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집 외집 제8권 / 대책(對策) 사관의 재능에 대한 득실과 순박에 대하여 물음〔問史才得失純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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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3회 작성일 21-07-28 14:36본문
금계집 외집 제8권 / 대책(對策)
사관의 재능에 대한 득실과 순박에 대하여 물음〔問史才得失純駁〕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제가 일찍이 초야에 물러나 있을 때에 역사와 경전을 읽었는데, 사학(史學)의 순박함을 또한 일찍이 신통하게 이해하여 대강 터득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밝은 물음을 받들어 감히 마음을 다해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생각건대, 사관의 직분은 어렵고 사관의 임무는 무겁다고 여겨집니다. 군신에 있어서 언행의 득실과 정사에 있어서 풍속의 미악이 사관에게 모였으니, 만약 써서 천하에 전하여 후세에 보여 권선징악하는 도구로 삼게 한다면 그 직분이 어렵지 않으며 그 임무가 무겁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천하의 선비가 되어 사관(史官)의 임무를 띤 사람 치고 학식만 있고 재능이 없으면 진실로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없고, 재능만 있고 절개가 없으면 그 임무를 다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학식, 재능, 절개가 완전하게 모두 갖추어져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뒤에야 비로소 함께 사관의 직분을 감당하고 사관의 임무를 다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이 듣고 잘 기억하며 많이 보고 잘 아는 사람을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글을 짓느라 붓을 놀려 순식간에 만언(萬言)을 짓는 사람을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부드러우면 먹고 단단하면 토하는 사람을 절개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학문은 천인(天人)의 이치를 규명하고, 지식은 고금의 이치를 통달하여 성인의 덕을 잘 관찰하고 제왕의 행실을 잘 말한 뒤에야 비로소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사물을 조리있게 관통하여 무리를 잃지 않아 편집함에 있어서 품조(品藻)의 공(工)을 지극히 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에 있어서 시비의 거울을 분명히 한 뒤에야 비로소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공론의 권형(權衡)을 가지고 사의(私意)의 취사(取舍)를 제거하여 마음을 세움이 변함이 없고 말을 정직하게 하고 필치가 곧은 뒤에야 비로소 절개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호오(好惡)가 정당하지 못하고 취사(取舍)가 공(公)과 부합되지 않으니 이는 천하에 전하고 후세에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사관이 된 자는 학식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고 재능이 없을까 걱정하고, 재능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고 절개가 없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사심이 없은 뒤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이치에 타당하고 그 공정(公正)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어진 사람만이 남을 제대로 좋아하고 제대로 미워할 수 있다.”라고 했으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적합한지는 또한 지공(至公)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지공한 마음으로써 세 사람의 장점을 겸할 수만 있다면 사관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범연히 고사(古史)를 보건대, 누가 득실이 되겠습니까? 저는 아뢰기를 간청합니다.
저 옛날 천지가 개벽하기 전에는 문적(文籍)이 생겨나지 않아 다만 결승(結繩)에다 생각을 붙여서 빠뜨리거나 잊어버릴 것을 기록하였고, 서계(書契)가 만들어진 뒤부터 사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색(丘索 삼황오제의 책) 이전에는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혼망(混茫)하여 충분히 징험할 것이 없고, 요순(堯舜) 시대에서 아래로 삼대에 이르러 풍기(風氣)가 크게 열리고 인문(人文)이 원하여 정일집중(精一執中)의 전수와 도덕인의(道德仁義)의 아름다움이 전모(典謨)에 실리고 고명(誥命)에 기재되어 있으니, 몸소 그 도리를 이행하여 덕행을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면 어찌 제대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집사(執事)가 말한 “크고 엄숙하여 더 이상 더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부터 세도(世道)가 쇠미하여 난적(亂賊)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중니(仲尼)가 이를 두려워하여《춘추》하나를 명분을 위해 만들어 2백 년 동안 남면하여 인륜을 만고에 전했으니, 이는 참으로 사가(史家)의 지남(指南)이고 사관의 재명(才名)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실상을 구해보면 지공한 마음으로 지공의 붓을 잡아 천하에 공정하게 좋아하고 미워한다고 말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자장(子長 사마천)의《사기(史記)》같은 책은 헌원(軒轅)에서부터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까지 사리를 잘 서술하여 질박하지만 속되지 않으니, 비유하자면 천마(天馬)가 공중을 다녀 진보가 범상치 않음과 같으니, 어찌 후세의 제가(諸家)가 미칠 수 있겠습니까? 반고(班固)의《한서(漢書)》는 격앙되거나 간사하지 않고 억압하거나 저항하지 않아 넉넉하여 법도가 있고 화려하여 문채가 있으니, 비유하자면 가을 물이 수정처럼 반짝반짝 빛나 영물(靈物)이 다 보니 정말로 이름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혹 황로(黃老)를 우선했다가 처사(處士)로 물러나고, 혹 사절(死節)을 배척하여 정직을 부인한다면 두 사람은 사재(史才)가 있다고 해도 괜찮겠지만 절개가 있다 하고 학식이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마씨(司馬氏)는 재능이 웅대하고 학문이 노련하여 뭇 사책(史冊)을 잡아《자치통감(資治通鑑)》을 만들어 위 열왕(威烈王)에서 오대(五代)까지 치란과 득실에 대한 이유가 환하게 명백하니, 어찌 보잘것없는 제가 경지를 엿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曹) 나라와 위(魏) 나라를 한(漢) 나라 계통에 접속하고 주 무왕(周武王)을 당(唐)나라 서계(緖系)에 이었으니 호오취사(好惡取舍)가 모두 그 중(中)을 얻지 못한다면 그 세 가지에 제가 다 부합되는지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자양(紫陽) 주부자(朱夫子)가 제가(諸家)의 장점을 채택하여《강목(綱目)》을 만들었는데, 강(綱)은《춘추》를 따랐고, 목(目)은 좌씨(左氏)를 모방하여 기산(祈山)에서 출사(出師)한 것에 대해 대의(大義)가 밝다고 썼고, 황재가 방주(房州)에 있은 것에 대해 인기(人紀)가 바르다고 썼습니다. 새 사람에게 아첨하여 몸을 던지는 자는 대부의 주벌(誅伐)을 면하지 못하고 끈을 풀어 갑(甲)에 쓰는 사람은 끝내 처사의 포상이 더해집니다. 기린을 잡아 절필(絶筆)한 뒤 천 년 만에 한 사람을 만났을 뿐이니, 어찌 지공한 마음을 잡고 세 사람의 장점을 겸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당나라의 한유(韓愈) 같은 이는 일대(一代)의 종유(宗儒)가 되어 문장을 자임하고, 이에 “사관이 된 자는 인화(人禍)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천형(天刑)이 있다.”라고 했으니, 유종원(柳宗元)이 편지를 전해 꾸짖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한퇴지가 강직한 의논을 한 이유로 자못 당세에 추앙을 받았으니 어찌 형벌과 화를 두려워했다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다만 당시 시비가 그 공정함을 얻지 못해 군국(郡國)이 숭상하는 바와 기거(起居)가 주목하는 바가 되돌아보는데 실망이 많았으니 비록 힘껏 직도(直道)를 펴려고 해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유가 단단히 사양하고 굳이 거절하면서 감히 이 말을 한 것도 혹 여기에 있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를 알고 이치에 통달한 한유로서 그 재능과 학식이 도리어 편당지어 아부하는 간사한 사람만 못하겠습니까?
우리 동방의 일로써 말하건대,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 대대로 각각 사(史), 전사(全史), 절요(節要)가 있어서 이미 다 상세하게 갖추어졌으니, 그 기록한 말과 찬술한 일이 비록 고인이 지은 것을 본받았지만 그 세 가지의 재능과 지공(至公)한 붓은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선은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 전후로 빛나는 덕화가 이어져 항상 옛 것을 준행하여 사국(史局)의 관원을 설치하고, 편주(編註)의 임무를 전담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낭원이, 지방에서는 수령이 모두 춘추의 직임을 띠어 그 책임을 이루게 하는 도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당연히 그 책무를 맡은 자는 허미(虛美)를 하지 않고 악을 숨기지 않으며 시사(時事)의 득실과 인재의 장부(臧否)를 사실에 근거하여 써서 천하 후세에 큰 규범이 되게 했으니, 사일(史佚)의 재능과 동호(蕫狐)의 붓이 전대에만 오로지 빛났던 것이 아닙니다. 어찌 붓을 잡은 관원이 위임한 중대한 뜻에 어둡고 지공(至公)한 도리를 몰라 말을 기록할 때 혹 사실로써 하지 않고 일을 찬술할 때 혹 그 진실이 뒤섞여 호오(好惡)와 시비의 실상을 어두워 분명하지 않아 지공한 본체를 없게 하겠습니까? 성상의 책임의 위탁을 입은 것이 이미 이와 같은데, 더구나 초야 사이를 바라보니 의젓하게 맑은 풍모가 있어 아래에서 공도(公道)를 행하는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옛날 전오(典午) 말에 쇠란이 지극하였습니다. 손성(孫盛)이 집에서《진춘추(晉春秋)》를 지었는데, 환온(桓溫)의 위엄으로써도 북벌(北伐)에 대한 주벌을 제거할 수 없었고, 당당한 성조(盛朝)로써 공도를 행했으니, 도리어 쇠란한 말년만 못했겠습니까? 참으로 집사가 유념해야 할 바입니다. 저는 생각건대,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공도가 행해지지 않아 사관이 된 자가 완전한 재능을 쓰지 못해서라고 여겨집니다.
지난 번, 간신이 권세를 부려 조정에서 한 의논과 산림에서 한 말들을 모두 법으로 중상(中傷)했으니, 공도(公道)가 엄폐되고 없어져 결국 이 극도의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근래 조정이 청명하니 서울과 지방이 마음을 합쳐서 공도를 행해야 할 때입니다. 창도하는 방법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고 나약한 습속이 아직 다 제거되지 않았으니, 만약 공도를 위에서 한 번 창도하여 그 선봉을 씩씩하게 하고 그 기운을 길러 아래에 책려(責勵)한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 감동을 받아 반드시 흥기하는 자가 반드시 심하게 있을 것이니, 사관이 된 자가 마음이 공도에 순수하여 위언(危言)을 자임하는 것으로 다툴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도를 어찌 행하기 어려우며 완전한 재능을 어찌 만들기 어렵겠습니까?
학문은 천인(天人)의 이치를 관통하고 도(道)는 고금을 갖추어 성덕(盛德)을 형용하고 치화(治化)를 드러나게 한 것은 옛날의 사관이니 지금 유독 그런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편언척자(片言隻字)에 영욕(榮辱)이 관계되어 간사한 사람은 이미 죽은 뒤에도 베고, 숨은 덕의 그윽한 광채를 드러내는 것이 옛날의 사관이었으니 지금 유독 그런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익으로 마음을 괴롭히지 않아 차라리 한 때 죄를 얻을지언정 만고(萬古)의 청의(淸議)에 죄를 얻지 않게 하는 것이 옛날의 사관이었으니 지금 유독 그런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대체로 그런 뒤에 사관이 된 자가 모두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어 호오(好惡)가 시비(是非)가 왜곡되는 바가 없고 사정(邪正)과 곡직(曲直)이 다 드러나지 않음이 없어서 도깨비와 신간(神奸)이 신우(神禹)의 솥에서 스스로 도망칠 수 없을 것입니다. 야사(野史)가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어찌 재능을 가진 사관 중에 그런 적임자가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집사의 물음에 제가 이미 앞에서 대략 진술했습니다만 편(篇) 끝에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체로 사관의 재능은 필수적으로 이 세 가지를 겸비해야 하는데, 세 가지 중에 또한 학식을 근본으로 삼으니, 학식이 이미 지극하면 재능과 절개는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옛날 선비를 양성함에 있어서 그 집에 있을 때에는 여사(閭師)와 족사(族師)가 그 선악을 써서 표지하였고, 성장하여서는 당정(黨正)이 또 써서 이목이 무젖는바가 항상 여기에 있으므로 평소에 모두 선을 사모하고 악을 두려워하여 숙특(淑慝 선악)을 분별했습니다. 사도(司徒)에게 올려 조정에 나아감에 이르러서는 더욱 애써 노력하여 지공의 도를 힘쓰므로 사관의 책무를 맡기니 재능과 덕이 완전히 갖추어져 붓을 잡을 때 사곡(私曲)의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 이 도가 이미 폐지되어 대의(大義)가 있는 바를 돌아보지 않고 일신의 호오(好惡)만을 따라 각각 본 바를 고집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니, 번잡한 것은 박학다식에만 힘쓰고 간약한 것은 또한 간단히 해치우는데서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 주관을 엄칙하는 것이 결여되었는데도 당시에 꺼려서 쌀을 청하여 금을 받는 꾸지람이 종종 있으니, 진실로 옛 제도가 회복되지 않으므로 인해 사관이 된 본분을 잃은 것입니다.
아! 사관에 대해서 말들 하지만 문장이 뛰어난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세 가지 장점을 겸비하되 학식으로 근본을 삼고 공도로 마음을 삼아야 하니 당대 사관이 된 홍유(鴻儒)에게 깊이 바람이 있습니다. 삼가 대답합니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정사가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니, 전조(銓曹 이조와 병조의 합칭)의 환로가 맑지 못하고 학교에서 인재를 양성함이 밝지 못하며 군졸이 위축되는 폐단이 날로 심해진다.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신은 듣건대, 성명(聖明)한 제왕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다스리는 대본(大本)이 있었고 다스리는 대용(大用)이 있었으니, 다스리는 대본은 마음에 있고, 다스리는 대용은 정사에 있습니다. 도가 마음에 있으면 다스림이 수립되고, 도가 정사에 통달되면 다스림이 행해지니, 진실로 도를 떠나 마음에 있을 수 없고, 또한 마음을 버리고 정사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 마음으로 모든 변화에 대응하는 주체를 삼고, 이 정사로 시세를 따라 사곡된 것을 바로잡는 도구로 삼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다스려져 끝내 난리 때문에 망하는 화가 없을 것이니 그 폐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고 천고에 으뜸가는 자질로 그지없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정성을 더하여 마음에 제왕의 마음을 두고 다스림에 제왕의 다스림을 이었으니 그 시사(時事)에 대략 염려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만 오히려 정사가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는 것을 걱정하여 위로 삼대로 부터 아래로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에 이르기까지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폐단을 구하는 대책을 듣고자 했습니다. 신이 일찍이 밭 가운데 엎드려 있었지만 하루도 전하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처럼 정중한 청문(淸問)을 받드니, 감히 마음 속의 생각을 숨김없이 다 드러내어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성책왈 제왕지정(聖策曰帝王之政)’부터 ‘하법지폐이연야(何法之獘而然也)’까지를 읽었습니다. 신이 들으니,《주역》에 말하기를 “군자가 이를 거울삼아 길이 마쳐서 떨어짐을 안다.”라고 했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을 통한 걱정거리입니다. 대체로 한 대(代)가 망하면 반드시 한 대의 정사가 있으니, 그 규모와 제도가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처음 만약 만세에 전할 만하고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면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세변(世變)이 서로 바뀐 것이 아니라 이세(理勢)에 당연한 것이니, 지키는 데 피곤하게 여기는 자는 적임자가 아니니 제왕의 도를 항상 지킬 수 없습니다.
신이 삼대가 융성했을 때를 살펴보니, 그 임금은 우(禹), 탕(湯), 문(文), 무(武)였고, 그 신하는 익(益), 이윤(伊尹), 주공(周公), 소공(召公)이었습니다. 강구(講求)한 것이 훌륭한 계책이 아님이 없었고, 규획(規畫)한 것이 좋은 정사와 교육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도 진실로 의논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어찌 폐단이 있는 정사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멀리 말세의 임금에 이르러 그럭저럭 하면서 소홀히 하여 나태하고 활기가 없어 우, 탕, 문, 무의 마음으로 우, 탕, 문, 무의 정사를 행하지 못하니, 전형(典刑)이 뒤집혀 폐단이 생겨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군(嗣君)이 선왕의 마음을 항상 지켜 오래 전해져도 폐단이 없다면 법만 가지고는 저절로 행해지지 않아 마침내 난망(亂亡)에 이를 것이니 개탄스러운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래로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서부터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비록 한 두 임금이 있어서 자품이 고상하고 계획이 주밀하여 의도(儀度)를 창립하고 치구(治具)를 아름답게 꾸몄으나, 시서(詩書)를 어찌 일삼았겠으며, 선정(善政)이 전해짐이 없었으니, 규문(閨門)의 참덕(慙德)이 대본(大本)을 이미 잃어 구장(舊章)을 가볍게 바꾸어 민생을 잔인하게 흔들었습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마음을 삼되 제왕이 도를 체득한 마음이 아니고, 그 정사를 그대로 정사를 하되 제왕이 마음을 둔 정사가 아니어서 그 수통(垂統)하는 처음에 이미 그 근본이 없었으니, 더구나 후사가 선리(善理)를 다시 변화시켜 때에 따라 현혁할 합당한 자를 바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난망(亂亡)이 서로 찾아드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도 반드시 신에게 물은 것은 신의 배운 바의 정조(精粗)를 보고자 해서입니다. 신이 전하께 바라는 것은 또한 삼대의 법 받고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를 거울삼았으면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마음을 두어 그 정사를 잘 했으면 합니다. 신이 삼가 ‘성책왈 아조(聖策曰我朝)’부터 ‘부지관어흥망여(不至關於興亡歟)’까지를 읽었습니다. 신이 삼가 우리 국가를 살펴보니,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집안을 이루고 나라를 이룬 성심(聖心)으로 재량하여 일대의 다스림을 정하고, 열성조를 계술하여 정치를 하는 도구로 삼아 모두 정도로 인도하고 조금도 결점이 없었으니,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운 뜻으로 주관(周官)의 법도를 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는 깊고 명철하고 문채나고 밝으시며 온화하고 공손하고 성실하고 독실함으로 기미를 연구하여서 밝아 일이 허술함이 없었고,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정신을 가다듬어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도록 도모했으니, 마땅히 일을 조치할 때 행동이 마땅함을 잃음이 없고, 정령을 시행할 때 폐단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래에는 이음(吏蔭)으로 잘못 선발되어 사로(仕路)에 용비(庸鄙)한 부류가 많고, 교훈이 마땅함을 잃어 학교에 사유(師儒)의 임무가 넓으며, 병졸은 훈련을 아니하여 군정(軍政)이 허술한 걱정이 있어서 정사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지극히 형용하여 성상께서 하문하는 수고를 끼쳤습니다. 세 가지 폐단은 반드시 온 원인이 있으니, 어찌 전하께서 다스리는 도가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렇겠습니까? 풍교를 받들어 덕화를 펴는 사람이 잘 봉행하지 못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놓치고 구하지 않는다면 폐단이 장차 어떻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곤궁함에 처하여 비록 조정의 의논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만, 삼가 신이 참람되게 백집사(百執事)의 말단으로 폐단을 구하기 위한 대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가 애초에는 대개 일찍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만, 법이 행해진 지가 이미 오래됨으로 봉행함에 있어서 쓸 사람을 놓쳐서 그 진실이 없어져 끝내 이런 폐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먼저 폐단이 일어나는 이유를 아뢴 뒤 그것을 구하는 술책을 언급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사로(仕路)로써 말한다면, 옛날에 선비를 취할 때 서(序)에서 학(學)에 올리고, 학에서 사도(司徒)에 천거했으니, 하루아침에 올리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이 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집에서 닦아 나라에 적용하니,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 성대하게 배출되어 온갖 직책에 포진되어 한 사람에게만 아첨했습니다. 우리 조선도 선비를 취하는 법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니, 이과(吏科)의 법은 보거(保擧 보증 천거)의 예(例)이고, 문음(門蔭)의 법은 세록(世祿)의 뜻입니다. 또 경서(經書)를 강(講)하여 시험을 치른 뒤 벼슬을 허락했으니, 이는 옛것을 배워 관(官)에 들어가는 뜻입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다 보니 폐단이 없을 수 없었으니, 혹은 편지에 기대기도 하고, 혹은 인친(姻親)을 매개하기도 하여 반 줄의 글도 모르는 자가 그 반열에 참여하여 이로써 낭원(郞員)을 맡고 이로써 수령을 맡아 국면(局面)에 닥쳐서 일을 다스리는 것이 번잡할 뿐입니다. 학문이 넉넉하면 벼슬하는 것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도에 있어서 어디에 해당되겠습니까?
학교로써 말하면 옛날에 가숙(家塾), 당상(黨庠), 술서(術序), 국학(國學)에 한 사람도 가르치지 않는 사람이 없고, 한 곳에도 학교가 없는 곳이 없었으며, 사표(師表)의 임무는 모두 그 적임자를 얻었습니다. 우리 조선에도 교양(敎養)의 법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으니, 서울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고 지방에는 주현(州縣)에 이르러 또한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교도(敎導)하는 관원은 또한 자주 과거를 치러서 경전에 밝은 사람을 택했으니 책임의 방도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다보니 폐단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열읍에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는 모두 용렬한 부류로 학문의 방도를 알지 못하고 이익만 노리는 계책을 품었으니, 심지어 이름만 교훈이지 구두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고비(皐比 스승의 자리)의 위에 앉아서 문난(問難)의 책임을 감당할 것을 바라겠습니까? 이 때문에 속수(束脩)에 뜻을 둔 자가 함장(函丈)의 호칭을 부끄럽게 여기고,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린 자는 고협(鼔篋)의 반열을 부끄럽게 여기니, 그 인재를 교육하여 덕을 기르고 인재를 고무시키는 뜻에 있어서 어디에 해당되겠습니까?
군정(軍政)으로 말하자면, 군사를 농사에 붙여 무예를 익히게 하는 일은 옛날의 법도인데, 이 제도가 이미 폐단이 되어 병사들이 피곤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의 힐융(詰戎)에 대한 방도가 지극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물에는 선군(船軍)이 있고, 뭍에는 보기(步騎)를 두어 비상시에 미리 대비하는 방비〔陰雨之防〕와 앞날을 견고히 하는 준비가 주밀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다보니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만호(萬戶) 중에 군사를 통솔하는 임무를 전담하는 자는 침탈(侵奪)하는 일만 알고 애호(愛護)하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항오(行伍)를 편명(編名)한 자는 장정은 없애고 액수만 두어 십상팔구(十常八九) 수령이 된 자는 인보(隣保)를 구분하지 않고 양천(良賤)을 따지지도 않고 때에 닥쳐 군적(軍籍)을 메워 책임을 면하는 바탕을 삼으니, 어찌 도창(刀鎗)의 쓰임을 알며 어찌 궁마(弓馬)의 일을 알겠습니까? 병사들이 야위어 초췌한 모습은 오늘보다 더 심한 적이 없습니다. 혹 풍진(風塵)의 경계가 있어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일어난다면 장차 어떻게 써야 할 지 모르겠으니, 국가와 족병(足兵)의 도리에 있어서 어디에 해당되겠습니까? 신이 그러므로 말하기를 “그 폐단을 구하려고 하면 마땅히 폐단이 이르게 된 연유를 생각한 뒤에 그 걱정을 구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앞에서 세 가지 폐단을 아뢴 것은 모두 전래가 오래된 폐단에 있으니, 적임자를 얻는 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 적임자를 얻어 전선(銓選)의 책무를 맡기면 반드시 최우보(崔祐甫)가 관직에 제수되니 8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흡족하게 여긴 것처럼 할 수 있으니, 조정에는 다투어 나아가는 버릇이 없고, 재야에는 어진 이를 빠뜨려 두었다는 탄식이 끊어져 사로가 맑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적임자를 얻어 교도의 책무를 맡기면 반드시 호안정(胡安定)이 호학(湖學)에 교수가 된 것처럼 할 수 있으니, 학교에 체용(體用)이 있어서 스승이 자리에 기대어 꾸짖는 일이 없고 인재를 양성하는 아름다움이 성대하게 있어서 교양이 극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적임자를 얻어 군려(軍旅)의 일을 맡긴다면 반드시 이목(李牧)이 조세를 거두어 병사를 대접하여 앞 다투어 쓰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할 수 있으니, 이미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없고 모두 사수(死綏)의 뜻을 품어 군액(軍額)이 날로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만 폐단을 구하는 말단의 도구이고 정치를 하는 하나의 단서일 뿐입니다. 정치를 하는 큰 근본 같은 것은 전하의 일심에 달려 있으니, 전하의 일심이 정치를 내는 큰 근본이고 정치를 하는 근원입니다. 근본이 가지런하면 그 말단을 헤아릴 필요가 없어 허명(虛明)하고 깊으며 진실로 이미 심원하게 조달(條達)되었고, 근원이 맑으면 그 흐름을 부딪치게 할 필요가 없어 진실로 이미 조용한 듯 티끌이 없어졌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그 마음을 두어 다스림을 내는 근원을 맑게 하며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는 실상을 미루어 교화를 밝혀서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한다면 사람들이 조급하게 나아가는 생각이 없고 모두 자중하는 마음이 있어서 다투어 남의 아들을 헤치는 것으로 경계를 삼아 내가 이에 법을 만든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니, 사로(仕路)에 함부로 나아갈까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그 마음을 두어 다스림을 내는 근본을 맑게 하여 먼저 스스로 몸소 실행하여 스스로 스승을 얻어 성탕(成湯)이 이윤(伊尹)에게 배우고 한 명제(漢明帝)가 삼로(三老)에게 절한 것처럼 한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서 감동하여 흥기하는 자가 반드시 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교훈할 그 적임자를 얻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그 마음을 두어 다스림을 내는 근원을 맑게 한다면 군정의 책무를 맡은 자가 애양(愛養)하는 인(仁)을 우러러 체득하여 모두 어루만지는 마음을 품을 것이니, 고름을 빨아내어 은혜를 사고 높이 뛰고 용기를 팔고 병졸이 훈련하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망녕된 말로써 청문(淸問)의 만분의 일이나마 우러러 대답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편 끝에 다시 마음〔心〕 한 글자로써 그 여온을 다합니다.
옛날 동중서(蕫仲書)는 바른 마음으로써 만민의 근원을 바루고, 정이(程頤)는 근독(謹獨)으로 천덕(天德)의 근본을 통달했습니다. 참으로 인주(人主)께서 정신(精神)과 심술(心術)의 운행으로 비록 관정(官庭) 속에 숨어있더라도 부험(符驗)이 환하게 밖으로 드러나 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마음이 한결같이 발라 빈 거울과 평평한 거울 같다면 인재(人才)의 사정(邪正)과 정사(政事)의 가부(可否)가 투명하여 폐단이 없을 것이니 나머지는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임금의 마음이 한 번이라도 바르지 않은 적이 있으면 실을 풀지만 뒤엉키는 것과 같아서 일일이 고치더라도 이루 다 고칠 수 없습니다.
지금 염치(廉恥)의 도가 상실되어 뇌물로써 벼슬살이를 하고, 심지어 임명한 글이 채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물색(物色)을 먼저 정하니, 먼저 다스림을 내는 바탕을 엄하게 하여 전주(銓注)의 길을 맑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풍(古風)이 한 번 가니 사제(師弟)의 길이 상실되어 의리에 대한 학문이 강론되지 않고 공리(功利)에 대한 설이 날로 치성하여 선비가 경전을 펼치고 질문하는 일도 없고, 스승은 곳간만 축낸다는 기롱이 있으니 먼저 다스림을 내는 근원을 바르게 하여 군사(君師)의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도(公道)가 엄폐되고 없어져 채수(債帥)가 풍속을 이루어 병사의 고혈(膏血)과 군사의 기력(氣力)이 권문의 뇌물에 꼼짝달싹 못하니, 먼저 다스림을 대는 근본을 맑게하여 포저(苞苴)의 길을 막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와 같이 한다면 한 사람의 창도가 일국(一國)의 효과가 되고, 한 마음의 추거(推去)가 만화(萬化)의 근간이 되어 덕을 하는 대본(大本)이 수립되고 정치를 하는 대용(大用)이 행해질 것입니다. 오늘날의 치화(治化)는 삼대의 곤역(閫域)을 높이 끼고서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이도(泥塗)를 내려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몇 가지 일은 모두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 속에, 큰 덕은 화(化)를 돈후하게 하는 안에 포함되어 있으니, 성상의 생각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의 각 순서는 폐단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성상께서 계획을 부지런히 하고 묘당에서 계책을 내더라도 가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도는 만세에 이르도록 폐단이 없으니, 폐단이 생기면 도를 잃게 된다.〔道者 萬世之弊 弊者 道之失也〕”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신은 삼가 대답합니다.
[주-D001] 어진 …… 있다 : 《대학장구》전(傳) 10장(章)에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들을 추방하되 사방 오랑캐 땅으로 내쫓아 중국에서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니, 이것을 일러 오직 어진 사람만이 남을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미워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唯仁人 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 此謂唯仁人爲能愛人能惡人〕”라고 하였다.
[주-D002] 전모(典謨) : 전은《서경》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이며, 모는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등의 편을 가리킨다. 모두 제왕의 도리와 치국(治國)의 대도(大道)를 논했다.
[주-D003] 기린을 잡아 절필(絶筆) : 공자가《춘추》를 기술하면서 노 애공(魯哀公)이 기린을 잡은 대목〔獲麟〕에서 붓을 그쳤던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주-D004] 한유(韓愈) …… 있다 : 《창려문집(昌黎文集)》 〈답유수재론사서(答劉秀才論史書)〉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5] 유종원(柳宗元)이 …… 것 : 유종원이 한유에게 보낸 〈여한유논사서(與韓愈論史書)〉를 가리킨다. 유종원이 사책(史冊)을 짓는 일로 한유를 질책하였다.
[주-D006] 전오(典午) : ‘전(典)’은 맡았다는 말이고, ‘오(午)’는 말(馬)이니, 이것은 사마씨(司馬氏)의 사마(司馬)와 같은 말이다. 한나라 때의《사기》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주-D007] 손성(孫盛)이 …… 지었는데 : 진(晉)나라 사람으로, 사학가로 유명했다. 《진춘추(晉春秋)》, 즉《진양추(晉陽秋)》를 지었는데 말이 바르고 사리가 정당하여 대단히 양사(良史)로 일컬어졌다 한다. 《晉書 卷82》
[주-D008] 환온(桓溫)의 …… 없었고 : 동진(東晉) 시대의 권신(權臣)으로서, 서쪽으로 촉(蜀)을, 북쪽으로 부건(符鍵) 등을 정벌하여 내외(內外)의 대권(大權)을 독차지하였고, 벼슬이 대사마(大司馬)ㆍ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가 되어 남군공(南郡公)에 봉해졌는데, 이토록 위권(威權)이 높아짐에 따라 반역심이 생겨 끝내는 제(帝)를 폐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세우고서 은밀히 제위를 찬탈하려고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역시 병사하였다. 《晉書 卷98 桓溫列傳》
[주-D009] 주역에 …… 안다 : 《주역》54괘 뇌택귀매(雷澤歸妹)에 “상에 말하기를 ‘연못 위에 우뢰가 있는 것이 귀매이니, 군자는 이를 법 받아 마침을 길게하여 떨어짐을 안다.’ 하였다.〔象曰 澤上有雷 歸妹 君子以永終 知敝〕”라고 하였다.
[주-D010] 참덕(慙德) : 덕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데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서경(書經)》상서(商書)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성탕(成湯)이 걸(桀)을 남소(南巢)로 내치고 나서 참덕(慙德)을 느껴 ‘나는 후세에 나를 구실로 삼을까 두렵다.’ 했다.”라고 하였다.
[주-D011] 관저(關雎)와 …… 뜻 : 《근사록(近思錄)》권8 〈치체류(治體類)〉에 나오는 정호(程顥)의 말이다. 〈관저〉는 주 문왕(周文王)의 후비를 찬양한 시이고, 〈인지(麟趾)〉는 문왕의 훌륭한 자손을 노래한 시인데, 임금이 수신(修身)은 물론이고 먼저 문왕처럼 궁중 내부부터 시작해서 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도를 행해야만《주례(周禮)》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제도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주-D012] 깊고 …… 독실함으로 : 《서경》 〈순전(舜典)〉에서 순 임금의 덕을 표현하여 ‘심원하고 명철하고 문채가 나고 밝으며 온화하고 공손하고 미덥고 진실하였다.〔濬哲文明 溫恭允塞〕’라고 하였다.
[주-D013] 풍교를 …… 사람이 : 승류선화(承流宣化)는《한서(漢書)》권56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나오는 말로, 풍교(風敎)를 받들어 숭상하고 은택을 베풀어 백성을 교화하는 관원의 직분을 가리키는 말인데, 보통 방백(方伯) 등 지방 장관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주-D014] 학문이 …… 것 : 《논어》 〈자장(子張)〉에 “벼슬하면서 여유가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하고서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5] 속수(束脩) : 수(脩)는 육포(肉脯)인데, 속수(束脩)는 육포 열 조각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속수를 가져온 사람은 내가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束脩以上 吾未嘗無誨〕”라고 했으니, 옛날 제자가 스승을 뵐 적에 드리는 약소한 예물이다.
[주-D016] 고협(鼔篋) : 북을 쳐서 선비를 모으고 책 상자를 끌러서 책을 펴놓게 하는 것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학궁에 들어와 고협을 한다.”라고 하였다.
[주-D017] 비상시에 …… 방비〔陰雨之防〕 : 《시경》 〈치효(鴟鴞)〉의 “하늘에서 장맛비가 아직 내리지 않을 때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 모아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牑戶 今此下民 或敢侮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18] 앞날을 …… 준비가 : 《주역》 〈비괘(否卦)〉에 “그 망할까 그 망할까 하여야 포(苞)한 뽕나무에 매었다 하리라.〔其亡其亡 繋于苞桑〕”라고 하였다.
[주-D019] 족병(足兵) : 군사가 넉넉한 것을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 자공(子貢)이 정사를 묻자 공자(孔子)가 대답하기를 “양식을 풍족히 하고 병(兵)을 풍족히 하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다.〔子貢問政 子曰 足食足兵民信之矣〕”라고 하였다.
[주-D020] 사수(死綏) : 군사가 패하면 장수는 마땅히 죽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문공(文公) 12년에 “사마법(司馬法)에 장군은 수레에 오르는 끈을 잡고 죽는다.〔死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1] 고름을 빨아내어 : 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는다는 말로, 비굴하고 악착같이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행위를 뜻한다. 연저지치(吮疽舐痔)라고도 한다. 《莊子 列禦寇》
[주-D022] 채수(債帥) : 빚을 내어 뇌물로 바쳐 장수가 된 것을 말한다. 당 대종(唐代宗) 이후 정치가 부패하여 장수가 내관(內官)에게 수많은 뇌물을 바쳐야 벼슬을 얻었는데, 돈이 없는 자는 부잣집에서 돈을 꾸어 뇌물로 바치고 벼슬을 얻은 뒤에는 백성에게 수탈하여 그 이자를 갑절로 갚았으므로 채수라는 용어가 생겼다. 《唐書 卷171 高瑀列傳》
[주-D023] 포저(苞苴)의 길 : 선물을 싸서 관직을 청탁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4] 작은 …… 하는 : 《중용장구》제30장에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과 같고 큰 덕은 화를 돈후히 한다.〔小德川流 大德敦化〕”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25] 도는 …… 된다 : 한나라 동중서(董仲舒)가 한 말로,《한서(漢書)》 권56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보인다.
사관의 재능에 대한 득실과 순박에 대하여 물음〔問史才得失純駁〕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제가 일찍이 초야에 물러나 있을 때에 역사와 경전을 읽었는데, 사학(史學)의 순박함을 또한 일찍이 신통하게 이해하여 대강 터득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밝은 물음을 받들어 감히 마음을 다해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생각건대, 사관의 직분은 어렵고 사관의 임무는 무겁다고 여겨집니다. 군신에 있어서 언행의 득실과 정사에 있어서 풍속의 미악이 사관에게 모였으니, 만약 써서 천하에 전하여 후세에 보여 권선징악하는 도구로 삼게 한다면 그 직분이 어렵지 않으며 그 임무가 무겁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천하의 선비가 되어 사관(史官)의 임무를 띤 사람 치고 학식만 있고 재능이 없으면 진실로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없고, 재능만 있고 절개가 없으면 그 임무를 다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학식, 재능, 절개가 완전하게 모두 갖추어져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뒤에야 비로소 함께 사관의 직분을 감당하고 사관의 임무를 다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이 듣고 잘 기억하며 많이 보고 잘 아는 사람을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글을 짓느라 붓을 놀려 순식간에 만언(萬言)을 짓는 사람을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부드러우면 먹고 단단하면 토하는 사람을 절개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학문은 천인(天人)의 이치를 규명하고, 지식은 고금의 이치를 통달하여 성인의 덕을 잘 관찰하고 제왕의 행실을 잘 말한 뒤에야 비로소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사물을 조리있게 관통하여 무리를 잃지 않아 편집함에 있어서 품조(品藻)의 공(工)을 지극히 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에 있어서 시비의 거울을 분명히 한 뒤에야 비로소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공론의 권형(權衡)을 가지고 사의(私意)의 취사(取舍)를 제거하여 마음을 세움이 변함이 없고 말을 정직하게 하고 필치가 곧은 뒤에야 비로소 절개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호오(好惡)가 정당하지 못하고 취사(取舍)가 공(公)과 부합되지 않으니 이는 천하에 전하고 후세에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사관이 된 자는 학식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고 재능이 없을까 걱정하고, 재능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고 절개가 없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사심이 없은 뒤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이치에 타당하고 그 공정(公正)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어진 사람만이 남을 제대로 좋아하고 제대로 미워할 수 있다.”라고 했으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적합한지는 또한 지공(至公)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지공한 마음으로써 세 사람의 장점을 겸할 수만 있다면 사관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범연히 고사(古史)를 보건대, 누가 득실이 되겠습니까? 저는 아뢰기를 간청합니다.
저 옛날 천지가 개벽하기 전에는 문적(文籍)이 생겨나지 않아 다만 결승(結繩)에다 생각을 붙여서 빠뜨리거나 잊어버릴 것을 기록하였고, 서계(書契)가 만들어진 뒤부터 사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색(丘索 삼황오제의 책) 이전에는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혼망(混茫)하여 충분히 징험할 것이 없고, 요순(堯舜) 시대에서 아래로 삼대에 이르러 풍기(風氣)가 크게 열리고 인문(人文)이 원하여 정일집중(精一執中)의 전수와 도덕인의(道德仁義)의 아름다움이 전모(典謨)에 실리고 고명(誥命)에 기재되어 있으니, 몸소 그 도리를 이행하여 덕행을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면 어찌 제대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집사(執事)가 말한 “크고 엄숙하여 더 이상 더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부터 세도(世道)가 쇠미하여 난적(亂賊)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중니(仲尼)가 이를 두려워하여《춘추》하나를 명분을 위해 만들어 2백 년 동안 남면하여 인륜을 만고에 전했으니, 이는 참으로 사가(史家)의 지남(指南)이고 사관의 재명(才名)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실상을 구해보면 지공한 마음으로 지공의 붓을 잡아 천하에 공정하게 좋아하고 미워한다고 말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자장(子長 사마천)의《사기(史記)》같은 책은 헌원(軒轅)에서부터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까지 사리를 잘 서술하여 질박하지만 속되지 않으니, 비유하자면 천마(天馬)가 공중을 다녀 진보가 범상치 않음과 같으니, 어찌 후세의 제가(諸家)가 미칠 수 있겠습니까? 반고(班固)의《한서(漢書)》는 격앙되거나 간사하지 않고 억압하거나 저항하지 않아 넉넉하여 법도가 있고 화려하여 문채가 있으니, 비유하자면 가을 물이 수정처럼 반짝반짝 빛나 영물(靈物)이 다 보니 정말로 이름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혹 황로(黃老)를 우선했다가 처사(處士)로 물러나고, 혹 사절(死節)을 배척하여 정직을 부인한다면 두 사람은 사재(史才)가 있다고 해도 괜찮겠지만 절개가 있다 하고 학식이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마씨(司馬氏)는 재능이 웅대하고 학문이 노련하여 뭇 사책(史冊)을 잡아《자치통감(資治通鑑)》을 만들어 위 열왕(威烈王)에서 오대(五代)까지 치란과 득실에 대한 이유가 환하게 명백하니, 어찌 보잘것없는 제가 경지를 엿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曹) 나라와 위(魏) 나라를 한(漢) 나라 계통에 접속하고 주 무왕(周武王)을 당(唐)나라 서계(緖系)에 이었으니 호오취사(好惡取舍)가 모두 그 중(中)을 얻지 못한다면 그 세 가지에 제가 다 부합되는지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자양(紫陽) 주부자(朱夫子)가 제가(諸家)의 장점을 채택하여《강목(綱目)》을 만들었는데, 강(綱)은《춘추》를 따랐고, 목(目)은 좌씨(左氏)를 모방하여 기산(祈山)에서 출사(出師)한 것에 대해 대의(大義)가 밝다고 썼고, 황재가 방주(房州)에 있은 것에 대해 인기(人紀)가 바르다고 썼습니다. 새 사람에게 아첨하여 몸을 던지는 자는 대부의 주벌(誅伐)을 면하지 못하고 끈을 풀어 갑(甲)에 쓰는 사람은 끝내 처사의 포상이 더해집니다. 기린을 잡아 절필(絶筆)한 뒤 천 년 만에 한 사람을 만났을 뿐이니, 어찌 지공한 마음을 잡고 세 사람의 장점을 겸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당나라의 한유(韓愈) 같은 이는 일대(一代)의 종유(宗儒)가 되어 문장을 자임하고, 이에 “사관이 된 자는 인화(人禍)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천형(天刑)이 있다.”라고 했으니, 유종원(柳宗元)이 편지를 전해 꾸짖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한퇴지가 강직한 의논을 한 이유로 자못 당세에 추앙을 받았으니 어찌 형벌과 화를 두려워했다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다만 당시 시비가 그 공정함을 얻지 못해 군국(郡國)이 숭상하는 바와 기거(起居)가 주목하는 바가 되돌아보는데 실망이 많았으니 비록 힘껏 직도(直道)를 펴려고 해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유가 단단히 사양하고 굳이 거절하면서 감히 이 말을 한 것도 혹 여기에 있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를 알고 이치에 통달한 한유로서 그 재능과 학식이 도리어 편당지어 아부하는 간사한 사람만 못하겠습니까?
우리 동방의 일로써 말하건대,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 대대로 각각 사(史), 전사(全史), 절요(節要)가 있어서 이미 다 상세하게 갖추어졌으니, 그 기록한 말과 찬술한 일이 비록 고인이 지은 것을 본받았지만 그 세 가지의 재능과 지공(至公)한 붓은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선은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 전후로 빛나는 덕화가 이어져 항상 옛 것을 준행하여 사국(史局)의 관원을 설치하고, 편주(編註)의 임무를 전담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낭원이, 지방에서는 수령이 모두 춘추의 직임을 띠어 그 책임을 이루게 하는 도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당연히 그 책무를 맡은 자는 허미(虛美)를 하지 않고 악을 숨기지 않으며 시사(時事)의 득실과 인재의 장부(臧否)를 사실에 근거하여 써서 천하 후세에 큰 규범이 되게 했으니, 사일(史佚)의 재능과 동호(蕫狐)의 붓이 전대에만 오로지 빛났던 것이 아닙니다. 어찌 붓을 잡은 관원이 위임한 중대한 뜻에 어둡고 지공(至公)한 도리를 몰라 말을 기록할 때 혹 사실로써 하지 않고 일을 찬술할 때 혹 그 진실이 뒤섞여 호오(好惡)와 시비의 실상을 어두워 분명하지 않아 지공한 본체를 없게 하겠습니까? 성상의 책임의 위탁을 입은 것이 이미 이와 같은데, 더구나 초야 사이를 바라보니 의젓하게 맑은 풍모가 있어 아래에서 공도(公道)를 행하는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옛날 전오(典午) 말에 쇠란이 지극하였습니다. 손성(孫盛)이 집에서《진춘추(晉春秋)》를 지었는데, 환온(桓溫)의 위엄으로써도 북벌(北伐)에 대한 주벌을 제거할 수 없었고, 당당한 성조(盛朝)로써 공도를 행했으니, 도리어 쇠란한 말년만 못했겠습니까? 참으로 집사가 유념해야 할 바입니다. 저는 생각건대,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공도가 행해지지 않아 사관이 된 자가 완전한 재능을 쓰지 못해서라고 여겨집니다.
지난 번, 간신이 권세를 부려 조정에서 한 의논과 산림에서 한 말들을 모두 법으로 중상(中傷)했으니, 공도(公道)가 엄폐되고 없어져 결국 이 극도의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근래 조정이 청명하니 서울과 지방이 마음을 합쳐서 공도를 행해야 할 때입니다. 창도하는 방법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고 나약한 습속이 아직 다 제거되지 않았으니, 만약 공도를 위에서 한 번 창도하여 그 선봉을 씩씩하게 하고 그 기운을 길러 아래에 책려(責勵)한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 감동을 받아 반드시 흥기하는 자가 반드시 심하게 있을 것이니, 사관이 된 자가 마음이 공도에 순수하여 위언(危言)을 자임하는 것으로 다툴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도를 어찌 행하기 어려우며 완전한 재능을 어찌 만들기 어렵겠습니까?
학문은 천인(天人)의 이치를 관통하고 도(道)는 고금을 갖추어 성덕(盛德)을 형용하고 치화(治化)를 드러나게 한 것은 옛날의 사관이니 지금 유독 그런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편언척자(片言隻字)에 영욕(榮辱)이 관계되어 간사한 사람은 이미 죽은 뒤에도 베고, 숨은 덕의 그윽한 광채를 드러내는 것이 옛날의 사관이었으니 지금 유독 그런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익으로 마음을 괴롭히지 않아 차라리 한 때 죄를 얻을지언정 만고(萬古)의 청의(淸議)에 죄를 얻지 않게 하는 것이 옛날의 사관이었으니 지금 유독 그런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대체로 그런 뒤에 사관이 된 자가 모두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어 호오(好惡)가 시비(是非)가 왜곡되는 바가 없고 사정(邪正)과 곡직(曲直)이 다 드러나지 않음이 없어서 도깨비와 신간(神奸)이 신우(神禹)의 솥에서 스스로 도망칠 수 없을 것입니다. 야사(野史)가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어찌 재능을 가진 사관 중에 그런 적임자가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집사의 물음에 제가 이미 앞에서 대략 진술했습니다만 편(篇) 끝에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체로 사관의 재능은 필수적으로 이 세 가지를 겸비해야 하는데, 세 가지 중에 또한 학식을 근본으로 삼으니, 학식이 이미 지극하면 재능과 절개는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옛날 선비를 양성함에 있어서 그 집에 있을 때에는 여사(閭師)와 족사(族師)가 그 선악을 써서 표지하였고, 성장하여서는 당정(黨正)이 또 써서 이목이 무젖는바가 항상 여기에 있으므로 평소에 모두 선을 사모하고 악을 두려워하여 숙특(淑慝 선악)을 분별했습니다. 사도(司徒)에게 올려 조정에 나아감에 이르러서는 더욱 애써 노력하여 지공의 도를 힘쓰므로 사관의 책무를 맡기니 재능과 덕이 완전히 갖추어져 붓을 잡을 때 사곡(私曲)의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 이 도가 이미 폐지되어 대의(大義)가 있는 바를 돌아보지 않고 일신의 호오(好惡)만을 따라 각각 본 바를 고집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니, 번잡한 것은 박학다식에만 힘쓰고 간약한 것은 또한 간단히 해치우는데서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 주관을 엄칙하는 것이 결여되었는데도 당시에 꺼려서 쌀을 청하여 금을 받는 꾸지람이 종종 있으니, 진실로 옛 제도가 회복되지 않으므로 인해 사관이 된 본분을 잃은 것입니다.
아! 사관에 대해서 말들 하지만 문장이 뛰어난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세 가지 장점을 겸비하되 학식으로 근본을 삼고 공도로 마음을 삼아야 하니 당대 사관이 된 홍유(鴻儒)에게 깊이 바람이 있습니다. 삼가 대답합니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정사가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니, 전조(銓曹 이조와 병조의 합칭)의 환로가 맑지 못하고 학교에서 인재를 양성함이 밝지 못하며 군졸이 위축되는 폐단이 날로 심해진다.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신은 듣건대, 성명(聖明)한 제왕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다스리는 대본(大本)이 있었고 다스리는 대용(大用)이 있었으니, 다스리는 대본은 마음에 있고, 다스리는 대용은 정사에 있습니다. 도가 마음에 있으면 다스림이 수립되고, 도가 정사에 통달되면 다스림이 행해지니, 진실로 도를 떠나 마음에 있을 수 없고, 또한 마음을 버리고 정사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 마음으로 모든 변화에 대응하는 주체를 삼고, 이 정사로 시세를 따라 사곡된 것을 바로잡는 도구로 삼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다스려져 끝내 난리 때문에 망하는 화가 없을 것이니 그 폐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고 천고에 으뜸가는 자질로 그지없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정성을 더하여 마음에 제왕의 마음을 두고 다스림에 제왕의 다스림을 이었으니 그 시사(時事)에 대략 염려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만 오히려 정사가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는 것을 걱정하여 위로 삼대로 부터 아래로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에 이르기까지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폐단을 구하는 대책을 듣고자 했습니다. 신이 일찍이 밭 가운데 엎드려 있었지만 하루도 전하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처럼 정중한 청문(淸問)을 받드니, 감히 마음 속의 생각을 숨김없이 다 드러내어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성책왈 제왕지정(聖策曰帝王之政)’부터 ‘하법지폐이연야(何法之獘而然也)’까지를 읽었습니다. 신이 들으니,《주역》에 말하기를 “군자가 이를 거울삼아 길이 마쳐서 떨어짐을 안다.”라고 했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을 통한 걱정거리입니다. 대체로 한 대(代)가 망하면 반드시 한 대의 정사가 있으니, 그 규모와 제도가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처음 만약 만세에 전할 만하고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면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세변(世變)이 서로 바뀐 것이 아니라 이세(理勢)에 당연한 것이니, 지키는 데 피곤하게 여기는 자는 적임자가 아니니 제왕의 도를 항상 지킬 수 없습니다.
신이 삼대가 융성했을 때를 살펴보니, 그 임금은 우(禹), 탕(湯), 문(文), 무(武)였고, 그 신하는 익(益), 이윤(伊尹), 주공(周公), 소공(召公)이었습니다. 강구(講求)한 것이 훌륭한 계책이 아님이 없었고, 규획(規畫)한 것이 좋은 정사와 교육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도 진실로 의논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어찌 폐단이 있는 정사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멀리 말세의 임금에 이르러 그럭저럭 하면서 소홀히 하여 나태하고 활기가 없어 우, 탕, 문, 무의 마음으로 우, 탕, 문, 무의 정사를 행하지 못하니, 전형(典刑)이 뒤집혀 폐단이 생겨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군(嗣君)이 선왕의 마음을 항상 지켜 오래 전해져도 폐단이 없다면 법만 가지고는 저절로 행해지지 않아 마침내 난망(亂亡)에 이를 것이니 개탄스러운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래로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서부터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비록 한 두 임금이 있어서 자품이 고상하고 계획이 주밀하여 의도(儀度)를 창립하고 치구(治具)를 아름답게 꾸몄으나, 시서(詩書)를 어찌 일삼았겠으며, 선정(善政)이 전해짐이 없었으니, 규문(閨門)의 참덕(慙德)이 대본(大本)을 이미 잃어 구장(舊章)을 가볍게 바꾸어 민생을 잔인하게 흔들었습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마음을 삼되 제왕이 도를 체득한 마음이 아니고, 그 정사를 그대로 정사를 하되 제왕이 마음을 둔 정사가 아니어서 그 수통(垂統)하는 처음에 이미 그 근본이 없었으니, 더구나 후사가 선리(善理)를 다시 변화시켜 때에 따라 현혁할 합당한 자를 바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난망(亂亡)이 서로 찾아드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도 반드시 신에게 물은 것은 신의 배운 바의 정조(精粗)를 보고자 해서입니다. 신이 전하께 바라는 것은 또한 삼대의 법 받고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를 거울삼았으면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마음을 두어 그 정사를 잘 했으면 합니다. 신이 삼가 ‘성책왈 아조(聖策曰我朝)’부터 ‘부지관어흥망여(不至關於興亡歟)’까지를 읽었습니다. 신이 삼가 우리 국가를 살펴보니,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집안을 이루고 나라를 이룬 성심(聖心)으로 재량하여 일대의 다스림을 정하고, 열성조를 계술하여 정치를 하는 도구로 삼아 모두 정도로 인도하고 조금도 결점이 없었으니,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운 뜻으로 주관(周官)의 법도를 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는 깊고 명철하고 문채나고 밝으시며 온화하고 공손하고 성실하고 독실함으로 기미를 연구하여서 밝아 일이 허술함이 없었고,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정신을 가다듬어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도록 도모했으니, 마땅히 일을 조치할 때 행동이 마땅함을 잃음이 없고, 정령을 시행할 때 폐단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래에는 이음(吏蔭)으로 잘못 선발되어 사로(仕路)에 용비(庸鄙)한 부류가 많고, 교훈이 마땅함을 잃어 학교에 사유(師儒)의 임무가 넓으며, 병졸은 훈련을 아니하여 군정(軍政)이 허술한 걱정이 있어서 정사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지극히 형용하여 성상께서 하문하는 수고를 끼쳤습니다. 세 가지 폐단은 반드시 온 원인이 있으니, 어찌 전하께서 다스리는 도가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렇겠습니까? 풍교를 받들어 덕화를 펴는 사람이 잘 봉행하지 못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놓치고 구하지 않는다면 폐단이 장차 어떻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곤궁함에 처하여 비록 조정의 의논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만, 삼가 신이 참람되게 백집사(百執事)의 말단으로 폐단을 구하기 위한 대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가 애초에는 대개 일찍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만, 법이 행해진 지가 이미 오래됨으로 봉행함에 있어서 쓸 사람을 놓쳐서 그 진실이 없어져 끝내 이런 폐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먼저 폐단이 일어나는 이유를 아뢴 뒤 그것을 구하는 술책을 언급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사로(仕路)로써 말한다면, 옛날에 선비를 취할 때 서(序)에서 학(學)에 올리고, 학에서 사도(司徒)에 천거했으니, 하루아침에 올리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이 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집에서 닦아 나라에 적용하니,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 성대하게 배출되어 온갖 직책에 포진되어 한 사람에게만 아첨했습니다. 우리 조선도 선비를 취하는 법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니, 이과(吏科)의 법은 보거(保擧 보증 천거)의 예(例)이고, 문음(門蔭)의 법은 세록(世祿)의 뜻입니다. 또 경서(經書)를 강(講)하여 시험을 치른 뒤 벼슬을 허락했으니, 이는 옛것을 배워 관(官)에 들어가는 뜻입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다 보니 폐단이 없을 수 없었으니, 혹은 편지에 기대기도 하고, 혹은 인친(姻親)을 매개하기도 하여 반 줄의 글도 모르는 자가 그 반열에 참여하여 이로써 낭원(郞員)을 맡고 이로써 수령을 맡아 국면(局面)에 닥쳐서 일을 다스리는 것이 번잡할 뿐입니다. 학문이 넉넉하면 벼슬하는 것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도에 있어서 어디에 해당되겠습니까?
학교로써 말하면 옛날에 가숙(家塾), 당상(黨庠), 술서(術序), 국학(國學)에 한 사람도 가르치지 않는 사람이 없고, 한 곳에도 학교가 없는 곳이 없었으며, 사표(師表)의 임무는 모두 그 적임자를 얻었습니다. 우리 조선에도 교양(敎養)의 법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으니, 서울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이 있고 지방에는 주현(州縣)에 이르러 또한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교도(敎導)하는 관원은 또한 자주 과거를 치러서 경전에 밝은 사람을 택했으니 책임의 방도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다보니 폐단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열읍에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는 모두 용렬한 부류로 학문의 방도를 알지 못하고 이익만 노리는 계책을 품었으니, 심지어 이름만 교훈이지 구두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고비(皐比 스승의 자리)의 위에 앉아서 문난(問難)의 책임을 감당할 것을 바라겠습니까? 이 때문에 속수(束脩)에 뜻을 둔 자가 함장(函丈)의 호칭을 부끄럽게 여기고,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린 자는 고협(鼔篋)의 반열을 부끄럽게 여기니, 그 인재를 교육하여 덕을 기르고 인재를 고무시키는 뜻에 있어서 어디에 해당되겠습니까?
군정(軍政)으로 말하자면, 군사를 농사에 붙여 무예를 익히게 하는 일은 옛날의 법도인데, 이 제도가 이미 폐단이 되어 병사들이 피곤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의 힐융(詰戎)에 대한 방도가 지극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물에는 선군(船軍)이 있고, 뭍에는 보기(步騎)를 두어 비상시에 미리 대비하는 방비〔陰雨之防〕와 앞날을 견고히 하는 준비가 주밀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다보니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만호(萬戶) 중에 군사를 통솔하는 임무를 전담하는 자는 침탈(侵奪)하는 일만 알고 애호(愛護)하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항오(行伍)를 편명(編名)한 자는 장정은 없애고 액수만 두어 십상팔구(十常八九) 수령이 된 자는 인보(隣保)를 구분하지 않고 양천(良賤)을 따지지도 않고 때에 닥쳐 군적(軍籍)을 메워 책임을 면하는 바탕을 삼으니, 어찌 도창(刀鎗)의 쓰임을 알며 어찌 궁마(弓馬)의 일을 알겠습니까? 병사들이 야위어 초췌한 모습은 오늘보다 더 심한 적이 없습니다. 혹 풍진(風塵)의 경계가 있어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일어난다면 장차 어떻게 써야 할 지 모르겠으니, 국가와 족병(足兵)의 도리에 있어서 어디에 해당되겠습니까? 신이 그러므로 말하기를 “그 폐단을 구하려고 하면 마땅히 폐단이 이르게 된 연유를 생각한 뒤에 그 걱정을 구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앞에서 세 가지 폐단을 아뢴 것은 모두 전래가 오래된 폐단에 있으니, 적임자를 얻는 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 적임자를 얻어 전선(銓選)의 책무를 맡기면 반드시 최우보(崔祐甫)가 관직에 제수되니 8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흡족하게 여긴 것처럼 할 수 있으니, 조정에는 다투어 나아가는 버릇이 없고, 재야에는 어진 이를 빠뜨려 두었다는 탄식이 끊어져 사로가 맑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적임자를 얻어 교도의 책무를 맡기면 반드시 호안정(胡安定)이 호학(湖學)에 교수가 된 것처럼 할 수 있으니, 학교에 체용(體用)이 있어서 스승이 자리에 기대어 꾸짖는 일이 없고 인재를 양성하는 아름다움이 성대하게 있어서 교양이 극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적임자를 얻어 군려(軍旅)의 일을 맡긴다면 반드시 이목(李牧)이 조세를 거두어 병사를 대접하여 앞 다투어 쓰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할 수 있으니, 이미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없고 모두 사수(死綏)의 뜻을 품어 군액(軍額)이 날로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만 폐단을 구하는 말단의 도구이고 정치를 하는 하나의 단서일 뿐입니다. 정치를 하는 큰 근본 같은 것은 전하의 일심에 달려 있으니, 전하의 일심이 정치를 내는 큰 근본이고 정치를 하는 근원입니다. 근본이 가지런하면 그 말단을 헤아릴 필요가 없어 허명(虛明)하고 깊으며 진실로 이미 심원하게 조달(條達)되었고, 근원이 맑으면 그 흐름을 부딪치게 할 필요가 없어 진실로 이미 조용한 듯 티끌이 없어졌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그 마음을 두어 다스림을 내는 근원을 맑게 하며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는 실상을 미루어 교화를 밝혀서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한다면 사람들이 조급하게 나아가는 생각이 없고 모두 자중하는 마음이 있어서 다투어 남의 아들을 헤치는 것으로 경계를 삼아 내가 이에 법을 만든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니, 사로(仕路)에 함부로 나아갈까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그 마음을 두어 다스림을 내는 근본을 맑게 하여 먼저 스스로 몸소 실행하여 스스로 스승을 얻어 성탕(成湯)이 이윤(伊尹)에게 배우고 한 명제(漢明帝)가 삼로(三老)에게 절한 것처럼 한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서 감동하여 흥기하는 자가 반드시 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교훈할 그 적임자를 얻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그 마음을 두어 다스림을 내는 근원을 맑게 한다면 군정의 책무를 맡은 자가 애양(愛養)하는 인(仁)을 우러러 체득하여 모두 어루만지는 마음을 품을 것이니, 고름을 빨아내어 은혜를 사고 높이 뛰고 용기를 팔고 병졸이 훈련하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망녕된 말로써 청문(淸問)의 만분의 일이나마 우러러 대답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편 끝에 다시 마음〔心〕 한 글자로써 그 여온을 다합니다.
옛날 동중서(蕫仲書)는 바른 마음으로써 만민의 근원을 바루고, 정이(程頤)는 근독(謹獨)으로 천덕(天德)의 근본을 통달했습니다. 참으로 인주(人主)께서 정신(精神)과 심술(心術)의 운행으로 비록 관정(官庭) 속에 숨어있더라도 부험(符驗)이 환하게 밖으로 드러나 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마음이 한결같이 발라 빈 거울과 평평한 거울 같다면 인재(人才)의 사정(邪正)과 정사(政事)의 가부(可否)가 투명하여 폐단이 없을 것이니 나머지는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임금의 마음이 한 번이라도 바르지 않은 적이 있으면 실을 풀지만 뒤엉키는 것과 같아서 일일이 고치더라도 이루 다 고칠 수 없습니다.
지금 염치(廉恥)의 도가 상실되어 뇌물로써 벼슬살이를 하고, 심지어 임명한 글이 채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물색(物色)을 먼저 정하니, 먼저 다스림을 내는 바탕을 엄하게 하여 전주(銓注)의 길을 맑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풍(古風)이 한 번 가니 사제(師弟)의 길이 상실되어 의리에 대한 학문이 강론되지 않고 공리(功利)에 대한 설이 날로 치성하여 선비가 경전을 펼치고 질문하는 일도 없고, 스승은 곳간만 축낸다는 기롱이 있으니 먼저 다스림을 내는 근원을 바르게 하여 군사(君師)의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도(公道)가 엄폐되고 없어져 채수(債帥)가 풍속을 이루어 병사의 고혈(膏血)과 군사의 기력(氣力)이 권문의 뇌물에 꼼짝달싹 못하니, 먼저 다스림을 대는 근본을 맑게하여 포저(苞苴)의 길을 막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와 같이 한다면 한 사람의 창도가 일국(一國)의 효과가 되고, 한 마음의 추거(推去)가 만화(萬化)의 근간이 되어 덕을 하는 대본(大本)이 수립되고 정치를 하는 대용(大用)이 행해질 것입니다. 오늘날의 치화(治化)는 삼대의 곤역(閫域)을 높이 끼고서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이도(泥塗)를 내려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몇 가지 일은 모두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 속에, 큰 덕은 화(化)를 돈후하게 하는 안에 포함되어 있으니, 성상의 생각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의 각 순서는 폐단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성상께서 계획을 부지런히 하고 묘당에서 계책을 내더라도 가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도는 만세에 이르도록 폐단이 없으니, 폐단이 생기면 도를 잃게 된다.〔道者 萬世之弊 弊者 道之失也〕”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신은 삼가 대답합니다.
[주-D001] 어진 …… 있다 : 《대학장구》전(傳) 10장(章)에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들을 추방하되 사방 오랑캐 땅으로 내쫓아 중국에서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니, 이것을 일러 오직 어진 사람만이 남을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미워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唯仁人 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 此謂唯仁人爲能愛人能惡人〕”라고 하였다.
[주-D002] 전모(典謨) : 전은《서경》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이며, 모는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등의 편을 가리킨다. 모두 제왕의 도리와 치국(治國)의 대도(大道)를 논했다.
[주-D003] 기린을 잡아 절필(絶筆) : 공자가《춘추》를 기술하면서 노 애공(魯哀公)이 기린을 잡은 대목〔獲麟〕에서 붓을 그쳤던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주-D004] 한유(韓愈) …… 있다 : 《창려문집(昌黎文集)》 〈답유수재론사서(答劉秀才論史書)〉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5] 유종원(柳宗元)이 …… 것 : 유종원이 한유에게 보낸 〈여한유논사서(與韓愈論史書)〉를 가리킨다. 유종원이 사책(史冊)을 짓는 일로 한유를 질책하였다.
[주-D006] 전오(典午) : ‘전(典)’은 맡았다는 말이고, ‘오(午)’는 말(馬)이니, 이것은 사마씨(司馬氏)의 사마(司馬)와 같은 말이다. 한나라 때의《사기》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주-D007] 손성(孫盛)이 …… 지었는데 : 진(晉)나라 사람으로, 사학가로 유명했다. 《진춘추(晉春秋)》, 즉《진양추(晉陽秋)》를 지었는데 말이 바르고 사리가 정당하여 대단히 양사(良史)로 일컬어졌다 한다. 《晉書 卷82》
[주-D008] 환온(桓溫)의 …… 없었고 : 동진(東晉) 시대의 권신(權臣)으로서, 서쪽으로 촉(蜀)을, 북쪽으로 부건(符鍵) 등을 정벌하여 내외(內外)의 대권(大權)을 독차지하였고, 벼슬이 대사마(大司馬)ㆍ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가 되어 남군공(南郡公)에 봉해졌는데, 이토록 위권(威權)이 높아짐에 따라 반역심이 생겨 끝내는 제(帝)를 폐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세우고서 은밀히 제위를 찬탈하려고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역시 병사하였다. 《晉書 卷98 桓溫列傳》
[주-D009] 주역에 …… 안다 : 《주역》54괘 뇌택귀매(雷澤歸妹)에 “상에 말하기를 ‘연못 위에 우뢰가 있는 것이 귀매이니, 군자는 이를 법 받아 마침을 길게하여 떨어짐을 안다.’ 하였다.〔象曰 澤上有雷 歸妹 君子以永終 知敝〕”라고 하였다.
[주-D010] 참덕(慙德) : 덕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데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서경(書經)》상서(商書)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성탕(成湯)이 걸(桀)을 남소(南巢)로 내치고 나서 참덕(慙德)을 느껴 ‘나는 후세에 나를 구실로 삼을까 두렵다.’ 했다.”라고 하였다.
[주-D011] 관저(關雎)와 …… 뜻 : 《근사록(近思錄)》권8 〈치체류(治體類)〉에 나오는 정호(程顥)의 말이다. 〈관저〉는 주 문왕(周文王)의 후비를 찬양한 시이고, 〈인지(麟趾)〉는 문왕의 훌륭한 자손을 노래한 시인데, 임금이 수신(修身)은 물론이고 먼저 문왕처럼 궁중 내부부터 시작해서 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도를 행해야만《주례(周禮)》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제도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주-D012] 깊고 …… 독실함으로 : 《서경》 〈순전(舜典)〉에서 순 임금의 덕을 표현하여 ‘심원하고 명철하고 문채가 나고 밝으며 온화하고 공손하고 미덥고 진실하였다.〔濬哲文明 溫恭允塞〕’라고 하였다.
[주-D013] 풍교를 …… 사람이 : 승류선화(承流宣化)는《한서(漢書)》권56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나오는 말로, 풍교(風敎)를 받들어 숭상하고 은택을 베풀어 백성을 교화하는 관원의 직분을 가리키는 말인데, 보통 방백(方伯) 등 지방 장관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주-D014] 학문이 …… 것 : 《논어》 〈자장(子張)〉에 “벼슬하면서 여유가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하고서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5] 속수(束脩) : 수(脩)는 육포(肉脯)인데, 속수(束脩)는 육포 열 조각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속수를 가져온 사람은 내가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束脩以上 吾未嘗無誨〕”라고 했으니, 옛날 제자가 스승을 뵐 적에 드리는 약소한 예물이다.
[주-D016] 고협(鼔篋) : 북을 쳐서 선비를 모으고 책 상자를 끌러서 책을 펴놓게 하는 것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학궁에 들어와 고협을 한다.”라고 하였다.
[주-D017] 비상시에 …… 방비〔陰雨之防〕 : 《시경》 〈치효(鴟鴞)〉의 “하늘에서 장맛비가 아직 내리지 않을 때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 모아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牑戶 今此下民 或敢侮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18] 앞날을 …… 준비가 : 《주역》 〈비괘(否卦)〉에 “그 망할까 그 망할까 하여야 포(苞)한 뽕나무에 매었다 하리라.〔其亡其亡 繋于苞桑〕”라고 하였다.
[주-D019] 족병(足兵) : 군사가 넉넉한 것을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 자공(子貢)이 정사를 묻자 공자(孔子)가 대답하기를 “양식을 풍족히 하고 병(兵)을 풍족히 하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다.〔子貢問政 子曰 足食足兵民信之矣〕”라고 하였다.
[주-D020] 사수(死綏) : 군사가 패하면 장수는 마땅히 죽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문공(文公) 12년에 “사마법(司馬法)에 장군은 수레에 오르는 끈을 잡고 죽는다.〔死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1] 고름을 빨아내어 : 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는다는 말로, 비굴하고 악착같이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행위를 뜻한다. 연저지치(吮疽舐痔)라고도 한다. 《莊子 列禦寇》
[주-D022] 채수(債帥) : 빚을 내어 뇌물로 바쳐 장수가 된 것을 말한다. 당 대종(唐代宗) 이후 정치가 부패하여 장수가 내관(內官)에게 수많은 뇌물을 바쳐야 벼슬을 얻었는데, 돈이 없는 자는 부잣집에서 돈을 꾸어 뇌물로 바치고 벼슬을 얻은 뒤에는 백성에게 수탈하여 그 이자를 갑절로 갚았으므로 채수라는 용어가 생겼다. 《唐書 卷171 高瑀列傳》
[주-D023] 포저(苞苴)의 길 : 선물을 싸서 관직을 청탁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4] 작은 …… 하는 : 《중용장구》제30장에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과 같고 큰 덕은 화를 돈후히 한다.〔小德川流 大德敦化〕”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25] 도는 …… 된다 : 한나라 동중서(董仲舒)가 한 말로,《한서(漢書)》 권56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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