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 황준량의 능력能力은 퇴계 이황李滉의 다음 말에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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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81회 작성일 21-08-17 05:16본문
금계 황준량의 능력能力은 퇴계 이황李滉의 다음 말에 잘 나타난다.
‘총명聰明하고 뛰어나며 어떤 일을 맡겨도 잘 할 수 있는 능력能力이 있었다.’(47세로 일찍 타계함에 안타까움을 나타낸 말이다.)
‘(황준량의 타계他界 소식에) 실성失性하여 길게 부르짖으며 물을 짜내듯이 눈물을 흘렸다오. 하늘이 이 사람을 빼앗음이 어찌 이다지도 빠른가? 참인가 꿈인가? 놀랍고 아득하여 목이 메는구나.’
황준량이 타계他界한 뒤 퇴계 이황이 제문祭文과 만사輓詞를 각기 두 번이나 쓰고 비석에 ‘금계황공지묘錦溪黃公之墓’, 명정銘旌에 ‘오호망우금계황선생嗚呼亡友錦溪黃先生(슬프다. 돌아간 벗, 금계 황선생이여)’이라 직접 썼을 정도로 안타까워하고 높이 평가하였다. 스승이 제자에게 곧바로 ‘선생’이라 일컬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임금에게 보고한 기록(승정원일기)도 보인다.
‘황준량이 죽자 이황이 ‘선생先生’이라고 그의 명정銘旌에 썼는데, 스승이 제자에게 곧바로 선생이라 일컬은 것은 바로 사문斯文(선비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영남의 선비들은 지금까지도 높이 우러르고 사모하고 있습니다.‘(승정원일기 중)
퇴계 이황이 쓴 두 개의 제문祭文 중 처음 지은 제문祭文은 금계 황준량을 잃은 퇴계의 슬픔이 가득 찬 내용 중심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잃은 심적 타격心的打擊이 컸음이 제문, 특히 첫 번째 제문에 스며있음을 볼 수 있다.
퇴계 이황이 행장行狀을 쓴 6명중(퇴계退溪 부친父親 제외)에 들어간다.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쓴 행장行狀 인물은 금계 황준량 외에 정암 조광조,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임금 명종, 퇴계의 돌아가신 아버지이다. 왕과 가족을 제외하면 5명에 대한 행장만 썼다. 행장을 씀에 매우 인색했다 할 수 있다.
※ 퇴계집退溪集과 금계집錦溪集을 보면 퇴계와 금계가 학문적으로 주고받은 글이 많음(퇴계를 비판하는 입장에 섰던 내암 정인홍鄭仁弘은 퇴계와 금계가 글을 주고받은 것도 비판하였는데 ‘이황과 황준량이 주고받은 글을 모으면 책을 이룰 정도’란 말을 쓰기도 하였다.)
금계가 퇴계를 방문하였을 때 퇴계가 지은 시 하나를 소개한다. 궁금한 점을 토의했다는 말이 첫 구절에 나온다. 그만큼 만나면 서로의 견해를 이야기하길 즐겼다 하겠다.
퇴계초옥황금계내방退溪草屋黃錦溪來訪(퇴계의 초가집을 찾은 금계)
계상봉군고소의溪上逢君叩所疑
냇가서 그대 만나 궁금한 점 토의하며
탁료료부위군지濁醪聊復爲君持
다시 그대 위해 차린 막걸리를 함께하네.
천공각한매화만天公卻恨梅花晩
매화꽃 늦게 필까 하늘이 걱정하는가
고견사수설만지故遣斯須雪滿枝
잠깐 눈 내려 가지마다 활짝 핀 눈꽃이네.
퇴계가 문인門人들에 대해 평가를 한 기록들이 많은데 긍정적 평가 보다 부정적 평가가 더 많다. 긍정적 평가가 유일하게 많은 사람이 금계錦溪이다.
황준량은 당대 어른으로 중앙에서도 존경을 받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처조부妻祖父)의 아낌을 받았다. 금계錦溪의 친필親筆은 농암 이현보 종가宗家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보물寶物로 지정된 농암 이현보 종가宗家 문적文籍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금계錦溪의 친필로 쓰인 [구경별록]이 포함되어 있다(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음).
그의 요절夭折에 대한 안타까움과는 별도로 그는 자신의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해 생명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선비들이 과거를 하는 이유도 권력權力을 잡고 그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상을 세상에 펴기 위함이었다. 금계 황준량이 지방 수령首領으로 나간 이후에는 중앙中央의 중요 보직補職을 마다한 것도 지방관地方官으로 자신의 뜻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뜻을 펴고 그 결실을 빨리 볼 수 있는 것도 지방관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금계 황준량은 성주목사로 있는 동안 두 개의 학교를 새로 만들고 기존의 두 개 학교를 확충하였으며 학생들과 즐겨 강학을 하고, 재정의 빈 곳이 없도록 하고, 행정 일을 보느라 또 덕계 오건 등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느라 밤을 자주 지새우다 건강을 해쳤다. 주변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음을 걱정하면 ‘마음을 다스리고 기운을 기르는 학문을 하고 독서를 하는데 어찌 병이 들 것이냐.’라고 하였으며 ‘혹시 질병에 든다하여도 운명’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건강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펴는데 온 심신을 바쳤다. 이상실현을 위해 생명을 불태운 모델 케이스이다. 금계 황준량의 이러한 행적은 해동소학海東小學에도 인용되고 있다.
‘총명聰明하고 뛰어나며 어떤 일을 맡겨도 잘 할 수 있는 능력能力이 있었다.’(47세로 일찍 타계함에 안타까움을 나타낸 말이다.)
‘(황준량의 타계他界 소식에) 실성失性하여 길게 부르짖으며 물을 짜내듯이 눈물을 흘렸다오. 하늘이 이 사람을 빼앗음이 어찌 이다지도 빠른가? 참인가 꿈인가? 놀랍고 아득하여 목이 메는구나.’
황준량이 타계他界한 뒤 퇴계 이황이 제문祭文과 만사輓詞를 각기 두 번이나 쓰고 비석에 ‘금계황공지묘錦溪黃公之墓’, 명정銘旌에 ‘오호망우금계황선생嗚呼亡友錦溪黃先生(슬프다. 돌아간 벗, 금계 황선생이여)’이라 직접 썼을 정도로 안타까워하고 높이 평가하였다. 스승이 제자에게 곧바로 ‘선생’이라 일컬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임금에게 보고한 기록(승정원일기)도 보인다.
‘황준량이 죽자 이황이 ‘선생先生’이라고 그의 명정銘旌에 썼는데, 스승이 제자에게 곧바로 선생이라 일컬은 것은 바로 사문斯文(선비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영남의 선비들은 지금까지도 높이 우러르고 사모하고 있습니다.‘(승정원일기 중)
퇴계 이황이 쓴 두 개의 제문祭文 중 처음 지은 제문祭文은 금계 황준량을 잃은 퇴계의 슬픔이 가득 찬 내용 중심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잃은 심적 타격心的打擊이 컸음이 제문, 특히 첫 번째 제문에 스며있음을 볼 수 있다.
퇴계 이황이 행장行狀을 쓴 6명중(퇴계退溪 부친父親 제외)에 들어간다.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쓴 행장行狀 인물은 금계 황준량 외에 정암 조광조,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임금 명종, 퇴계의 돌아가신 아버지이다. 왕과 가족을 제외하면 5명에 대한 행장만 썼다. 행장을 씀에 매우 인색했다 할 수 있다.
※ 퇴계집退溪集과 금계집錦溪集을 보면 퇴계와 금계가 학문적으로 주고받은 글이 많음(퇴계를 비판하는 입장에 섰던 내암 정인홍鄭仁弘은 퇴계와 금계가 글을 주고받은 것도 비판하였는데 ‘이황과 황준량이 주고받은 글을 모으면 책을 이룰 정도’란 말을 쓰기도 하였다.)
금계가 퇴계를 방문하였을 때 퇴계가 지은 시 하나를 소개한다. 궁금한 점을 토의했다는 말이 첫 구절에 나온다. 그만큼 만나면 서로의 견해를 이야기하길 즐겼다 하겠다.
퇴계초옥황금계내방退溪草屋黃錦溪來訪(퇴계의 초가집을 찾은 금계)
계상봉군고소의溪上逢君叩所疑
냇가서 그대 만나 궁금한 점 토의하며
탁료료부위군지濁醪聊復爲君持
다시 그대 위해 차린 막걸리를 함께하네.
천공각한매화만天公卻恨梅花晩
매화꽃 늦게 필까 하늘이 걱정하는가
고견사수설만지故遣斯須雪滿枝
잠깐 눈 내려 가지마다 활짝 핀 눈꽃이네.
퇴계가 문인門人들에 대해 평가를 한 기록들이 많은데 긍정적 평가 보다 부정적 평가가 더 많다. 긍정적 평가가 유일하게 많은 사람이 금계錦溪이다.
황준량은 당대 어른으로 중앙에서도 존경을 받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처조부妻祖父)의 아낌을 받았다. 금계錦溪의 친필親筆은 농암 이현보 종가宗家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보물寶物로 지정된 농암 이현보 종가宗家 문적文籍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금계錦溪의 친필로 쓰인 [구경별록]이 포함되어 있다(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음).
그의 요절夭折에 대한 안타까움과는 별도로 그는 자신의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해 생명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선비들이 과거를 하는 이유도 권력權力을 잡고 그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상을 세상에 펴기 위함이었다. 금계 황준량이 지방 수령首領으로 나간 이후에는 중앙中央의 중요 보직補職을 마다한 것도 지방관地方官으로 자신의 뜻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뜻을 펴고 그 결실을 빨리 볼 수 있는 것도 지방관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금계 황준량은 성주목사로 있는 동안 두 개의 학교를 새로 만들고 기존의 두 개 학교를 확충하였으며 학생들과 즐겨 강학을 하고, 재정의 빈 곳이 없도록 하고, 행정 일을 보느라 또 덕계 오건 등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느라 밤을 자주 지새우다 건강을 해쳤다. 주변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음을 걱정하면 ‘마음을 다스리고 기운을 기르는 학문을 하고 독서를 하는데 어찌 병이 들 것이냐.’라고 하였으며 ‘혹시 질병에 든다하여도 운명’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건강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펴는데 온 심신을 바쳤다. 이상실현을 위해 생명을 불태운 모델 케이스이다. 금계 황준량의 이러한 행적은 해동소학海東小學에도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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