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시가詩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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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9회 작성일 21-08-17 05:21본문
11. 시가詩歌
우리나라 국문國文 시가詩歌 발전에 기여를 하였다.
주세붕과 경기체가景幾體歌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 받으며 논쟁을 하였으며
처조부妻祖父인 농암 이현보가 어부가漁夫歌를 짓는데 도움이 되도록 원전을 백방으로 찾아 구했다.
신재 주세붕과 의견을 주고받은 기록은 주세붕의 문집과 황준량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주세붕은 죽계지竹溪誌를 편찬하면서 경기체가 류類의 죽계별곡을 포함하였으나 황준량은 이에 대해 반대하였다. ‘호협질탕豪俠跌宕’한 유흥적 분위기는 죽계지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농암 이현보를 위한 금계 황준량의 자료 수집에 대한 고증考證은 퇴계 이황이 어부가漁夫歌의 탄생에 대해 쓴 글에 나온다. 금계 황준량 스스로도 노래를 취해 부르곤 했고 하는데 황준량이 쓴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그 가사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만들 때, 그 대상이 되었던 원본이 바로 황준량이 구해준 그것이었다. 금계 황준량이 한시漢詩만이 아니라 국문시가나 악서에 대한 안목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만년으로 갈수록 유흥적, 현시적, 자기만족적 경향이 짙은 경기체가에 부정적이었던 퇴계 이황과 뜻을 같이 하여 문학文學의 교육적, 사회적, 내면 수양적 기능을 중시하는 선비들의 절제된 미의식의 체현을 중시한 선비였다.
퇴계 이황이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에 쓴 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좌랑 벼슬을 하는 황중거黃仲擧(중거仲擧는 황준량의 字)는 선생(농암 이현보)과 친하고 두터운 사이였다.(금계 황준량이 처조부인 농암 이현보에게 어부가의 원전 책자를 구해다 줄 때에 좌랑 벼슬을 하고 있었다.)
항상 박준의 책 중에서 이 노래를 취하곤 하였다.
또한 단가로 어부가 지은 10장을 함께 헌납獻納하면 선생(농암 이현보)이 얻어 즐기고 고상高尙함을 기뻐하였지만 오히려 쓸데없이 긴 것을 면하지 못함을 병으로 여겼다.
이에 개정하고 보충補充하기를 12장을 9장으로, 십장을 5장으로 줄여 시종 아이들에게 주어 익히고 노래하게 하였다.”
12. 국토國土 사랑
금계 황준량은 국토國土에 대해 애정이 깊었다. 자연을 사랑하였다. 옛 사람들은 자연을 산수山水로 표현을 하나 산수山水는 포괄적인 의미의 자연이다. 산수山水가 꼭 산과 물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나는 곳이나 머무는 곳에 아름다운 자연이 있으면 찾았다. 길을 가다 경치에 취해 홀로 즐기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가 많았다. 때로는 사람을 불러 같이 시간을 보냈다.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이 때로는 승려이기도 하고, 조정에서 같이 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 지역의 선비이기도 하고, 은거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의 성격을 보면 선비들이 가장 많았다.
금계 황준량의 일상이 모두 엄숙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썰매를 타기도 하고 말을 달리기도 하고 달을 보며 취하기도 했다. 단양 군수로 있을 때에는 단양에 은거하던 이지번(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의 형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아버지)과 함께 교유할 때 썰매를 타고 방문한 기록도 있다.
퇴계의 증언에 의하면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겨 무릇 지나가는 곳이나 머무는 곳에 이름난 산과 운치 있는 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을 불러 함께 찾아가기도 하며 혹은 몸을 빼쳐 혼자 가기도 하였는데 당도한 즉슨 이리저리 거닐면서 휘파람 불고 시를 읊조리고 저녁이 되어도 돌아 갈 것을 잊을 정도였다. 단양의 도담島潭과 구담龜潭에서 성암 이지번을 주인으로 하여 마음껏 놀고 마음껏 감상하기도 하였다. 더욱 즐거워 한 것으로는 얼음이 언 강에서 썰매를 타고 놀기도 하고 겨울달이 얼음이 언 강위에 비췰 때 충주에서부터 강 위를 따라 썰매를 타고는 사람을 시켜 앞에서 썰매에 맨 줄을 당기게 하여 미끄럼을 지쳐 위로 올라가 이지번이 있는 곳을 지나 군郡에 도달하여 스스로 말하길 ‘이 쾌락한 마음을 비길 데 없구나.’라 했으니 그 운치韻致와 진솔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다고 하였다.
13. 유적遺蹟
금계 황준량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수많은 유적遺蹟이 있다.
그 중 금양정사錦陽精舍는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이 그 수호를 당부하였고 지금은 경북 유형문화재 3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후손들과 선생을 추모하는 탐방객이 찾아와 강학을 하곤한다. 후손들이 금계를 그리고 세웠던 금선정錦仙亭은 후손들과 지역사회 지도자들에 의해 수호守護되어 왔다.
신령현감을 지내면서 창건한 백학서원은 일제강점기 독립지사를 배출하면서 독립운동유적지로 복원을 앞두고 있으며, 성주목사 시절 창건하여 지금의 성주와 칠곡 및 인근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고 실천학문인 실학의 배태지로 재조명되고 있는 녹봉정사도 복원을 앞두고 있다.
그 외 단양군수 재임 시에 족적을 남긴 곳을 비롯하여 목민관으로 또는 어사로 활동하면서 족적을 남긴 곳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국문國文 시가詩歌 발전에 기여를 하였다.
주세붕과 경기체가景幾體歌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 받으며 논쟁을 하였으며
처조부妻祖父인 농암 이현보가 어부가漁夫歌를 짓는데 도움이 되도록 원전을 백방으로 찾아 구했다.
신재 주세붕과 의견을 주고받은 기록은 주세붕의 문집과 황준량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주세붕은 죽계지竹溪誌를 편찬하면서 경기체가 류類의 죽계별곡을 포함하였으나 황준량은 이에 대해 반대하였다. ‘호협질탕豪俠跌宕’한 유흥적 분위기는 죽계지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농암 이현보를 위한 금계 황준량의 자료 수집에 대한 고증考證은 퇴계 이황이 어부가漁夫歌의 탄생에 대해 쓴 글에 나온다. 금계 황준량 스스로도 노래를 취해 부르곤 했고 하는데 황준량이 쓴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그 가사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만들 때, 그 대상이 되었던 원본이 바로 황준량이 구해준 그것이었다. 금계 황준량이 한시漢詩만이 아니라 국문시가나 악서에 대한 안목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만년으로 갈수록 유흥적, 현시적, 자기만족적 경향이 짙은 경기체가에 부정적이었던 퇴계 이황과 뜻을 같이 하여 문학文學의 교육적, 사회적, 내면 수양적 기능을 중시하는 선비들의 절제된 미의식의 체현을 중시한 선비였다.
퇴계 이황이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에 쓴 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좌랑 벼슬을 하는 황중거黃仲擧(중거仲擧는 황준량의 字)는 선생(농암 이현보)과 친하고 두터운 사이였다.(금계 황준량이 처조부인 농암 이현보에게 어부가의 원전 책자를 구해다 줄 때에 좌랑 벼슬을 하고 있었다.)
항상 박준의 책 중에서 이 노래를 취하곤 하였다.
또한 단가로 어부가 지은 10장을 함께 헌납獻納하면 선생(농암 이현보)이 얻어 즐기고 고상高尙함을 기뻐하였지만 오히려 쓸데없이 긴 것을 면하지 못함을 병으로 여겼다.
이에 개정하고 보충補充하기를 12장을 9장으로, 십장을 5장으로 줄여 시종 아이들에게 주어 익히고 노래하게 하였다.”
12. 국토國土 사랑
금계 황준량은 국토國土에 대해 애정이 깊었다. 자연을 사랑하였다. 옛 사람들은 자연을 산수山水로 표현을 하나 산수山水는 포괄적인 의미의 자연이다. 산수山水가 꼭 산과 물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나는 곳이나 머무는 곳에 아름다운 자연이 있으면 찾았다. 길을 가다 경치에 취해 홀로 즐기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가 많았다. 때로는 사람을 불러 같이 시간을 보냈다.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이 때로는 승려이기도 하고, 조정에서 같이 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 지역의 선비이기도 하고, 은거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의 성격을 보면 선비들이 가장 많았다.
금계 황준량의 일상이 모두 엄숙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썰매를 타기도 하고 말을 달리기도 하고 달을 보며 취하기도 했다. 단양 군수로 있을 때에는 단양에 은거하던 이지번(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의 형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아버지)과 함께 교유할 때 썰매를 타고 방문한 기록도 있다.
퇴계의 증언에 의하면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겨 무릇 지나가는 곳이나 머무는 곳에 이름난 산과 운치 있는 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을 불러 함께 찾아가기도 하며 혹은 몸을 빼쳐 혼자 가기도 하였는데 당도한 즉슨 이리저리 거닐면서 휘파람 불고 시를 읊조리고 저녁이 되어도 돌아 갈 것을 잊을 정도였다. 단양의 도담島潭과 구담龜潭에서 성암 이지번을 주인으로 하여 마음껏 놀고 마음껏 감상하기도 하였다. 더욱 즐거워 한 것으로는 얼음이 언 강에서 썰매를 타고 놀기도 하고 겨울달이 얼음이 언 강위에 비췰 때 충주에서부터 강 위를 따라 썰매를 타고는 사람을 시켜 앞에서 썰매에 맨 줄을 당기게 하여 미끄럼을 지쳐 위로 올라가 이지번이 있는 곳을 지나 군郡에 도달하여 스스로 말하길 ‘이 쾌락한 마음을 비길 데 없구나.’라 했으니 그 운치韻致와 진솔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다고 하였다.
13. 유적遺蹟
금계 황준량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수많은 유적遺蹟이 있다.
그 중 금양정사錦陽精舍는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이 그 수호를 당부하였고 지금은 경북 유형문화재 3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후손들과 선생을 추모하는 탐방객이 찾아와 강학을 하곤한다. 후손들이 금계를 그리고 세웠던 금선정錦仙亭은 후손들과 지역사회 지도자들에 의해 수호守護되어 왔다.
신령현감을 지내면서 창건한 백학서원은 일제강점기 독립지사를 배출하면서 독립운동유적지로 복원을 앞두고 있으며, 성주목사 시절 창건하여 지금의 성주와 칠곡 및 인근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고 실천학문인 실학의 배태지로 재조명되고 있는 녹봉정사도 복원을 앞두고 있다.
그 외 단양군수 재임 시에 족적을 남긴 곳을 비롯하여 목민관으로 또는 어사로 활동하면서 족적을 남긴 곳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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