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3. 금석문의 대가 중관 황재국 서예가 강원일보 입력 2023. 7. 14. 00:05 > 중관뉴스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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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3. 금석문의 대가 중관 황재국 서예가 강원일보 입력 2023. 7. 14. 00:05 > 중관뉴스모음

[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3. 금석문의 대가 중관 황재국 서예가 강원일보 입력 2023. 7. 1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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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4회 작성일 23-08-19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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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돌 위에서 피어난 검은 꽃
전국 곳곳 현판·비문 500여 작품
평이함 속 비범·준열함 깃들어
독보적 서체 글씨 대중화 기여
서단의 베스트셀러작가
강원대 한문교육과 교수 부임
아내 노영식 화가, 영혼의 동반자
꾸밈없는 순수한 작품세계 구축
부부 금혼기념서화집 제작
가족들 작품 모두 소개 눈길


붓글씨를 한자로 서예라 이름한다. 중국은 서법, 일본은 서도라 하여 달리 부른다. 서예란 명칭은 위창 오세창의 1대 제자 소전 손재형이 처음 지어 썼다고 한다. 예술이 한 사람의 심성을 그대로 표현함은 서예가 가장 으뜸이 됨을 모르는 이가 없다.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이다. 한 획 한 획이 그 사람의 정성이요, 한 획 한 획이 그 사람의 본성이다.

정성은 집중함과 같고, 집중은 일념과 같으며, 일념은 궁극의 경지에 닿는 올바른 길임을 글씨를 쓰는 이라면 어찌 한시도 잊을 리가 있겠는가. 다만 실천이 따르지 못하여 붓을 던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하여 서를 예라 한 것은,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에 닿기 위한 부단한 정진을 뜻함이다.

나는 황재국 교수의 명성을 누누이 들어왔다. 그는 금석문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산재한 현판, 돌에 새긴 비문, 문인비, 시문, 관공서와 학교의 명패에서 우리는 황재국의 글씨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토록 많은 서예가 중에 유독 황재국의 글씨가 사랑받는 이유는 평이함 속에 비범과 준열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 황재국 서예가의 ‘매월당기념관’ 현액

▲ 황재국 서예가의 낙관

▲ 노영식 작 ‘버찌 따는 아이들

▲ 황재국 (사진 왼쪽) 서예가와 부인 노영식 화가.

 ▲ ‘휴식’


어디선가 눈에 익은, 힘 있고 정연한, 격식을 갖추었으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그런 글씨체를, 우린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정겹다. 온기가 느껴진다.

나는 황재국의 글씨를 보고 이런 단순한 생각을 했다. 다른 이들도 별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그는 독보적인 금석문 서체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월간 ‘서예문인화’ 편집주간 이용진 님은 이렇게 말한다. 한자체도 경지에 이르러 있지만, 특히 한글 체형이 우아하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고.

이 나라에서 황재국의 글씨가 석문에서 제일 많은 까닭은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황재국은 서단의 베스트셀러작가인 셈이다. 글씨의 대중화에 기여한 그 공로는 태산만큼이나 지대하다. 차가운 돌에서 온기를 느낀다면 그 석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재국의 붓끝에서 흘러나온 먹물, 그것은 아마도 돌 속에 흐르는 뜨거운 핏방울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생각의 자유로움으로 하여 나는 황재국 서체의 흡인력을 새삼 깨닫게 된다.

황재국은 경희대 중국문학과를 수학하면서 1961년 동방연서회에 입회한다. 그곳에서 서예의 대가 일중 김충현과 여초 김응현에게 글씨와 학덕을 배우기 시작한다. 서예를 배운 지 4년 후인 1964년, 황재국은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인 서예 부문에서 입상하고, 2년 후인 1966년엔 제15회 국전 서예부에 입선하게 된다. 학문과 서예를 가열하게 공부했던 결과는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 일중 김충현 서예가는 젊은 황재국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다.

“소질 없는 글씨가 탁 트이면 기교 부린 글씨보다 글맛과 운치를 더하는 법이다”라고.

그분은 황재국의 재능을 낮춰 보아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황재국의 성실함과 배움에 대한 열정을 지켜본 일중 선생은 일찍이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엄한 경계의 말씀을 황재국은 겸허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벼루 열 개를 구멍 내었고, 붓 천 자루를 닳게 했다지 않은가. 황재국은 혼신을 기울여 한 자 한 자 화선지에 먹물을 채워나갔다. 번짐과 굽힘과 곧음과 스밈 그리고 은근한 드러냄이 무아 속에서 저절로 흐를 때까지, 황재국은 쓰고 또 쓰면서 자신을 잊었다.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두드리고 담금질하듯 글을 벼리고 또 다듬었다. 서서히 글자는 의미를, 의미는 심오한 시문의 향기를 은은히 내뿜기 시작했다. 두 분 스승은 한국 서단을 이끄는 거목이었고, 황재국은 그런 스승의 올곧은 길을 걷고자 매사에 소홀함이 없었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강사, 경희대 미술교육과 서예 강사를 하면서 황재국은 10년 동안 학문과 서예의 길을 함께 공부해 나갔다. 절차탁마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981년 황재국은 강원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1985년엔 ‘고려 이곡李穀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의 저서 ‘가정 이곡의 한시 연구’는 학계의 귀중한 자료로 남아 후학들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강원대학교 한문교육과 수업은 재미있었다. 황재국은 서예 지도교수로 활동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탁본을 뜨러 오래된 비문을 찾아다녔다. 낡은 기왓장을 수집하여 거기에 쓰인 글귀의 뜻을 찾을 때는 천 년 신비를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느덧 황재국 교수는 금석문의 전문가로서 학계나 서단에 널리 알려졌다. 그때부터 황재국의 글을 받기 위해 주문이 쇄도했다. 바쁜 나날이었다. 그러나 즐거웠다. 독립기념관 표석 제자(題字), 매월당과 이육사 기념관 등의 현액(懸額), 의암 유인석 선생 어록비, 동창기미만세운동기념비, 공공기념물의 표석(標石) 등 그동안 무려 500여 기의 작품을 썼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한글과 한문을 병행하는 서예가로서 황재국은 이 나라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데는 가족의 힘이 컸다. 특히 아내 노영식 화가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함께 살아온 부부는 늘 예술과 함께 했다. 노영식과 황재국은 부부이면서 영혼의 동반자였다. 노영식은 30년간의 교직생활 중에도 조용히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을 키워왔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글씨와 어머니의 그림을 보며 성장했다.

노영식의 그림은 맑고 평안한 느낌을 준다. 꾸밈없는 순수와 천진의 세계가 그림 속에 펼쳐진다. 2022년 9월 황재국 노영식 부부의 금혼기념서화집이 나왔다. 50년 세월을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온 부부였다. 그 믿음과 사랑을 노영식 화가가 그린 ‘휴식’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의자에 앉아 묵상하며 어딘가를 고요히 바라보는 모습. 그것은 마치 숲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지금도 노영식 화가는 그린다. 작년 소양강변에서 버찌 따는 아이들을 보고 그린 수채화는 노영식의 작품세계가 어떠한가를 또렷이 보여준다. 나는 서화집을 뒤적이다가 순간 한 풍경에 머물렀다. 해맑은 풍경의 주황색 지붕의 그림에서 문득 헤르만 헤세의 수채화가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가 언덕에 올라 마을을 그리던 모습, 노영식 화가가 언덕에 올라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동시에 떠올려진 일은 참으로 아득하고 신비했다.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풍경이 다름에도 마음속에 그려지는 아련한 풍경은 시대를 뛰어넘어 함께 공유되는 일임을 깨달았다.

서화집의 제자는 황재우 영남대학교 명예교수가 썼다. 황재국의 네 살 위 형이다. 손가락을 짚어 한자를 가르쳐 주던 형이었다. 서화집엔 가족의 중요한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다. 손자와 외손주들의 작품, 조카들의 작품들 모두가 하나같이 미소를 머금게 했다.

소양강변 아파트촌에 소재한 장방형의 중관서재(中觀書齋)는 동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책상 위 벼루들 위로 빛이 스며들어왔다. 고서와 서집들이 서가에 빼곡히 들어찼고, 글씨 쓰는 책상 위로 먹빛 품은 대소의 붓들이 나란히 벽에 걸려 있었다.

금석문의 대가 황재국은 종이를 편 다음, 벼루에 잘 갈린 먹물을 찍어 단숨에 써 내려갔다.



春華秋實 (춘화추실)

‘봄엔 꽃, 가을엔 열매’란 뜻으로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결실을 비유한 말이라 했다. 곁에 있던 기연옥 명창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창밖으로 호수 건너 대룡산이 묵상하듯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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