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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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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5회 작성일 21-08-17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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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본사상

 

당시로서는 이른 나이인 24세에 문과 급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관직에 있었다. 그의 관직 생활의 대부분은 학문의 진흥과 교육 그리고 백성을 살리고자 하는데 있었다. 모두 목민관이 해야 할 일이라 하여 목민관으로 본분을 다하는데 몰두하였다.

 

모함을 당하여 승진이 막히기도 하고 영전이 막히기도 하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특히, 지방관으로 보임된 뒤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금계 황준량의 학문을 하는 기본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었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익히고 경세치용으로 백성들을 위한 유익한 사업을 펼치는 것이 그 본령이라고 보고 실제 자신이 죽을 때까지 실천하였다. 학문은 세상에 적용하여 효험이 있어야 하며, 자신을 돌이켜 보며 끝없이 탐구하는 실질實質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재 주세붕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미 이름을 날린 선현에 대해서 세상에 적용되지 못하고 궁구하여 실제 써먹지 못한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조세이명도지효措世而明道之效。

세상에 적용하여 도를 밝히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

반신이궁리지실反身而窮理之實。

자신을 되돌아보고 이치를 끝까지 탐구하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

 

후학들에게 당부할 때에도 학문이 일상생활에서 내외교수內外交修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퇴계 이황이 고봉 기대승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토론을 할 때 금계 황준량에게 그 토론 내용을 알리자 적극 의견을 개진하였다.

 

퇴계 이황이 금계 황준량에 대해 평하기를 주정지경主靜持敬이라 하였다. 학문 몰두의 자세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목민관牧民官으로 활동하는 모습은 늘 왕성하여 짧은 기간에도 많은 성과를 내었다. 금계 황준량의 행적으로 보면 늘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그가 이룩한 성과가 많음에 비추어 볼 때 학문學問은 백성百姓들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충실했다 할 수 있다.

 

가르칠 바를 세우고 교훈을 전할 때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주세붕에게 보낸 글에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전傳함이 멀지 못하고, 전함이 멀지 못하면 도(道)가 밝아질 수 없다.”고 하였다.

 

여지불심慮之不深。 깊고깊게 생각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전지불원傳之不遠。 멀리 전하지 못하게 된다.

전지불원傳之不遠。멀리 전하지 못하게 되면

도무이명道無以明。도를 밝히지 못하게 된다.

군자지립교수훈君子之立敎垂訓。군자의 가르침은 후세에도 교훈이 되어야 하니

가불근재可不謹哉。어찌 부지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대자에게 기대어 복을 구하거나 일을 하지 않고 안락安樂을 추구하거나 종교인이라고 해서 세금을 면제받고 군역을 면제받는 것에 반대하였다. 불교의 선종과 교종 혁파를 청하는 상소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는 대표적인 그의 생각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불교를 없애야 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승려들과의 교유(승려와 수창을 많이 하였다. 여러 산승들을 우호적으로 대우하고 불교의 세계도 선의로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 작품에서 보인다.)에서 뜻이 통하기도 했음은 주고받은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다름의 인정(똘레랑스)’ 이고 다름의 인정을 넘어 다름의 상호 조화와 공존을 추구했다 하겠다. 서원을 운영할 때 주변의 사찰에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당부도 하였다(소수서원의 운영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황효공, 안현, 안공신, 유경장, 정준 등과 함께 만든 사문입의斯文立議).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에는 군역軍役 등 백성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종교인의 실상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당시 나라를 주물렀던 대왕대비大王大妃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잘못은 바로 왕王의 잘못임을 지적하는 내용도 들어있으니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은 선비의 기개가 있었다.

 

5. 공직公職 - 공직자의 모델

 

문과급제 후 초기 관직생활은 잠시 성주훈도星州訓導와 상주교수尙州敎授를 한 외에는 중앙정부에서 여러 직을 담당하면서 족적足跡을 남겼으나 모함을 받은 후 중앙정부 보다는 지방 근무를 희망하였다. 중앙직中央職의 자리가 나도 나아가지 않았다. 지방 근무 희망은 경상도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使로 지역을 시찰하면서 보았던 백성들의 어려운 경제 여건과 배우지 못함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작용하였다.

말로만 ‘백성이 근본’이라고 하지 않고 실천實踐을 하였다.

공직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로만 하지 않고 실행實行을 하였다. 부임赴任하는 곳마다 그 지역실정地域實定에 맞게 다스렸으며 큰 족적足跡을 남겼다.

 

신령新寧에 현감縣監으로 부임赴任하여서는 장부상帳簿上으로만 남아있는 채권문서債券文書를 불태워서 그 피해被害가 고을 백성百姓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였다. 장부帳簿와 실제實際와의 차이는 당신이 지출을 아껴서 채웠다. 공문서公文書를 불사르면 크게 문책問責당할 일이었으나 그대로 두면 백성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지라 개의치 않았다 한다. 부임 시 흉년이 들었으나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救濟하여 ‘백성이 소생蘇生되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단양에 군수로 부임하여서 그 피폐疲弊함에 임기만 채우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기 보다 근본원인인 조세租稅의 문제를 해결하자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조세는 지금처럼 화폐로 납부하는 것만 있지 않았다. 단양의 폐단을 진달하는 상소인 5천자 단양진폐소를 보면 목재, 종이, 사냥, 대장장이, 악공, 병사, 아전, 가죽, 타고을의 조세 떠안기, 의약재료 등 다양하다. 단양진폐소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하고 백성의 실상을 실상의 조사에 의해 통계로 제시하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내용이 곡진한바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단양진폐소는 부임하자마자 당시의 단양 실태實態를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방안解決方案을 제시한 글일 뿐만 아니라 명문장名文章으로도 유명하다.

 

성주星州에 목사牧使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성주星州는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으나 어렵다고 각종 문서를 정비하고 문제에 맞는 해결책을 만들어 시행했으며 지역민地域民 교육으로 문화발달文化發達에 주력하였다. 전임자가 남긴 포흠逋欠이 있었는데 물자를 절약하고 아껴 채워 넣은 다음 관련 문서를 불태웠다.(정약용, 『목민심서』) 성주에서는 교육과 관련하여 지역민 교육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를 출판出版하였으며 그 뒤 회암서절요는 전국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의 교과서敎科書로 사용되었다.

 

황준량은 청렴淸廉의 공직자 모범을 보였다.

그의 청렴함은 죽을 때 이불과 속옷 등이 구비되지 않아서 베를 빌려 염을 했을 정도였으며 관에 채울 의류도 별로 없었음에서 알 수 있다. 가난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었음은 그가 죽은 후에야 그의 청빈함을 알 정도였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청빈을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이상 실현에 가치를 둔 것이지 물질적 부에 가치를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이나 지인들이 곤궁할 때 이들을 도와주어 구하려고 하였으며 이들을 구제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가 쓴 시에는 거문고(금琴)이 많이 나온다. 거문고는 공직자의 청렴결백한 생활과 관련된 말이다. 중국 송나라의 조변趙弁이 부임할 때 거문고와 학을 대동하는데 벼슬을 물러날 때에도 거문고와 학만 대동하였다는 고사와 관련이 있다. 황준량이 공직자의 이임을 기념하는 시를 쓰거나 공직자를 추모하는 제문을 쓸 때에 꼭 ‘청렴’의 내용을 넣었으니 청렴한 사람과 사귀고 청렴한 사람을 존중하였고 청렴한 공직자를 그만큼 우대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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