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나누미칼럼} 백학서원(백학서당)과 금계 황준량 정재진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기사입력 20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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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23-08-23 06:22본문
내가 백학서원(서당)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알게 된 것은 1997년이다. 당시 영천에 살고 있는 안동권씨 문중에서 문집을 우리말로 푸는 작업을 하게 되어 내가 그 일을 맡으면서부터다. 권응도(權應道 1616~1673)라는 분으로 4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출사(出仕)치 아니하고 향촌에 살면서 신녕향교의 교수직 등 후진양성으로 일생을 살다 간 분으로 그의 유문(遺文)인 풍영정일고(風詠亭逸稿)에는 도처에 백학서당에 관한 글이 남아 있다.
백학서당이 만들어진 시기는 금계 황준량의 신녕현감 재임기간인 1552년으로 추정된다. 처음 서당이 세워진 곳의 산 이름은 양각산(羊角山)으로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와 화산면 가상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26m이며 산의 시작은 화산(華山)이다. 영천시 화남면과 신녕면에 걸쳐 있는 화산의 한 자락이 급격히 남으로 방향을 틀면서 만든 백학산은 대천리에 바라보면 마치 한 마리의 학이 날개 죽지를 펼친 형상이다.
전설로는 이 양각산에 퇴계와 금계 두 분 선생이 오른 뒤로 이름을 백학이라 명명하였다.(권응도의 풍영정일고 중)
▪ 제 문헌상의 기록
1. 화산지(花山誌) 1934년 권영국 김병현 등에 의하여 만들어진 지리지
백학서원은 신녕현 동쪽 30리 지점의 능산(陵山)의 아래 오도리(吾道里)에 있으며 본래 서기1552년에 세워졌다.(금계 황준량공께서 신녕 현감 재임 시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백학산의 아래 양강의 위에다 서당을 건축하고서, 여러 차례 도산의 이 선생에게 질문하여 절목(節目)을 상정(詳定)하고 그 서당의 이름을 청하자 선생께서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였고, 그로 인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삼게 되었다)
임진년(1592년)에 병화(兵火)로 불타 임자년(1612년)에 중건하였으며, 효종조 무술년(1658년)에 땅이 협소하고 위치가 궁벽하여 이곳 능산 아래 오도리로 옮겨 세웠고, 숙종조 무오년(1678년) 서당을 서원으로 하고 사당(祠堂)은 ‘상덕(尙德)’ 강당을 ‘전교(典敎) 누각을 ’풍영(風詠)‘이라 하였다. 고종조 무진년(1868년)에 훼철(毁撤)되었다가 경자년(1900년)에 다시 서당(書堂)으로 세웠다.
擇新基而移創建院之規模已成仍舊貫而改爲講學之堂宇斯作虹梁擧於白日燕賀徧於靑衿竊惟書院經始之初在錦溪爲宰之日錦溪之自述佳什燦瓊玉於壁間退陶之手筆華扁煥銀鉤於楣上幾多儒林之矜式幸爲後學之藏修雖見災於島夷慶重營於僉議遺風不泯至敎彌長誦存心主敬之詞怳若面承指誨玩玉澗風臺之句依如目覩詠歸享祀之禮當興守護之路宜廣然局內之逼窄況山脊之剛燥不便於立廟設齋無望乎井飮田食玆用移建於勝地龜筮協從遂因輸運其舊村丁壯畢出不借工之手方圓平直各得前規不斷徂徠之松闑店楔咸適其用幾年乎神慳鬼馝一朝焉鳥革翬飛瞻望舊基可想黃先生建學芳躅用施前揭猶存魏了翁講道山名信乎君子之攸躋抑亦風氣之所聚對三面之彩岳橫一帶之長流物産則稻粱魚鼈之肥饒人居則士農工賈之稠密在人事而盡美於改卜而何傷將有崇奉之儀先爲培養之所士子向道之志從此益勤民俗尙賢之風自玆愈振敢申呼邪之唱以贊兒郞之謠抛梁東削玉三峰聳碧空颯爽仙風來几席自然淸興滌煩胸抛梁西眼看天日遠岑低東隅雖逝桑楡在至道要存一變齊抛梁南白鶴山頭捲曉嵐忽憶先生開院日提撕怳若丈相函抛梁北普賢山勢連宸極蜿淑氣此爲窮必有生全才與德抛梁上萬古高明人所仰一氣鳶魚化育行方知此理眞無妄抛梁下混混源泉流不舍進必盈科放海門須知有本如斯者伏願上梁之後賢才蔚興髦士輩出不事口耳之習專尙作成之方家程戶朱縱未探天根月窟賦宋詩李不難作錦肝繡腸不亦休哉此其大者
.새로운 터를 골라 옮겨 세우니 서원의 규모 이미 이루어졌고, 옛 제도를 따라 고치니 강학(講學)의 당우(堂宇)가 이에 만들어졌네. 긴 들보 밝은 날에 들어 올리니 제비들이 두루 청금(靑衿)을 축하한다.
그윽이 서원을 경영하던 처음을 생각해보니, 지난날 국가가 밝았던 때였었지. 금계께서 스스로 지은 시 귀는 벽 사이에서 아름다운 옥처럼 찬란하며, 퇴계선생의 친필로 쓰신 아름다운 편액은 문미위에서 은고리로 빛난다. 얼마나 우리 사림들의 긍식(矜式)이 많았던가? 다행히 후학을 가르치는 곳(藏修)이 되었네. 비록 왜란에 불타긴 했지만, 여러 사람의 의논에 의해 다시 세워짐을 축하한다. 유풍(遺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지극한 가르치심 더욱 커지리.
존심주경(存心主敬)이라는 말씀을 외우면, 으슴프레함이 마치 얼굴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듯하며, 옥간풍대(玉澗風臺)의 시 귀를 완상하면 흡사 시를 읊으며 돌아오심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제사를 드리는 예에는 마땅히 수호(守護)의 길이 넓어야겠지만, 그러나 국내(局內)가 좁은데다 하물며 산허리의 토질이 좋지 않아 묘우(廟宇)를 세우고 재사(齋舍)만들기에 불편하며 위토(位土)와 우물은 바라지도 못 함에랴. 이에 좋은 곳에 옮겨 세우니, 구서(龜筮)마저 도와 따르고, 드디어 옛 재목들을 옮기려니 장정들이 모두 나온다. 목수들의 손을 빌지 않아도 방원평직(方圓平直)이 각기 전의 제도에 꼭 맞으며, 따로 소나무를 베지 않아도 외얼점설(椳臬店楔)이 모두 그 쓰임에 적의하다. 얼마나 귀신이 아끼고 감추었던가? 하루아침에 아름다운 집을 지었네. 옛 터를 우러러 바라보니 가히 황선생의 학교를 세운 꽃다운 발자취를 상상하겠고, 걸려 있는 편액을 바라보니 위료옹(魏了翁)의 강도(講道)가 오히려 남았구나.
산의 이름은 참으로 군자들이 오를 바니, 아니 또한 풍기(風氣)가 모여드는 곳이 아니겠는가? 삼면의 물들인 산들을 마주하고 한줄기 긴 강이 비껴 흐른다.
물산(物産)은 벼와 기장 물고기와 자라의 살찌고 넉넉함이요, 사람들이 사는 것은 선비와 농부 기술자와 장사꾼의 조밀(稠密)함이니, 인사(人事)에 있어서는 아름다움을 다하였으니 다시 옮겨 지음에 무엇이 나쁘리오?
장차 성현을 높이고 받드는 의식(儀式)에는 먼저 배양(培養)의 장소가 되어야 하리. 선비들이 도를 향한 뜻에는 이로부터 더욱 힘쓰게 되리며, 민속과 상현(尙賢)의 풍토는 이로부터 더욱 진작되리라.(하략))
나. 우중술회(寓中述懷) 풍영정일고 41쪽. 서기1654년12월25일에 씌여진 글
(중략)(1654년12월)28일 저녁 갑자기 스님이 와서 절을 하며 말씀하기를 나의 장인어른이 대차 백학서당에 계신다고 하며, 오늘 정오에 (백학서당의)유사 박씨가 와서 (장인어른께서)나를 청하신고 하기에, 나는 즉시 말을 타고 (장인어른을 뵙기위해 박학서당에)갔더니 기뻐하신다. 그리하여 각기 우거 중의 회포를(하략)
다. 백학산(白鶴山) - 풍영정일고 55쪽
강남의 백학산은 또한 우리의 땅에 있네
위료옹의 남긴 바람 이 가운데 완연하다
천년의 두 어진이 이 곳에 오른 뒤에
이름난 곳의 산색은 얼마나 높아졌나?
라. 백학서원 개기 축문 풍영정일고 165쪽
대저 길지라 함은 신명(神明)이 보호하는 곳이리니
아낀 지는 오래지만 새로 지음에 운수가 있는 것
이제야 서원을 지으니 이 어찌 우연이리?
이미 좋은 땅 점쳐 모든 이에게 물어보니
날은 좋고 시간도 좋아 비로소 경영하네
위치는 남쪽이라 산과 개울들 아름다움 바치고
참다운 기운 모이기에 학생들 많으리
처음 서원 짓기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명도움 바라오니
호걸들은 일어나고 어른 아이들 시 읊으며 돌아오게 해 주시어
성대하게 노래하기 영원토록 어김없게 하여 주오
3. 남창 정제(鄭梯)의 백학서원 풍영루 중수 기문(1761년 소작)
白鶴書院風詠樓重修記(원문)
書院副任李君梅以其士林之意來曰院之風詠樓重修訖工願得一言以記顧余不文年紀衰耄神識荒落何能副其所需逡巡固辭請之愈勤試按其故昔在嘉靖三十四年乙卯錦溪黃先生之爲縣也特愛白鶴山之高絶而爽塏幽邃而靜閒薄牒之暇登臨遊覽顧而樂之遂與縣中諸子謀乃架數椽精舍以爲藏修之地置田設廩留僧以守廣集章甫冠童異列敎養有法每於佳辰美景講帳儼臨衿佩集討論書史琢磨道義一區荒閒絶境幾年隱藏於天慳地秘之中而一朝忽爲儒林絃誦之場玆山之遇先生亦豈偶爾哉將與古之鹿洞鶴山匹美於千載之下花山一境庶可以一變至魯矣錦溪公實退陶門下高弟也嘗以此仰稟於師門請其品題則先生命名曰白鶴書堂手書四大字以扁之於是公自爲序文以記其事又以三篇詩及陶山學規寓其獎勉表率之方兩先生振作一方之意顧不盛歟越翌年丙辰冬先生解歸而遺堂依舊則邑士去後之思未嘗不眷眷於斯也龍蛇之變沒爲煨燼扁額學規蕩然無存而獨詩板得全於士人之家自是一鄕人士莫不慨恨於遺址之棒蕪每以重修爲意萬曆四十年壬子鄕老金公得禹倡議鳩材募工更新舊堂庖舍齋宇煥然一新遂有兩先生俎豆之議而以地偏境絶難之孝廟戊戌李公陽郁議於士林移卜舊址之北五里許吾道里蓋地之淸勝無讓於白鶴山也仍白鶴舊號以建書院廚廩庖舍先成己酉李公成春作講堂丁巳李公東碩建廟翌年戊午曺公永夏廣延道儒以三月中丁遂奉安李先生以錦溪黃公從祀蓋自書堂而進爲書院以門弟而從享先師杖屨遺馥之地竟爲尸祝之所多士景慕之誠遂成崇奉之禮春秋薦芳縟儀蠲潔衿組群居周旋有地則其於瞻仰之道庶無憾焉而若夫宣暢湮鬱發敍神氣則必待夫高樓危欄風楹凉軒徙倚眺望不得不以無樓居爲恨也辛巳一鄕僉謀多士會議乃於講堂之南作樓四楹扁之曰風詠自此諸儒登臨之際其快樂何如哉而歲久年積風掣雨剝恐有傾覆之患也今上辛巳金公休李君梅權君達經以鄕父老之意乃謀修改士樂民赴突兀重新椽之短者婦椽以加之柱之下者斲石以承之翼翼渠渠輪焉奐焉回視舊日頓覺生顔而院宇因此亦增其深嚴諸公之辛勤用意者其功詎不大歟雖然書院之必就前賢播芬之地立廟而尊奉建齋而養士者蓋欲慕遺風而觀感焉蹈前軌而矜式使後學有所振起吾道無所墜失而況風詠二字蓋取曾點浴沂水風舞雩之遺意也樓額之必以此者其旨尤其深矣夫曾點遊聖人之門見得大意故方其浴沂而風雩也物累消盡天理流行超然有堯舜氣象則風詠二字豈非可慕而可效者耶今是樓也山擁水抱地幽境寂若其和煦之時憑軒引風詠懷放情固可人人而能之至於曾氏詠歸之意則苟非脫略於塵汙者不可得也必須像想於千古之上會於一心之中使人欲無一毫留著於靈臺不但爲一時取適而已諸君子盍亦顧名而思義哉是爲記
3. 남창 정제(鄭梯)의 백학서원 풍영루 중수 기문(1761년 소작)
(백학)서원의 부임(부원장)인 이매씨가 사림(士林)들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를 ‘풍영루를 중수하고 공사가 끝났으니 원하건대 한 말씀으로 기문을 삼고자 합니다’라 하는데, 나를 돌아보면 글재주도 없는데다 나이가 들어 쇠약하고 늙어 정신과 지혜가 황폐하니 어이 능히 그 필요한 바에 부응하겠는가 하여 머뭇거리며 굳이 사양하는데 (기문을)청함이 더욱 근직하였다. (그리하여)시험 삼아 지나간 일들을 살펴보니 가정34년(서기1552년) 을묘에 금계 황준량 선생께서 신녕 고을 현감이 되었을 때 특히 백학산의 높고 빼어나 전망이 빼어나며 깊숙하여 고요함을 사랑하여 공무(公務)를 본 여가에 이곳에 올라 유람하며 즐기다가, 드디어 고을의 여러 분들과 도모하여 이에 몇 칸의 정사(精舍)를 지어 그것을 학문을 갈고 닦는 장소로 삼았다. 밭(위토)을 두고 창고를 지어 스님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널리 선비들과 아이들을 모아 특별히 교양(敎養)을 베풀 되 법도가 있게 하고, 언제나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에는 강의(강론)하는 자리에 엄숙하게 임하게 하여 떼 지어 모여 토론하고 도의(道義)를 갈고 닦는다. 한 지역의 고요하고 외떨어진 곳이 몇 년이나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두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유림(儒林)들의 글을 외우고 노래하는 곳이 되었으니, 이 산이 선생을 만남 또한 어이 우연이었겠는가? 장차 옛날의 녹동(鹿洞)의 백학산과(더불어)천년이 지난 후에 나란히 아름다우니, 화산의 한 지역이 가히 한번 변하여 노나라(魯 공자의 고국인 노나라. 즉 성인의 나라)로 된 것이다. 금계 황준량은 실로 퇴계 이황선생의 빼어난 제자인데,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 우러러 품의하여 (서당의)이름을 여쭈었더니 퇴계 선생께서는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시고 손수 (백학서당 이라는)넉자의 큰 글자를 쓰셔서 편액 하셨다. 이에 공은 스스로 서문을 지어 그 일들을 기록하고 또한 시 세편과 도산서원의 학규(學規)로써 학문을 권장하고 권면하는 본보기를 부치셨으니, 두 분 선생의 (유학을) 진작하시는 하나의 방법의 뜻이 성대하지 않겠는가? 이듬해인 병진년 겨울 선생께서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셨지만 남기신 서당이 예전과 같으므로 고을의 선비들이 (황준량 공이)가신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이에 미상불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재가 되어버려 편액과 학규는 없어져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홀로 시판(詩板)만이 어느 선비의 집에 온전히 남아 있어 이로부터 한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서원이 있던 옛터가 잡풀에 우거짐에 대하여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어 언제나 (사당을)중수함으로 뜻을 삼지 않음이 없었다.
)~1877(고종14)
조선후기 문신. 본관 昌寧 자 景休 호 龜厓. 부 暻燮 모 달성서씨 德淳의 따님. 柳致明 문인. 1831년에 식년문과 급제. 승문원 부정자. 1840 예조좌랑 종부시주부 사헌부감찰 1845 성균관 전적 1849 사간원 정언 문신 선전관 겸직 철종시 언관으로 사임. 고향에 은거 1867 조정에서 위정척사 강조하자 사서삼경 강석을 열어 유풍을 진작 1875년 공조참의 제수
古縣之白鶴山卽錦溪黃公藏修之地也壁立千仞下有長川滾滾至山之下而演漾泓渟深可行舟金沙白礫淸瑩紺寒卽所謂羊江也且鶴山之名偶合於前賢講道之地故黃公之守玆土也遂乃誅茅拓地構數間屋子而往復師門退溪李先生手書白鶴書堂四大字又詩以勉之自此師敎益勵士心興起門成鄒魯化洽菁莪矣龍蛇之難入於煨燼萬曆年間一鄕士林慨然興歎有兩先生俎豆之論而舊址則山高路險不可爲永久之計移卜於今撤享之地到今遺蹟永士無依歸環一境有識之士尤不禁高山景仰之思暮春之月約同志若爾人浴羊江登鶴山終日嘯詠如干詩篇皆不忘前人之意也迺蒙賢宰寄以序文幷惠四韻豈直爲當日遊士之興於前人尤有光焉玆呈拙構敢冀斤敎山自峨峨水自明百年陳蹟去無聲風光不減當時趣羹慕深此日觥消息金丹桂老繽紛玉珮馥芬淸玆遊豈是偸閒者俛仰中間不勝情
고현의 백학산은 금계 황공이 후학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던 곳이다. 절벽이 천 길이나 높이 서 있고 아래에는 긴 개울이 세차게 흘러가면서 백학산 아래에 이르러 물결이 출렁이며 깊고 넓게 괴어있어 깊이가 가히 배가 다닐 만하며, 금빛 모래와 흰 자갈이 맑고도 차가우니 곧 이른바 양강이다.
또한 백학산의 이름은 우연히 옛 현인이 도의를 강학한 곳과도 합치된다. 그러므로 황공께서 이 땅을 지킴에 드디어 띄 풀을 걷어내고 땅을 넓혀 몇 칸의 집을 짓고 사문을 왕복함에 퇴계 이선생께서 손수 백학서당이라는 넉자의 글을 써 주시고, 또한 시로써 권면하시니, 이로부터 스승은 가르침을 더욱 힘쓰고 선비들은 마음을 일으켜 (백학서원의)문은 추로(鄒魯)를 이루었고 교화는 청아(菁莪)에 협흡하였다.
4. 귀애 조극승(曺克承) 龜厓 曺克承1803(순조3)~1877(고종14)
임진왜란에 불에 타고 만력 년간에 한 고을의 선비들이 개탄하여 두 분 선생의 향사 드리는 논의가 있었지만, 옛터는 곧 산은 높고 길은 험하여 가히 영원한 계책이 되지 못하여 지금의 장소로 터를 잡아 옮겼지만, 지금에 이르러 유적은 영원히 땅에 묻혀지고 선비들은 돌아가 의지 할 곳이 없었으니, 주위 한 경내의 유식한 선비들이 더욱 (선현들을)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여 늦은 봄날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이 약속하여 양강에서 목욕하고 백학산에 올라서 종일 시를 읊고 노래함이 약간의 글이 됨은 모두 옛사람의 뜻을 잊지 못함이었다.
그리하여 현명한 고을 수령의 도움을 입어 서문을 붙이고 아울러 칠언율시를 주었으니, 어찌 바로 당일 논 선비들의 흥이 옛사람보다 더욱 빛남이 아니겠는가? 이에 졸고를 드려 감히 밝은 가르침을 바라노라.
산은 절로 아득하고 물은 절로 밝으니
백년의 옛 자취는 사라져 소리가 없어라
풍광은 당시의 정취를 덜어내지 못하고
사모하는 마음은 두루 오늘 술잔에 넘쳐난다
사라지고 자라나는 금단에도 계수나무는 늙어가고
많고 성한 옥패엔 고운향기 맑구나
오늘의 놂 어찌 한가함을 훔쳤으리
고개 들었다 숙이는 사이에도 정감이기지 못하네
5. 희암고(希巖稿) 김재석 소작(1857~1925) 본관 영양. 1900년 지음
신녕의 백학서당은 가정 년간 금계 황공께서 이 고을에 부임하시어 사림(士林)을 위해 양강(羊江)의 위 백학산의 아래에 한 채의 집을 지어 퇴계 이황선생에게 품부(稟賦)하여 절목(節目)을 정함으로써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숙종조 무오년(서기1678)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능산(陵山)아래에다 이축(移築)하여 “백학서원“이라 편액하여 퇴계선생을 주향(主享)으로 금계 황준량을 배향(配享)으로 하여 이로써 갱장(羹牆)의 사모함을 부친 것이 100여년에, 고종조 무진년(서기1868) 서원 철폐령으로 이 서원을 철거하여 위토(半畝)와 묘우(明宮)는 잡초가 우거지고 주춧돌은 평평해졌으며, 높은 담장은 언덕의 빈터에 몰입(沒入)되었으니, 이 서원을 다시 세우자는 무리들(縫掖之倫)이 어찌 고금(古今)의 느낌이 없겠는가?
정이천(程頤)이 말하기를 ‘우물은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은 차마 버릴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윽이 예전의 서원을 생각해보면 본래 선비들의 학문하는 장소인지라 비단 (성현을)제사하는 곳일 뿐만이 아닌즉, 강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함이 무엇에 구애된단 말인가?
이에 고을의 선비 모모씨 등이 서원을 새로 짓는 일을 주간하여 옛 법도로 나아가 새롭게 하고 서원으로 인하여 강당으로 하니, 무릇 10칸 가운데 3칸을 강당으로 하고 서쪽의 위는 방으로 남쪽의 날개는 다락으로 동쪽의 위는 실(室)로 남쪽의 날개를 퇴실(退室)로 하니, 으리으리하게 큰 집이라. 다만 보이느니 운물(雲物)은 경관을 바꾸고 초목(草木)은 그 색깔을 더한다. 우리 고을의 군자들이 옷자락을 걷고 올라 선정(先正:先哲)의 글을 읽고 선정(先正)의 도(道)를 강론(講論)하여 선정(先正)의 가르침으로 하여금 환하니 다시금 세상을 비추게 한다면, 즉 저 세상 밖(世外)의 사악한 말(邪說)과 잘못 된 학문(曲學)은 저절로 햇빛아래 눈처럼 녹을 것이며, 이 강당은 장차 양강과 학산과 더불어 무궁한 훗날에 까지 흐르게 되리라.
강당이 이미 준공(낙성)되어 여러분들이 말씀하기를 “기문을 써 주게”라 하기에, 자신을 돌아보면 또한 퇴계 선생의 남긴 무리(遺徒)이며, 하물며 욕되게도 강당의 임원임에랴? 의리상 감히 글재주 없음으로써 사양치 못하고서 드디어 이로 기문을 쓰노니 여러 군자들은 외울 지어다.
□ 문헌으로 본 백학서원의 연혁
1. 백학서당의 설치
서당은 금계 황준량이 신녕현감 재임 기간 중 설치되었으니 서기 1552년이다.
2. 설치 장소
신녕현 대량면 추곡의 백학산으로 지금의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백학산이 양강(고현천)과 만나는 절벽 위
3. 규모 : 강당 고직사 우물(묘우는 없음)
4. 설치 목적
당시 신녕현 관내에는 관학인 신녕향교를 제외하고 별다른 교육기관이 부재하여, 성현의 가르침으로 풍속을 변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강학의 장소로 활용.
5. 개요
금계 황준량은 백학서당을 만들기 전에 도산으로 가서 스승인 퇴계선생을 뵙고 절목(節目)과 현판과 주련(존심주경(存心主敬) 옥간풍대(玉澗風臺))을 받아 옴. 금계 황준량은 스스로 서문을 지어 사실을 기록하고 시(詩)3편과 도산서원의 학규(學規)로 학문을 권장하고 권면하는 본보기로 삼음.
6. 변천
○정사(精舍)-백학서당(白鶴書堂) 1552년
○중수 – 포사와 묘우 중수. 1612년
○이건-화남면 능계(오도리)로 이건하고 백학서원으로 이름을 바꿈. 1658년
○증축 – 관리사 창고 포사를 지음. 1669년
○증축 – 묘우 건립. 1677년
○위패봉안 및 향사 - 퇴계 이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금계 황준량 종향(從享)으로 춘추 두 차례 향사. 1678년
○풍영루 건립 – 서원의 외삼문. 1701년
○훼철(毁撤) -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1868년
○강당 재축(再築) - 백학서당 강당을 다시 지음. 1900년
○백학학원으로 개명하고 신교육 실시 – 1920년
□현황
백학서원의 옛 터에 남아 있던 백학서당의 강당은 100여년 사이에 허물어져 폐허로 남았더니 2016년 호국보훈시설로 지정되어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강당건물이 새롭게 지어지고 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당초 금계선생께서 처음 서당을 지으신 백학산의 고지(故址)에 백학서당을 처음 규모로 서당을 중건하여 선생의 유지도 받들고 나아가 세교(世敎)에 활용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됨.
5. 희암고(希巖稿) 김재석 소작(1857~1925) 본관 영양. 1900년 지음
신녕의 백학서당은 가정 년간 금계 황공께서 이 고을에 부임하시어 사림(士林)을 위해 양강(羊江)의 위 백학산의 아래에 한 채의 집을 지어 퇴계 이황선생에게 품부(稟賦)하여 절목(節目)을 정함으로써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숙종조 무오년(서기1678)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능산(陵山)아래에다 이축(移築)하여 “백학서원“이라 편액하여 퇴계선생을 주향(主享)으로 금계 황준량을 배향(配享)으로 하여 이로써 갱장(羹牆)의 사모함을 부친 것이 100여년에, 고종조 무진년(서기1868) 서원 철폐령으로 이 서원을 철거하여 위토(半畝)와 묘우(明宮)는 잡초가 우거지고 주춧돌은 평평해졌으며, 높은 담장은 언덕의 빈터에 몰입(沒入)되었으니, 이 서원을 다시 세우자는 무리들(縫掖之倫)이 어찌 고금(古今)의 느낌이 없겠는가?
정이천(程)이 말하기를 ‘우물은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은 차마 버릴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윽이 예전의 서원을 생각해보면 본래 선비들의 학문하는 장소인지라 비단 (성현을)제사하는 곳일 뿐만이 아닌즉, 강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함이 무엇에 구애된단 말인가?
이에 고을의 선비 모모씨 등이 서원을 새로 짓는 일을 주간하여 옛 법도로 나아가 새롭게 하고 서원으로 인하여 강당으로 하니, 무릇 10칸 가운데 3칸을 강당으로 하고 서쪽의 위는 방으로 남쪽의 날개는 다락으로 동쪽의 위는 실(室)로 남쪽의 날개를 퇴실(退室)로 하니, 으리으리하게 큰 집이라.
백학서당이 만들어진 시기는 금계 황준량의 신녕현감 재임기간인 1552년으로 추정된다. 처음 서당이 세워진 곳의 산 이름은 양각산(羊角山)으로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와 화산면 가상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26m이며 산의 시작은 화산(華山)이다. 영천시 화남면과 신녕면에 걸쳐 있는 화산의 한 자락이 급격히 남으로 방향을 틀면서 만든 백학산은 대천리에 바라보면 마치 한 마리의 학이 날개 죽지를 펼친 형상이다.
전설로는 이 양각산에 퇴계와 금계 두 분 선생이 오른 뒤로 이름을 백학이라 명명하였다.(권응도의 풍영정일고 중)
▪ 제 문헌상의 기록
1. 화산지(花山誌) 1934년 권영국 김병현 등에 의하여 만들어진 지리지
백학서원은 신녕현 동쪽 30리 지점의 능산(陵山)의 아래 오도리(吾道里)에 있으며 본래 서기1552년에 세워졌다.(금계 황준량공께서 신녕 현감 재임 시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백학산의 아래 양강의 위에다 서당을 건축하고서, 여러 차례 도산의 이 선생에게 질문하여 절목(節目)을 상정(詳定)하고 그 서당의 이름을 청하자 선생께서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였고, 그로 인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삼게 되었다)
임진년(1592년)에 병화(兵火)로 불타 임자년(1612년)에 중건하였으며, 효종조 무술년(1658년)에 땅이 협소하고 위치가 궁벽하여 이곳 능산 아래 오도리로 옮겨 세웠고, 숙종조 무오년(1678년) 서당을 서원으로 하고 사당(祠堂)은 ‘상덕(尙德)’ 강당을 ‘전교(典敎) 누각을 ’풍영(風詠)‘이라 하였다. 고종조 무진년(1868년)에 훼철(毁撤)되었다가 경자년(1900년)에 다시 서당(書堂)으로 세웠다.
擇新基而移創建院之規模已成仍舊貫而改爲講學之堂宇斯作虹梁擧於白日燕賀徧於靑衿竊惟書院經始之初在錦溪爲宰之日錦溪之自述佳什燦瓊玉於壁間退陶之手筆華扁煥銀鉤於楣上幾多儒林之矜式幸爲後學之藏修雖見災於島夷慶重營於僉議遺風不泯至敎彌長誦存心主敬之詞怳若面承指誨玩玉澗風臺之句依如目覩詠歸享祀之禮當興守護之路宜廣然局內之逼窄況山脊之剛燥不便於立廟設齋無望乎井飮田食玆用移建於勝地龜筮協從遂因輸運其舊村丁壯畢出不借工之手方圓平直各得前規不斷徂徠之松闑店楔咸適其用幾年乎神慳鬼馝一朝焉鳥革翬飛瞻望舊基可想黃先生建學芳躅用施前揭猶存魏了翁講道山名信乎君子之攸躋抑亦風氣之所聚對三面之彩岳橫一帶之長流物産則稻粱魚鼈之肥饒人居則士農工賈之稠密在人事而盡美於改卜而何傷將有崇奉之儀先爲培養之所士子向道之志從此益勤民俗尙賢之風自玆愈振敢申呼邪之唱以贊兒郞之謠抛梁東削玉三峰聳碧空颯爽仙風來几席自然淸興滌煩胸抛梁西眼看天日遠岑低東隅雖逝桑楡在至道要存一變齊抛梁南白鶴山頭捲曉嵐忽憶先生開院日提撕怳若丈相函抛梁北普賢山勢連宸極蜿淑氣此爲窮必有生全才與德抛梁上萬古高明人所仰一氣鳶魚化育行方知此理眞無妄抛梁下混混源泉流不舍進必盈科放海門須知有本如斯者伏願上梁之後賢才蔚興髦士輩出不事口耳之習專尙作成之方家程戶朱縱未探天根月窟賦宋詩李不難作錦肝繡腸不亦休哉此其大者
.새로운 터를 골라 옮겨 세우니 서원의 규모 이미 이루어졌고, 옛 제도를 따라 고치니 강학(講學)의 당우(堂宇)가 이에 만들어졌네. 긴 들보 밝은 날에 들어 올리니 제비들이 두루 청금(靑衿)을 축하한다.
그윽이 서원을 경영하던 처음을 생각해보니, 지난날 국가가 밝았던 때였었지. 금계께서 스스로 지은 시 귀는 벽 사이에서 아름다운 옥처럼 찬란하며, 퇴계선생의 친필로 쓰신 아름다운 편액은 문미위에서 은고리로 빛난다. 얼마나 우리 사림들의 긍식(矜式)이 많았던가? 다행히 후학을 가르치는 곳(藏修)이 되었네. 비록 왜란에 불타긴 했지만, 여러 사람의 의논에 의해 다시 세워짐을 축하한다. 유풍(遺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지극한 가르치심 더욱 커지리.
존심주경(存心主敬)이라는 말씀을 외우면, 으슴프레함이 마치 얼굴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듯하며, 옥간풍대(玉澗風臺)의 시 귀를 완상하면 흡사 시를 읊으며 돌아오심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제사를 드리는 예에는 마땅히 수호(守護)의 길이 넓어야겠지만, 그러나 국내(局內)가 좁은데다 하물며 산허리의 토질이 좋지 않아 묘우(廟宇)를 세우고 재사(齋舍)만들기에 불편하며 위토(位土)와 우물은 바라지도 못 함에랴. 이에 좋은 곳에 옮겨 세우니, 구서(龜筮)마저 도와 따르고, 드디어 옛 재목들을 옮기려니 장정들이 모두 나온다. 목수들의 손을 빌지 않아도 방원평직(方圓平直)이 각기 전의 제도에 꼭 맞으며, 따로 소나무를 베지 않아도 외얼점설(椳臬店楔)이 모두 그 쓰임에 적의하다. 얼마나 귀신이 아끼고 감추었던가? 하루아침에 아름다운 집을 지었네. 옛 터를 우러러 바라보니 가히 황선생의 학교를 세운 꽃다운 발자취를 상상하겠고, 걸려 있는 편액을 바라보니 위료옹(魏了翁)의 강도(講道)가 오히려 남았구나.
산의 이름은 참으로 군자들이 오를 바니, 아니 또한 풍기(風氣)가 모여드는 곳이 아니겠는가? 삼면의 물들인 산들을 마주하고 한줄기 긴 강이 비껴 흐른다.
물산(物産)은 벼와 기장 물고기와 자라의 살찌고 넉넉함이요, 사람들이 사는 것은 선비와 농부 기술자와 장사꾼의 조밀(稠密)함이니, 인사(人事)에 있어서는 아름다움을 다하였으니 다시 옮겨 지음에 무엇이 나쁘리오?
장차 성현을 높이고 받드는 의식(儀式)에는 먼저 배양(培養)의 장소가 되어야 하리. 선비들이 도를 향한 뜻에는 이로부터 더욱 힘쓰게 되리며, 민속과 상현(尙賢)의 풍토는 이로부터 더욱 진작되리라.(하략))
나. 우중술회(寓中述懷) 풍영정일고 41쪽. 서기1654년12월25일에 씌여진 글
(중략)(1654년12월)28일 저녁 갑자기 스님이 와서 절을 하며 말씀하기를 나의 장인어른이 대차 백학서당에 계신다고 하며, 오늘 정오에 (백학서당의)유사 박씨가 와서 (장인어른께서)나를 청하신고 하기에, 나는 즉시 말을 타고 (장인어른을 뵙기위해 박학서당에)갔더니 기뻐하신다. 그리하여 각기 우거 중의 회포를(하략)
다. 백학산(白鶴山) - 풍영정일고 55쪽
강남의 백학산은 또한 우리의 땅에 있네
위료옹의 남긴 바람 이 가운데 완연하다
천년의 두 어진이 이 곳에 오른 뒤에
이름난 곳의 산색은 얼마나 높아졌나?
라. 백학서원 개기 축문 풍영정일고 165쪽
대저 길지라 함은 신명(神明)이 보호하는 곳이리니
아낀 지는 오래지만 새로 지음에 운수가 있는 것
이제야 서원을 지으니 이 어찌 우연이리?
이미 좋은 땅 점쳐 모든 이에게 물어보니
날은 좋고 시간도 좋아 비로소 경영하네
위치는 남쪽이라 산과 개울들 아름다움 바치고
참다운 기운 모이기에 학생들 많으리
처음 서원 짓기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명도움 바라오니
호걸들은 일어나고 어른 아이들 시 읊으며 돌아오게 해 주시어
성대하게 노래하기 영원토록 어김없게 하여 주오
3. 남창 정제(鄭梯)의 백학서원 풍영루 중수 기문(1761년 소작)
白鶴書院風詠樓重修記(원문)
書院副任李君梅以其士林之意來曰院之風詠樓重修訖工願得一言以記顧余不文年紀衰耄神識荒落何能副其所需逡巡固辭請之愈勤試按其故昔在嘉靖三十四年乙卯錦溪黃先生之爲縣也特愛白鶴山之高絶而爽塏幽邃而靜閒薄牒之暇登臨遊覽顧而樂之遂與縣中諸子謀乃架數椽精舍以爲藏修之地置田設廩留僧以守廣集章甫冠童異列敎養有法每於佳辰美景講帳儼臨衿佩集討論書史琢磨道義一區荒閒絶境幾年隱藏於天慳地秘之中而一朝忽爲儒林絃誦之場玆山之遇先生亦豈偶爾哉將與古之鹿洞鶴山匹美於千載之下花山一境庶可以一變至魯矣錦溪公實退陶門下高弟也嘗以此仰稟於師門請其品題則先生命名曰白鶴書堂手書四大字以扁之於是公自爲序文以記其事又以三篇詩及陶山學規寓其獎勉表率之方兩先生振作一方之意顧不盛歟越翌年丙辰冬先生解歸而遺堂依舊則邑士去後之思未嘗不眷眷於斯也龍蛇之變沒爲煨燼扁額學規蕩然無存而獨詩板得全於士人之家自是一鄕人士莫不慨恨於遺址之棒蕪每以重修爲意萬曆四十年壬子鄕老金公得禹倡議鳩材募工更新舊堂庖舍齋宇煥然一新遂有兩先生俎豆之議而以地偏境絶難之孝廟戊戌李公陽郁議於士林移卜舊址之北五里許吾道里蓋地之淸勝無讓於白鶴山也仍白鶴舊號以建書院廚廩庖舍先成己酉李公成春作講堂丁巳李公東碩建廟翌年戊午曺公永夏廣延道儒以三月中丁遂奉安李先生以錦溪黃公從祀蓋自書堂而進爲書院以門弟而從享先師杖屨遺馥之地竟爲尸祝之所多士景慕之誠遂成崇奉之禮春秋薦芳縟儀蠲潔衿組群居周旋有地則其於瞻仰之道庶無憾焉而若夫宣暢湮鬱發敍神氣則必待夫高樓危欄風楹凉軒徙倚眺望不得不以無樓居爲恨也辛巳一鄕僉謀多士會議乃於講堂之南作樓四楹扁之曰風詠自此諸儒登臨之際其快樂何如哉而歲久年積風掣雨剝恐有傾覆之患也今上辛巳金公休李君梅權君達經以鄕父老之意乃謀修改士樂民赴突兀重新椽之短者婦椽以加之柱之下者斲石以承之翼翼渠渠輪焉奐焉回視舊日頓覺生顔而院宇因此亦增其深嚴諸公之辛勤用意者其功詎不大歟雖然書院之必就前賢播芬之地立廟而尊奉建齋而養士者蓋欲慕遺風而觀感焉蹈前軌而矜式使後學有所振起吾道無所墜失而況風詠二字蓋取曾點浴沂水風舞雩之遺意也樓額之必以此者其旨尤其深矣夫曾點遊聖人之門見得大意故方其浴沂而風雩也物累消盡天理流行超然有堯舜氣象則風詠二字豈非可慕而可效者耶今是樓也山擁水抱地幽境寂若其和煦之時憑軒引風詠懷放情固可人人而能之至於曾氏詠歸之意則苟非脫略於塵汙者不可得也必須像想於千古之上會於一心之中使人欲無一毫留著於靈臺不但爲一時取適而已諸君子盍亦顧名而思義哉是爲記
3. 남창 정제(鄭梯)의 백학서원 풍영루 중수 기문(1761년 소작)
(백학)서원의 부임(부원장)인 이매씨가 사림(士林)들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를 ‘풍영루를 중수하고 공사가 끝났으니 원하건대 한 말씀으로 기문을 삼고자 합니다’라 하는데, 나를 돌아보면 글재주도 없는데다 나이가 들어 쇠약하고 늙어 정신과 지혜가 황폐하니 어이 능히 그 필요한 바에 부응하겠는가 하여 머뭇거리며 굳이 사양하는데 (기문을)청함이 더욱 근직하였다. (그리하여)시험 삼아 지나간 일들을 살펴보니 가정34년(서기1552년) 을묘에 금계 황준량 선생께서 신녕 고을 현감이 되었을 때 특히 백학산의 높고 빼어나 전망이 빼어나며 깊숙하여 고요함을 사랑하여 공무(公務)를 본 여가에 이곳에 올라 유람하며 즐기다가, 드디어 고을의 여러 분들과 도모하여 이에 몇 칸의 정사(精舍)를 지어 그것을 학문을 갈고 닦는 장소로 삼았다. 밭(위토)을 두고 창고를 지어 스님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널리 선비들과 아이들을 모아 특별히 교양(敎養)을 베풀 되 법도가 있게 하고, 언제나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에는 강의(강론)하는 자리에 엄숙하게 임하게 하여 떼 지어 모여 토론하고 도의(道義)를 갈고 닦는다. 한 지역의 고요하고 외떨어진 곳이 몇 년이나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두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유림(儒林)들의 글을 외우고 노래하는 곳이 되었으니, 이 산이 선생을 만남 또한 어이 우연이었겠는가? 장차 옛날의 녹동(鹿洞)의 백학산과(더불어)천년이 지난 후에 나란히 아름다우니, 화산의 한 지역이 가히 한번 변하여 노나라(魯 공자의 고국인 노나라. 즉 성인의 나라)로 된 것이다. 금계 황준량은 실로 퇴계 이황선생의 빼어난 제자인데,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 우러러 품의하여 (서당의)이름을 여쭈었더니 퇴계 선생께서는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시고 손수 (백학서당 이라는)넉자의 큰 글자를 쓰셔서 편액 하셨다. 이에 공은 스스로 서문을 지어 그 일들을 기록하고 또한 시 세편과 도산서원의 학규(學規)로써 학문을 권장하고 권면하는 본보기를 부치셨으니, 두 분 선생의 (유학을) 진작하시는 하나의 방법의 뜻이 성대하지 않겠는가? 이듬해인 병진년 겨울 선생께서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셨지만 남기신 서당이 예전과 같으므로 고을의 선비들이 (황준량 공이)가신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이에 미상불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재가 되어버려 편액과 학규는 없어져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홀로 시판(詩板)만이 어느 선비의 집에 온전히 남아 있어 이로부터 한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서원이 있던 옛터가 잡풀에 우거짐에 대하여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어 언제나 (사당을)중수함으로 뜻을 삼지 않음이 없었다.
)~1877(고종14)
조선후기 문신. 본관 昌寧 자 景休 호 龜厓. 부 暻燮 모 달성서씨 德淳의 따님. 柳致明 문인. 1831년에 식년문과 급제. 승문원 부정자. 1840 예조좌랑 종부시주부 사헌부감찰 1845 성균관 전적 1849 사간원 정언 문신 선전관 겸직 철종시 언관으로 사임. 고향에 은거 1867 조정에서 위정척사 강조하자 사서삼경 강석을 열어 유풍을 진작 1875년 공조참의 제수
古縣之白鶴山卽錦溪黃公藏修之地也壁立千仞下有長川滾滾至山之下而演漾泓渟深可行舟金沙白礫淸瑩紺寒卽所謂羊江也且鶴山之名偶合於前賢講道之地故黃公之守玆土也遂乃誅茅拓地構數間屋子而往復師門退溪李先生手書白鶴書堂四大字又詩以勉之自此師敎益勵士心興起門成鄒魯化洽菁莪矣龍蛇之難入於煨燼萬曆年間一鄕士林慨然興歎有兩先生俎豆之論而舊址則山高路險不可爲永久之計移卜於今撤享之地到今遺蹟永士無依歸環一境有識之士尤不禁高山景仰之思暮春之月約同志若爾人浴羊江登鶴山終日嘯詠如干詩篇皆不忘前人之意也迺蒙賢宰寄以序文幷惠四韻豈直爲當日遊士之興於前人尤有光焉玆呈拙構敢冀斤敎山自峨峨水自明百年陳蹟去無聲風光不減當時趣羹慕深此日觥消息金丹桂老繽紛玉珮馥芬淸玆遊豈是偸閒者俛仰中間不勝情
고현의 백학산은 금계 황공이 후학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던 곳이다. 절벽이 천 길이나 높이 서 있고 아래에는 긴 개울이 세차게 흘러가면서 백학산 아래에 이르러 물결이 출렁이며 깊고 넓게 괴어있어 깊이가 가히 배가 다닐 만하며, 금빛 모래와 흰 자갈이 맑고도 차가우니 곧 이른바 양강이다.
또한 백학산의 이름은 우연히 옛 현인이 도의를 강학한 곳과도 합치된다. 그러므로 황공께서 이 땅을 지킴에 드디어 띄 풀을 걷어내고 땅을 넓혀 몇 칸의 집을 짓고 사문을 왕복함에 퇴계 이선생께서 손수 백학서당이라는 넉자의 글을 써 주시고, 또한 시로써 권면하시니, 이로부터 스승은 가르침을 더욱 힘쓰고 선비들은 마음을 일으켜 (백학서원의)문은 추로(鄒魯)를 이루었고 교화는 청아(菁莪)에 협흡하였다.
4. 귀애 조극승(曺克承) 龜厓 曺克承1803(순조3)~1877(고종14)
임진왜란에 불에 타고 만력 년간에 한 고을의 선비들이 개탄하여 두 분 선생의 향사 드리는 논의가 있었지만, 옛터는 곧 산은 높고 길은 험하여 가히 영원한 계책이 되지 못하여 지금의 장소로 터를 잡아 옮겼지만, 지금에 이르러 유적은 영원히 땅에 묻혀지고 선비들은 돌아가 의지 할 곳이 없었으니, 주위 한 경내의 유식한 선비들이 더욱 (선현들을)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여 늦은 봄날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이 약속하여 양강에서 목욕하고 백학산에 올라서 종일 시를 읊고 노래함이 약간의 글이 됨은 모두 옛사람의 뜻을 잊지 못함이었다.
그리하여 현명한 고을 수령의 도움을 입어 서문을 붙이고 아울러 칠언율시를 주었으니, 어찌 바로 당일 논 선비들의 흥이 옛사람보다 더욱 빛남이 아니겠는가? 이에 졸고를 드려 감히 밝은 가르침을 바라노라.
산은 절로 아득하고 물은 절로 밝으니
백년의 옛 자취는 사라져 소리가 없어라
풍광은 당시의 정취를 덜어내지 못하고
사모하는 마음은 두루 오늘 술잔에 넘쳐난다
사라지고 자라나는 금단에도 계수나무는 늙어가고
많고 성한 옥패엔 고운향기 맑구나
오늘의 놂 어찌 한가함을 훔쳤으리
고개 들었다 숙이는 사이에도 정감이기지 못하네
5. 희암고(希巖稿) 김재석 소작(1857~1925) 본관 영양. 1900년 지음
신녕의 백학서당은 가정 년간 금계 황공께서 이 고을에 부임하시어 사림(士林)을 위해 양강(羊江)의 위 백학산의 아래에 한 채의 집을 지어 퇴계 이황선생에게 품부(稟賦)하여 절목(節目)을 정함으로써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숙종조 무오년(서기1678)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능산(陵山)아래에다 이축(移築)하여 “백학서원“이라 편액하여 퇴계선생을 주향(主享)으로 금계 황준량을 배향(配享)으로 하여 이로써 갱장(羹牆)의 사모함을 부친 것이 100여년에, 고종조 무진년(서기1868) 서원 철폐령으로 이 서원을 철거하여 위토(半畝)와 묘우(明宮)는 잡초가 우거지고 주춧돌은 평평해졌으며, 높은 담장은 언덕의 빈터에 몰입(沒入)되었으니, 이 서원을 다시 세우자는 무리들(縫掖之倫)이 어찌 고금(古今)의 느낌이 없겠는가?
정이천(程頤)이 말하기를 ‘우물은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은 차마 버릴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윽이 예전의 서원을 생각해보면 본래 선비들의 학문하는 장소인지라 비단 (성현을)제사하는 곳일 뿐만이 아닌즉, 강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함이 무엇에 구애된단 말인가?
이에 고을의 선비 모모씨 등이 서원을 새로 짓는 일을 주간하여 옛 법도로 나아가 새롭게 하고 서원으로 인하여 강당으로 하니, 무릇 10칸 가운데 3칸을 강당으로 하고 서쪽의 위는 방으로 남쪽의 날개는 다락으로 동쪽의 위는 실(室)로 남쪽의 날개를 퇴실(退室)로 하니, 으리으리하게 큰 집이라. 다만 보이느니 운물(雲物)은 경관을 바꾸고 초목(草木)은 그 색깔을 더한다. 우리 고을의 군자들이 옷자락을 걷고 올라 선정(先正:先哲)의 글을 읽고 선정(先正)의 도(道)를 강론(講論)하여 선정(先正)의 가르침으로 하여금 환하니 다시금 세상을 비추게 한다면, 즉 저 세상 밖(世外)의 사악한 말(邪說)과 잘못 된 학문(曲學)은 저절로 햇빛아래 눈처럼 녹을 것이며, 이 강당은 장차 양강과 학산과 더불어 무궁한 훗날에 까지 흐르게 되리라.
강당이 이미 준공(낙성)되어 여러분들이 말씀하기를 “기문을 써 주게”라 하기에, 자신을 돌아보면 또한 퇴계 선생의 남긴 무리(遺徒)이며, 하물며 욕되게도 강당의 임원임에랴? 의리상 감히 글재주 없음으로써 사양치 못하고서 드디어 이로 기문을 쓰노니 여러 군자들은 외울 지어다.
□ 문헌으로 본 백학서원의 연혁
1. 백학서당의 설치
서당은 금계 황준량이 신녕현감 재임 기간 중 설치되었으니 서기 1552년이다.
2. 설치 장소
신녕현 대량면 추곡의 백학산으로 지금의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백학산이 양강(고현천)과 만나는 절벽 위
3. 규모 : 강당 고직사 우물(묘우는 없음)
4. 설치 목적
당시 신녕현 관내에는 관학인 신녕향교를 제외하고 별다른 교육기관이 부재하여, 성현의 가르침으로 풍속을 변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강학의 장소로 활용.
5. 개요
금계 황준량은 백학서당을 만들기 전에 도산으로 가서 스승인 퇴계선생을 뵙고 절목(節目)과 현판과 주련(존심주경(存心主敬) 옥간풍대(玉澗風臺))을 받아 옴. 금계 황준량은 스스로 서문을 지어 사실을 기록하고 시(詩)3편과 도산서원의 학규(學規)로 학문을 권장하고 권면하는 본보기로 삼음.
6. 변천
○정사(精舍)-백학서당(白鶴書堂) 1552년
○중수 – 포사와 묘우 중수. 1612년
○이건-화남면 능계(오도리)로 이건하고 백학서원으로 이름을 바꿈. 1658년
○증축 – 관리사 창고 포사를 지음. 1669년
○증축 – 묘우 건립. 1677년
○위패봉안 및 향사 - 퇴계 이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금계 황준량 종향(從享)으로 춘추 두 차례 향사. 1678년
○풍영루 건립 – 서원의 외삼문. 1701년
○훼철(毁撤) -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1868년
○강당 재축(再築) - 백학서당 강당을 다시 지음. 1900년
○백학학원으로 개명하고 신교육 실시 – 1920년
□현황
백학서원의 옛 터에 남아 있던 백학서당의 강당은 100여년 사이에 허물어져 폐허로 남았더니 2016년 호국보훈시설로 지정되어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강당건물이 새롭게 지어지고 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당초 금계선생께서 처음 서당을 지으신 백학산의 고지(故址)에 백학서당을 처음 규모로 서당을 중건하여 선생의 유지도 받들고 나아가 세교(世敎)에 활용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됨.
5. 희암고(希巖稿) 김재석 소작(1857~1925) 본관 영양. 1900년 지음
신녕의 백학서당은 가정 년간 금계 황공께서 이 고을에 부임하시어 사림(士林)을 위해 양강(羊江)의 위 백학산의 아래에 한 채의 집을 지어 퇴계 이황선생에게 품부(稟賦)하여 절목(節目)을 정함으로써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숙종조 무오년(서기1678)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능산(陵山)아래에다 이축(移築)하여 “백학서원“이라 편액하여 퇴계선생을 주향(主享)으로 금계 황준량을 배향(配享)으로 하여 이로써 갱장(羹牆)의 사모함을 부친 것이 100여년에, 고종조 무진년(서기1868) 서원 철폐령으로 이 서원을 철거하여 위토(半畝)와 묘우(明宮)는 잡초가 우거지고 주춧돌은 평평해졌으며, 높은 담장은 언덕의 빈터에 몰입(沒入)되었으니, 이 서원을 다시 세우자는 무리들(縫掖之倫)이 어찌 고금(古今)의 느낌이 없겠는가?
정이천(程)이 말하기를 ‘우물은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은 차마 버릴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윽이 예전의 서원을 생각해보면 본래 선비들의 학문하는 장소인지라 비단 (성현을)제사하는 곳일 뿐만이 아닌즉, 강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함이 무엇에 구애된단 말인가?
이에 고을의 선비 모모씨 등이 서원을 새로 짓는 일을 주간하여 옛 법도로 나아가 새롭게 하고 서원으로 인하여 강당으로 하니, 무릇 10칸 가운데 3칸을 강당으로 하고 서쪽의 위는 방으로 남쪽의 날개는 다락으로 동쪽의 위는 실(室)로 남쪽의 날개를 퇴실(退室)로 하니, 으리으리하게 큰 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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