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 황준량이 퇴계 이황의 초옥을 방문했을 때 퇴계 이황이 지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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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3회 작성일 21-08-18 08:08본문
영주 금양정사(榮州 錦陽精舍)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88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풍기읍 금계리 38번지
금양정사는 정사와 그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바 건물의 구성은 좌측에 온돌방을, 우측에 대청을 설치하고 전면과 좌측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건축 양식과 평면구성에서 지방 사림과 사대부 건축의 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진은 금양정사 본 건물이며 부속건물은 사진 왼쪽편에 있다.
금양정사는 16세기 중엽 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선생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건축한 곳이다. 금계 황준량 선생은 젊어서 부터 학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 '풍유금계 영유소고'라는 말이 생겼다. 풍기에는 금계선생이 있고 영주에는 소고(소고 박승임)선생이 있다는 말이었다.
금계 황준량 선생은 중앙의 벼슬을 사양하고 백성을 직접 대하는 지방 무대에서 백성을 잘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학교(당시 향교와 서당)를 세워 인재의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책을 편찬 배포하였다. 금계 황준량 선생은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 보다 세상을 먼저 뜨니 스승인 퇴계 선생의 애통해 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한다. 퇴계 선생은 제자인 금계 선생의 행장(행장이란 죽은이의 이력과 행적을 기록한 글)을 직접 지어 그 애통함을 대신하고 금계의 덕을 기렸다.
퇴계 이황 선생은 수 많은 글을 지었으나 그가 지은 행장은 얼마 되지 않는다. 퇴계 선생이 지은 행장은 금계 황준량 선생 외에 이상적 개혁가로 이름이 높았던 정암 조광조 선생, 명종 임금, 퇴계 선생의 선친 등 총 8명에 불과하다. 행장은 인물을 평가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글이다. 그 집안 사람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는 글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객관적인 글이다. 그런 이유로 행장은 같은 집안 인사보다는 명망이 있는 외부 인사에게 맡겨 짓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황준량은 본관은 평해(平海), 자(字)는 중거(仲擧), 호(號)는 금계이다. 중종 35년(1540) 문과(文科)에 을과(乙科)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급제할 당시의 나이는 24세로 당시로서 매우 이른 나이였다. 참고로 경북 북부 지역 선배 중엔 농암 이현보가 32세, 충재 권벌이 30세, 퇴계 이황이 34세, 학봉 김성일이 31세에 급제했다.
황준량은 후대 사람들이 그 공덕과 인격을 추모하여 신령 백학서원(白鶴書院)과 욱양단소(郁陽壇所)에서 배향(配享)하고 있다. 단양에는 그의 공덕비가 있다. 2002년 단양 출신의 농민소설가 조순호씨는 금계 황준량이 단양에 끼친 덕을 기려 [목민관 항준량]이라는 소설을 내기도 하였다.
다음 글은 퇴계 선생이 그의 제자 금계 황준량 선생에 대해 지은 행장의 일부이다.
(선략) 나 황(滉)이 공(公)을 농암선생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부터 서로 함께 놀로 따르기를 가장 오래하며 친밀히 하였는데 우둔하여 들은 바가 없었던 나로서 공을 얻어서 깨우친 점이 많았다.
공이 물러 나서 돌아오면 실로 서로 내왕하며 옛날의 정을 다시 가꾸자는 언약(言約)이 있었으나 공은 항상 내가 늙고 병이 들어 몸을 보존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였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늙고 병든 자는 세상에 남아 있고 오히려 강건한 나이에 있던 공을 곡(哭)할 줄 알았으리요. 공의 언행은 기록할 것이 많으나 정중히 다 감히 기록하지 못하고 오직 그 큰 것만을 위와 같이 추려서 서술한다.(하략)
다음 시는 금계 황준량이 퇴계 이황의 초옥을 방문했을 때 퇴계 이황이 지은 시이다.
시냇가에서 님을 만나 의심난 것 토로하다
막걸리 한 사발을 그대 위해 마련했다네
조물주가 매화꽃 더디 피운 것을 아쉬워해
일부러 잠깐 동안 가지에 눈꽃 피게 했네
금선정에 솔바람이 분다 솔바람 소리인가, 소백산 산굽이에 그리움을 잔뜩 남겨놓고 맨발로 떠나온 사람들의 가슴시린 소리인가. 금선정(錦仙亭) 계곡엔 연신 바람소리에 그리움이 짙게 날리고 있다. 금선정은 풍기읍 금계2리 장선(長善) 마을 위 금선계곡 에 자리하고 있다. 장선 마을은 옛날엔 지형이 긴 배모양 같다하여 장선(長船)마을로 불리다가 어느때부터인가 이 마을에 오랫동안 착한 사람이 많이나서 번성하라는 뜻으로 장선(長善) 마을로 불리어졌다. 소백산 비로봉과 연화봉에서 근원한 물은 정안동(靜安洞)계곡과 욱금동천(郁錦洞天) 삼십리 길을 달려 이곳 금선계곡에 닿아 잠시 가슴을 조아리고 숨을 고른다. 송림과 어우러진 넓은 계곡과 그 곳에 펼쳐진 기암괴석, 그리고 맑고 고운 물소리. 간혹 하늘은 햇살을 거두어 가고 숨어서 울던 바람 마져도 선채로 이곳에선 가슴에 묻혀온다. 솔숲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들어선 금선정엔 어느새 온통 가을이다. 금선정엔 파아란 가을 하늘이 가끔씩 머리를 식혀 주다가도 금세 가슴을 타고 오르는 물소리와 바람소리에 젖어 들게한다. | |
탈 속을 꿈꾼 목민관 금계 황준량 이곳 금선계곡은 지난날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즐겨 거닐던 곳이다. 금계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리었으며, 문명(文名)이 나 있었다. 1537년(중종 32)에 생원이되고 1540년(중종 35)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성균학유로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 후 여러벼슬을 거쳐 1548년 공조 좌랑시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한 뒤 복직되어 호조좌랑겸 춘추관 기사관에 겸직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금계는 이후 그에게 청탁을 하였다가 거절당한 언관(言官)의 모함이 있자 외관(外官)을 자청하여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로 재임하다가 1563년 봄에 병(病)으로 사직하고 고향 풍기(豊基)로 돌아오던 도중 예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아끼지 않았으며, 청빈한 생활로 주위의 귀감을 사기도 했다. 금계는 여가가 있을때마다 이곳을 찾곤 했는데 그는 “소백 운하는 어디가 제일인가, 금선대 풍월은 스스로 무엇과도 비할길 없구나”라며 이곳 금선대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금선정” 정자아래 넓은 반석을 금선대(錦仙臺)라 이름하기도 했다. 금계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학문이 깊었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금계는 단양 군수 시절 “관(官)은 민(民)을 근본으로 삼는 법, 이 폐단이 제거되지 않으면 우리 백성들이 살수가 없거늘 어떻게 관(官)을 유지 할 수 있겠는가”하며 장장 4천 8백 여자에 이르는 우국애민의 「단양진폐소(丹陽陣弊疏)」를 올렸는데 왕은 이 상소를 읽고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함이 아닌것이 없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라며 10년동안 단양의 공부(貢腑)와 조세를 감면할것을 명했다. 금계는 결국 왕을 감동시키고 선정을 베풀어 흩어져 떠돌던 단양 군민들을 정착하게 하는등 청백리 목민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지금도 그의 선정비가 단양향교 앞에 세워져 있어 그 앞을 지나는 이들에게 늘 숙연함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신녕현감 시절에도 기민을 잘 진휼(賑恤)하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전임관(前任官)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을 태워버린 일도 있다. 그는 농암 이현보의 아들인 이문량(李文樑)의 사위로 스승인 퇴계와 처음 만난곳도 그의 처가집인 안동의 농암댁에서였다. 금계는 그후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에게≪심경≫, ≪근사록≫을 배우는 등 학문을 탐구하고 실천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 |
금계는 스승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 “낚시질하고 농사지으면서 허물을 적게하고 싶다”고 하자 퇴계 또한 이에 감동 받기도 했다. 금계는 관직에 있을 때 공무를 마치고 남는 시간이면 책상에 앉아 강독(講讀)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다반사였으며, 간혹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은채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금계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혹시 피로로 인해 병이 날까봐 충고라도 하면 “글을 읽고 학문을 하는 것은 본래 마음을 다스리고 기운을 기르기 위한 것이니 어찌 독서로 인하여 질병을 초래하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혹시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운명이요, 독서의 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퇴계는 이런 수제자이자 학문의 동반자였던 금계가 고향으로 돌아오던중 예천에서 임종하자 그의 제문을 통해 “실성하여 길게 부르짓으며 물을 짜내듯이 늙은이는 눈물을 흘렸다오. 하늘이 이 사람을 빼앗음이 어찌 이다지도 빠른가. 참인가. 꿈인가. 놀랍고 아득하여 목이 메이는 구나”라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또 퇴계는 그의 행장(行狀)에서 “그대가 물러나서 돌아오면 실로 오가면서 옛 우의를 다시 회복하자는 언약이 있었는데, 그대 늘 내가 늙고 병들어 견디기 어려울 것을 근심하더니 어찌 짐작인들 했으랴, 오늘 늙고 병든 내가 살아 있어 도리어 한창 나이인 그대를 곡(哭)하게 될 줄이야”라고 하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금계는 스승 퇴계보다 17년이나 연하였으나 퇴계보다 7년이나 먼저 죽음을 맞이했으니 퇴계의 슬픔이 컸던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퇴계는 금계가 죽은 후 ≪금계집(錦溪集)≫ 원집(元集) 4권을 직접 찬정(撰定)하여 단양에서 간행했다. 퇴계 또한 풍기군수 시절 이곳 금선계곡을 자주 찾아 거닐곤 했는데, 그때 그는 시(詩)를 한 수 남겼다. 신선 될 재주없어 삼신산을 못찾고 구름 경치 찾아 시냇물을 마셔보네 얼시구 풍류 찾아 떠도는 손(客)들아 여기 자주와서 세상 시름 씻어 보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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