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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선생 묘지명〔聾巖先生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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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4회 작성일 21-07-2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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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선생 묘지명〔聾巖先生墓誌銘〕

공의 휘는 모(某), 자는 모이니, 그 선조는 영천인(永川人)이다. 군소윤(軍少尹) 휘 헌(軒)이 처음 예안현(禮安縣)에 우거했으니 이가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 의흥 현감(義興縣監) 휘 파(坡)는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조부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 휘 효손(孝孫)은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중훈대부(中訓大夫) 인제 현감(麟蹄縣監) 휘 흠(欽)은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으니, 모두 덕을 숨기고서 낮은 벼슬을 하여 공에게 복을 끼쳐 주었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권씨(權氏)는 호군(護軍) 겸(謙)의 딸로 어릴 때 외가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에게 양육되었다. 모친은 어머니의 도리를 밝게 익히고 남편의 덕성과 짝하여 어진 이를 잉태하여 성화(成化) 정해년(1467, 세조13) 7월 29일에 공을 낳았다. 이날 밤에 신통한 꿈을 꾸었는데, 참판공(參判公)에게 고하기를 “적선(積善)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습니다.”라 했다. 꿈에서 깬 뒤 작은 아들을 낳는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따서 어릴 적 이름을 유경(有慶)이라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20세에 처음 향교에 가서 인도하고 깨우쳐 주지 않아도 날로 개익(開益)되는 바가 있었다. 이때 김전(金詮)이 예안 현감으로 있었는데 그의 그릇이 특이한 점을 크게 칭찬하였다. 을묘년(1495, 연산군1)에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했고, 관시(舘試)를 치러 화려한 명성이 더욱 퍼졌다.

무오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고, 신유년(1501)에 한림(翰林)에 뽑혀 진언(進言)하기를 “사관(史官)의 임무는 반드시 임금의 행동을 쓰는 것이니 가까운 위치에 가서 임금의 말씀을 자세히 들을까 합니다.”라고 하고, 모든 시정(時政)을 다 직서(直書)하고 꺼리는 일이 없었다. 17년에 사서(司書)로 옮기고,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어서 동궁(東宮)을 보양하는 방법과 서연관(書筵官)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일을 면대(面對)해서 잘못을 아뢰다가 사체(事體)를 잃은 것이 죄가 되어 안기역(安奇驛)에 유배(流配)되었다.

무오년 이후부터 연산(燕山)이 음학(淫虐)이 날로 심하여 툭 하면 죽이니, 조정의 신하들이 머리를 움츠렸지만 공만 언성을 높여 직간하고 붓을 휘둘러 자못 풍재(風栽)가 특출하였다. 이에 말을 다한 것을 추구(追仇)하여 옥에 70일 동안 구속되었다가 마침 죄수를 죽일지 석방할지 처리를 살피다가 어묵(御墨)이 공의 이름에 찍혀 석방되어 배소(配所)로 오게 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도와주었으니, 운명을 주도할 권한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해 반정(反正)이 되어 은혜가 내려 전적(典籍)에서 호부 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옮겼다가 얼마 안 되어 사헌부 지평에 올라 일을 만나면 강개하여 권세에 흔들리지 않으니 모두 공평하고 두려워하였다.

정덕(正德) 3년(1506, 중종1)에 형조 정랑으로 영천 군수(永川郡守)를 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정치를 청렴하고 공평하게 하여 이민(吏民)의 마음을 얻으니, 안찰사가 그를 최고라 칭송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군기 첨정(軍器僉正)이 되고, 곧 사간(司諫)으로 옮겨 직책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밀양(密陽) 수령으로 나가니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하였으나 문서를 구분하여 지체한 것을 없애니 두어 달 만에 송사가 정리되어 지금까지도 선치(善治)했다 한다.

11년에 또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나가니, 풍속이 민업(民業)에 게을렀다. 그래서 비로소 영(令)을 내려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게 하며 몸소 사람의 과업(課業)을 독려하여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다. 이듬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부신(符信)을 바꾸어 안동으로 가게 되니 백성이 다 길을 막고 붙들고 부르짖었다. 안동에 와서 이익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하니 민속(民俗)이 화합되고 풍년이 들어 이에 온 경내 남녀를 모아 양로회(養老會)를 베풀어 양친(兩親)을 모셔와 내외연(內外宴)을 주관하니, 사방 이웃이 구경하여 감탄하고 문사(文士)들이 노래로 축수 하였다. 경록(慶錄)에 갖추어져 있다.

16년에 체직되어 사복시 정이 되고 집의(執義)에 이배되었다. 얼마 뒤에 성주 목사가 되니, 한 달 만에 교화가 행해져 아름다운 칭송이 넘치니, 표리(表裏 의복)를 하사(下賜)하고 유서(諭書)를 내려 포상하였다. 5년에 사성(司成)에 제수되었다가 보덕(輔德)으로 옮겼다. 때에 인종(仁宗)이 동궁에 있었는데, 선한 일을 진달하고 가르침을 드려 보익(補益)이 많았다. 6년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고쳤다. 진해(鎭海) 왜선(倭船)에 관한 일에 차출되어 국문(鞠問)하고 돌아올 무렵에 병조 참지에 특진되고, 조정에 돌아와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겼다. 또 대구 부사가 되기를 간청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연로한 부모로 인해 사직하였다. 8년에 평해 군수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영천 군수로 바꾸었는데, 한해 남짓 지나 정사가 이루어져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충족되어 바로 그 채권을 모두 불태우고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다.

10년에 어머니의 상을 만나 60세가 넘었는데도 울며 사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복(服)을 마친 뒤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고 얼마 안 있어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겼다. 가을에 근친하여 향중(鄕中)의 노인을 모아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공이 자제의 반열을 따른 것을 영광으로 삼아 그림을 그려 병풍을 만들었다. 13년에 다시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자세하고 마땅하였다. 또 어버이를 위해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어 순박(淳朴)을 숭상하여 옛 풍속을 일으키니, 당시 사람들이 경주에 처음 있는 정치라 하였다.

15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겨울에 특별히 가선(嘉善)을 제수(除授)하고 본도 감사를 삼으니, 어버이 연세가 97세인데도 오히려 평안히 집에 계셨다. 공이 외임(外任)에서 늙어서 열읍(列邑)의 병폐를 고루 알아 해(害)가 되는 것을 거의 다 제거하였다. 16년에 또 아버지 상을 당하니 71세의 나이에도 오히려 예절대로 여막(廬幕)에 거처하셨다. 복을 마치고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낭관(郎官)을 거쳐 공경(公卿)에 이르기까지 세 번이나 추관(秋官 형조의 별칭)에 들어가 절충하여 죄를 감해 주니, 동료들이 그의 명철함을 탄복하였다.

19년 가을에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니, 좌상(左相) 홍언필(洪彦弼)이 아뢰기를 “모(某)는 조정에 노성(老成)한 신하이니 머물러 두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불러보고서 간절히 효유하니 공이 부득이 휴가를 청하고 돌아왔다. 그 해 겨울에 호조 참판으로 옮겨 호조의 일을 익혀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하기에 힘썼다.

21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니, 오직 도서(圖書)와 화초(花草) 뿐이었다. 배 삯을 주고 한강을 따라 지나니 조정을 비우고 나와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거리를 메웠다. 재상 김안국(金安國)이 첫째 증별시(贈別詩)를 짓고 명재상들이 화답을 붙여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 《남행록(南行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22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특진되니 전문(箋文)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이 되지 않았다. 23년 겨울에 중종대왕이 승하 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달려가 곡(哭)도 하지 못했다.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글을 올려 죄를 기다리고 인하여 처음을 삼가는 도(道)와 사람을 쓰는 요령을 아뢰니, 포상(褒賞)으로 자헌(資憲)을 제수했다. 이어 승하하였다는 말을 들었지만 두 번이나 국상(國喪)에 달려가지 못하니, 신하의 절의(節義)에 크게 흠이 된다며 통한(痛恨)을 마지않았다. 또 물러나와 있었는데 승진되니, 짐을 진 듯하여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정의 재신(宰臣)처럼 음식을 공궤했다.

28년에 정헌(正憲)으로 승진시키고 음식물을 하사했으니 재상 김광준(金光準)이 염퇴(恬退)를 포상하도록 하는 계(啓)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은혜롭게 기르는 것을 사사롭게 할 수 없다 하고 주찬(酒饌)을 극진히 마련하여 향중의 노인을 대접하고, 또 구로회를 만드니 읍인(邑人)이 모두 발돋움하여 구경하였다. 그 해 가을에 나이가 많으므로 또 숭정(崇政)으로 올렸다.

33년 봄에 정 대간(鄭大諫)이 늙고 덕이 높은 사람을 맞이하여 고문(顧問)에 갖출 것을 청하니, 교서(敎書)에 크게 포상하고 편안한 수레로 올라오게 하였다. 그러나 공은 은명(恩命)이 분수에 넘친다하여 부끄러움을 느껴 눈물을 흘리고 허겁지겁 달려가 사은(謝恩)을 하려 하니 모든 아들이 그의 늙음을 안타깝게 여겨 간함으로 그만 두고 곧바로 전문(箋文)으로 간곡히 사례하고 인하여 시무(時務)의 긴급을 상소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포유(褒諭)하였다. 명년 을묘 5월에 학질(瘧疾)로 환후가 점점 더 심해졌으나 정신은 오히려 밝아져 자녀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나이와 벼슬이 이미 지극하고 아손(兒孫)이 가득하니 죽어도 유감이 없다. 너무 울지 말고 장사(葬事)는 석 달만 하되 일은 되도록 간략히 하라.”고 하고,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6월 13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9세였다. 상이 놀라고 애도하며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특별히 하였다.

공은 자질과 성품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났으며 풍채(風采)가 맑고 엄하였으며 표리가 환히 통하여 얼음 병〔氷壺〕과 물거울〔水鑑〕 같았으며, 몸가짐이 간략하고 남을 너그럽게 대접했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영명(英明)하고 과감하게 결단하였으며, 물욕(物慾)을 나타내지 않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한 털끝만큼이라도 취하지 아니하니, 사람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을 요구하지 못하였다. 비록 학문은 전수하지 않았으나 행실은 의(義)에 부합되고 시(詩)는 뜻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청경(淸警)하여 전할 만하였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조금도 나태함이 없었고, 한가롭게 집에 있을 때에는 법도가 있어서 아들은 예로 가르치고 아래 종들에게 까지도 은혜로운 마음을 다했다. 의복과 음식을 간소하게 하고, 거처하는 집을 가까스로 구비하였으며, 비용은 남음이 없어서 항상 자주 양식이 떨어졌다. 50년 동안 벼슬살이를 했지만 노비(奴婢)를 더하지 않았고, 10여 년 동안 외함(外銜)을 가졌지만 봉록을 사사로이 받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였다. 고향에 거처하는 날에는 몸소 부역과 세금을 솔선했고, 균역(均役)을 의논해 정하여 폐읍(敝邑)이 많이 힘입어 소복(蘇復)되었다. 집에 오는 사람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귀천(貴賤)과 친소(親疎)의 사이가 없었고, 남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도와주고 지나간 허물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사람이 모두 기뻐하며 존경하고 받들 줄을 알았다. 조정에 나가서는 공무(公務)를 봉행(奉行)하여 지성으로 직책을 다하였으니, 언론과 풍절(風節)이 볼만한 것이 많았다. 여덟 고을을 두루 맡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고, 가는 곳마다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고 영재를 기르니 선비가 다투어 모여들어 드러난 사람이 많았다. 공이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을 간청했으니 한 해라도 조정에서 지내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늙은 부모님을 영화롭게 봉양하여 30년이 넘도록 맛난 음식으로 받들었으니,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고인(古人)도 견줄 사람이 없었다.

본래 계산(溪山)을 좋아하고 평소 벼슬에 뜻이 없어 명농당(明農堂)에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려 고상한 취지(趣旨)를 부쳤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근력(筋力)과 이목(耳目)이 많은 연세에도 쇠하지 않아 학림(鶴林)의 놀이를 취하고 향락(香洛)의 모임을 모방하였으니, 정사(精舍)ㆍ소각(小閣)ㆍ병암(屛庵)ㆍ임강사(臨江寺)가 모두 한가롭게 수양하여 늙음을 마치던 곳이다. 애일당(愛日堂)을 중수(重修)하여 해마다 채색옷을 입고 춤을 추며 긍구당(肯構堂)을 수선하여 자손에게 전하고 절후가 덥고 시원함에 따라 마음 가는 대로 꽃도 가꾸고 대나무도 심으며 서책을 펴고 향불을 피우니, 쓸쓸하게 평민과 같은 생활을 하니, 사람들이 그의 귀중함을 몰랐다. 그 나머지 용두사(龍頭寺)와 월란대(月瀾臺)의 같은 10여 곳을 지팡이를 짚고 보행도하고 가마를 타기도 하며 산놀이 도구를 메고 꽃을 뜯고 버드나무를 구경하며 길을 물어 중을 찾아 소요하며 돌아올 줄을 잊어버리고 한포기 풀과 하나의 돌도 모두 감상하였다. 또 달밤에 배를 타고 안개 속에 도롱이를 두르고서 〈적벽가(赤壁歌)〉와 〈어부가(漁父歌)〉를 불러 멀리 속세를 뛰어 넘어 신선의 흥이 있어서 바라보면 신선 중의 사람 같았으니, 거의 14년 동안 이런 생활을 하였다. 마침내 명예와 절개가 둘 다 보전되었고 임금의 은혜도 쇠하지 아니하여 일대(一代)의 청명(淸明)을 누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곽 분양(郭汾陽)과 비교하였다.

살고 있는 분천(汾川)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에 도달되는데 벼랑과 숲이 빼어나고 천석(泉石)이 아름다우니, 소윤공(少尹公)부터 자리를 잡아 대대로 여기에 살았다. 공의 깨끗한 흉금도 여기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바위 곁에 애일당이 있는데 여울 소리가 메아리를 쳐서 귀머거리로 이름하여 이 때문에 ‘농암 야로(聾巖野老)’라 불렀다. 그 세상을 근심하는 뜻은 늙어서도 더욱 돈독하여 잘못된 정사를 들으면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병이 위중할 때 왜구(倭寇)가 호남을 침략하였다는 보고가 있자, 공이 놀라서 일어나 말하기를 “조정에 자주 변고가 생기면 천재(天災)가 견책을 보이니, 이런 일이 있을 줄 안지가 오래되었다.” 하고, 인하여 오열하여 목이 쉬었다. 임종할 아침에도 모든 아들이 하무(夏務)를 지체할까 걱정했다.

부인 권씨(權氏)는 충순위(忠順衛) 효성(孝誠)의 딸이다. 아름다운 명성이 있고 선조의 훌륭한 공덕을 품어 6남 1녀를 낳았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은 석량(碩樑)이니 훈련원 정(訓鍊院正) 임찬(任纘)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은 수사(秀士) 문량(文樑)이니 글을 잘하였으나 낙방하여 과거를 즐기지 않았으며, 충순위(忠順衛) 이승손(李承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다음은 현감 희량(希樑)이니 내금위(內禁衛) 황정(黃珽)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다음은 부사(府使) 중량(仲樑)이니 무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갑오년에 문과 급제하였으며, 습독(習讀) 반사형(潘士泂)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다음은 현감 계량(季樑)이니 김옥견(金玉堅)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다음은 진사 숙량(叔樑)이니 충의위(忠義衛) 이복신(李復新)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모두 선을 좋아하고 화락하였으며 인물이 출중하였다. 딸은 해주 판관(海州判官) 김부인(金富仁)에게 시집가서 4남을 낳았다. 수사(秀士)의 아들은 학수(鶴壽)이고, 장녀는 황준량(黃俊良)에게, 다음은 금응선(琴應先)에게 시집갔다.

공이 또 측실(側室)이 있어 아들을 낳았으니, 윤량(閏樑)은 의과 주부(醫科主簿)이고, 다음은 연량(衍樑)이다. 두 사람이 의약에 정통하고 어렵(漁獵)을 잘해서 만년의 봉양에 이바지했다. 8월 22일에 용두산(龍頭山) 남쪽 도곡(道谷)에 장사했으니, 선묘(先墓)를 따랐다. 제빙고(諸聘孤)가 저 황준량(黃俊良)으로 하여금 묘도(墓道)에 명(銘)을 짓게 하였다. 외람되게 은혜를 받아 정이 부친 보듯 했으니, 문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 대강만 대략 글 못한다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대강 그 큰 절목만 기록하여 산이 무너지는 슬픔을 부치니, 그 남은 운치 같은 것은 향린(鄕隣)을 교화(敎化)하기에 충분하고 끼친 풍채는 후세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하니, 태사씨(太史氏)가 붓을 적셔 특별히 써서 후세에 빛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영천 이씨는 / 永之李
뿌리가 쌓이고 쌓여 / 根積累
공에게서 귀함이 시작되었네 / 貴自公始
어두운 시대를 지나 / 歷昏否
성군의 치세를 만났으니 / 遭聖理
험하고 평평함이 일치되네 / 險夷一致
뜻을 받들어 효도하고 / 孝養志
자신을 다하여 충성하니 / 忠盡己
경사가 여러 후손에게 미치네 / 慶衍錫類
영리를 버리고 / 屣榮利
산수를 즐기며 / 樂山水
만년의 절개를 잘 보존했네 / 晩節能事
달존이 구비되고 / 達尊備
오복이 모였으니 / 五福萃
평생 영화로웠지만 죽음은 애통하네 / 榮生哀死
산은 닳아지고 / 山可砥
비석은 훼손할 수 있지만 / 石可毁
훌륭한 명성은 떨어지지 않으리 / 大名不墜


[주-D001] 채권을 모두 불태우고 : 풍환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이었는데, 맹상군의 심부름으로 설(薛) 땅의 빚을 거두러〔收債〕 갔다가 군명(君命)을 핑계하고 백성들이 변상(辨償)해야 할 채권(債券)을 모두 합하여 불에 태워버렸으므로, 뒤에 맹상군이 궁지에 몰려 설(薛)로 돌아갔을 때 백성들이 대환영하였다.

[주-D002] 구로회(九老會) : 농암(聾巖)이 1519년 안동 부사로 봉직했을 때 부(府) 내의 남녀, 귀천을 막론하고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청사마당으로 초청하여 성대한 양로연을 베풀었다. 이 양로연을 안동의 옛 이름인 ‘화산(花山)’에서 따와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고향에서 70세 이상 노인을 초청했는데, 마침 그 숫자가 아홉이고 애일당(愛日堂)에 모였기에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명명했다.

[주-D003] 채색옷을 …… 추며 : 나이 들어서 나이 든 부모님께 효도를 다한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효자인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어린애처럼 채색옷을 입고 부모 앞에서 어린애 같은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4] 곽 분양(郭汾陽) : 당 숙종(唐肅宗) 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을 평정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진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킨다.

[주-D005] 산이 무너지는 슬픔 : 공자(孔子)가 자신이 별세할 꿈을 꾸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고 문 앞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들보가 부러지겠구나. 철인이 죽게 되겠구나.〔泰山其頹乎 樑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이후로 태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짐은 곧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주-D006] 달존(達尊)이 구비되고 :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왕을 만나지 않는 것에 대해 경자(景子)가 따지자 맹자가 답한 내용에 “천하에 달존(達尊)이 세 가지인데, 작(爵)과 연치(年齒)와 덕(德)이다. 조정에서는 덕만 한 것이 없고, 고을에서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 세상을 보도(輔導)하고 백성을 기르는 데는 덕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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