나고 원종이 원나라에 기울면서 원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집니다, 그리고 원종의 ...
신돈에 의한 전민변정도감 설치 (1366년) /토지환수 분배/ 노비 양민환원
1366년 5월 신돈(1323,1365~1369,1371)이 토지개혁을 주관하는 관청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부당하게 겸병(남의 토지를 합쳐서 가짐)당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강압 탓에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되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신돈이 성리학 우대 /성균관 중건 개축 보수(1367년)
신돈이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 정몽주,정도전 중용
1367년 공민왕에게 명령받아 성균관을 중건, 개축, 보수하였으며, 신진사대부의 지도자인 이색을 적극추천하여 성균관 대사성으로 발탁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신돈(1323,1365~1369,1371)은 권문세족과 척신세력들을 제어하였으나 성리학의 이념을 부정하지는 않았고 개혁 성향이 강한 신진 유학자인 이색(1328~1396, 공민왕 개혁 주도자인 이제현 제자),
정몽주(1338~1392), 정도전(1342~1398)이 진출하게끔 후원하여 이 사람들이 성균관을 근거로 삼아 중용합니다,
정도전은 신돈이 정치 전면에 나서자 정계에서 물러났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저도 궁금해집니다, 역사 전문학자들이 발표를 해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목은 이색(1328~1396)
목은 이색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7세 때(1335, 충숙왕 복위4)부터 독서를 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 이곡(1298~1351)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익제 이제현을 찾아가 정주학을 배웠고, 이제현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입니다,
이제현의 문하생 중에 수제자로 이름났던 이색은 14세(1341, 충혜왕 복위2)에 자신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성총(1318~미상)에게 시를 배운 적이 있으며, 같은 해인 1341년 13살 성균시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간을 유학하고 있던 중 1351년에 아버지의 상(喪)을 입자 귀국을 하였습니다,
1352년(공민왕 1) 24살 이색은 학문의 경향과 정견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공민왕에게 제출하였고 25살인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갑과(3등 이내)로 급제하였으며, 다시 정동행성 향시에 장원(1등)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뒤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 지제고가 되었습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김구용 등과 명륜당에서 송나라의 정호와 주자의 학문과 예법에 대한 것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던 것이고, 이때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하륜 등이 그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이색은 권문세족의 전횡을 비판하여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적극 협력하였고, 또한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1371년(공민왕 20년) 정당문학이 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다시 1373년(공민왕 22) 한산군으로 지명되었다가, 다시 1377년(우왕 3)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이라는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1388년 이성계에 의한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 개혁 논의에서 사전 혁파(관료에게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줌, 단 당대에 한함)에 반대했는데, 이것은 많은 토지를 보유한 계층인 이색의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이색은 우왕 폐위 이후 창왕 옹립에 앞장섰기에, 공양왕 옹립 이후 정치적 공격을 받게 되며, 그 뒤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폐가 입진(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말로, 고려 말 이성계등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사건.)을 명분으로 우왕을 폐위하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공양왕 때 함안으로 귀양 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지명되어 예문춘추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귀양지에서 선왕(공민왕)에 대한 그리움과 많은 문인들 중 사랑하는 제자인 유창에게 느낀 심정을 읊은 시가
목은 시고권지35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색은 역성혁명파의 역성 혁명에 협력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인들은 혁명참여파와 절의파로 나누어졌으며, 이 때문에 한 때 제자였던 정도전과 조준, 남은은 그의 정적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이후 정도전은 이색과 우현보, 정몽주에게 격렬한 논조로 비판을 하게 됩니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피살되자 연좌되었으나 정도전은 이색을 구하지 않았으며, 그이색은 이후 다시 금천·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습니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는 이색의 재능을 아껴 1395년(조선 태조 4) 한산백으로 임명하여 예를 다하여 조정에 나오기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한 고려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다음 해인 1396년 68살에 피서차 여주로 가던중 여강(오늘날 섬강)의 배 안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으므로 그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의혹을 남기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설은 정도전이 보낸 부하 자객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명나라 건국(1368년)/ 이인임이 명과 함께 원나라 잔존세력 공략
신돈은 많은 개혁을 하여 권문세력으로부터 온갖 모략을 받지만 결국은 역모가 발각되어 죽습니다, 이 신돈(1323,1365~1369,1371)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기간 중 공민왕(1330,1351~1374)이 38살이 되던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이 되는 데 이때 공민왕은 이인임(나이를 모름)을 요동에 보내어 명나라와 함께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공략합니다,
명나라 건국 (1368) 원나라가 북원으로 존재/ 북원 멸망(1388)
1368년 난징에서 주원장(1328,1368~1398)이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 이와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징)에 육박하자, 몽골인들은 도저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368년 원나라 토곤 테무르는 대도(지금의 베이징)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1320,1333~1370)가 북쪽으로의 이동하기에 원 왕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정권은 이후에도 몽골고원에서 북원으로 존속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왕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 이후의 원 왕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와 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하였는데,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자 쿠빌라이 이래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자, 1271년에 건국한 원나라는 117년만인 1388년에 멸망합니다,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1372년)
1372년(공민왕 21)에 백운화상 경한이 임제종 18대 법손 석옥청공(石屋淸珙) 화상(和尙)으로부터 받아 온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증보하여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은 것입니다,
백운화상이 입적하고 3년 뒤인 1377년에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찍어 낸 것이 초인본(初印本)이며, 이는 현존하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금속활자본은 현재 하권만이 전해지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간본(古刊本)으로는 1378년 백운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 간행한 목판본이 있는데, 목판본은 1992년 4월 20일
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상하권 1책이 각각 소장되어 있습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
구텐베르크는 1440년 경에 금속 활판 인쇄술을 사용한 독일의 금(金) 세공업자입니다,
1448년 마인츠에 인쇄소를 개업하여 가톨릭교회의 면죄부를 찍어 팔았는데, 이후, 고딕 활자를 사용하여 최초로 36행의 라틴어 성서, 즉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하였다고합니다,
1453년경 다시 보다 작고 발전된 활자로 개량한 후, 2회에 걸쳐 42행의 구약 성서를 인쇄하였는데, 이 책에서 나타난 우수한 인쇄 품질로 그는 호평을 받았으며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위해 95개조 반박문(1517년)을 써서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문에 붙였는데, 이 글은 활판 인쇄술에 의해 대량으로 인쇄되어 두 주 만에 독일 전역에,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논리를 널리 퍼트려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민왕 죽음 이후(1330,1351~1374) 고려 멸망까지 이인임 섭정(1374~1386)
우왕(1365,1374~1388,1389)은 9살에 등극하여 14년을 통치하는 데 등극하여 9년간은 공민왕의 시해범들을 잡은 공로가 있던 이인임(?~1388)이 1386년까지 섭정을 하고 물러났지만 이인임의 일파였던 임견미, 염흥방 등은 탐학과 부패를 더욱 극악무도하게 일삼아 고려 조정의 몰락을 초래하게 됩니다
최무선 화약 발명(1377)
우왕 3년(1377년) 10월, 화통도감(화약국)이 처음으로 설치되어, 화통도감의 제조로서 52살 최무선(1325~1395)은 총포류를 개발하고, 발사용 화기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였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함포를 실을 수 있도록 전함 개량에도 힘을 쏟았으며, 또한 화기 이용에 대한 교육에도 힘써 화기발사의 전문부대로 보이는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이 편성되었습니다,
이성계 아들 5남 이방원16살 문과 급제(1383년) 이방원글씨
1382년(우왕 9년) 이성계의 5남인 15살 이방원(1367,1400~1418,1422)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16살에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을 당시, 아버지 48살 이성계(1335,1392~1398,1408)와 어머니 46살 한씨 부인(1337,결혼1351,1391)이 매우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첫만남 (1383년) 정도전과 이성계
1383년 가을, 41살 정도전(1342~1398)은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 도지휘사 48살 이성계(1335,1392~1398,1408)를 찾아갑니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출정했던 정몽주(1338~1392)
로부터 이성계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입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됩니다,
삼봉 정도전(1342~1398) 정도전과 그의 글씨
정도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1305년 ~ 1366년)/ 정도전 어머니/ 정경부인 영주 우씨/ 누이 : 봉화 정씨/ 매부 : 황유정(1343~1421)/ 동생 : 정도존(?~1398)/ 동생 : 정도복(1351~1435)
정도전 부인: 경숙택주 경주 최씨 장남 : 형조판서 증 우찬성 희절공 정진(1361~1427) 차남 : 정영(? ~ 1398년)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동 431번지)에서 출생하였고 1347년에서 1348년까지 그 자신의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1년간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정도전의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직위를 지낸 정운경 선생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 선생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조모가 노비 출신이라서 출신 성분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 붙곤 했습니다,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18살에 성균시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 20살인 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21살인 1363년 관직에 나갔습니다
1365년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우 씨가 1366년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습니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고,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습니다,
1367년 공민왕이 신돈에게 정치를 맡기고 있을 때에 신돈이 성균관을 중건하고 그해 목은 이색(1328~1396)이 대사성이 되자, 1370년 정도전은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며,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습니다
신돈의 사리사욕에 치우친 행동에 보고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였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에 정도전은 재등용되었습니다
1374년(공민왕 24)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는데,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나라가 이때는 북원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때 그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으며, 또한 그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문란이 정치 경제 사회의 폐해가 극심함으로 불교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1375년(우왕 1년)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북원)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으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북원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고,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했으나 정도전은 사신영접을 거부했습니다,
이때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임·경복흥 등이 원나라와의 이중 통교를 주장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해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 등 권신의 노여움을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 거평부곡으로 유배되었는데 , 그 유배지에서 정도전은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리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유랑하며 지내다가 ,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가집을 짓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습니다,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후 부평부 남촌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고.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경기도 김포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유배와 유랑 살이를 통하여 향민과 사우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하기도 했는데, 이때 정도전은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고 합니다,
1383년 가을, 정도전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입니다,
이인임 사임(1386년)
우왕(1365,1374~1388,1389)은 9살에 등극하여 14년을 통치하는 데 등극하여 9년간은 공민왕의 시해범들을 잡은 공로가 있던 이인임(?~1388)이 1386년까지 섭정을 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인임파 숙청/ 이인임 병사 (1388)
이인임이 사임한 이후에도 이인임의 일파였던 임견미, 염흥방 등은 탐학과 부패를 더욱 극악무도하게 일삼아 고려 조정의 몰락을 초래하다가 1388년 이러한 횡포에 분격한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하여 그의
일당이 축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인임은 최영의 건의로 경산부에 안치되었으며 곧 병사(1388년 6월, 사임하고 2년 후)하였습니다,
원나라가 북원으로 존재하다/북원 멸망(1388)
북원(北元, 1368년 ~ 1635년)은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밀려 몽골 고원의 초원지대로 돌아간 이후의 원나라를 부르는 말입니다,
1368년 원 순제(토곤 테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상도(上都)로 패주했다. 1370년 토곤 테무르는 응창(應昌)에서 죽었습니다, 이로써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던 것입니다
토곤 테무르의 아들인 원 소종(元昭宗)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이후 코케 테무르가 죽고,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퇴하고, 1388년 브이르 노르의 동북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소종의
뒤를 이은 동생 토구스 테무르도 투울 강 기슭에서 살해되었던 것입니다. 이 후로는 대칸으로 명목으로 1635년까지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성계 위화도회군 (1388년 6월)
고려 조정은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나라와, 안으로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1316~1388.12)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는데,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1335,1392~1398,1408)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1391)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 장군에게 회군을 거듭 청했습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6월 24일 군사를 수도 개경으로 돌려 회군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조민수는 이성계의 전제개혁에 대항하다 서인으로 강등되고,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창녕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1391년에 죽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왕이 등극한지 14년이 되어 23살이 되는 해 1388년 요동을 정벌하러 간 53살의 이성계(1335,1392~1398,1408)가 1388년에 회군을 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1367,1400~1418,1422)은 21살이며 (이방원은 15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 위화도회군을 하는 해인 1388년 이색과 함께 신년축하사절인 정조사로 중국을 다녀 왔음) 위화도 회군 시에는
가족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이 당시 이성계의 첫째부인으로 이방원의 친어머니인 한씨(1337,결혼1351,1391)로 51살이며, 장남 진안대군 방우(1354~1393)는 34살, 차남 방과 정종(1357,1398~1400,1419)은 31살, 3남 익안대군
방의(1360~1404)는 28살, 4남 회안대군 방간(1364~1421, 2차 왕자의 난 유배)은 24살 , 5남 태종 이방원(1367,1400~1418,1422)은 21살이였습니다,
그리고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은 권문세가 출신 규수로 후에 조선의 첫왕비 신덕왕후(결혼날짜 미상,추측 1377?)가 되는 강씨(1356,1392~1396)는 32살, 장녀 경순공주(?~1407), 장남 무안대군
방번(1381~1398.9,1차 왕자의 난 죽음)은 7살, 차남 첫왕세자 의안대군 방석(1382,1392.8~1398.9, 1차 왕자의 난에서 죽음)은 6살이었습니다,
우왕폐위 /최영장군 유배 후 처형(1388년 12월) 묘는 일산 근처에 있습니다
이성계(1335,1392~1398,1408)보다 2살이 적은 51살의 정몽주(1337~1392)와 정몽주보다 5살 아래인 정도전(1342~1398)은 이성계를 도와서 23살의 우왕을 폐위시키고 72살의 최영장군(1316~1388.12)은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리고 최영장군은 유배된 지 2달 만에 개경으로 불려와서 처형을 당하는데 이 최영장군의 딸이 우왕의 후궁이였습니다,
우왕도 폐위를 당하고 여주 강릉으로 유배되었다가 폐위 1년 만에 살해를 당해 24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창왕 폐위 우왕과 창왕을 죽임(1389)
우왕(1365,1374~1388,1389)이 15살에 낳은 아들인 창왕(1380,1388~1389)이 우왕의 뒤를 이어 8살의 나이로 등극하지만 재위 1년 만에 우왕과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하였다는 죄목으로 강화도로
유배가 되어 거기서 살해를 당해 9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이때 우왕과 창왕을 이성계가 죽이면서 이 두 왕은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고 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우왕이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면서 후계자로 선언하였습니다,
공양왕 등극(1389년)
54살 이성계(1335,1392~1398,1408)에 의해 폐위된 9살 창왕(1380,1388~1389)을 이은 44살 공양왕(1345,1389~1392,1394)은 고려의 마지막왕으로 고려 20대 왕인 신종의 둘째아들의 6대손으로 등극을 하여
3년을 통치한 후 1392년 정몽주(1337~1392.4)가 죽고 4개월 후 폐위가 됩니다,
정도전 봉화 유배(1391년)
1391년에 56살 이성계(1335,1392~1398,1408)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49살 정도전(1342~1398)은 삼군도총제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게 됩니다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상소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도로 몰아 제거한 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 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과 우현보 등을 신우와 신창
(우왕과 창왕을 말한다)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합니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했었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정도전은 거듭 그들을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습니다,
1391년 9월 49살 정도전(1342~1398)은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54살 정몽주(1337~1392) 등이 정도전을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하여, 정도전은 봉화로 유배당하게 됩니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정몽주의 탄핵 내용을 접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되고,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을
당해 평민이 되었습니다,
이때 정몽주는 김진양을 사주하여 사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정도전을 처형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공양왕이 이를 듣지 않았고 1392년(공양왕 4년)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정몽주가 1392년에 이방원에 의해 암살되고 난 후 1392년 6월에 유배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복직하였다
정몽주 암살(1392.4)/ 정도전 복직(1392.6) 공양왕폐위(1392.8)/ 공양왕 죽음(1394)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정성군(?~1394)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평양과 개성사이)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의 아들 25살 이방원(1367,1400~1418,1422)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를 합니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하는데,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55살 정몽주(1337~1392)와 25살 이방원(1367,1400~1418,1422)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와 《하여가》입니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습니다,(이 이야기는 모호합니다)
정몽주의 단심가/ 이방원의 하여가
1392년 4월 이성계의 집을 방문,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선죽교
정몽주는 역적으로 단죄되고, 수급과 시신은 바로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베어져 개경의 저잣거리에 매달려졌다. 그의 시신은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우현보와 송악산의 중들에 의해 수습되어 승려들이
염습한 뒤 개경 풍덕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일 경기도 용인 능원리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충성을 뜻하는 대나무가 자랐다고 해서 선죽교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포은 정몽주의 죽음을 놓고 이성계가 이방원을 비토했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책망하였다고도 합니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만은 반대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정몽주를 보면 세조 때 성삼문이 생각납니다, 성상문은 세조가 김종서를 죽인 것에는 동조를 하는데 단종을 몰아내는 것에는
목숨을 걸고 반대합니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좋아했고 정몽주도 이성계에 동조를 하였지만 왕이 되는 것에는 반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리학을 굳게 믿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방원도 태종으로 등극한 후 정몽주를
복원시킨 것을 보면 그의 충절만은 존경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55살 정몽주(1337~1392)가 죽자 공양왕은 47살에 57살의 이성계에 의해 폐위를 당하고,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때 이방원은 25살이며 정도전은 50살입니다,
공양왕은 폐위를 당한 후 강원도 원주와 강릉을 거쳐 삼척으로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폐위된 지 2년 만에 조선 개국하고 2년뒤에 49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이 당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성계도 없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자말자 정도전과 두 번째 부인의 말을 듣고 두 번째 부인의 차남이었던 10살 방석(1382,1392.8~1398.9, 1차 왕자의 난에서 죽음)을 세자로 책봉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이성계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흔히 정도전이 신하들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고 하지만 그 생각에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신하라는 사람들이 백성에 의해 선발되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통해 선발되는 사람들이기에 결국은 그들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정도전이 영국 헨리 3세(1207,1216~1272)시절
헨리 3세의 처남인 시몽드 몽포르(1208~1265)처럼 지방호족들로 구성된 의회를 구성(1265년)하였다면 왕과 귀족이 서로 견제를 할 수가 있었기에 동의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 봉건사회도 강력한 중앙집권형태의 왕이 등장할 때 나라가 성장하였던 것을 보며는 민주제도라는 것이 오늘날의 개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성계등극(1392.8)
고려라는 나라는 이성계(1335,1392~1398,1408)가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한 후 4년 만에, 공민왕이 죽고 18년 만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474년 만인 1392년 8월에공양왕(1345,1389~1392,1394)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은 후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57살 이성계에 의해 그 문이 닫힙니다.
국호 조선으로 개명(1393.2)/ 한양으로 도읍이전(1394)
1393년 2월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치기 시작합니다,
조선왕조
[출처] 고려멸망,조선건국과정-태조 이성계 가계도,부인,아버지-정몽주 단심가,삼봉 정도전,이방원 하여가,목은 이색-금속활자,최무선화약,위화도회군배경,철령위설치,정몽주 정도전,정몽주 이방원|작성자 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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