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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 김담과 우리 책력 칠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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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9회 작성일 22-07-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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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과 정도전, 삼판서 고택

김담은 영주의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났다. 삼판서고택이란 한 집에서 내리 3명의 판서를 배출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첫 번째 판서는  고려 공민왕때 형부판서를 지낸 정운경으로 그는 조선 개국 공신인 정도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정운경은 이 집을 사위인 황유정에게 물려주었는데 황유정은 조선 태조에서 태종에 걸쳐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냈다.황유정은 다시 이집을 그의 외손자인 김담에게 물려주었으면 김담은 세조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옛 사람들은 나라의 다스림이 하늘에 그 뜻이 나타난다고 여겨 우주 법칙을 알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천문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은 중국 역법이 우리 실제와 맞지 않는 것을 알아 나라 인재를 동원하여 우리 역법을 만들도록 독려했다. 이십여 년 동안 중국과 이슬람 역법을 연구하고 깨우쳐 이순지와 김담이 우리 역법 칠정산 내편과 외편을 만들었다. ​

    칠정산이란 해와 달 그리고 화·수·목·금·토 오행성의 절도 있는 움직임이 나라의 정사(政事)와 비슷하다 하여 ‘칠정(七政)’으로 이름 지었고 역법은 중국 황제가 만드는 것이라 하여 ‘산(算)’을 붙였다. 15세기 최고의 천문서적으로 우리나라 과학문명사의 일대 쾌거였다.

    숙종 때까지 칠정산으로 우리 책력을 만들어 나라에 배포했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해 국정에 활용했다. 김담은 금모래 고운 영주 내성천 무섬마을의 무송헌종가 주인이다. 현대 과학으로도 그 정확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칠정산을 들여다본다.​

    태음태양력
    태음태양력은 음력이 주가 되고 양력을 가미한 역법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문화권에서 주로 사용했다. 중국 고대 철학에서 삼라만상은 음에서 시작했고 음이 양보다 우위였다. 그래서 음양이고 자웅(암수)이고 홀짝이며 역법도 음력을 중시했다. 한편 농자천하지대본이므로 계절의 변화에 따른 농사 달력 24절기를 만들었다. 계절의 변화는 태양의 움직임으로 생기고 날짜는 달의 삭망인 음력으로 정했으니 태음태양력은 무척 만들기 어렵고 복잡했다.​

    음력인 달의 삭망주기는 29.53일이며 12삭망월은 354.36일이다. 1태양년은 365.25일로 이 둘을 맞추기 위해 윤달을 넣는데 넣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역법이 생겼다. BC600년경 중국 춘추시대에 19태양년이 235삭망월과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스에서는 BC432년에 이를 발견했다. 이 일수가 6,940일인데 중국에서 장(章), 서양에서 메톤주기라 하며 19년 동안 윤달을 7회 넣어서 태양년 즉 계절을 맞추었다.

    아무리 역법을 잘 만들어도 오차가 생기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차이는 점점 커졌다. 그래서 왕조가 바뀌면 하늘의 뜻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다고 역법을 새로 만들어 조공 받는 이웃나라에게 나누어줬는데 동지사행사는 새해인사와 함께 이듬해 역법을 받으러 가는 사절단이었다.​

    동양 역법은 동지를, 서양 역법은 춘분을 기준으로 삼았다. 절기를 태양의 길인 황도를 24등분 하는 방법과 타원 궤도상 태양 운동의 빠르고 늦어짐을 반영하기도 했다. 케플러 법칙과 삼각함수, 원주율 ℼ의 개념을 몰랐던 시대에 고대 수학으로 천체운동을 계산해 역법을 만들었다.​

    세종대왕의 천문 열정
    세종대왕은 나라를 다스림에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 세상에 절기를 바르게 알려주는 것이 국가의 책무라 했다. 중국 역법은 북경을 기준했으므로 우리 실제와 달랐고 정확한 우리 역일을 알기 위해 산학에 능통한 관리들을 뽑아 중국으로 보내 천문지식 습득과 계산법을 배워 오도록 했다. 아울러 천문 관찰을 위해 서운감을 관상감으로 바꾸고 경북궁 내에 천문관측소인 흠경각과 보루각을 세웠다. 보루각에는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를 설치하여 시각을 도성에 알려주었고 해시계 앙부일구를 만들었고 흠경각에는 간의, 혼의, 혼상을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했다.​

    앙부일구는 보물 845호로 오목한 가마솥처럼 생겼는데 시계판에 가로선 13줄, 세로선 50줄을 그어져 있다. 가로선은 24절기를, 세로선은 1각(15분)을 나타낸다. 영침(影針)의 그림자 끝이 그 때의 시각과 절기를 보여주는데 이는 천구상 매일 운행하는 태양의 일주운동과 1년 단위로 운행하는 연주운동이 가로 세로선에 나타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앙부일구는 설치장소의 위도, 절기 때 태양위치, 남중시각 등을 정확히 산출해야만 만들 수 있는 정밀한 천문기구이다.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 동편에 설치했다.

    흠경각에 설치한 천문기구는 물의 흐름으로 모든 것이 자동으로 돌아가며 시간과 천상(天象)이 표시되도록 만들었다. 일곱 자 인공 산을 종이로 만들고, 그 둘레로 인공 해가 돌고, 방위신이 시각에 맞춰 움직이고, 인형이 때에 맞춰 종을 치게 돼 있다. 모두 세종대왕의 천문에 대한 열정의 산물이었다.​

    우리 고유역법 칠정산
    정인지 등이 지은 고려사 역지 편에 천운(天運)이 고르지 못해 역이 오래 되면 반드시 차가 생긴다. 고려는 당의 선명력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충선왕이 원에서 수시력을 구해 왔는데 역일을 추정하는 법만 알뿐 나머지는 알지 못했고 차가 크면 천문 관리가 임의로 고쳤다.

세종대왕은 중국 역대 역법, 당의 선명력, 원의 수시력, 명의 대통력과 이슬람 회회력을 구해 놓고 우리 역법 만드는 것을 국정 우선 과제로 삼았다. 20여년 노력 끝에 중국 역법을 완전 이해하고 깨우쳐, 마침내 이순지와 김담이 1442년에 수시력과 대통력을 바탕으로 칠정산 내편을, 1444년에 회회력을 바탕으로 칠정산 외편을 완성했다.

그 결과 칠정산으로 측정한 동짓날 한양의 낮 길이가 대통력으로 측정한 동짓날 연경의 낮 길이보다 14분 24초 긴 것으로 나타났다. 동양 역법의 기준은 동짓날 시각인데 위도 차이로 기준점부터 틀리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중국과 이슬람 천문 과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칠정산은 동서양 최고 천문 과학을 완전히 깨우치고 받아들여 우리 천문 능력으로 만든 결정체이다. 15세기 우리 과학을 세계 최고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후 매년 칠정산으로 우리 책력을 만들어 나라에 배포했다. 1598년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사신 정응태가 칠정산으로 우리 책력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음을 알고 문책할까봐 조정에서는 우리 책력 앞·뒷장을 명의 대통력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사료에 남아있다. 인조 때 대동법의 김육이 청의 시헌력을 주청했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1706년 숙종 때 시헌력으로 책력을 만들고 칠정산을 중단한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만들어진지 250년이 흘러 실제와 차가 컸는지 알 수 없지만 1894년 갑오개혁까지 시헌력이 사용되고 칠정산은 역사 속에 묻혔다.​

    칠정산의 우수성
    칠정산은 해와 달, 오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하여 일출 일몰 삭망 절기 일식 월식 영축운동을 밝힌 책이지만 고대 역법 용어와 계산방법이 현대 천문학과 너무 달라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것을 1973년 서울대 유경로 이은성 현정준 교수가 역주하여 비로소 그 진가가 알려지게 됐다.

    내편과 외편은 조금 다르다. 1태양년 길이가 내편은 365.2425일이고 외편은 365.242188일이다. 1태음년은 내편이 354.36712일이고 외편은 354.36667일로 현대 과학과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내편은 100진법 외편은 60진법을 사용했다.

    1447년 음력 8월 1일의 일식 기록이, 8월 15일의 월식 기록이 남아 있는데 현대 과학으로 계산한 수치와 비교하더라도 1~3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옛날 일식과 월식은 매우 중요한 천문현상으로 정확한 시각을 아는 것이 나라의 큰 책무였다. 불길한 징조로 인식되어 구식례(救食禮)를 올리기도 했다. 칠정산 외편에 의한 일·월식 예보가 초기에 잘 맞아 국왕이 칭찬했다는 기록이 있고 1603년 일식 예보는 30여분 시차가 생겨 정확도가 떨어졌다. 역법이 생기고 세월이 흐르면 세차와 고유운동으로 하늘이 바뀌고 역법 상수의 오차가 커졌기 때문이다.​

  천동설을 믿었던 고대 천문학이 계산한 수치와 지동설인 현대 과학으로 계산한 수치와  큰 차이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옛 사람들은 둥근 공처럼 생긴 하늘이 매일 한 바퀴씩 돌고 서쪽으로 1°씩 지나친다고 했다. 하늘 모습은 매양 똑같으므로 별의 일주운동과 연주운동으로 하늘이 이동한다고 했다.  오늘날 지구 자전과 공전이다.

  그리고  별은 무한대로 떨어져 있으므로 태양계 어디서 관찰하더라도 관측 위치에 따라 상대적일 뿐  결과는 차이가 나지 않는다. 공전에 따라  매일 서쪽으로 1°씩 움직이므로 1년 뒤 본래 위치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별을 붙박이별 항성이라 했고 항성을 이용해 항법을 만들었다. 아을러 움직이는 별, 행성도 관찰했는데  태양길 따라 움직이는 태양계 팔행성 중 육안으로 보이는 별은 화수목금토성의 오행성이다.

  천체의 운동은 일정하므로 지구 중심이든 태양 중심이든 상대적일 뿐 차이는 나지 않는다. 하늘이 돌든지 땅이 돌든지 관측결과는 차이가 없으니 고(古)천문학은 정확했다. ​

    김담의 생애
    20세에 과거 급제하여 관리생활을 시작한 김담(1416~1464)은 36세에 사헌부 장령으로 보임될 때까지 16년 동안 천문학자로 나라에 봉사했다. 10살 위 이순지와 짝을 이루어 우리 고유 역법 칠정산 내편과 외편을 완성했다. 그의 산학 능력은 탁월하여 제방공사 치수 산출은 항상 그의 몫이었고 관상감부정(副正,서열2위 직책)으로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해 향리 영주로 내려갔는데 역법은 국가의 중대사이므로 상중에도 빨리 귀임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역대 왕들은 이순지와 김담 같은 인재가 없어 일·월식 예보에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가 실록에 수시로 나온다.​

    젊은 시절에는 천문으로 나라의 기둥이 되었고 장년에는 고을 수령으로 백성을 보살폈다. 충주부사, 상주목사, 안동부사, 경주부윤을 지냈고 48세에 마침내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그 이듬해 1464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순지도 한성부윤, 전라도 관찰사, 예조참판을 지냈다.​

    2016년 그의 탄신 600주년을 맞이하여 영주시에서는 세계 13개국 천문학자 18명과 국내 학자 10명이 참가해 그의 천문학 업적을 기리는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후손으로 퇴계제자 대사헌 김륵을 비롯하여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와 영남명문가가 됐고  금모래 고운 내성천 강변, 영주시 문수면 무섬마을의 예안(선성)김씨 무송헌종가에서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출처] 천문학자 김담과 우리 책력 칠정산|작성자 진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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