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양정사 완호기문〔錦陽精舍 完護記文〕 [이황(李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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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02회 작성일 21-07-28 14:08본문
금양정사 완호기문〔錦陽精舍 完護記文〕 [이황(李滉)]
이 사이에 있는 소위 금양정사(錦陽精舍)는 망우(亡友) 금계 주인(錦溪主人) 황군 준량(黃君俊良)이 만년에 장수(藏修)하려고 했던 곳인데, 정사를 다 짓지 못하고 주인이 죽었습니다. 일을 주간(主幹)하던 승려 행사(行思)가 유지(遺志)를 잘 받들어 다 마치고 삼가 지키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혹시 뒷날 점점 멀어지고 점점 잃어버려 관(官)에서도 그 유래를 알지 못하고 사찰의 관례와 같이 보아 역사(役使)하는 승려를 두어 살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수호할 사람이 없어서 정사에 결국 잡초가 무성할 것입니다. 간곡히 바라건대, 인자(仁慈)하신 수령께서는 이런 뜻을 깊이 헤아려 사중(舍中 금양정사)과 유라소(維羅所 사찰)에 모두 완문(完文)과 체문〔帖文〕을 보내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부터 수호하는 승려는 길이 역사(役使)를 면제하여 뜻을 다하여 수호하도록 한다면 그 집안 자제들도 그 가운데 오가며 글을 읽고, 인하여 주인이 뜻은 품고 있었지만 성취하지 못했던 유감을 조금이나마 풀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황(滉)은 금계 주인과 정의(情誼)가 두터워 옛 마을을 지나가다가 산양(山陽)에서 이웃집의 젓대 소리를 듣고 슬퍼하였던 것과 같은 감회를 견디지 못하고, 이 정사를 보호하여 옛날을 그리는 정을 붙이고자 감히 이처럼 번거롭게 아룁니다. 황(滉)은 황공스러운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21) 2월 일
부가한 발문〔附跋〕 류운룡(柳雲龍)
금계(錦溪) 선생은 퇴계(退溪)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만년에 용공(用功)이 가장 친절하였다. 만일 하늘이 수명을 좀 더 연장해 주었다면 나는 용문(龍門)의 울림이 선생에게 연속되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알겠다. 불행하게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하늘이 나를 망친다는 탄식을 갑자기 발했으니, 퇴계 선생께서 애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처음 선생께서 금계(錦溪) 가에 정사(精舍)를 지으려 했으니 이루지 못하고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이를 지키던 승려도 관역(官役)의 침탈을 받아 거의 지탱할 수 없었다.
병인년(1566) 연간에 퇴계 선생께서 부르심을 받들어 군(郡)을 지나가실 때, 대사(臺舍)가 황폐했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감탄하셨다. 군재(郡宰 군수)에게 회포를 부쳐 길이 수호하는 일을 부탁하였는데, 그 당시 군수였던 조완벽(趙完壁)에게 정비하고 유라(維羅 사찰)에 체문을 보내 특별히 완호(完護)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연대가 바뀐 데다 상란(喪亂)을 겪어 큰 사업을 계승하지 못한 지가 또한 벌써 오래되었도다. 지금 변 사이 유묵(遺墨)을 읽어보니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다. 또 그 기문(記文)과 체문〔帖文〕이 산중의 정사(精舍) 벽 사이에 걸려 있었다. 그러므로 뒤에 온 자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므로 끼친 향기가 전파되는 터전이 생기게 되었다.
퇴계 선생께서 돌보시며 수호하려는 계책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져 접함이 없으니 어쩌면 다만 땅을 지키는 사람들의 부끄러움이겠는가, 아니 또한 온 고을 사군자(士君子)의 치욕이라 하겠다.
지금 퇴계 선생의 기문(記文) 및 조재(趙宰 조완벽(趙完壁))의 체문〔帖文〕을 향사당(鄕射堂) 벽상(壁上)에 온 고을 사람들이 길이 지키는 고사(故事)로 삼아 이제부터 향소(鄕所)의 제공(諸公)들도 이를 준행(遵行)하여 잃지 않도록 유라(維羅)에게 신칙(申飭)하고 수재(守宰 수령)에게 간고(墾告)하였다. 또한 수호하는 승려에게 영원히 관역을 면제해주어 퇴계 선생의 지극한 뜻을 저버림이 없도록 기약하였으면, 다행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만력(萬曆) 23년(1566, 명종2) 6월 일 풍기 군수(豐基郡守) 풍산(豐山) 류운룡(柳雲龍)은 삼가 기록한다.
[주-D001] 금양정사(錦陽精舍) : 경북 풍기군 북쪽 5리에 있는 정자이다.
[주-D002] 완문(完文)과 체문〔帖文〕 : 완문은 관(官)에서 향교(鄕校)ㆍ서원(書院)ㆍ개인(個人)에게 어떤 사실을 인지(認知) 또는 권리(權利) 등 특전(特典)을 부여하기 위하여 발급한 확인서(確認書)이고, 체문은 고을 수령이 그 고을의 면임(面任)이나 동임(洞任), 향교(鄕校)나 서원의 유생(儒生)에게 유시(諭示)하던 문서이다.
[주-D003] 산양(山陽)에서 …… 감회 : 옛 친구를 그리워함을 비유한다. 진(晉)나라 때 상수(向秀)가 일찍이 산양의 구택(舊宅)을 지나다가 그 이웃 사람이 부는 젓대 소리를 듣고는, 이미 죽은 친구인 혜강(嵇康), 여안(呂安)과 서로 즐겨 노닐었던 예전 일을 추상(追想)하여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晉書 卷49 向秀傳》
[주-D004] 류운룡(柳雲龍) : 1539~160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이다. 성룡(成龍)의 형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주-D005] 용문(龍門)의 울림 : 주자(朱子)의 시에 “용문에 전해 오는 노래가 있다.〔龍門有遺歌〕” 했는데, 그 주(注)에 “정자가 늘그막에 용문에서 살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정주학(程朱學)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6] 하늘이 …… 탄식 :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공자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구나.〔天喪予〕”라고 탄식한 일을 말한다. 《論語 先進》여기서는 퇴계가 제자 황준량의 죽음을 그와 같이 안타까워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7] 조완벽(趙完壁) :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중국(重國)이니, 진주 출신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경도(京都)로 잡혀가 복역하다가, 1607년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그의 본국 송환을 간청하여 10년 만에 돌아왔다.
이 사이에 있는 소위 금양정사(錦陽精舍)는 망우(亡友) 금계 주인(錦溪主人) 황군 준량(黃君俊良)이 만년에 장수(藏修)하려고 했던 곳인데, 정사를 다 짓지 못하고 주인이 죽었습니다. 일을 주간(主幹)하던 승려 행사(行思)가 유지(遺志)를 잘 받들어 다 마치고 삼가 지키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혹시 뒷날 점점 멀어지고 점점 잃어버려 관(官)에서도 그 유래를 알지 못하고 사찰의 관례와 같이 보아 역사(役使)하는 승려를 두어 살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수호할 사람이 없어서 정사에 결국 잡초가 무성할 것입니다. 간곡히 바라건대, 인자(仁慈)하신 수령께서는 이런 뜻을 깊이 헤아려 사중(舍中 금양정사)과 유라소(維羅所 사찰)에 모두 완문(完文)과 체문〔帖文〕을 보내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부터 수호하는 승려는 길이 역사(役使)를 면제하여 뜻을 다하여 수호하도록 한다면 그 집안 자제들도 그 가운데 오가며 글을 읽고, 인하여 주인이 뜻은 품고 있었지만 성취하지 못했던 유감을 조금이나마 풀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황(滉)은 금계 주인과 정의(情誼)가 두터워 옛 마을을 지나가다가 산양(山陽)에서 이웃집의 젓대 소리를 듣고 슬퍼하였던 것과 같은 감회를 견디지 못하고, 이 정사를 보호하여 옛날을 그리는 정을 붙이고자 감히 이처럼 번거롭게 아룁니다. 황(滉)은 황공스러운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21) 2월 일
부가한 발문〔附跋〕 류운룡(柳雲龍)
금계(錦溪) 선생은 퇴계(退溪)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만년에 용공(用功)이 가장 친절하였다. 만일 하늘이 수명을 좀 더 연장해 주었다면 나는 용문(龍門)의 울림이 선생에게 연속되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알겠다. 불행하게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하늘이 나를 망친다는 탄식을 갑자기 발했으니, 퇴계 선생께서 애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처음 선생께서 금계(錦溪) 가에 정사(精舍)를 지으려 했으니 이루지 못하고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이를 지키던 승려도 관역(官役)의 침탈을 받아 거의 지탱할 수 없었다.
병인년(1566) 연간에 퇴계 선생께서 부르심을 받들어 군(郡)을 지나가실 때, 대사(臺舍)가 황폐했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감탄하셨다. 군재(郡宰 군수)에게 회포를 부쳐 길이 수호하는 일을 부탁하였는데, 그 당시 군수였던 조완벽(趙完壁)에게 정비하고 유라(維羅 사찰)에 체문을 보내 특별히 완호(完護)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연대가 바뀐 데다 상란(喪亂)을 겪어 큰 사업을 계승하지 못한 지가 또한 벌써 오래되었도다. 지금 변 사이 유묵(遺墨)을 읽어보니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다. 또 그 기문(記文)과 체문〔帖文〕이 산중의 정사(精舍) 벽 사이에 걸려 있었다. 그러므로 뒤에 온 자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므로 끼친 향기가 전파되는 터전이 생기게 되었다.
퇴계 선생께서 돌보시며 수호하려는 계책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져 접함이 없으니 어쩌면 다만 땅을 지키는 사람들의 부끄러움이겠는가, 아니 또한 온 고을 사군자(士君子)의 치욕이라 하겠다.
지금 퇴계 선생의 기문(記文) 및 조재(趙宰 조완벽(趙完壁))의 체문〔帖文〕을 향사당(鄕射堂) 벽상(壁上)에 온 고을 사람들이 길이 지키는 고사(故事)로 삼아 이제부터 향소(鄕所)의 제공(諸公)들도 이를 준행(遵行)하여 잃지 않도록 유라(維羅)에게 신칙(申飭)하고 수재(守宰 수령)에게 간고(墾告)하였다. 또한 수호하는 승려에게 영원히 관역을 면제해주어 퇴계 선생의 지극한 뜻을 저버림이 없도록 기약하였으면, 다행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만력(萬曆) 23년(1566, 명종2) 6월 일 풍기 군수(豐基郡守) 풍산(豐山) 류운룡(柳雲龍)은 삼가 기록한다.
[주-D001] 금양정사(錦陽精舍) : 경북 풍기군 북쪽 5리에 있는 정자이다.
[주-D002] 완문(完文)과 체문〔帖文〕 : 완문은 관(官)에서 향교(鄕校)ㆍ서원(書院)ㆍ개인(個人)에게 어떤 사실을 인지(認知) 또는 권리(權利) 등 특전(特典)을 부여하기 위하여 발급한 확인서(確認書)이고, 체문은 고을 수령이 그 고을의 면임(面任)이나 동임(洞任), 향교(鄕校)나 서원의 유생(儒生)에게 유시(諭示)하던 문서이다.
[주-D003] 산양(山陽)에서 …… 감회 : 옛 친구를 그리워함을 비유한다. 진(晉)나라 때 상수(向秀)가 일찍이 산양의 구택(舊宅)을 지나다가 그 이웃 사람이 부는 젓대 소리를 듣고는, 이미 죽은 친구인 혜강(嵇康), 여안(呂安)과 서로 즐겨 노닐었던 예전 일을 추상(追想)하여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晉書 卷49 向秀傳》
[주-D004] 류운룡(柳雲龍) : 1539~160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이다. 성룡(成龍)의 형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주-D005] 용문(龍門)의 울림 : 주자(朱子)의 시에 “용문에 전해 오는 노래가 있다.〔龍門有遺歌〕” 했는데, 그 주(注)에 “정자가 늘그막에 용문에서 살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정주학(程朱學)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6] 하늘이 …… 탄식 :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공자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구나.〔天喪予〕”라고 탄식한 일을 말한다. 《論語 先進》여기서는 퇴계가 제자 황준량의 죽음을 그와 같이 안타까워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7] 조완벽(趙完壁) :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중국(重國)이니, 진주 출신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경도(京都)로 잡혀가 복역하다가, 1607년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그의 본국 송환을 간청하여 10년 만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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