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鄭道傳) (1337년~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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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22-07-13 09:15본문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경상북도 봉화군 출신, 외가는 충청북도 단양 출신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정도전은 1337년 양주군 삼각산에서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과 어머니 영천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경상북도 봉화군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며 외가는 충청북도 단양으로 단양 출신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이 설에 의하면 그의 아호 삼봉은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그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여종이었던 탓에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당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정운경이 경학의 대가인 이곡과 친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15세에 개경의 유학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몽주·이숭인 등 훌륭한 학자들과도 사귈 수 있었다. 개성의 성균관에서 스승 이색으로부터 새로운 학문 성리학을 전수 받아 조선의 건국이념을 완성하였는데,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이숭인, 설장수(偰長壽) 등이며,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그는 인맥을 형성하였으며 1360년 성균시험에 합격했다.
공민왕 때인 1360년 문과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1362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뒤 성균박사, 태학사 등의 중요한 직위를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83년 정도전은 함주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예와 통솔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도 정도전의 학식과 포부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아득한 세월에 소나무 한 그루 몇 만 겹 푸른 산속에 자랐도다.
잘 있다가 다른 날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인간 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이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을 모두 제거하자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만들었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정도전은 조선을 신권이 왕권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차기 임금은 여린 임금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신덕왕후와 손을 잡아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내세우고 태조는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은 계모 소생의 막내동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고,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음력 8월 26일 밤에 이방원(태종)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정도전은 그때 송현에 있는 남은의 별장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이방원(태종)의 사병에게 참수되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또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을 복권하고 문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뒤 대원군에 의해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에 사당이 세워졌고 고종 때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현판이 하사되었다. 사당은 1986년 3월 향토유적 2호로 지정되었다.
정도전은 1337년 양주군 삼각산에서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과 어머니 영천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경상북도 봉화군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며 외가는 충청북도 단양으로 단양 출신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이 설에 의하면 그의 아호 삼봉은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그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여종이었던 탓에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당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정운경이 경학의 대가인 이곡과 친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15세에 개경의 유학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몽주·이숭인 등 훌륭한 학자들과도 사귈 수 있었다. 개성의 성균관에서 스승 이색으로부터 새로운 학문 성리학을 전수 받아 조선의 건국이념을 완성하였는데,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이숭인, 설장수(偰長壽) 등이며,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그는 인맥을 형성하였으며 1360년 성균시험에 합격했다.
공민왕 때인 1360년 문과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1362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뒤 성균박사, 태학사 등의 중요한 직위를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83년 정도전은 함주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예와 통솔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도 정도전의 학식과 포부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아득한 세월에 소나무 한 그루 몇 만 겹 푸른 산속에 자랐도다.
잘 있다가 다른 날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인간 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이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을 모두 제거하자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만들었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정도전은 조선을 신권이 왕권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차기 임금은 여린 임금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신덕왕후와 손을 잡아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내세우고 태조는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은 계모 소생의 막내동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고,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음력 8월 26일 밤에 이방원(태종)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정도전은 그때 송현에 있는 남은의 별장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이방원(태종)의 사병에게 참수되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또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을 복권하고 문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뒤 대원군에 의해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에 사당이 세워졌고 고종 때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현판이 하사되었다. 사당은 1986년 3월 향토유적 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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