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신 도산기행12. 도산7곡 단천. 이제부터 그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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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06회 작성일 21-08-17 05:13본문
제 목 : 신 도산기행12. 도산7곡 단천. 이제부터 그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글 쓴 이 : 이성원 등 록 일 : 2007-06-13 오전 11:04:01 조 회 수 :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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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던 길’을 따라서
‘도산 길’의 마지막은 ‘천사’에서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선인들이 ‘청량산’을 갈 때 ‘천사’는 그 깃 점이었다. 천사에서부터 청량산산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온혜에서 청량산까지 국도가 바로 뚫려 있지만, 옛길은 천사-단사-가송-너분들로 이어지는 강변길이었다. ‘도산 9곡’ 가운데 7, 8, 9곡이 몰려있는 곳으로, 청량산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길을 걸어가며 글을 쓰고 시를 지었다.
퇴계는 생애 6, 7번 정도 갔다. 그때마다 단촐 한 산행이었다. 그런데 1564년은 달랐다. 16명을 초청했는데 13명이 참가했다. 혼자 사색하기를 좋아하며, 집단적 모임을 주도한 일이 거의 없는 퇴계에게 이 해 산행은 ‘퇴계식의 일상’으로 볼 때 매우 의례적이다. ‘유산遊山’의 의미를 알게 하고자 한 계획적인 산행으로, 퇴계 전 생애의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또한 마지막 청량산산행이기도 했다.
이날 천사에서 퇴계는 참석자 가운데 유일한 친구인 이문량에게 이런 시를 썼다.
烟巒簇簇水溶溶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至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11. 이제부터 그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도산7곡, 단천-
홀로 걷는 즐거움, 퇴계 예던 길
원촌을 지나면 좌측은 단천丹川이고 우측은 천사川沙다. 천사는 ‘내살미’라 부르는데, 원촌과는 강 이편과 저편이지만 천사는 항상 천사로 존재했다. 빛깔도 원촌과는 다르다. 원촌은 퇴계 후손들의 집성마을이나 천사는 그렇지 않다. 원촌이 산촌에 가까운, 그래서 강과 관련 없는 ‘원촌’, ‘원대’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천사는 물굽이와 모래로 인해 ‘도산 9곡’ 가운데 제6곡인 ‘천사곡’이 되었다. 퇴계의 ‘천사곡’ 시는 이러하다.
흐르는 강물 산을 돌아 흘러오고 川流轉山來
붉은 무지개 마을 안고 비껴있다 玉虹抱村斜
언덕 위엔 푸른 밭이랑 펼쳐있고 岸上渴祿疇
수풀 강변엔 흰 모래가 깔려있다 林邊鋪白沙
천사에는 두 가지 유적이 있다. ‘왕모산성’과 ‘월란사月瀾寺’다. 왕모산성에 대해 육사는 “내 동리 동편에 있는 왕모성은 고려 공민왕이 그 어머니를 모시고 몽진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터가 남아 있다”라고 했다. 월란사는 “달빛을 즐기고 물결을 바라본다”는 ‘농월관란弄月觀瀾’의 뜻에서 지어진 조그만 암자로, 지난 시절 농암, 퇴계에 의해 ‘월란사 철쭉꽃 필 무렵의 모임’이란 뜻의 ‘월란척촉지회月瀾琇乘會’란 향기로운 문학동인회가 열린 곳이다. 실로 ‘문향 안동’의 남상이 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천사 강변이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옛날 선인들은 여기서부터 청량산 산행을 시작했다. 그 길은 천사-단사-매내-올미재-가사리-너분들-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이다. 그 가운데 매내-올미재-가사리의 지역은 무인지경의 협곡으로 지금도 뚜렷하지 않는 강변길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길의 아름다움을 어찌 표현하랴! 퇴계는 이 길을 ‘그림 속’이라 했고, 자신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퇴계는 이 길을 따라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래서 이 길을 퇴계가 그리던 이른 바 ‘예던 길’이라 이름하여 본다.
지금부터 그 길을 따라 한 폭의 그림 같은 청량산으로 들어가 보자. 예던 길 초입에는 옮겨 온 도산초등학교가 있다. 이미 야영장으로 변모했지만, 초등학교는 감정의 원형 같은 곳이다. 그 원형 속에는 중학교 진학을 위한 과외 수업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학교의 빈방에서 자취를 한 추억이 서려 있다. 석발기가 없던 시절, 석발 안 된 쌀로 지은 밥은 끼니마다 이를 손상시켰다. 그래도 우리의 자취 생활은 재미있었다.
도산초등학교 앞산은 왕모산王母山이다. 이 산에 오르면 도산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도산에서 ‘도산’을 볼 수 있는 두 지점 가운데 한 곳이다.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면 지금도 모습이 완연한 산성山城이 보인다. 왕모산성이라 한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을 왔을 때 어머니를 이곳에 피신시켰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내판을 따라 등산로가 다듬어진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보니 과연 산세가 천혜의 요새였다. 뒤는 험준한 산이 둘러싸고 있고, 앞은 사방이 트여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강과 단애로 막혀 있어 마치 단종이 유폐된 청령포를 연상케 하는 그런 지세였다. 어제 쌓은 듯 완연한 산성의 모습을 뒤로하고 조금 나아가니 아늑한 뒤편에 뜻밖에 조그만 집이 있는데, 바로 왕모당이었다. 왕의 어머니가 피신한 곳이었다. 당 안에는 지금 두 개의 목각 인형을 모셔 두었고, 사방에는 금줄을 쳐 놓았다. 목각 인형은 왕과 왕모의 형상이며, 금줄은 이곳 주민들이 당제를 지내고 남긴 추모 의식의 한 단면이다.
공민왕의 안동몽진은 이곳 청량산 일대에 신화가 되었다. 지금 이 일대의 마을에는 왕모당, 공민왕당, 공주당, 부인당 등 십여 곳 정도의 추모공간이 있는데,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추모 의식이 계속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하고, 다시 왕모당 뒤를 지나 얼마간 올라가니 관청에서 설치한 갈선대라는 간판과 더불어 까마득한 수직 암벽이 나타난다. 대가 위치한 공간은 너무 협소하여 현기증이 나서 잠시도 있기가 어려웠다. 조심조심 엎드려 나아가니 절벽 아래 도산 9곡의 제7곡인 단사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갈선葛仙’은 신선이며 ‘단사丹砂’는 신선이 먹는 음식이니, 신선은 정녕 이런 곳에 사는 것인가!
흥 일어 바람처럼 홀로 찾아가다, 갈선대
이곳 갈선대를 떠올리면 너무나 멋있는 한 편의 편지가 생각난다. 그 편지는 나만 숨겨놓고 보는 것인데 이제 공개하게 되니 마치 감추어둔 애인을 공개하는 것 같아 쑥스럽기까지 하다. 그 편지는 퇴계가 친구 이문량에게 보낸 것이다. 나는 퇴계의 수많은 글 가운데 이 한 편의 편지글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제목이 없기에 임의로 ‘능운대, 갈선대 유상遊賞’이라 붙여 보았다.
이대성에게 드림[答李大成-대성은 이문량의 자]
일전에 틈을 내어 홀로 길을 나서 산수를 두루 구경했더니 무르익은 가을풍경과 들국화의 산뜻한 향기가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흐뭇하게 하여 당나귀가 지쳐 절룩거리는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능운대의 선명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한나절을 걸었습니다. 부근의 여러 벗들을 불렀다면 반드시 마음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 돌아갈 길이 낭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늙고 병든 사람이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런 연고로 ‘대나무만 구경하고 주인을 묻지 않은 격’이 되었으니, 만약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렇게 되었다고 알려주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갈선대의 산보는 늘 염두에 두고 있는데, 스무날이 넘으면 늦은 감이 있다 해도 말씀하신 대로 따를 것입니다. 다만 들리기는 근일 안동의 두 관원이 온다고 하니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만약 흥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滉-
이 편지는 갈선대, 능운대 현장으로 나를 유혹했다. 고서를 찾아보니 능운대는 월란사 주변에 있고, 갈선대는 왕모산 아래에 있었다. 두 곳 모두 천사의 북쪽과 남쪽에 위치했다. 우선 갈선대부터 찾았다. 그런데 관청에서 설치한 왕모산 안내판에는 갈선대가 왕모당 뒤편 수직 벼랑인 것으로 되어 있다. 문득 잘못된 고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년의 퇴계에게 그런 가파르고 좁은 단애의 바위 꼭대기가 가을 산책로일 수는 없었다. 갈선대는 “흥이 일어나면 훌쩍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퇴계 역시 “단사벽 남쪽에 왕모산성이 있고, 그 산 서쪽으로 향해서 북쪽을 감싸는 곳에 두 개의 대가 있으니 하나는 갈선대요 하나는 고세대高世臺”라 했다. 《선성지》에도 그 순서가 고세대, 갈선대, 왕모산성으로 나와 있다.
의문을 갖고 있던 1996년 5월, 퇴계종손 이근필 선생을 모시고 월란척촉회 모임을 위해 이곳을 지나는 기회가 있어 물어 보았다. 선생께서는 왕모산성 초입의 언덕을 갈선대라고 지목하셨다. 산성을 오르기 직전 훌륭한 대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갈선대였다. 문헌 자료와도 일치했다. 갈선대에 대해 퇴계는 이렇게 노래했다.
단사 남쪽 벽 갈선대 丹砂南壁葛仙臺
겹겹 구름 산 구비 구비 시냇물 百匣雲山一水回
만약 신선을 지금 보고자 한다면 若使仙翁今可見
땔나무와 물을 가지고 신령께 빌어 보렴. 願供薪水乞靈來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능운대”와 “흥이 일어난다면 혼자도 갈 수 있는 갈선대.” 이 능선의 가을 단풍을 바라보며 홀로 걸어가는 퇴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퇴계의 고독을 반추했다. 또한 편지의 말처럼 ‘틈을 내어 홀로 물을 완상하고 산을 찾으며抽身孤往 玩水尋山’ “만약 흥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若不禁興發則 或作孤往 亦未可知耳”라는 ‘홀로 걷는 즐거움’도 음미해 보았다.
선비들은 이를 ‘유상遊賞’이라 했고, 산행은 ‘유산遊山’이라 했다. 그 속에는 보步, 사思, 주酒, 가歌, 시詩, 창唱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좀 더 고상하게는 ‘풍류風流’라는 단어가 마련되어 있다. 풍류는 ‘바람처럼 흐른다’인데, 바람처럼 흐르는 인생을 구가함이 어디 쉬운 일인가. 풍류의 개념은 높은 인격적 수양을 전제한 까닭에 쉽사리 쓰지 않았고, ‘유상’이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기록들을 상기하면서, 우리들 역시 당시 선인들의 ‘유상’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함께 하기로 한다.
무궁한 모습 시심을 북돋우네, 단사벽과 두 개의 비석
이제 우리는 왕모산을 내려와 장장 1킬로미터에 달하는 바위 병풍의 단사벽을 지난다. 누가 억겁의 세월을 생각하랴만, 원시 지구의 용솟음치는 거대한 물길은 소와 못과 내와 구비와 협을 만들었다. 그때 강은 산을 마음껏 제압하고 할퀴고 짓이겼다. 산은 모든 살을 다 깎아 주고 저항했다. 그후 강은 다시는 산을 이기지 못하고 영원히 복종했다. 강은 이제 조상의 위업마저 잊어버렸고 체념한 지 오래다. 단천의 ‘붉은 내’는 천 년 전에 그러했듯이 천 년 후에도 저렇게 흘러갈 것이리라. 단사벽에 대한 퇴계의 시는 이렇다.
아래는 용소 위에는 범 바위 下有龍淵上虎巖
신선 먹는 단사 옥함에 간직 했으니 藏砂千�玉爲函
이곳 사람들 당연히 천수를 누리리라 故應此境人多壽
병든 이 몸 하필 약초 캐어 무엇 하리 病我何須�翠�
단사벽을 따라 올라가면 강 건너 백운지白雲池라는 곳이 나온다. 보통 ‘배오지’라 부른다. 지대가 낮아 자주 강이 범람했다고 한다.
백운지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봉화 금씨 비석’과 ‘선성 김씨 비석’이다. 두 비석은 서로 조응한다. 선성 김씨 비석은 동편 밭 기슭에 있다. 비석 좌우에 일곱 개의 상석이 놓여 있고, 비 전면에는 ‘선성김씨7세분형전의비宣城金氏七世墳瑩傳疑碑’라 쓰여 있다. 풀이하면 ‘선성 김씨 7세까지의 분묘라 전해짐을 표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근거로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요컨대 수수께끼의 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동 선성 김씨의 뿌리를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비석 글 일부를 풀어 보니 대략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김씨는 고려 때부터 대대로 예안현에 살았다. 시조 호장공으로부터 7세까지의 묘소가 북쪽 백운산白雲山에 있다고 전해졌는데 지금은 타인이 차지했다. 지금 산 위에 퇴락한 묘 두 기와 그 아래 십여 기의 묘가 있으나 모두 비지碑誌 글이 없어 증거할 수 없다. 아, 슬프다!
낭장공의 아들이 영주로 이사했고, 아들 형제는 교리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판서의 둘째가 현감이 되어 산 아래 십여 리의 거리에 와서 살았다. 자손들이 이처럼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수호하지 않아 타인에게 점취당해 버렸다.
안동 지방 씨족의 정착 과정 연구에 천착하신 고 소극 서주석 선생의 글을 보니, 안동의 선성 김씨는 16세기에 이미 이조판서 김담, 형조참판 김늑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특히 김담의 가문은 ‘3판서댁’이라 했을 정도의 명가였다. 형부상서를 역임한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이 집에서 살다가 사위 공조판서 황유정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의 외손자인 김담이 이 집에서 태어나 이른바 ‘3판서댁’이 되었다. 비문에 쓰인 이조판서는 김담을 말하고, ‘산 아래 십여 리에 산 인물’은 현감을 역임한 김담의 아들 김만균金萬鈞을 말한다.
《농암집》에 보면 농암이 승지가 되어 오니 어머니가 가사를 지어 “승지가 오거든 내가 지은 노래로 노래하라” 했는데, 그 가사가 <선반가宣飯歌>였다. 농암은 이때를 술회하며 “이는 대개 어머니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시고 외삼촌댁에서 성장하시어 승지 벼슬이 귀한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라 했다. 여기서 외삼촌은 곧 김담을 말한다.
김늑의 《백암집》에 보면 충재 권벌 종손인 권두인이 김늑의 외손으로 묘지명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선성 김씨는 도산에 여러 성씨들이 입향할 무렵 최고의 명문이었다. 그러나 김담의 아버지가 황유정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집을 물려받음으로써 영주로 가게 되고, 이후 영주가 새로운 전거지로 자리하면서 고향의 선영은 잊혀져 간 것이다.
그렇다면 선성 김씨 묘소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정말 타인이 점취한 것인가? 아니면 실전한 것인가? 그런데 이 비석의 바로 옆에 또 하나의 오래된 비석이 있다. 봉화 금씨 비석이다. 여기에는 “봉성금씨백운산변의비鳳城琴氏白雲山辨疑碑”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봉화 금씨의 백운산 관련 의문을 해명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봉화 금씨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해명의 글을 써야 했는가? 또한 무엇 때문에 그것을 돌에 새겼을까? 궁금하여 우선 빼곡한 비문부터 읽어 보니 대략 이러했다.
‘변의비’를 세움은 선성김씨 ‘전의비’를 변파辨破하기 위함이다. 전에 김씨들이 그 조상의 묘소를 잃고 이 산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선영 아래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전의비라 했다. 그 글에는 “시조 이하 7세까지의 분묘가 세상에 전하기를 백운산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백운산은 곧 우리 집 근원의 산이다. 산 중턱에 선조 정략공 이하 4세까지 묘가 연봉으로 있고, 그 위는 성재공 옛 묘 터가 있다. 이 묘 위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묘 흔적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두 묘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로써 비석이 세워진 연유가 밝혀졌다. 요컨대 한때 두 가문은 이 백운산 묘소의 점취 여부를 둘러싸고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했다. 결과는 무승부. ‘전의傳疑’란 전해오는 의심나는 사항을 조리 있게 추정하는 글이다. ‘변의辨疑’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안에 대한 조리 있는 해명의 글이다. 조리 있게 추정했지만 조리 있게 반박했다. 전의와 변의는 저마다 의문을 말끔히 씻어 줄 사실적 근거와 자료를 요구한다. 그래서 아직 이 승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래에 분명한 시비를 가릴 날을 대비하여 장기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영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이런 염원을 반영한 듯 변의비의 끝에는 “비석을 묘 아래 세우고 훗날 식자의 판단을 기다린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고, 전의비에는 “이미 우리 산을 잃었지만 우리의 이 비석만은 상하게 하지 마라”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때 혼인까지 한 가까운 가문들이지만 선영은 양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선성 김씨는 전의비를 세웠고, 봉화 금씨는 변의비를 세웠다. 이런 비석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 같아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그 많던 은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두 비석을 뒤로하고 되돌아 나와 왼편 강기슭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문득 청량산 육육봉과 학소대의 수직 단애, 백운지 넓은 못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지점이 나온다. 퇴계가 언급한 그림 같은 곳이 여기가 아닐까 싶은 그런 곳이다. 본격적인 청량산 산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조성된 ‘예던 길’도 바로 여기서부터다. 이제부터는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옛길 그대로의 길이다. 4킬로미터, 1시간 정도 거리.
칸트가 걸어 전 세계인이 걷는다는 유명한 ‘철인의 길’ 열 배 이상의 유서 깊고 멋진 길이 아닐 수 없다. 퇴계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구비구비 넓은 여울 曲折屢渡淸凉灘
높고 높은 푸른 산 突兀始見高高山
청량산은 숨은 듯 다시 보이고 淸凉高高隱復見
무궁한 모습 시심을 북돋우네. 無窮變態供吟鞍
길을 따라 오르면서 백운지 강가로 내려가니 물 흐름이 멈춘 듯 고요히 내려앉아 있다. 물은 한없이 맑고 깨끗하며, 물속에는 온갖 고기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유영하고 있다. 그런데 강가 진흙 모래 위 여러 곳에 알 수 없는 짐승의 발자국과 배설물이 보였다. 전에 주민들이 백운지에 수달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 수달의 흔적이란 말인가! 수달이 있고도 남을 만한 곳이라 여겼다.
이 글을 쓰면서 수달 이야기는 하지 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8년 전 이 일대에 엄청난 은어 떼의 출현이 있었는데 그때 몰지각한 사람들의 난리법석을 생각하면 쉬쉬하고 감추어 버릴 일만도 아닌 것 같다. 그야말로 물 반, 은어 반이라 했는데, 지금 그 은어들은 어디에 있는가? 안동댐으로 회귀하는 그 은어는 ‘육봉은어’라 하여 연구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약에 쓸 정도도 보이지 않는다.
은어의 소멸에 대해 사람들은 상류 지역 오염을 그 주범으로 지목한다. 공감한다. 폐광은 많이 정화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곳곳에 물고기를 괴롭히는 시설이 적지 않다. 이곳 강물을 십여 년간 지켜보았는데, 한번은 아이들이 다슬기를 잡아 왔다. 놀라 나가보니 과연 강바닥에 다슬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또 없어졌다. 최근에는 전에 없던 꺽지가 대량으로 서식한다. 꺽지, 다슬기의 출몰과 존재 여부가 1급, 2급수를 측정하는 거울이라 하니 지금 이곳의 강물은 이 사이를 오고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때 일본인 은어 낚시 마니아 한 사람이 왔는데, 그는 청량산 은어를 두고 세계적이라 했다. 일본에는 은어 낚시 마니아만 수천 명이라 했고, 잘 관리하여 그들이 알게 되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있을 것이라 하며, 무법천지이던 전기배터리 사용을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지리산의 반달곰 서식을 공개하고 왜 보호해야 하는지를 설명함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악산 반달곰도 그렇게 했으면 지금 수렴동 계곡을 지나는 수많은 등산객 중 일 년에 한 두 명은 등산 도중 경이로운 조우를 가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걷는데 갑자기 지축을 흔드는 무한궤도의 굉음이 들려온다. 이 산중에 웬 일인가 했더니 곧 수십 대의 지프가 열을 지어 험한 강변을 따라 내려온다. 최근 출몰하는 이른바 오프로드 차량들이었다. 가송리-단천리 구간 협곡은 이들 동호인들에는 최상의 코스였고, 나 또한 한두 번 이들을 만난 바 있다. 처음 그들이 자본주의 시대의 선택받은 귀족들이 아닐까 했는데, 뜻밖에도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갑남을녀들이어서 무척 놀랐다. 실로 거침없는 문명의 전진이고 장관이었다. 또한 인간 광기의 현장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글 쓴 이 : 이성원 등 록 일 : 2007-06-13 오전 11:04:01 조 회 수 :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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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던 길’을 따라서
‘도산 길’의 마지막은 ‘천사’에서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선인들이 ‘청량산’을 갈 때 ‘천사’는 그 깃 점이었다. 천사에서부터 청량산산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온혜에서 청량산까지 국도가 바로 뚫려 있지만, 옛길은 천사-단사-가송-너분들로 이어지는 강변길이었다. ‘도산 9곡’ 가운데 7, 8, 9곡이 몰려있는 곳으로, 청량산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길을 걸어가며 글을 쓰고 시를 지었다.
퇴계는 생애 6, 7번 정도 갔다. 그때마다 단촐 한 산행이었다. 그런데 1564년은 달랐다. 16명을 초청했는데 13명이 참가했다. 혼자 사색하기를 좋아하며, 집단적 모임을 주도한 일이 거의 없는 퇴계에게 이 해 산행은 ‘퇴계식의 일상’으로 볼 때 매우 의례적이다. ‘유산遊山’의 의미를 알게 하고자 한 계획적인 산행으로, 퇴계 전 생애의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또한 마지막 청량산산행이기도 했다.
이날 천사에서 퇴계는 참석자 가운데 유일한 친구인 이문량에게 이런 시를 썼다.
烟巒簇簇水溶溶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至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11. 이제부터 그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도산7곡, 단천-
홀로 걷는 즐거움, 퇴계 예던 길
원촌을 지나면 좌측은 단천丹川이고 우측은 천사川沙다. 천사는 ‘내살미’라 부르는데, 원촌과는 강 이편과 저편이지만 천사는 항상 천사로 존재했다. 빛깔도 원촌과는 다르다. 원촌은 퇴계 후손들의 집성마을이나 천사는 그렇지 않다. 원촌이 산촌에 가까운, 그래서 강과 관련 없는 ‘원촌’, ‘원대’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천사는 물굽이와 모래로 인해 ‘도산 9곡’ 가운데 제6곡인 ‘천사곡’이 되었다. 퇴계의 ‘천사곡’ 시는 이러하다.
흐르는 강물 산을 돌아 흘러오고 川流轉山來
붉은 무지개 마을 안고 비껴있다 玉虹抱村斜
언덕 위엔 푸른 밭이랑 펼쳐있고 岸上渴祿疇
수풀 강변엔 흰 모래가 깔려있다 林邊鋪白沙
천사에는 두 가지 유적이 있다. ‘왕모산성’과 ‘월란사月瀾寺’다. 왕모산성에 대해 육사는 “내 동리 동편에 있는 왕모성은 고려 공민왕이 그 어머니를 모시고 몽진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터가 남아 있다”라고 했다. 월란사는 “달빛을 즐기고 물결을 바라본다”는 ‘농월관란弄月觀瀾’의 뜻에서 지어진 조그만 암자로, 지난 시절 농암, 퇴계에 의해 ‘월란사 철쭉꽃 필 무렵의 모임’이란 뜻의 ‘월란척촉지회月瀾琇乘會’란 향기로운 문학동인회가 열린 곳이다. 실로 ‘문향 안동’의 남상이 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천사 강변이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옛날 선인들은 여기서부터 청량산 산행을 시작했다. 그 길은 천사-단사-매내-올미재-가사리-너분들-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이다. 그 가운데 매내-올미재-가사리의 지역은 무인지경의 협곡으로 지금도 뚜렷하지 않는 강변길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길의 아름다움을 어찌 표현하랴! 퇴계는 이 길을 ‘그림 속’이라 했고, 자신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퇴계는 이 길을 따라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래서 이 길을 퇴계가 그리던 이른 바 ‘예던 길’이라 이름하여 본다.
지금부터 그 길을 따라 한 폭의 그림 같은 청량산으로 들어가 보자. 예던 길 초입에는 옮겨 온 도산초등학교가 있다. 이미 야영장으로 변모했지만, 초등학교는 감정의 원형 같은 곳이다. 그 원형 속에는 중학교 진학을 위한 과외 수업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학교의 빈방에서 자취를 한 추억이 서려 있다. 석발기가 없던 시절, 석발 안 된 쌀로 지은 밥은 끼니마다 이를 손상시켰다. 그래도 우리의 자취 생활은 재미있었다.
도산초등학교 앞산은 왕모산王母山이다. 이 산에 오르면 도산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도산에서 ‘도산’을 볼 수 있는 두 지점 가운데 한 곳이다.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면 지금도 모습이 완연한 산성山城이 보인다. 왕모산성이라 한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을 왔을 때 어머니를 이곳에 피신시켰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내판을 따라 등산로가 다듬어진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보니 과연 산세가 천혜의 요새였다. 뒤는 험준한 산이 둘러싸고 있고, 앞은 사방이 트여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강과 단애로 막혀 있어 마치 단종이 유폐된 청령포를 연상케 하는 그런 지세였다. 어제 쌓은 듯 완연한 산성의 모습을 뒤로하고 조금 나아가니 아늑한 뒤편에 뜻밖에 조그만 집이 있는데, 바로 왕모당이었다. 왕의 어머니가 피신한 곳이었다. 당 안에는 지금 두 개의 목각 인형을 모셔 두었고, 사방에는 금줄을 쳐 놓았다. 목각 인형은 왕과 왕모의 형상이며, 금줄은 이곳 주민들이 당제를 지내고 남긴 추모 의식의 한 단면이다.
공민왕의 안동몽진은 이곳 청량산 일대에 신화가 되었다. 지금 이 일대의 마을에는 왕모당, 공민왕당, 공주당, 부인당 등 십여 곳 정도의 추모공간이 있는데,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추모 의식이 계속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하고, 다시 왕모당 뒤를 지나 얼마간 올라가니 관청에서 설치한 갈선대라는 간판과 더불어 까마득한 수직 암벽이 나타난다. 대가 위치한 공간은 너무 협소하여 현기증이 나서 잠시도 있기가 어려웠다. 조심조심 엎드려 나아가니 절벽 아래 도산 9곡의 제7곡인 단사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갈선葛仙’은 신선이며 ‘단사丹砂’는 신선이 먹는 음식이니, 신선은 정녕 이런 곳에 사는 것인가!
흥 일어 바람처럼 홀로 찾아가다, 갈선대
이곳 갈선대를 떠올리면 너무나 멋있는 한 편의 편지가 생각난다. 그 편지는 나만 숨겨놓고 보는 것인데 이제 공개하게 되니 마치 감추어둔 애인을 공개하는 것 같아 쑥스럽기까지 하다. 그 편지는 퇴계가 친구 이문량에게 보낸 것이다. 나는 퇴계의 수많은 글 가운데 이 한 편의 편지글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제목이 없기에 임의로 ‘능운대, 갈선대 유상遊賞’이라 붙여 보았다.
이대성에게 드림[答李大成-대성은 이문량의 자]
일전에 틈을 내어 홀로 길을 나서 산수를 두루 구경했더니 무르익은 가을풍경과 들국화의 산뜻한 향기가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흐뭇하게 하여 당나귀가 지쳐 절룩거리는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능운대의 선명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한나절을 걸었습니다. 부근의 여러 벗들을 불렀다면 반드시 마음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 돌아갈 길이 낭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늙고 병든 사람이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런 연고로 ‘대나무만 구경하고 주인을 묻지 않은 격’이 되었으니, 만약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렇게 되었다고 알려주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갈선대의 산보는 늘 염두에 두고 있는데, 스무날이 넘으면 늦은 감이 있다 해도 말씀하신 대로 따를 것입니다. 다만 들리기는 근일 안동의 두 관원이 온다고 하니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만약 흥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滉-
이 편지는 갈선대, 능운대 현장으로 나를 유혹했다. 고서를 찾아보니 능운대는 월란사 주변에 있고, 갈선대는 왕모산 아래에 있었다. 두 곳 모두 천사의 북쪽과 남쪽에 위치했다. 우선 갈선대부터 찾았다. 그런데 관청에서 설치한 왕모산 안내판에는 갈선대가 왕모당 뒤편 수직 벼랑인 것으로 되어 있다. 문득 잘못된 고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년의 퇴계에게 그런 가파르고 좁은 단애의 바위 꼭대기가 가을 산책로일 수는 없었다. 갈선대는 “흥이 일어나면 훌쩍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퇴계 역시 “단사벽 남쪽에 왕모산성이 있고, 그 산 서쪽으로 향해서 북쪽을 감싸는 곳에 두 개의 대가 있으니 하나는 갈선대요 하나는 고세대高世臺”라 했다. 《선성지》에도 그 순서가 고세대, 갈선대, 왕모산성으로 나와 있다.
의문을 갖고 있던 1996년 5월, 퇴계종손 이근필 선생을 모시고 월란척촉회 모임을 위해 이곳을 지나는 기회가 있어 물어 보았다. 선생께서는 왕모산성 초입의 언덕을 갈선대라고 지목하셨다. 산성을 오르기 직전 훌륭한 대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갈선대였다. 문헌 자료와도 일치했다. 갈선대에 대해 퇴계는 이렇게 노래했다.
단사 남쪽 벽 갈선대 丹砂南壁葛仙臺
겹겹 구름 산 구비 구비 시냇물 百匣雲山一水回
만약 신선을 지금 보고자 한다면 若使仙翁今可見
땔나무와 물을 가지고 신령께 빌어 보렴. 願供薪水乞靈來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능운대”와 “흥이 일어난다면 혼자도 갈 수 있는 갈선대.” 이 능선의 가을 단풍을 바라보며 홀로 걸어가는 퇴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퇴계의 고독을 반추했다. 또한 편지의 말처럼 ‘틈을 내어 홀로 물을 완상하고 산을 찾으며抽身孤往 玩水尋山’ “만약 흥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若不禁興發則 或作孤往 亦未可知耳”라는 ‘홀로 걷는 즐거움’도 음미해 보았다.
선비들은 이를 ‘유상遊賞’이라 했고, 산행은 ‘유산遊山’이라 했다. 그 속에는 보步, 사思, 주酒, 가歌, 시詩, 창唱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좀 더 고상하게는 ‘풍류風流’라는 단어가 마련되어 있다. 풍류는 ‘바람처럼 흐른다’인데, 바람처럼 흐르는 인생을 구가함이 어디 쉬운 일인가. 풍류의 개념은 높은 인격적 수양을 전제한 까닭에 쉽사리 쓰지 않았고, ‘유상’이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기록들을 상기하면서, 우리들 역시 당시 선인들의 ‘유상’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함께 하기로 한다.
무궁한 모습 시심을 북돋우네, 단사벽과 두 개의 비석
이제 우리는 왕모산을 내려와 장장 1킬로미터에 달하는 바위 병풍의 단사벽을 지난다. 누가 억겁의 세월을 생각하랴만, 원시 지구의 용솟음치는 거대한 물길은 소와 못과 내와 구비와 협을 만들었다. 그때 강은 산을 마음껏 제압하고 할퀴고 짓이겼다. 산은 모든 살을 다 깎아 주고 저항했다. 그후 강은 다시는 산을 이기지 못하고 영원히 복종했다. 강은 이제 조상의 위업마저 잊어버렸고 체념한 지 오래다. 단천의 ‘붉은 내’는 천 년 전에 그러했듯이 천 년 후에도 저렇게 흘러갈 것이리라. 단사벽에 대한 퇴계의 시는 이렇다.
아래는 용소 위에는 범 바위 下有龍淵上虎巖
신선 먹는 단사 옥함에 간직 했으니 藏砂千�玉爲函
이곳 사람들 당연히 천수를 누리리라 故應此境人多壽
병든 이 몸 하필 약초 캐어 무엇 하리 病我何須�翠�
단사벽을 따라 올라가면 강 건너 백운지白雲池라는 곳이 나온다. 보통 ‘배오지’라 부른다. 지대가 낮아 자주 강이 범람했다고 한다.
백운지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봉화 금씨 비석’과 ‘선성 김씨 비석’이다. 두 비석은 서로 조응한다. 선성 김씨 비석은 동편 밭 기슭에 있다. 비석 좌우에 일곱 개의 상석이 놓여 있고, 비 전면에는 ‘선성김씨7세분형전의비宣城金氏七世墳瑩傳疑碑’라 쓰여 있다. 풀이하면 ‘선성 김씨 7세까지의 분묘라 전해짐을 표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근거로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요컨대 수수께끼의 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동 선성 김씨의 뿌리를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비석 글 일부를 풀어 보니 대략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김씨는 고려 때부터 대대로 예안현에 살았다. 시조 호장공으로부터 7세까지의 묘소가 북쪽 백운산白雲山에 있다고 전해졌는데 지금은 타인이 차지했다. 지금 산 위에 퇴락한 묘 두 기와 그 아래 십여 기의 묘가 있으나 모두 비지碑誌 글이 없어 증거할 수 없다. 아, 슬프다!
낭장공의 아들이 영주로 이사했고, 아들 형제는 교리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판서의 둘째가 현감이 되어 산 아래 십여 리의 거리에 와서 살았다. 자손들이 이처럼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수호하지 않아 타인에게 점취당해 버렸다.
안동 지방 씨족의 정착 과정 연구에 천착하신 고 소극 서주석 선생의 글을 보니, 안동의 선성 김씨는 16세기에 이미 이조판서 김담, 형조참판 김늑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특히 김담의 가문은 ‘3판서댁’이라 했을 정도의 명가였다. 형부상서를 역임한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이 집에서 살다가 사위 공조판서 황유정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의 외손자인 김담이 이 집에서 태어나 이른바 ‘3판서댁’이 되었다. 비문에 쓰인 이조판서는 김담을 말하고, ‘산 아래 십여 리에 산 인물’은 현감을 역임한 김담의 아들 김만균金萬鈞을 말한다.
《농암집》에 보면 농암이 승지가 되어 오니 어머니가 가사를 지어 “승지가 오거든 내가 지은 노래로 노래하라” 했는데, 그 가사가 <선반가宣飯歌>였다. 농암은 이때를 술회하며 “이는 대개 어머니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시고 외삼촌댁에서 성장하시어 승지 벼슬이 귀한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라 했다. 여기서 외삼촌은 곧 김담을 말한다.
김늑의 《백암집》에 보면 충재 권벌 종손인 권두인이 김늑의 외손으로 묘지명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선성 김씨는 도산에 여러 성씨들이 입향할 무렵 최고의 명문이었다. 그러나 김담의 아버지가 황유정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집을 물려받음으로써 영주로 가게 되고, 이후 영주가 새로운 전거지로 자리하면서 고향의 선영은 잊혀져 간 것이다.
그렇다면 선성 김씨 묘소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정말 타인이 점취한 것인가? 아니면 실전한 것인가? 그런데 이 비석의 바로 옆에 또 하나의 오래된 비석이 있다. 봉화 금씨 비석이다. 여기에는 “봉성금씨백운산변의비鳳城琴氏白雲山辨疑碑”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봉화 금씨의 백운산 관련 의문을 해명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봉화 금씨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해명의 글을 써야 했는가? 또한 무엇 때문에 그것을 돌에 새겼을까? 궁금하여 우선 빼곡한 비문부터 읽어 보니 대략 이러했다.
‘변의비’를 세움은 선성김씨 ‘전의비’를 변파辨破하기 위함이다. 전에 김씨들이 그 조상의 묘소를 잃고 이 산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선영 아래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전의비라 했다. 그 글에는 “시조 이하 7세까지의 분묘가 세상에 전하기를 백운산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백운산은 곧 우리 집 근원의 산이다. 산 중턱에 선조 정략공 이하 4세까지 묘가 연봉으로 있고, 그 위는 성재공 옛 묘 터가 있다. 이 묘 위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묘 흔적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두 묘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로써 비석이 세워진 연유가 밝혀졌다. 요컨대 한때 두 가문은 이 백운산 묘소의 점취 여부를 둘러싸고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했다. 결과는 무승부. ‘전의傳疑’란 전해오는 의심나는 사항을 조리 있게 추정하는 글이다. ‘변의辨疑’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안에 대한 조리 있는 해명의 글이다. 조리 있게 추정했지만 조리 있게 반박했다. 전의와 변의는 저마다 의문을 말끔히 씻어 줄 사실적 근거와 자료를 요구한다. 그래서 아직 이 승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래에 분명한 시비를 가릴 날을 대비하여 장기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영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이런 염원을 반영한 듯 변의비의 끝에는 “비석을 묘 아래 세우고 훗날 식자의 판단을 기다린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고, 전의비에는 “이미 우리 산을 잃었지만 우리의 이 비석만은 상하게 하지 마라”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때 혼인까지 한 가까운 가문들이지만 선영은 양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선성 김씨는 전의비를 세웠고, 봉화 금씨는 변의비를 세웠다. 이런 비석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 같아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그 많던 은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두 비석을 뒤로하고 되돌아 나와 왼편 강기슭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문득 청량산 육육봉과 학소대의 수직 단애, 백운지 넓은 못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지점이 나온다. 퇴계가 언급한 그림 같은 곳이 여기가 아닐까 싶은 그런 곳이다. 본격적인 청량산 산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조성된 ‘예던 길’도 바로 여기서부터다. 이제부터는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옛길 그대로의 길이다. 4킬로미터, 1시간 정도 거리.
칸트가 걸어 전 세계인이 걷는다는 유명한 ‘철인의 길’ 열 배 이상의 유서 깊고 멋진 길이 아닐 수 없다. 퇴계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구비구비 넓은 여울 曲折屢渡淸凉灘
높고 높은 푸른 산 突兀始見高高山
청량산은 숨은 듯 다시 보이고 淸凉高高隱復見
무궁한 모습 시심을 북돋우네. 無窮變態供吟鞍
길을 따라 오르면서 백운지 강가로 내려가니 물 흐름이 멈춘 듯 고요히 내려앉아 있다. 물은 한없이 맑고 깨끗하며, 물속에는 온갖 고기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유영하고 있다. 그런데 강가 진흙 모래 위 여러 곳에 알 수 없는 짐승의 발자국과 배설물이 보였다. 전에 주민들이 백운지에 수달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 수달의 흔적이란 말인가! 수달이 있고도 남을 만한 곳이라 여겼다.
이 글을 쓰면서 수달 이야기는 하지 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8년 전 이 일대에 엄청난 은어 떼의 출현이 있었는데 그때 몰지각한 사람들의 난리법석을 생각하면 쉬쉬하고 감추어 버릴 일만도 아닌 것 같다. 그야말로 물 반, 은어 반이라 했는데, 지금 그 은어들은 어디에 있는가? 안동댐으로 회귀하는 그 은어는 ‘육봉은어’라 하여 연구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약에 쓸 정도도 보이지 않는다.
은어의 소멸에 대해 사람들은 상류 지역 오염을 그 주범으로 지목한다. 공감한다. 폐광은 많이 정화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곳곳에 물고기를 괴롭히는 시설이 적지 않다. 이곳 강물을 십여 년간 지켜보았는데, 한번은 아이들이 다슬기를 잡아 왔다. 놀라 나가보니 과연 강바닥에 다슬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또 없어졌다. 최근에는 전에 없던 꺽지가 대량으로 서식한다. 꺽지, 다슬기의 출몰과 존재 여부가 1급, 2급수를 측정하는 거울이라 하니 지금 이곳의 강물은 이 사이를 오고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때 일본인 은어 낚시 마니아 한 사람이 왔는데, 그는 청량산 은어를 두고 세계적이라 했다. 일본에는 은어 낚시 마니아만 수천 명이라 했고, 잘 관리하여 그들이 알게 되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있을 것이라 하며, 무법천지이던 전기배터리 사용을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지리산의 반달곰 서식을 공개하고 왜 보호해야 하는지를 설명함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악산 반달곰도 그렇게 했으면 지금 수렴동 계곡을 지나는 수많은 등산객 중 일 년에 한 두 명은 등산 도중 경이로운 조우를 가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걷는데 갑자기 지축을 흔드는 무한궤도의 굉음이 들려온다. 이 산중에 웬 일인가 했더니 곧 수십 대의 지프가 열을 지어 험한 강변을 따라 내려온다. 최근 출몰하는 이른바 오프로드 차량들이었다. 가송리-단천리 구간 협곡은 이들 동호인들에는 최상의 코스였고, 나 또한 한두 번 이들을 만난 바 있다. 처음 그들이 자본주의 시대의 선택받은 귀족들이 아닐까 했는데, 뜻밖에도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갑남을녀들이어서 무척 놀랐다. 실로 거침없는 문명의 전진이고 장관이었다. 또한 인간 광기의 현장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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