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先生 발자취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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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5회 작성일 21-08-17 05:14본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先生 발자취 소고
1. 서문
2. 주요 연보年譜
3. 능력能力과 평가評價
4. 기본사상
5. 공직公職 - 공직자의 모델
6. 교육敎育 - 학교 창건, 증축,
그리고 주자서절요 발간
7. 성품性稟
8. 문학文學
9. 서예書藝
10. 역사의식歷史意識
11. 시가詩歌
12. 국토國土 사랑
13 유적遺蹟
1. 서 문
2017년은 금계 황준량 선생이 나신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을 둘러싼 이야기는 한 시대와 한 문중만이 아니라, 문중을 벗어나 수많은 선비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동안 회자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지금도 금계를 선조로 둔 자부심으로 그의 이야기를 거울삼아 삶의 방향을 찾고 삶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후손들이 있다.
선생의 사후, 스승인 퇴계退溪가 선생의 행장行狀을 직접 쓰고, 문집의 편차를 직접 정하였으며, 이산해李山海가 발문跋文을 쓰고, 세 번에 걸쳐 선생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부친 상喪을 당하여 3년 상을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직에 있었다. 시詩에는 산림은거하고 제자를 키우고자 하는 바람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공직 특히 목민관의 길을 중시하였다. 중앙의 권력 싸움이 싫기도 하였지만 가장 큰 역점이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목민관 이력을 보면 신령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로 세 군데의 목민관 밖에 지내지 않았으나 이는 일찍 타계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모친 봉양을 이유로 목민관으로 나선 후 임금이 주요 자리를 제수하여도 중앙직에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고 목민관으로 일관하였으며 5천자에 이르는 유명한 단양진폐소 상소를 하고 실권을 휘두르는 대비(왕의 어머니)를 비판하는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청렴함은 공직자의 처세에 귀감이 되었다. 타계하기 전까지는 가난의 티를 내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을 사람들이 몰랐는데 죽은 후에 공직에 있으면서 사욕을 채우지 않고 있는 재산마저도 학교를 세우거나 주변을 돕는데 썼음을 알고 감탄하였다 한다. 퇴계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이 타계하였을 때 관을 채울 옷가지가 부족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가난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가치관이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의 삶의 향상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고 경제적 부에는 초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행정 능력이 탁월하였다. 목민관의 자리를 잠시 지나가는 자리로 생각하여 큰 잘못 없이 지내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백성을 소생시키고 백성들에게 부담이 돌아갈 부담을 걱정하여 전임자들까지 쌓여온 무리한 부채문권을 스스로의 절약과 행정의 효율화로 메우고 관련 문건을 소각하였다. 공문서의 소각인지라 자칫 위험할 수 있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다. 선생이 글로 말로 행동으로 보여준 공직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나 해야 할 일은 지금의 공직자들에게도 지침이 된다.
선생은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당시 교육은 목민관의 주요 업무이기도 하였다. 학교를 확충하고 창건하였다. 벼슬을 바라는 교육 프로그램 중심의 공립학교와는 달리 학문 탐구에 포인트를 두고 사립학교를 창건하였다. 교육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바 일찍 타계하였으면서도 증축한 학교만도 공립 3개 학교 사립 1개 학교였으며 창건한 학교는 사립 4개 학교에 이르니 평생을 학교 하나 만든 사람도 드믄 시절인지라 그 열정 정도를 알 수 있다.
2017년 현재는 혼란의 시대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혼란의 시대는 전환의 시대일 수 있다. 사람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한 전환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탄신 5백주년을 맞이한 금계 황준량 선생이 남긴 말, 글, 행동은 전환의 시대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의 혼란이 진정 새롭게 거듭나는 해가 되길 바란다. 각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방안을 찾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서로 돕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선비를 지칭하는 선비 유儒는 사람 人과 공급할 需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걸 공급해준다는 말이다. 선생이 살았을 때 선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벼슬을 통하여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것이었고 금계선생이 거기에 온 열정을 바치고 생명의 불꽃을 태웠듯이 지금의 우리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 때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에서 그 분의 정신을 이을 수 있다. 선현의 뜻을 이음은 바로 그 얼을 우리 시대에 맞게 적용함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직접 창건하였던 영천 백학서원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안동 분강서원汾江書院에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과 함께, 그리고 과거 입격 위주의 소수서원 운영을 비판하면서 그 대척점에 만들어진 풍기 욱양서원郁陽書院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배향되어 선비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고전번역원 지원으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한글로 번역된 후 더욱 많은 관심이 생기고 관련 글들이 인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넘치고 넘치는 정보 가운데 선생의 이야기를 번역된 문집과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나타난 기록, 근래에 이르러 선생의 이야기를 쓴 분들의 기고문, 금계집 번역 사업에 참여하였던 분의 글을 참고로 하여 편집한다.
2. 주요 연보年譜
성명: 황준량黃俊良, 본관: 평해平海, 자字: 중거仲擧, 호號: 금계錦溪
배향서원配享書院: 풍기 욱양서원郁陽書院, 신령 백학서원白鶴書院, 안동 분강서원分江書院
1517년(중종中宗 12년) 7월 출생.출생지出生地: 경북 영주시 풍기읍 출생(당시의 행정단위行政單位로는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1539년(23세) 정시庭試에서 직부회시直赴會試
1540년(24세) 문과급제文科及第
1540년(24세) 권지성균관학유權智成均館學諭
1540년(24세) 성주훈도星州訓導
1541년(25세) 풍기군수이며 소수서원 창건자인 주세붕과 죽계지에 경기체가류 포함 여부로 논쟁
1542년(26세) 학유學諭
1. 서문
2. 주요 연보年譜
3. 능력能力과 평가評價
4. 기본사상
5. 공직公職 - 공직자의 모델
6. 교육敎育 - 학교 창건, 증축,
그리고 주자서절요 발간
7. 성품性稟
8. 문학文學
9. 서예書藝
10. 역사의식歷史意識
11. 시가詩歌
12. 국토國土 사랑
13 유적遺蹟
1. 서 문
2017년은 금계 황준량 선생이 나신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을 둘러싼 이야기는 한 시대와 한 문중만이 아니라, 문중을 벗어나 수많은 선비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동안 회자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지금도 금계를 선조로 둔 자부심으로 그의 이야기를 거울삼아 삶의 방향을 찾고 삶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후손들이 있다.
선생의 사후, 스승인 퇴계退溪가 선생의 행장行狀을 직접 쓰고, 문집의 편차를 직접 정하였으며, 이산해李山海가 발문跋文을 쓰고, 세 번에 걸쳐 선생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부친 상喪을 당하여 3년 상을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직에 있었다. 시詩에는 산림은거하고 제자를 키우고자 하는 바람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공직 특히 목민관의 길을 중시하였다. 중앙의 권력 싸움이 싫기도 하였지만 가장 큰 역점이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목민관 이력을 보면 신령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로 세 군데의 목민관 밖에 지내지 않았으나 이는 일찍 타계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모친 봉양을 이유로 목민관으로 나선 후 임금이 주요 자리를 제수하여도 중앙직에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고 목민관으로 일관하였으며 5천자에 이르는 유명한 단양진폐소 상소를 하고 실권을 휘두르는 대비(왕의 어머니)를 비판하는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청렴함은 공직자의 처세에 귀감이 되었다. 타계하기 전까지는 가난의 티를 내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을 사람들이 몰랐는데 죽은 후에 공직에 있으면서 사욕을 채우지 않고 있는 재산마저도 학교를 세우거나 주변을 돕는데 썼음을 알고 감탄하였다 한다. 퇴계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이 타계하였을 때 관을 채울 옷가지가 부족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가난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가치관이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의 삶의 향상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고 경제적 부에는 초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행정 능력이 탁월하였다. 목민관의 자리를 잠시 지나가는 자리로 생각하여 큰 잘못 없이 지내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백성을 소생시키고 백성들에게 부담이 돌아갈 부담을 걱정하여 전임자들까지 쌓여온 무리한 부채문권을 스스로의 절약과 행정의 효율화로 메우고 관련 문건을 소각하였다. 공문서의 소각인지라 자칫 위험할 수 있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다. 선생이 글로 말로 행동으로 보여준 공직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나 해야 할 일은 지금의 공직자들에게도 지침이 된다.
선생은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당시 교육은 목민관의 주요 업무이기도 하였다. 학교를 확충하고 창건하였다. 벼슬을 바라는 교육 프로그램 중심의 공립학교와는 달리 학문 탐구에 포인트를 두고 사립학교를 창건하였다. 교육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바 일찍 타계하였으면서도 증축한 학교만도 공립 3개 학교 사립 1개 학교였으며 창건한 학교는 사립 4개 학교에 이르니 평생을 학교 하나 만든 사람도 드믄 시절인지라 그 열정 정도를 알 수 있다.
2017년 현재는 혼란의 시대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혼란의 시대는 전환의 시대일 수 있다. 사람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한 전환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탄신 5백주년을 맞이한 금계 황준량 선생이 남긴 말, 글, 행동은 전환의 시대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의 혼란이 진정 새롭게 거듭나는 해가 되길 바란다. 각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방안을 찾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서로 돕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선비를 지칭하는 선비 유儒는 사람 人과 공급할 需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걸 공급해준다는 말이다. 선생이 살았을 때 선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벼슬을 통하여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것이었고 금계선생이 거기에 온 열정을 바치고 생명의 불꽃을 태웠듯이 지금의 우리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 때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에서 그 분의 정신을 이을 수 있다. 선현의 뜻을 이음은 바로 그 얼을 우리 시대에 맞게 적용함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직접 창건하였던 영천 백학서원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안동 분강서원汾江書院에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과 함께, 그리고 과거 입격 위주의 소수서원 운영을 비판하면서 그 대척점에 만들어진 풍기 욱양서원郁陽書院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배향되어 선비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고전번역원 지원으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한글로 번역된 후 더욱 많은 관심이 생기고 관련 글들이 인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넘치고 넘치는 정보 가운데 선생의 이야기를 번역된 문집과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나타난 기록, 근래에 이르러 선생의 이야기를 쓴 분들의 기고문, 금계집 번역 사업에 참여하였던 분의 글을 참고로 하여 편집한다.
2. 주요 연보年譜
성명: 황준량黃俊良, 본관: 평해平海, 자字: 중거仲擧, 호號: 금계錦溪
배향서원配享書院: 풍기 욱양서원郁陽書院, 신령 백학서원白鶴書院, 안동 분강서원分江書院
1517년(중종中宗 12년) 7월 출생.출생지出生地: 경북 영주시 풍기읍 출생(당시의 행정단위行政單位로는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
1539년(23세) 정시庭試에서 직부회시直赴會試
1540년(24세) 문과급제文科及第
1540년(24세) 권지성균관학유權智成均館學諭
1540년(24세) 성주훈도星州訓導
1541년(25세) 풍기군수이며 소수서원 창건자인 주세붕과 죽계지에 경기체가류 포함 여부로 논쟁
1542년(26세) 학유學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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