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行狀〕 이황(李滉) [이황(李滉)] > 금계외집 9권부록

본문 바로가기

서브이미지

행장〔行狀〕 이황(李滉) [이황(李滉)] > 금계외집 9권부록

행장〔行狀〕 이황(李滉) [이황(李滉)]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1회 작성일 21-07-28 13:49

본문

금계집 외집 제9권 / 부록(附錄)


행장〔行狀〕 이황(李滉) [이황(李滉)]

성주 목사(星州牧使) 황공(黃公)의 휘는 준량(俊良)이고, 자는 중거(仲擧)이며,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 벼슬을 한 유중(裕中)이 그의 먼 조상이다. 시중의 손자 근(瑾)이 공민왕(恭愍王) 때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과 상소(上疏)하여 지진의 변고를 극력 논란하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서 옥천 군수(沃川郡守)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벼슬이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제학공(提學公)이 낳은 휘 유정(有定)은 본조(本朝 조선(朝鮮))에 벼슬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전서공(典書公)이 낳은 생원(生員) 휘 연(鋋)은 공(公)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전서공이 영천(榮川 경북 영주)에 우거(寓居)하였고 생원공(生員公)이 또 풍기(豐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 사람이 되었다. 증조(曾祖) 휘 말손(末孫)은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를 지냈고, 조부의 휘는 효동(孝童)이고, 선고(先考)의 휘는 치(觶)이니, 모두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선비(先妣)는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교수(敎授) 한필(漢弼)의 따님이다. 정덕(正德) 정축년(1517, 중종12) 7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 특이한 자질을 간직하여 일찍이 문자를 터득하여 말을 하면 곧 남들을 놀라게 했으니 ‘기동(奇童)’으로 지칭되었다. 나이 18세에 남성(南省 예조의 별칭)에 나가 시험을 보았는데 시험관이 공의 책문(策文)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니, 이로 말미암아 문명(文名)이 매우 자자하였으며, 매번 시험 볼 때마다 언제나 남보다 앞섰다.

정유년(1537, 중종32)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기해년(1539)에 정시(庭試)에서 직부회시(直赴會試)되었다. 경자년(1540)에 을과(乙科) 제2인(人)으로 급제하여 권지 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가 되고, 성주 훈도(星州訓導)로 조용(調用)되었다가 임인년(1542)에 학유(學諭)로 들어왔다. 계묘년(1543)에 학록 겸 양현고 봉사로 승진하였고, 갑진년(1544)에 학정(學正)으로 승진하여 을사년(1545, 인종1)에 승문원 전고(承文院殿考)로 나가서 상주 교수(尙州敎授)가 되었다. 정미년(1547, 명종2) 가을에 박사(博士)가 되었고, 그해 겨울에 전례에 의하여 전적(典籍)으로 승진되고, 다음 해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고, 부친상을 당했다. 경술년(1550) 삼년상을 마치고 전적(典籍)으로부터 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옮겨 중종(中宗)과 인종(仁宗) 양조(兩朝)의 실록(實錄)을 편수하였다. 겨울에 병조 좌랑으로 전직되어 〈벽불소(闢佛疏)〉를 올렸다.

신해년(1551) 2월 경상도 감군 어사(慶尙道監軍御史)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에 차제(差除)되었고, 6월에 이어서 추생 어사(抽栍御史)가 되었다. 7월에는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으나 나가지 않았다. 9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이 때 한씨(韓氏) 성(姓)인 사람이 언로(言路)에 있으면서 공에게 요구한 적이 있었지만 공이 응하지 않았는데, 그의 모함에 걸려 논박(論駁)하여 체차(遞差)되었다. 공이 드디어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을 청하여 신녕 현감(新寧縣監)이 되었다.

병진년(1556) 겨울에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명년 가을에 조정에서 단양(丹陽) 고을이 쇠잔하고 피폐함으로 인하여 특별히 그 적임자를 선임했는데, 공을 기용하여 수령으로 삼았다. 가족을 이끌고 부임하여 3년의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와 집에서 머물렀다. 예조와 병조의 정랑을 제수했으나 모두 배명(拜命)하지 않았다. 경신년(1560) 가을에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그 4년 뒤 계해년(1563, 명종18) 봄에 병이 나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질병이 더욱 악화되어 3월 11일 예천(醴泉)에 도착하여 끝내 별세하니, 향년 47세였다.

공은 사람됨이 영특하고 빼어나 범상하지 않았고 명민하고 풍모가 있었으며 미목(眉目)이 그림과 같고 재주는 화려하고 넉넉하여 장차 무슨 일을 맡겨도 역량을 베풀지 못할 데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주현(州縣)에서 벼슬하였으므로 또 직무를 비루하고 쓸데없다고 여기지 않고, 문서와 장부에 몰두하여 백성들의 일에 마음을 다하였다.

신녕현(新寧縣)에 있을 때, 흉년을 만난 해에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기를 마치 자기가 굶주리는 것처럼 여겨 합당하게 진휼(賑恤)하여 백성들이 그로써 소생하였다. 전임 수령이 진 부채(負債)를 공이 절약하여 보충하고 수량이 충족되면 그 문권(文券)을 불살랐다. 학교에 더욱 유의(留意)하여 문묘(文廟)를 새로 증축하였고 힘써 권면하고 훈도했다. 또한 옛 마을에 나아가 학사(學舍)를 창건하여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편액하고, 서적을 보관하고 전답을 배치하니 선비들의 마음이 흥기하여 사모하였다.

단양(丹陽)에 부임하여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사경(四境)을 둘러보니 수십 호(戶)가 겨우 남았는데 모두 기운이 없고 병들어 고초를 겪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폐단이 누적된 이유를 따져 묻고 개탄스럽게 말하기를 “관(官)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런 폐단이 제거되지 않으면 우리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으니 어떻게 관아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곧 상소(上疏)하여 극력 말했으니 그 강령(綱領)은 하나로 운운(云云)하였고, 그 조목(條目)은 열 가지로 운운(云云)하였다.

이에 임금의 비답을 내려 장유(奬諭)하기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라고 하고, 10년을 한정하고 공부(貢賦) 20여 조목을 감면할 것을 특별히 명하셨으니, 공의 정성이 하늘을 감격시킨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예전에 없던 은전(恩典)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단양 백성들이 고무(皷舞)되어 흩어졌던 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향교(鄕校)가 산간(山澗)에 닿아 있어 자주 침식(侵蝕)되는 근심이 있었다. 공이 옮겨 세우라고 명하여 군치(郡治)의 동편에 자리를 구하니, 재목도 훌륭하고 제도 또한 아름다워 온 고을의 면목이 바뀌니 재물이 부족하다고 하여 풍화(風化)의 근원을 느슨하게 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또 군의 전현(前賢)인 좨주(祭酒) 우탁(禹倬)의 경학(經學)과 충절(忠節)이 모두 세상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고 여겨 문묘(文廟)의 서편에 별도로 집 한 칸을 지어 제사를 드렸다.

성주(星州)에 이르러서는 그 고을을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졌는데 공은 스스로 어렵다고 여기지 않고 학교를 일으키는 한 가지 일을 앞의 두 고을에 비하여 더욱 힘을 쏟고 정성을 다하였다. 이보다 먼저 목사(牧使) 노경린(盧慶麟)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예전 벽진(碧珍)의 터에 건립했는데, 공이 인하여 꾸미며 아름답게 하였고, 또 문묘(文廟 향교)를 중수하여 예전 규모를 확장하였다.

마침 사문(斯文) 오건(吳健)이 주(州)의 교관(敎官)이 되었는데 서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의논하여 자제 약간 명을 가려 뽑아 네 등급으로 나누고 오 교관에게 교육을 주관하도록 하고, 자신은 그 검독(檢督)을 맡았다. 매달 한 차례 회강(會講)하고 그 읽은 글을 배송(背誦)하게 하고 인하여 의심나는 뜻은 논란(論難)을 벌여 그 부지런하고 태만함을 살펴 상벌(賞罰)을 매기도록 하였다. 고을 동편에 공곡(孔谷)이라는 터가 있었는데, 제생(諸生)들이 서당(書堂)을 세우기를 원하므로 인하여 공이 흔연히 집을 짓고 공곡서당(孔谷書堂)이라 편액(扁額)하였다.

또 성주(星州)의 팔거현(八莒縣)에 녹봉정사(鹿峯精舍)를 세우고 다양한 방면으로 훈도(訓導)하니 각각 그 자질(資質)의 고하(高下)에 따라 성취(成就)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처음에 상산(商山)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가 되었을 때, 공이 후진(後進)으로서 오가며 많이 논변(論辨)하였는데, 그 다르고 같음과 따르고 어긋나는 사이에 사람들이 벌써 그 견식(見識)이 명확함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당(堂)에 나아가 그 고깃점을 맛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조정에 있을 때 오직 문사(文辭)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그 뒤에 차츰 사우(師友)들을 따라서 성리(性理)와 연원(淵源)에 대한 학설을 듣고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이 종래에 말한 바에 그치지 않음을 알고 이 학문에 큰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다가《심경》과《근사록》등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구하여 읽었고, 최후에 또 주자서(朱子書)를 구하여 읽었는데, 이에 깊이 감발(感發)한 바가 있어 크게 탐락하였다.

성주에서 또 동인(同人)들이 이택(麗澤)의 도움이 있어서 그 뜻이 더욱 분발하였고 그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매양 공무(公務)를 마친 여가에 문득 오 교관(吳敎官)과 서안(書案)을 마주하고 강독(講讀)하느라 밤을 새우며 잠자고 먹는 것조차 잊은 채로 끊임없이 공부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간혹 피로하여 병이 날까 규제(規制)하는 사람이 있으면 답하기를 “글을 읽고 학문을 하는 것은 본래 마음을 다스리고 기운을 기르기 위한 것인데 어찌 독서로 인하여 질병을 초래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혹시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운명이니, 독서를 한 탓이 아니다.” 하였다.

혼자 거처할 때에는 조촐한 방에 성현(聖賢)의 중요한 훈계를 사방 벽(壁)에 붙이고 스스로 깨우치며 반성하였는데, ‘주정지경(主靜持敬)’이라는 어구(語句)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매양 사환 때문에 뜻을 빼앗기고 관사(官事)가 번잡함을 깊이 병통으로 여겨 하루아침에 훌훌 벗어 버리고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의 가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려고 벌써 점유(占有)해 두었던 그 터에 몇 칸 집을 짓고 ‘금양정사(錦陽精舍)’라 하고 책을 간수하고 도를 강론하는〔藏書講道〕 장소로 삼았다.

독실히 좋아하는 뜻으로 조용히 수양하는 공부를 더했더라면 그 견문은 마땅히 진보가 있고 그 터득함은 마땅히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질병이 갑자기 찾아왔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공의 이름이 벌써 홍문관(弘文館)에서 인재(人才)를 양성하는 선발에 올랐다.

무오년(1558, 명종13) 봄에 공이 단양 부사의 직임(職任)을 맡았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공의(公議)가 있어 계(啓)를 올려 공을 불러 문한(文翰)의 직분(職分)을 맡기려고 하였다. 비록 곧바로 함께 진출한 자들이 미워하며 이간(離間)하여 정지되었으나 그 당시에 제공(諸公)들이 칭찬하며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은 이미 기예(技藝)를 능숙하게 하여 급하게 이루려는 데 마음을 두지 않고 영예롭게 진출하는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니, 도리어 머리를 돌리고 생각을 바꾸어 온 세상에서 구하지 않는 것을 구하고 여러 사람들이 맛들이지 않는 것을 맛들이면서 비방(誹謗)과 조소(嘲笑)가 되고 화복(禍福)이 재앙과 복록이 됨을 알지 못하고, 날마다 부지런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는 그 학술을 택한 것이 정대하였고 도를 향함이 부지런했으므로 숭상할 만한 것이다.

공은 우애(友愛)가 돈독하여 무릇 물품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자당(慈堂)에게 올리고 자매(姊妹)와 아우, 조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자기는 아주 적게 취하였다. 그리고 향당(鄕黨)의 친구들에게도 곤궁한 이를 주휼(賙恤)하고 급박(急迫)한 이를 구제하여 마치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비록 이 때문에 남들에게 혐의나 비방을 들어도 근심하지 않았다.

운명하던 날에 이르러서는 이불과 속옷 등이 구비되지 않아서 베를 빌려 염(斂)을 했는데 의류(衣類)가 관(棺)을 채우지 못했다.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또 그의 청빈(淸貧)함이 이와 같아서 거짓으로 꾸며서 스스로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았다.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무릇 지나는 곳이나 머무는 곳마다 어떤 이름난 산이나 운치 있는 물이 있으면 기어코 사람을 불러 함께 찾아갔고, 간혹 몸을 빼내 홀로 가기도 했다. 그곳에 가서는 배회(徘徊)하며 시를 읊조리느라 밤이 다하도록 돌아갈 것을 잊기도 했다.

단양의 도담(島潭)과 구담(龜潭) 같은 곳은 은사(隱士) 이지번(李之蕃)을 주인으로 삼아 마음껏 노닐며 감상했다. 또한 기호(奇好)에 관한 일을 숭상했는데, 더욱 얼음이 언 강에서 썰매 타는 놀이를 좋아하였다.

겨울철에 강에 얼음이 마침 알맞게 얼었으면 중원(中原)으로부터 강을 따라 길을 취하여 썰매를 타고 사람에게 앞에서 끈으로 당기게 하니 미끄럼을 타고 올라와 이군(李君)을 방문하고 군(郡)에 도달하였는데, 스스로 쾌적함이 비길 데가 없다고 여겼으니 그 운치(韻致)가 진솔(眞率)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이 오랫동안 병을 앓아 기운이 날로 다하였으나 정신은 어긋나지 않아 임종하기 하루 전날에 황(滉)에게 서찰로 영결을 고했는데, 사의(辭意)가 청신하여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임종할 때도 또렷하여 어지럽지 않음이 또한 그러했다고 운운(云云)하는 말을 들었다.

공은 예안인(禮安人) 찰방(察訪) 이문량(李文樑)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아우 수량(秀良)의 아들 영(瑛)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명년 갑자년(1564) 1월 일에 군(郡)의 동편 산 내곡(內谷) 감좌(坎坐 남향)의 언덕 선영(先塋)의 왼편에 장례(葬禮) 지냈다. 찰방은 곧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의 아드님이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서 공을 처음 알고 서로 종유(從遊)한 것이 가장 오래고 긴밀하였다. 어리석고 비루하여 견문이 없었는데 공을 통하여 경발(警發)된 것이 많았다. 공이 물러나 돌아오면 실로 오가며 예전의 정의(情誼)를 회복하자는 언약이 있었는데, 공은 항상 내가 늙고 병들어 보전하기 어려움을 걱정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날 늙고 병든 사람은 세상에 살아남아 도리어 강강(康疆)한 나이에 군(君)을 곡(哭)하게 될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공의 언행(言行)은 기록할 만한 것이 정중(鄭重)하여 다하지 못하고 다만 그 가운데 큰 것만 위와 같이 적었으니, 다른 날 혹시 글을 쓰는 사람이 상고하기를 바랄 뿐이나 졸렬하고 어눌한 문장으로 드러내지 못하니 아, 슬프도다. 공이 저술한 문집(文集) 2권과 시집(詩集) 2권이 집안에 간수되어 있다.

가정(嘉靖) 42년 계해년(1563, 명종18) 12월 일에 진성(眞城) 이황(李滉)이 삼가 행장을 짓다.

[주-D001] 추생 어사(抽栍御史) : 조선조 때 정치의 잘잘못과 백성의 고락(苦樂)을 살피기 위하여 임금이 남몰래 파견한 사자(使者)인데, 전 지역을 다 살필 수 없을 경우 찌를 뽑아 뽑힌 곳만 살피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주-D002] 우탁(禹倬) : 1263~1342.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ㆍ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ㆍ단암(丹巖)이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당시 원(元)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해득,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으며,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통달하였다. 《주역》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는 뜻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불렸다.[주-D003] 당(堂)에 …… 못하였다 : 직접 문하에 나아가 선생과 학문을 강론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당에 오름〔升堂〕’과 ‘방에 들어감〔入室〕’은 도(道)에 들어가는 경지를 비유하였다.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경지를 두고 말하기를 “당에는 올랐고 아직 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升堂矣 未入於室也〕”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先進》[주-D004] 동인(同人)들이 이택(麗澤)의 도움 :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못이 붙어 있는 것이 태이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붕우들과 더불어 강습한다.〔麗澤 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주-D005] 주정지경(主靜持敬) : 정을 위주로 하고 경을 유지한다는 말이다.[주-D006]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선비는 도량이 넓고 강인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니,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니, 또한 멀지 않겠는가.〔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泰伯》[주-D007] 이지번(李之蕃) : ?~157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佰), 호는 성암(省菴)ㆍ사정(思亭)ㆍ구옹(龜翁)이다. 선조 때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아버지인데, 천문지리에 모두 정통하였다. 윤원형(尹元衡)이 국권을 잡아 횡포하므로 벼슬을 버리고 단양의 구담(龜潭)에 집을 짓고 정신을 수양하며 세월을 보냈다.[주-D008] 이문량(李文樑) : 1498~1581.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성(大成), 호는 벽오(碧梧)ㆍ녹균(綠筠)이다. 이황(李滉)과는 이웃에 살면서 절친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사명 (주)스피드레이저기술 주소 경기도 광명시 하안로 108 에이스광명타워 208호 사업자 등록번호 119-86-49539 대표 황병극 전화 02-808-3399 팩스 02-6442-7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