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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판서댁(黃判書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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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7회 작성일 21-08-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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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판서댁(黃判書宅)

평해 황씨는 28년(신라 유리왕 5) 중국 후한대의 학사로 구대림(丘大林) 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 지금의 월남)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이곳 평해에 표착(漂着)하여 살았다는 황락(黃洛)을 시조로 한다.

후손에 3형제가 있어 이들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봉토를 받았는데 장남 갑고(甲古)는 기성군(箕城君), 둘째아들 을고(乙古)는 장수군(長水君), 셋째 아들 병고(丙古)는 창원백(昌原伯)에 각각 봉해져 3관(貫)으로 분관(分貫)되었다.

평해 황씨는 바로 장남 기성군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그 후 계대(系代)가 분명치 않아 갑고(甲古)의 후손으로 고려에 금오장군(金吾將軍)과 태자검교(太子檢校)를 지낸 황온인(黃溫仁)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2세(世) 우정(佑精)이 군기소윤, 3세(世) 유중(裕中)이 문하시중, 4세(世) 진(璡)이 검교군기감을 각각 지냈다. 5세(世)는 지정(之挺)이고, 6세(世) 원로(原老)는 문과에 급제 한 후 영해(寧海) 부사를 지냈는데 그가 영천(榮川) 초곡리(草谷里, 푸실)에 옮겨와 터전을 잡았다.

원로(原老)의 아들 근(瑾)이 공민왕 때 문과 급제로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손자 유정(有定)이 공민왕 때 형부 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 정도전의 아버지)의 사위로, 또한 문과에 올라 공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그 장인의 가장(家庄)을 물려받아, 영주 읍내로 옮겨 살았으니, 바로 그 집이 유명한 삼판서고택(三判書故宅)이다.

유정의 맏아들 전(銓)이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지평·청도(淸道) 군사를 지냈고, 둘째 현(鉉))이 조선 초에 생원, 문과 중시(重試)에 뽑혀 대사성을 지냈으며, 셋째, 연이 생원으로 순흥(順興) 훈도를 지냈다.

전(銓)의 아들 맹하(孟夏)가 생원으로, 영천으로부터 풍기 일원(豊基 逸院: 안정면 안심리)에 옮겨 살았고, 그 아들 종손(終孫)이 생원, 손자 정유가 군자감정 을 지냈으며, 종손의 아들 준동(俊仝)이 청도(淸道) 군수를 지냈다.

맹하(孟夏)의 아우 계하(季夏)가 세종 때 문과 급제로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전(銓)의 아들 중하(仲夏)가 생원, 그 맏아들 진손(震孫)이 세조때 문과 급제로 선공감 정을 지냈으며, 진손의 아들 계옥(啓沃)이 성종때 문과 급제로, 홍문관 응교를 지내고, 문집(文集)을 남겼으며, 간손(艮孫)이 생원이었다.

종손(終孫)의 증손 언량(彦良)이 생원으로 참봉, 언량의 아들 이(怡)가 생원으로 강릉(江陵) 교수, 이의 아들 상눌(尙訥)이 진사, 상겸(尙謙)이 문과로 좌통례를 지냈으며, 상겸의 조카 중연(中衍)이 문과 급제로 신령(新寧) 현감을 지냈다, 이의 아우 침(忱)이 통례원 인의를 지냈다.

연(鋋)의 아들 말손(末孫)이 사온서(司醞署) 주부를 지내고, 그 손자 치(觶)가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지냈으며, 치의 아들 준량(俊良)이 중종 때 문과 급제로 성주(星州) 목사를 지냈고 퇴계(退溪) 이황의 고제(高弟)로 도학(道學) 문장으로 크게 알려졌다.

준량의 아우 수량(秀良)이 또한 퇴계 문인으로 부령(富寧) 교수를 지냈고, 준량의 손자 입(岦)이 제용감 정을 지냈으며, 그 후손 석주(奭周)가 고종 때 진사, 석주의 손자 헌이 구한말에 문과 급제로 승문원 부정자를 지냈다.

영주의 평해 황씨는 풍기 욱금(郁錦), 안정면 대평(大坪), 봉현면 노좌(魯佐), 이산면 지동(池洞), 부석면 뿔바우·보계실, 문수면 전닷 등지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황원로(黃原老) 

1260년(고려 원종 1)~몰년 미상. 지정(之挺)의 아들이고 문하시중 유중(裕中)의 현손이다. 1260년(고려 원종 1)에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강릉 최씨 전서 사립(斯立)의 딸이다. 고려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록참군(司錄參軍), 영해(寧海) 부사를 지내고 좌승지에 증직(贈職)되었다. 일찍이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籌鳩分養七林枝 비둘기 일곱 숲 가지에 나누어서 길러졌으니

各分南北往來稀 각각 남북으로 갈라져 왕래가 드물게 되었도다 
 

하였으니 이 시(詩)를 통해 그의 아들 7형제가 각기 흩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재 『평해황씨족보』에는 여섯 형제만이 기록되어 있어 한사람이 누락된 것으로 보여 진다.
 

황근(黃瑾) 

1302년(충렬왕 29)~ 몰년 미상. 영해 부사 원로(原老)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성군부인(龜城郡夫人) 단양 우씨로 역동(易東) 우탁(禹卓)의 종제(從第)인 평의 딸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예겸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일찍이 공민왕때 우헌납으로 정언인 김속명(金續命)과 더불어 상소(上疏)하여 당시 지진(地震)이 일어난 것이 후궁(後宮)과의 관계에 엄격하지 못해서 발생했다고 극언(極言)을 하여 임금의 뜻에 거슬려 옥천(沃川) 군수로 좌천(左遷) 되었다가 제학이 되었다. 좌천되어 귀양도중에 한강 배위에서 신총사(信聰師) 스님의 시(詩)를 차운(次韻)하여 읊었는데 
 

欲知民水載君舟 백성의 물에 임금의 배를 실은 것을 알고자 하면

要盡忠誠誡逸遊 요컨대 충성을 다하고 편안히 노는 것을 경계하노라

諫院未能語樂石 사간원에서 경계가 되는 직언(樂石)을 올리지 못하여

長沙見謫不彦萩 장사(長沙)에 귀양을 당했으니 근심할 것 없도다. 
 

라고 했다. 일찍이 서거정(徐居正)은 말하기를 “이 시(詩)는 신하의 도리와 체통을 다했고 세상 교화에 도움을 준다."라고 했으니 그의 저술(著述)에는 볼만한 것이 많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에 자헌대부 한성 판윤에 증직되었다.
 
▶황유정 판서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1422 卒  초명(初名)은 지정(知定)이고 호가 미균(米囷)이다. 부친인 근(瑾)은 성균관 사예 겸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직제학 근과 순흥 안씨 사이의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문정공(文貞公) 근재 안축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비범하여 12세 되던 해인 1355년(공민왕 4)에 안동도회(安東都會)에 가서 시(詩)를 지었는데 시관(試官)이 그 시를 보고 과거에 응시하기를 권하였다. 그때 지은 <병서(病署)>라는 제(題)의 시에 아래와 같은 구(句)를 붙이니 고관(考官)이 보고 놀랐다.

 
先秋後夏天若問 가을을 먼저, 여름을 뒤에 둘까 하늘이 묻는다면

朝三暮四吾從狙 조삼모사라, 나는 원숭이를 따르련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오직 글읽기 만을 좋아하여 잠들기 전에는 손에서 책을 놓아 본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논어(論語)』읽기를 즐겨하여 당시 세인들이 칭하기를 “미균 선생(米囷先生)”이라 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작성된 영천(榮川) 장적(帳籍,호적대장)에 의하면 당시 유정은 48세이고 초계(草溪, 경남 합천) 군수를 지내고 있었으며, 맏아들 전(銓)은 예빈 주부였고, 둘째 아들 현(鉉)은 22세로 생원이었으며, 셋째 아들 연(鋋)은 11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초계 군수 시절 단정, 청렴하여 초계 군민과 아전들이 오래토록 그 덕을 기렸다고 한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당인(唐人)의 풍조가 있었는데 80세이던 1422년(세종 14) 어느 날 외손자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집을 찾아가 시를 지었다. 
 

偶携藜丈出柴扉 우연히 명아주 지팡이를 집고 사립문을 나서니

四月淸和燕燕飛 4월의 화창한 날씨에 제비들이 쌍쌍이 날고

乘興往尋金氏子 이에 시흥이 솟구쳐 김씨집에 찾아가보니

薔薇一朶秀疎籬 장미꽃 한 떨기가 울타리에 빼어나게 피어있네 
 

1390년 초계 군수를 역임했는데 초계 군수시절의 활동은 찾아볼 수 없다. 이후 미균은 한성 판윤을 거쳐 예조 전서와 공조 전서, 형조 전서를 지냈다.

조선에 들어와 공조 판서, 형조 판서, 예조 판서를 지냈다. 이후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고 늙어 병(病)을 이유로 낙향(落鄕)하여 영주의 구성(龜城) 아래 동리의 자택에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이곳이 곧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봉화 정씨로 형부 상서 정운경(鄭云敬)의 딸이다. 

황전(黃銓) 

1363년(공양왕 12)~1411년(태종 11). 공조 전서 유정(有定)의 장남이다. 그의 기록은 근거가 될 수 있는 문헌이 거의 없고, 다만 옛 족보 작은주(小註)에 적혀있기를 16세에 삼시(三試)에 장원을 했고, 21세에 또 삼시(三試)에 장원을 했는데 나이는 불과 40여세에 지나지 않았으며, 벼슬은 천거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고 또 지청도 군수(知淸道郡守)가 되었는데 그 관저(官邸)에서 서거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넓고 컸으나 당시 시대에 쓰여져서 세상에 은택을 남길 수가 없었으며, 또 그 남긴 글이 없어져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황현(黃鉉) 

1369년(공민왕 18)~1434년(세종 16). 지군사(知郡事) 전(銓)의 아우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해 약관인 1389년(공양왕 1) 2월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3년(태조 2) 식년(式年) 문과 을과 제1등으로 합격하여 권지성균 직강이 되었고, 또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 을과 제52등으로 뽑혔다. 1415년에 예문관 응교를 거쳐 1425년에 성균관 대사성에, 1428년에 인수(仁壽) 부윤이 되었다. 1429년에 재차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긴 소장(疏狀)과 짤막한 차자(箚子 : 신하가 임금께 올리는 문서의 한 체)의 우직하고 강직한 말과 바른 논리에 가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볼 수가 있다.

아깝게도 그 유사(遺事)와 유적(遺蹟)들이 세상에 다 전하지 못하게 되어서 그 온전한 것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질박한 것을 숭상하여 남의 선(善)한 것을 기록할 적에 한자도 함부로 쓰지 않았으니 보첩(譜牒)에 [經明行修爲世師儒: 경서에 밝고 행실이 잘 닦아져서 세상에 스승이 되는 유학자]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 있으니 그 분이 높은 문장과 큰 덕이 아니었다면 능히 이와 같이 기재되었겠는가? 이 여덟 자의 글이야말로 그의 진실을 묘사한 한 장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경학(經學)에 발고 행실이 있어 사림(士林)에 추앙(推仰)되었다. 

황연(黃鋋)
 

1380년(우왕 6)~ 1461년(세조 7). 지군사 전(銓)의 아우이다. 생원으로 승의랑 순흥(順興) 훈도를 지냈다. 영천(榮川)에서 다시 풍기로 이사하여 그 자손들이 이로부터 풍기에 살게 되었다. 배(配)는 공인(恭人)으로 청주 정씨 지평 시(時)의 딸이요, 문간공(文簡公) 복(福)의 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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