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7년에는 안향선생 사당과 소수서원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지... > 黃門家 학술자료

본문 바로가기

서브이미지

1547년에는 안향선생 사당과 소수서원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지... > 黃門家 학술자료

1547년에는 안향선생 사당과 소수서원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8회 작성일 21-08-17 05:19

본문

1547년에는 안향선생 사당과 소수서원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지에 대해 전사간 황효공, 관찰사 안현, 도사 정준, 군수 유경장, 전정랑 안공신과 함께 의론하여 정하여 그대로 따르게 하였다. 사문입의斯門立議(정식 명칭은 ‘순흥문성공묘백운서원사문입의’이다)가 그것이다. 공부를 어떻게 하며, 선비들을 어떻게 대하며, 선비들의 공부 지원은 어떻게 하며, 서원 운영은 어떻게 하는지가 나타나 있다. 주변 절에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내용도 있다.
 

금계 황준량의 학문 자세는 신재 주세붕과 주고받은 편지에 나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세이명도措世而明道, 반신이궁리反身而窮理가 그것이다. 풀어본다면 첫째, ‘인간 세상에 베풀어서 사람들이 갈 길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자기 자신을 늘 관찰하고 이치를 궁구할 수 있어야 한다.’이다. 공허한 담론談論이 아니라 실제의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현실現實의 개혁改革을 중시하였다 할 수 있다. 세상의 실 삶을 개선하고 개혁하기 위해서 대충 일을 하지 말고 끝까지 그 솔루션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금계 황준량이 세운 학교에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맥學脈을 모두 잇는다는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영봉서원(전임자가 창건한 학교로 금계가 부임 후 증수완공하였으며 후에 천곡서원으로 개칭)과 녹봉정사에서 금계 황준량에게 배웠다.

 

“우리 고을(현 성주, 칠곡, 경산, 고령, 달성의 화원읍 지역이며 당시 이름은 성주목星州牧임)의 수령으로 부임하셔서는 후생을 이끌어 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비들이 오늘날까지도 그 교화에 감격하여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찍이 저는 선생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았던지라 더욱 그러합니다. 저를 인정하고 사랑하신 그 뜻이 각별하셨습니다. (중략) 한평생 선생의 덕을 흠모하고 뜻을 받들어 감히 그 기대를 실추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야 어찌 잠시라도 소홀히 한 적이 있었겠습니까.”(정구鄭逑가 금계錦溪 묘소墓所에 참배하고 지은 제문祭文)

 

퇴계 이황에 의하면 금계 황준량이 “다양한 방면으로 훈도訓導하니 각각 그 자질資質의 고하高下에 따라 성취成就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한다.

 

주자서절요를 편찬하여 선비들이 학문을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는 본래 퇴계 이황이 주자학朱子學 연구硏究와 문인門人들을 위한 강학講學 교재敎材로서 기획企劃된 책이었다. 퇴계는 1543년(중종中宗 38)에 주자대전朱子大典을 구한 후 10여년 동안의 연구 결과를 가지고 편찬하였지만 출판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금계 황준량은 주자서절요를 왜 발간하려고 했을까?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발간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교재敎材로서 주자서朱子書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입장에서는 학맥學派의 숙원을 해결하는 쾌거이기도 하였다. 주자朱子의 편지가 집주集註나 어류語類 등의 저술著述과는 달리 이론이나 학설에 대한 내용이 이론理論의 논리적 맥락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적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 점이 그의 학문관學問觀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퇴계는 학문을 추구하되 추구하는 사람이 단서端緖를 쉽게 열 수 있게끔 하는 교재敎材로 실생활實生活과 밀접한 편지便紙를 택한 것이었고 금계錦溪는 이 책을 간행하고자 여러 해 동안 노력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표현으로 가르침을 주면 이해를 못하는 사람도 있다. 주자서절요는 배우는 사람들이 쉽게 깨우칠 수 있도록 그에 맞게 가르치는데 매우 유용하였기 때문에 출판을 서두른 것이었음이 금계錦溪가 쓴 주자서절요 발문跋文에서 알 수 있다. 주자서절요의 발간과 관련하여 퇴계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주자서절요를 출판하여도 사람들이 많이 읽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을 하였지만 금계錦溪는 출판을 결행하였다. 금계錦溪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발간發刊한 이후 여러 곳에서 출판出版이 거듭될 정도였다. 금계가 출판을 하지 않았더라면 당시의 학문 수준 발달이 늦어졌을 것이라 한다.

 

7. 성품

 

-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남달랐다. 물건이 생기면 어머니를 봉양奉養하거나 형제자매兄弟姉妹에게 나누어 주었다. 행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공公은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하여 무릇 물품物品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어머니(자당慈堂)에게 올리고 자매姉妹와 아우, 조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자기는 아주 적게 취하였다.’

- 가족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궁핍窮乏함을 돌보았다. 행장行狀에는 ‘지역의 친구들에게도 곤궁困窮한 이를 주휼賙恤하고 급박急迫한 이를 구제하여 마치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비록 이 때문에 남들에게 혐의嫌疑나 비방을 들어도 근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 문중門中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글과 지역 선비들에게 당부하는 글은 늘 좋은 사회에 대한 것이었다.

- 나라로부터 받는 녹봉祿俸은 부임하는 곳마다 학교(향교鄕校, 서원書院, 정사精舍, 서당書堂 등)를 증수하고 창건하는데 드는 경비經費로 많이 썼다. 이러니 생활을 검소儉素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족의 경제적 궁핍窮乏이 심했을 터이나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나 대화에서 가난에 대한 불편함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금계집에도 그런 경제적 형편에 대한 불만이라든지 그런 흔적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는데 가치를 두었지 어려운 살림살이를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자신을 위해서는 근면검소하여 장사葬事를 지내는 날 상복喪服이나 관棺하나 변변한 것이 없을 정도였다. 운명하던 날에 이르러서는 이불과 속옷 등이 구비되지 않아서 베를 빌려 염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야 사람들이 금계錦溪의 청빈함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거짓으로 꾸며서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한다.

- 우리 땅을 매우 아꼈다. 길을 가다가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시를 읊느라 밤이 되도록 집에 가는 것을 잊기도 했다.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도 내려 꽃을 감상한 기록도 보인다. 운치韻致있는 곳은 지인을 불러 함께 찾거나 홀로 가기도 하였다. 금계의 시에는 이렇게 지인들과 함께한 시들이 많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사명 (주)스피드레이저기술 주소 경기도 광명시 하안로 108 에이스광명타워 208호 사업자 등록번호 119-86-49539 대표 황병극 전화 02-808-3399 팩스 02-6442-7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