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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策問〕 묻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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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89회 작성일 21-07-2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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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策問〕

묻노라.

고인이 학문을 하던 차례는 덕을 닦아 도를 이루는 큰 단서이니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한다.”라는 두 가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라도 빠트리면 학문이 아니니 진실로 치우쳐서 폐해서는 안 된다. 존심(存心)하는 요점과 치지(致知)하는 방법도 본말과 선후를 말로 할 수 있는가?

당우(唐虞) 삼대(三代)의 시대에 사람은 선비의 행실이 있고 집집마다 봉할 만 했으니, 이른바 사도(司徒)의 직분과 상서(庠序)를 세워 무슨 책을 강론하며 무엇을 가르쳤는가? 또한 두 가지 뜻이 그 사이에 깃들어 있는가? 궐리(闕里)의 문에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차원이 높은 이야기를 해 주거나 낮은 이야기를 해 주지만 각기 그 재능을 따른다. 그러나 도덕(道德)을 증진(增進)하고 학업(學業)을 닦는 데에, 어찌 지향(指向)할 만한 문호(門戶)가 없겠는가? 성손(聖孫)이 입언(立言)함에 두 가지를 끌어내어 만세(萬世)에 보여줌에 또한 받은 바가 있는가? 안자(顔子)는 거의 가까웠고, 증자(曾子)는 그 종지를 얻었으니, 박약(博約)의 뜻과 충서(忠恕)라는 말은 두 가지 가르침에 합치함이 있는가?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맹자는 재기가 높아 배움에 의거할 곳이 없다”, 했으니, 성인이 되는 공부에도 혹시 특별한 지름길이 있는가? 한(漢), 당(唐) 이래로 옛 것을 상고하여 경전을 연구한 사람이 없지 않겠지만 여기에 종사한 사람이 또한 있는가?

염락관민(濂洛關閩)이 이 도를 천명하여 묘하게 계합하여 손바닥 들여다 보듯 명백하여 멀리 적통(嫡統)을 이었다. 그러나 가르침을 베푼 것에 각기 한 가지 길로 가서 들어가는 길이 달랐으니, 또한 두 가지 뜻이 서로 드러나는가?

순수한 귀산(龜山) 양시(楊時)와 독실한 상채(上蔡) 사현도(謝顯道)가 친히 대면하여 가르침을 받아 조예(造詣)가 이미 깊었으나, 끝에 가서 어떤 사람은 선학(禪學)으로 들어갔으니, 입각(立脚)한 차이가 어느 곳에 있는가? 육씨(陸氏)의 학문은 오로지 간이(簡易)하여 힘써 덕성(德性)을 높였지만 지나치게 높고 이론을 세워 회옹(晦翁 주자)에게 배척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오초려(吳草廬)가 말학(末學)의 폐단을 징계하고 존심(存心)의 설을 주장했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강서(江西)의 기습을 면하지 못했다”라 했으니, 그 설이 그러한가?

우리 동방은 문헌(文獻)이 많은 나라로 불리지만, 구주(九疇)의 가르침이 대대로 전하지 않으니 그 가르침은 무엇인가?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5백년간에 어찌 호걸다운 선비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끝내 이교(異敎)를 배척하여 대도(大道)를 밝히고 성리(性理)의 깊은 이치를 드러내지 못했으니, 어쩌면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에 유독 우리 동국(東國)에 인색해서 그런 것인가! 어찌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는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횡설수설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다〔橫豎當理〕”라고 했지만, 강학하는 순서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으니 무엇으로 그가 도에 나아간 천심(淺深)을 상고할 수 있는가? 우리 조정의 문운(文運)이 이제 막 형통하여 도를 중시하고 선비를 높여 인재를 양성한 아름다움은 주나라에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한 선비가 산림에 숨어서 존양(存養)하며 사도(斯道)를 담당하여 스스로 성현(聖賢)을 기약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간혹 여기에 뜻을 두었지만 예리하게 나갔다가 신속하게 물러나 마침내 지극한 경지에 깊이 나가지 못하니, 어찌 모두 기습이 치우침에 국한한 것인가?

《소학》을 읽도록 권장하는 일은 교화를 흥기시키는 아름다운 뜻인데 사기(邪氣)라 지목하고, 정좌(靜坐)와 서행(徐行)은 학문에 뜻을 두는 시작인데 배척하여 위행(僞行)이라 한다.

사우(師友)들은 의리(義理)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선비들이 입과 귀의 말단에만 익숙하여 책문(策文)을 지어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이익을 능사(能事)로 여기고, 존심(存心)하고 치지(致知)하는 학문을 어느 물건에 비길 수가 있겠는가? 폐습이 벌써 고질이 되어 구제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극을 세우고 명을 세운다고 함은 세속에 모범을 드리우려는 것인데 어디에 기대겠는가?

몸소 세도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 어찌 장구하게 염려하여 고려하지 않는가? 장차 기풍(氣風)이 날로 하강하여 인심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성인의 도가 높고 멀어 배워서 이를 바가 아니기 때문인가? 선비들에게 추향(趨向)을 알아 학문에 연원(淵源)을 궁구하도록 하여 경중(輕重)의 나뉨을 판단하고 선후(先後)의 순서를 강구하여, 전하지 않는 은미한 말을 천명(闡明)하여 잃어가는 사문(斯文)을 흥기시킬 그 방도는 무엇으로 해야 하겠는가?

제생(諸生)들이 책을 끼고 옛것을 배움은 단지 문장을 기억하고 외워 명성과 이익을 구하는 데에 힘쓸 뿐만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아 대업(大業)에 잠심(潛心)하여 덕성(德性)의 본원에 함양하고 문의(文義) 사이에 연마하여 가슴에 지녀 마음으로 터득하여 도를 지닌 사람에게 나아가 질문하려고 했던 것이 오래 되었다. 명쾌한 변론을 듣기를 원하노라.


묻노라.

위로 올라가 인물을 논하며 그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는 것도 이치를 궁리하는 한 가지 일이니, 반드시 자신이 그 자리에 처하여 그가 만나고 대처한 바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한다. 만일 한때의 성패를 범연하게 보고 판단한다면 영웅에 대하여 잘 논하는 사람이 아니다.

장자방(張子房 장량)이 조룡(祖龍)을 저격(狙擊)한 것은 필부의 용맹에서 특출한 것인데, 대대적인 수색을 벗어났으니 무슨 술수를 사용하여 그런 것인가? 발을 들고 눈알을 굴리며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를 겁탈하여 제압하고 한신(韓信)을 재상으로 삼아 원수를 갚았지만, 끝내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이를 유자(儒者)의 기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가? 흙다리 위에서 책을 받고, 도인(道引)과 벽곡(辟穀)을 했다는 설은 그 또한 믿을만한가?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가 와룡(龍臥)의 초당에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 만일 유비가 부지런히 삼고초려(三顧草廬)하지 않았다면 장차 시골에서 초목과 함께 썩었을 뿐이겠는가? 헌제(獻帝)를 높이지 않고 유장(劉璋)을 습격하여 취했으니, 왕자(王者)를 도울 만한 사업을 이루어 겨우 솥발 같은 형세를 보존했다고 할 만하지만 예전 문물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장재(將才)로 보아도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설은 옳은가, 그른가?

도원량(陶元亮 도잠)은 인끈을 풀고 전원으로 돌아가 두 왕조 섬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높은 풍치를 숭상할 만하지만 승려들과 사귀며 왕래했으니 어떤가? 종국(宗國)이 망했는데도 역적을 토벌할 뜻은 없이 초사(楚些)를 읊으며 술에 몹시 취하였으니, 끝내 충담(沖澹)한 사람이지만 본래 위태로운 나라를 부지할 뜻은 없었는가? 시가(詩家)로 비유하면 공문(孔門)의 백이(伯夷)라 할 만하니, 그의 시 때문인가, 그의 절개 때문인가?

두자미(杜子美두보)는 험준하고 조심하여 충애(忠愛)가 성대했으나 이응(李膺)과 곽태(郭泰)의 사이에서 주선하여 중흥(中興)의 대업을 돕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임금을 만나면 도를 행하도록 했으니 그 재주는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을 능가하니 직설(稷契)의 사업을 했던가? 작자는 시사(詩史)를 육경(六經)에 비유하니, 또한 어디에서 취한 것인가?

악비(岳飛)는 송(宋)나라가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태어나, 끊어져 가는 형세를 떨쳤으니 하늘의 의도가 있는 듯하지만 끝내 두 임금의 대가(大駕)가 북쪽으로 끌려감을 되돌리지 못했으니, 무엇 때문인가? 기이한 계책을 꾸며 귀신같이 적의 형세를 헤아렸지만, 끝내 간신(奸臣)의 무함(誣陷)을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참소의 칼날에 걸려 죽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충의(忠義)를 타고나 몸소 사직(社稷)을 맡았지만 자신을 보호할 지혜를 마련할 겨를도 없었는가?

문천상(文天祥)은 나랏일이 이미 결딴난 뒤에 재상에 임명되어 군사를 출동했으니 만에 하나라도 위태로운 상황을 유지하려는 뜻을 가졌던가? 모진 고생을 겪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오랫동안 연경(燕京)의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무엇을 하려는 뜻을 품었는가? 마침내 한 번 죽음을 아끼다가 원수의 칼날을 피로 물들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정신이 감동하는 바에 천지가 진동했지만 한 번도 금(金)나라의 흉악한 칼날을 꺾지 못했으니, 뜻만 크고 재주는 엉성했다는 말이 옳은가, 그른가?

이상 여섯 사람은 모두 삼대(三代) 이후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인데, 그 인품을 논한다면 상하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그 사업(事業)을 상고해 보면 각기 성패(成敗)가 있다. 그 재지(才智)의 고하(高下)와 시의(時義)의 가부(可否)도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자방(子房 장량)의 시기를 만났다면 어떻게 원수를 갚고 한(韓)나라를 보존하여 속임수에 가까웠다는 자취가 없겠으며, 공명(孔明)의 시대를 만났다면 어떻게 위(魏)나라를 멸망시키고 오(吳)나라를 섬멸하여 한 고조(漢高祖)와 광무제(光武帝)의 유업을 넓힐 수 있었겠는가? 자미(子美)가 되어서는 자신을 허여하는 충성을 다했고, 원량(元亮)이 되어서는 원수를 갚는 절개를 다했으니, 무슨 방법을 이용했기에 가능했는가? 무목(武穆)이 공을 세우는 기회에 몸을 온전히 하고 문산(文山)이 곤경에 처한 날에 보존을 도모했으니, 그 또한 대책이 있는가?

여러 군자(君子)들이 장수(藏修)했던 한 서원에서,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아, 경서를 궁구하고 역사서를 읽으며 우러러 읽고 굽어 사색했다. 이전 현인들의 자취를 연마하고 헤아리며, 평소 가슴 가운데 강론한 지가 오래되었다. 대처하는 정책을 듣기를 원하노라.


묻노라.

형벌은 정치를 보완하는 도구인데 제왕(帝王)이 부득이하여 사용한 것이다.

대순(大舜)의 시대에도 오히려 사흉(四凶)의 죄가 있었고,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세대에도 죄수를 보고 수레에서 내려 눈물짓는 것을 면하지 못했으니, 어찌 성인의 정치를 헤아려 보면 지극하지 않음이 있어서 그런가?

상(商)나라는 관부(官府)의 형벌을 만들어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경계했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 주(周)나라가 번성할 때에 감옥이 텅 비고 형벌을 버려두고 사용하지 않았으니, 무슨 방법으로 이룩하였는가?

소공(蘇公)이 사구(司寇)가 되니 주공(周公)이 아름답게 여겼고, 자산(子産)이 형서(刑書)를 만들자 숙향(叔向)이 비난했으니, 그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는가? 한 문제(漢文帝)가 육형(肉刑)을 없앴고, 당 태종(唐太宗)은 채찍으로 등을 때리는 형벌을 금지했다. 형법을 가볍게 여겨 죄를 쉽게 범하는 길을 열어 준 듯한데, 사관(史官)이 “거의 형벌을 쓸 일이 없게끔 되었다.〔幾致刑措〕”라 했으니, 한나라와 당나라의 정치는 과연 삼대(三代)에 부끄럼이 없는가?

이제 밝으신 성상께서 지위에 있어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려짐을 구하고 형벌을 삼가는 한 가지 일에 더욱 뜻을 다하였다. 그리고 사형수를 두 번 조사하고 옥사를 평결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을 거쳐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不忍之政〕를 행하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근년 이래 도적이 일어나 죄없는 사람을 끌어들여서 문서가 책상 위에 가득하여 옥송(獄訟)이 지체되니, 불쌍히 여기는 뜻을 자주 반포하여 금법(禁法)을 어기는 무리가 더욱 불어나 어리석은 백성의 목숨을 해치고 죄인을 가엾게 여겨 그 죄를 신중히 심리〔欽恤〕하는 인자함을 손상하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세상에 인정이 점점 경박해지니 순박함을 회복할 대책은 없는가? 인심이 예전과 같지 않아 부끄러움을 알게 하여 바로잡는 방도가 없다. 형벌은 이후 형벌을 시행할 일이 없음을 기약하여 유사(有司)를 범하지 않도록 하여 백성들이 하고 싶어 함을 좇는 정치를 하는 그 방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묻노라.

예로부터 성현(聖賢)은 만난 상황에 따라 안주하여 각기 즐거움을 두었으니, 그 마음가짐과 일을 처리함이 같은 법도였다.

예로부터 성현(聖賢)이 처한 상황에 따라 편안히 여기며 각기 즐긴 바가 있으니, 그들이 마음가짐과 행동이 같은 법이다. 그런데도 마음으로 즐긴 바가 서로 현격하게 달랐으니, 무엇 때문인가? 신야(莘野)에서 구름 속에 논밭을 갈 때 기뻐했던 취지, 위수(渭水) 가에서 달을 낚으며 일생을 마치려 했던 뜻을 가졌으니,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이 즐긴 바는 참으로 이곳에 있었는가?

팔을 베고 물을 마시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고, 대그릇과 표주박이란 자주 비었으나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으니,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즐긴 바는 무슨 일인가?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는 흥취에 공자가 유독 탄식하며 허여했으나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에 들어 있지 않다. 증점(曾點)의 학문이 이미 요순(堯舜)의 경지에 도달하여 지위를 얻어 도를 행했으니, 과연 맹자가 즐긴 바가 아니겠는가? 공명(孔明)은 몸소 농사를 지으며 무릎을 감싸 안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고, 중엄(仲淹)은 귀양살이하며 천하 사람들보다 앞서 걱정하고 천하 사람들 뒤에 즐긴다고 했다. 이 또한 참다운 즐거움을 얻었으니 고인의 풍모에 부끄러움이 없는가? 연을 사랑하고 뜰에 풀을 관찰하며 나의 의사(意思)와 서로 같다고 했고, 꽃 찾아 버들 따라 앞 시내를 건너고 고요히 관찰해 보면 모두가 자득했다 하니, 염계(濂溪)의 쇄락(灑落)한 흉금과 명도(明道)의 온화하고 순수한 기상을 형용할 수 있는가? 눈과 달과 바람과 꽃으로 조화를 희롱하고, 무이(武夷)와 운곡(雲谷)에서 도를 강론하며 흥취를 붙였다. 강절(康節)은 풍류의 호걸이고, 회옹(晦翁)은 인자(仁者)와 지자(智者)의 즐거움을 누렸으니, 마음 속으로 깨달을 수 있는가?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행하여 천하를 구제함은 선비의 소원이다. 성현의 즐거움은 대부분 곤궁하게 사는 가운데 있다. 그런데 천지 사이에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恩澤)을 끼치게 하는 부탁을 태연히 모른 척하니, 이른바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이 이곳에 있고 저곳에 있지 않은가? 아니면 그 즐거운 바가 내외(內外)와 천심(淺深)의 차이가 있어서, 쾌활한 바탕을 배워서 이를 수 있는가?

여러 군자들은 추로지향(鄒魯之鄕)에서 나고 자라 경서와 역사서의 뜻을 연구했으니, 명성과 이록(利祿)만을 낚아채고 세속의 기호(嗜好)를 취할 뿐만 아니다. 반드시 성인을 스승삼고 현인을 본받아 흠모하고 좋아하며, 참으로 마음에 터득해야 함을 알고 각기 뜻을 말한 지가 오래되었다. 여러분들이 배우는 바는 무슨 학문이며 사모하는 바는 무슨 즐거움인가? 만일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곳을 찾는다〔尋孔顔樂處〕’라고만 하고 좋아하며 즐거워하는 실상을 알지 못하면, 이는 벌써 말한 것이 쓸모없는 것이니 스스로 터득하는 참 즐거움에 대하여 듣기를 원하노라.


묻노라.

어진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經界)를 바로잡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경계를 바로잡지 않고 삼대(三代)의 지치(至治)를 법 삼으려면 따를 방도가 없다.

구획하는 제도는 어디에서 형상을 취하여 어느 시대에 시작했는가? 하(夏)ㆍ상(商)ㆍ주(周)가 번성하여 공법(貢法), 조법(助法), 철법(徹法)을 시행한 것은 시대에 따라 상황이 다르니, 어느 것이 백성들에게 가장 편리했는가? 상앙(商鞅)이 천맥(阡陌)을 터서 나라가 부강해졌고, 신망(新莾)이 정전(井田)을 회복하여 백성들이 원망했다고 하니,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도 족히 믿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가? 당 태종(唐太宗)이 예전 제도를 복원하였으나 끝내 시행하지 못했고, 장횡거(張橫渠 장재)가 법제(法制)를 강구했지만 뜻을 둔 채로 이루지 못했으니, 들판을 경영하는 제도는 과연 회복할 수 없는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은(殷)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봉해진 뒤로 처음 들판을 그어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했는데, 언제 폐지되었는가? 삼국(三國)과 고려(高麗)의 전답을 나누는 제도는 시대가 각기 다르겠지만 두루 열거하여 말할 수 있는가? 아조(我朝)의 흥기하는 운세를 역대 임금이 이어 받아 정치의 도구가 다 펼쳐져서 모든 일에 예전 법도를 따랐지만 전제(田制) 한 가지 일은 폐습(獘習)을 그대로 따랐다. 부자들은 들판을 연이은 풍요로움을 차지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송곳도 꽂을 땅도 없으니, 점차 토호(土豪)들이 토지를 겸병하는 지경에 이르러 정치는 분산되고 백성들은 유랑하니 참으로 한심스럽게 여길 만하다.

의논하는 자들이 “산천이 험하고 지역이 어긋나게 연결되어, 도랑과 구획을 봉하는 정책을 시행할 수 없는 형세인데 대대로 거실(巨室)을 지키다가 마침내 반드시 닫게 되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비옥하고 척박한 토지를 구분하여 결부(結負)를 정하니, 귀하고 천함에 가지런함이 있고 많고 적음에 수량이 있으며, 사고파는 데에 금지할 조목을 밝히고 함부로 점유하는 법률을 엄하게 하였다. 연한을 두어 기약하고 스스로 바름을 취했으니, 갑론을박하는 의논을 시행할 수 있는가, 시행할 수 없는가?” 하였다.

여러 군자(君子)들이 장수(藏修)했던 한 서원에서 세상을 경륜하려는 뜻을 품고 융성했던 옛날에 마음을 쓰며 시대의 어려움에 눈을 놀라게 한다. 이는 민생(民生)의 하늘이고 왕정(王政)의 근본이니, 반드시 강론하여 밝혀서 절충해야 할 것이니, 적용할 대책에 대하여 듣기를 원하노라.


묻노라.

군자의 학문은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밝히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으니, 작은 차이가 크게 어긋난다는 것은 분변하는 방도이니 이에 대하여 들을 수 있겠는가?

하늘이 처음 명을 내려준 때부터 이 모든 이치를 갖추었으니 원래 양단(兩端)이 상대하여 생기는가?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키며 위태하고 은미한 뜻과 공경과 게으름, 의리 있고 욕심부리는 경계가 서로 경계하는데 성명(聖明)한 제왕(帝王)도 반드시 규잠(規箴)을 기다림이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성인의 문하에서 사람을 가리킬 때에 드물게 한 말인데 자사(子思)가 백성을 다스리는 도에서 우선으로 삼은 그 의도는 무엇인가?《대학》마지막 장에서 거듭 경계했지만 격물치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고,《맹자》첫 권에서 말하고, 7편 가운데서 반복했으니, 그 앞뒤로 상세하고 간략함이 같지 않음은 따로 은미한 뜻이 있는가? 동자(蕫子)가 말한 의를 바르게 하고 도를 밝히는 설(說)과 한자(韓子)가 주장한 도(道)를 따지고 드러낸 논(論)이 성인 문하의 남은 업적을 터득함이 있고 또한 세상의 교화에 보탬이 있는가? 장자방(張子房)은 유자(儒者)의 기상을 지녔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왕자(王者)를 보필할 재능을 지녔으니, 두 가지 구분을 밝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염계(濂溪)는 선악의 기미를 분석했고, 정자(程子)는 오로지 치지(致知)의 경을 말했으니, 같거나 다르다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주회암(朱晦菴 주자)은 입언(立言)할 무렵에 정성스러워 아주 작은 것도 자세히 살펴서 세상을 구하고 훈계를 내려 조금도 남음이 없었다. 그리고 장남헌(張南軒 장식)은 무소위(無所爲)와 유소위(有所爲)에 관한 설은 이전 성인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확충했으니 그 또한 스승에게 전수받은 바가 있는가?

우리나라는 대대로 문교(文敎)가 융성하고 치도(治道)가 밝아 백성은 에의로 사양함을 알고 선비는 염치에 힘써 소중화(小中華)로 불린 유래가 있었다. 그동안 사람들이 학문을 사사롭게 하고 선비들의 습속이 날로 더러워져 입으로 성률(聲律)에 맞는 시문을 읽어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수단으로만 여기고 의리와 연원(淵源)을 평소에 강습하는 일이 드물다. 더구나 경서를 연구함을 비루하게 여겨 현담(玄談)을 논하고《소학》을 단절하여 재앙의 근본으로 여기니 폐습이 벌써 고질이 되어 약으로 구제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선악과 시비의 귀결을 밝혀 곤궁할 때 기르고 통달했을 때 시행하는 학문을 하겠는가? 그 사이 조금 내와의 구분을 아는 사람이 있었지만 함부로 남을 따라서 남을 위함을 면하지 못하니, 평생 마음 씀씀이가 끝내 이록(利祿)의 길에서 소진하니, 여러 취한 사람 가운데 빼어나고 여러 물길 가운데 뛰어난 사람은 누구인가? 심한 경우에는 오직 이익만을 따라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서로 이익을 취하여 농단(壟斷)하니, 이욕(利慾)의 물결이 하늘에 닿아 인력으로 그칠 바가 아닙니다. 원기(元氣)가 위급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이른바 “세도(世道)를 부지하고 인륜(人倫)을 세웠다”라고 한 것은 어느 곳에 의지하는가? 중흥한 호걸로 세찬 물결에서 자임하는 사람, 과연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는가? 사람들에게 선비의 행실을 하여 이욕을 제거하고 의리를 품어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의 길을 구분하고 사악하고 정대한 갈림길을 판단하여 집집마다 봉할 만한 풍속으로 돌이키고 중화위육(中和位育)의 공부를 다 하는 그 방도는 무엇으로 해야 하겠는가?

여러 군자(君子)들이 장수(藏修)했던 한 서원에서 오랜 세월에 침잠하여 위기(爲己) 공부를 궁구하고 진리를 어지럽히는 거짓을 분변하여 성인을 스승삼고 현인을 본받아 오직 닮으려는 중대함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옛사람을 좋아하지만 늦게야 태어나 퇴폐한 풍속에 놀라 평소 온축(蘊蓄)한 학문을 펼치려 한 것이 오래이니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논의를 듣기를 원하노라.

[주-D001] 덕성을 …… 말한다 : 《중용장구》제27장에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미암으니, 광대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함을 다한다.〔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라고 하였다.

[주-D002] 집집마다 …… 했으니 : 집집마다 봉(封)을 받을 만큼 인물이 많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요순 시대는 집집마다 다 봉하여도 되었다.〔堯舜之世 比屋可封〕”라고 하였고,《논형(論衡)》 〈솔성전(率性傳)〉에는 “요순의 백성들은 집집마다 다 봉하여도 되었고, 걸주의 백성은 집집마다 다 죽여도 되었다.〔堯舜之民 可比屋而封 桀紂之民 可比屋而誅〕”라고 하였다.

[주-D003] 궐리(闕里) : 공자의 구택(舊宅)이 있던 곳으로, 고향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주-D004] 차원이 …… 주지만 : 《논어》 〈옹야(雍也)〉에 “중인 이상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차원이 높은 도를 말해 줄 수 있지만, 중인 이하의 재질을 지닌 사람에게는 그런 차원이 높은 도를 말해 줄 수가 없다.〔中人以上 可以語上也 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5] 성손(聖孫) : 《중용장구(中庸章句)》를 편찬한 것으로 전하는 자사(子思)를 가리킨다. 공자의 손자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D006] 안자(顔子)는 거의 가까웠고 : 공자가 〈복괘(復卦) 초구(初九)〉를 해설하면서 “안씨의 아들은 도의 경지에 거의 도달하였다. 선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모르는 일이 없었고, 그것을 알고 나서는 반복해서 행하는 일이 없었다.〔顔氏之子 其殆庶幾乎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未嘗復行也〕”라고 언급한 말이《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온다. 안씨의 아들은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을 말한다.

[주-D007] 증자(曾子)는 …… 얻었으니 : 주자(朱子)가《대학장구》서문에서 “증씨의 전이 홀로 그 종지를 얻었다.〔曾氏之傳 獨得其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주-D008] 선유(先儒)가 …… 없다 : 《근사록》 〈위학(爲學)〉에 “맹자는 재주가 높아서, 그를 배우려 해도 의거할 곳이 없다. 배우는 이들은 마땅히 안자를 본받아 배워야 성인의 배움에 가깝고 또한 힘쓸 만한 곳이 있다.〔孟子才高 學之無可依據 學者當學顔子 入聖人為近 有用力之處〕”라고 하였다.

[주-D009] 염락관민(濂洛關閩) : 송나라 때 이학(理學)을 제창한 학자로,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 등 송대(宋代)의 학자들을 가리킨다.

[주-D010] 육씨(陸氏) : 육씨는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을 가리킨다. 강서(江西) 금계(金谿) 사람. 자(字)는 자정(子靜). 호(號)는 상산(象山). 형(兄)인 육구소(陸九韶)ㆍ육구령(陸九齡) 등과 함께 ‘삼육자(三陸子)’라고 일컬어진다.

[주-D011] 오초려(吳草廬) : 원(元)나라 오징(吳澄, 1249~1333)을 가리킨다. 오징은 숭인(崇仁) 사람으로, 자는 유청(幼淸),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주역》,《서경》,《춘추》,《예기》 등에 찬(纂)을 하였으며,《학기(學基)》,《학통(學統)》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도통도(道統圖)〉를 지어 자신이 주자 이후의 도통을 계승한 사람이라 자부하였다. 그러나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D012] 강서(江西)의 …… 못했다 : 송(宋)나라의 육상산(陸象山)이 강서의 금계(金溪)에서 출생했으므로 그의 학술을 강서학파라 한다. 오징(吳澄)이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에 빠졌음을 비판하는 말이다.

[주-D013] 구주(九疇)의 가르침 : 기자(箕子)의 가르침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리킨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이륜(彛倫)을 펴는 이치에 대해 물었는데, 이에 기자가 대답한 것이 홍범구주이다. 그 대강은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 육극(五福六極)이다. 《書經 洪範》

[주-D014] 횡설수설이 …… 합당하다〔橫豎當理〕 : 《포은집(圃隱集)》노수신(盧守愼)이 쓴 서문에 나오는 말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횡설수설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다고 일컬어졌다.”라고 하였다.

[주-D015] 예리하게 …… 물러나 : 은근한 끈기가 없음을 지적한 말이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그 나아감이 예리한 사람은 그 후퇴하는 것 또한 빠른 것이다.〔其進銳者 其退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주-D016] 극을 …… 함 : 입극(立極)은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 즉 도덕의 표준을 세우는 것으로서 주희(朱熹)의《중용장구》서문(序文)에 나오는 말이다. 입명(立命)은《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에 두 마음을 두지 말고서 자신의 덕을 닦아 천명을 기다려야 하니, 이것이 바로 천명을 지키는 방법이다.〔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7] 장자방(張子房)이 …… 것 : 장량(張良)이 나라가 망한 뒤에 그는 가재(家財)를 털어 자객을 구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창해역사를 시켜서 박랑사(博浪沙)에서 철퇴를 던져 진 시황(秦始皇)을 저격하려 한 것을 말한다. 조(祖)는 시(始)의 뜻이고, 용(龍)은 임금을 상징하는 말로, 시황(始皇)을 가리킨다.

[주-D018] 대대적인 수색을 벗어났으니 : 진시황이 저격한 범인을 열흘 동안을 찾았으나 잡지 못했다. 《漢書 卷40 張良傳》

[주-D019] 흙다리 …… 설 : 장량이 진시황을 저격하려다 실패한 뒤에 하비(下邳) 땅 흙다리 위에서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을 만나, 그로부터 태공망(太公望)의 병서(兵書)를 받아서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을 건국하고 유후(留候)에 봉해졌다. 자신의 뜻을 이루자 그는 속세를 벗어나 벽곡(辟穀)을 하여 신선술을 익히며 여생을 보냈다 한다. 《漢書 卷40 張良傳》

[주-D020] 무릎을 …… 지었는데 : 제갈량(諸葛亮)이 출사(出仕)하기 전 남양(南陽)에서 몸소 농사를 지을 때 매일 새벽과 저녁에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길게 불렀던 노래를 ‘포슬음(抱膝吟)’이라고 한다. 천하에 뜻을 품은 선비가 울울한 심정을 토로함을 뜻한다. 혹은 ‘양보음(梁甫吟)’이라고도 한다.

[주-D021] 헌제(獻帝)를 높이지 않고 : 헌제는 후한(後漢)의 마지막 임금 유협(劉協)의 묘호. 아홉 살 때에 동탁(董卓)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문화를 좋아하여 진실로 종실의 모범이 되었으나 나중에 조비(曹丕)에게 쫓겨나 산양공(山陽公)이 되었다.

[주-D022] 유장(劉璋)을 습격하여 취했으니 : 유장은 중국 삼국(三國) 때 익주 자사(益州刺史)로 조조(曹操)의 진위장군(振威將軍)이 되었다. 제갈량(諸葛亮)이 건안(建安) 6년(201)에, 유장의 청으로 장로(張魯)를 방어하러 익주에 간 그의 임금 유비(劉備)와 합세하여 유장을 습격하여 내쫓았다.

[주-D023] 승려들과 사귀며 왕래했으니 : 동진(東晉) 때의 고승(高僧) 혜원 법사(惠遠法師)가 일찍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거주하면서 당대의 명유(名儒)인 도잠(陶潛), 육수정(陸修靜) 등을 초청하여 승속(僧俗)이 함께 염불 수행(念佛修行)을 할 목적으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結成)하고 서로 왕래하며 친밀하게 지냈다.

[주-D024] 초사(楚些) : 전국 시대 초나라의 민간에 유행하던 초혼가(招魂歌)의 형식에 구절의 끝마다 사(些) 자를 쓴 데서 전하여 초혼가를 뜻하며, 여기서는 곧 만장(挽章)을 가리킨다.

[주-D025] 이응(李膺)과 곽태(郭泰) : 동한(東漢)의 명망가인 이응이 낙양(洛陽)에서 고향으로 떠나는 곽태를 전송하면서 둘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갔는데, 이 광경을 보고서 사람들이 신선과 같다고 찬탄하며 부러워했다는 ‘이곽선주(李郭仙舟)’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주-D026] 요숭(姚崇) : 650~721. 본명은 원숭(元崇)이었으나 현종(玄宗)의 연호를 피해 요숭으로 바꾸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오른 이래 중종(中宗), 예종(睿宗)과 현종 초기에 걸쳐 여러 번 재상의 직에 올라 국정을 숙정하고 민생의 안정에 힘썼으며, 716년에 은퇴하였다. 송경(宋璟)과 함께 개원(開元)의 명재상으로 숭앙된다.

[주-D027] 송경(宋璟) : 663~737. 문장에 뛰어나 측천무후가 정권을 휘두를 때 누차 좌대어사중승(左台御使中丞)에 임명되었는데, 강직한 관리로서 측천무후의 신임을 받았다. 예종 복위 후에 폐단을 혁파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서 태평공주(太平公主)의 미움을 받아 초주 자사(楚州刺史)로 좌천되었다. 현종 개원 초년에 다시 형부 상서에 임명되었다. 개원 4년에 요숭(姚崇)을 이어 재상이 되어 요숭과 함께 개원(開元)의 현상(賢相)으로 일컬어진다.

[주-D028] 직설(稷契) : 순(舜)임금 때 후직(后稷)으로서 농업을 담당한 직(稷)과 사도(司徒)의 직책을 관장한 설(契)을 가리킨다. 어진 신하의 대명사로 쓰인다.

[주-D029] 시사(詩史)를 육경(六經)에 비유하니 : 두보(杜甫)의 시는 특히 시사(時事)를 잘 진술(陳述)하되 격률(格律)이 아주 잘 맞고 의리가 정심(精深)하였으므로, 세인(世人)들이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 불렀다. 또 그의 시가《시경》에 버금갈 만큼 아정(雅正)하였으므로《시경》을 이었다고 하였다.

[주-D030] 악비(岳飛) :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의 충신이며 명장(名將)으로, 자는 붕거(鵬擧), 시호는 무목(武穆)이다. 여러 차례 금(金)나라 군대를 격파하다가 진회(秦檜)의 모함에 걸려 39세의 나이로 옥사(獄死)하였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주-D031] 두 …… 못했으니 : 왕(王)의 대가(大駕)가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말한다. 금(金)나라 군대가 남하(南下)하여 송(宋)나라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송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체포하여 북으로 돌아간 일을 말한다.

[주-D032] 문천상(文天祥) :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이다. 원(元)나라 군대가 침입하여 수도(首都)가 함락되자 단종(端宗)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대항하다가 사로잡혀 연옥(燕獄)에 삼년 동안 구금되어 있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다가 처형되었다. 옥중에서 지은 〈정기가(正氣歌)〉가 고금에 회자된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주-D033] 자방(子房)의 …… 가까웠다 : “‘자방(子房)이 조용한 모습을 지었다.’라는 일도 교휼(狡譎)함에 가까운 것이었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주자도 〈답위원리(答魏元履〔掞之號艮齋〕〉에서 “자방은 지모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속인 것에 조금 가깝습니다.〔子房 用智之過 有微近譎處〕”라고 했다.

[주-D034] 천고의 …… 삼아 : 위로 고인(古人)을 벗하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한 지방의 훌륭한 선비라야 한 지방의 훌륭한 선비들과 사귈 수 있고,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라야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들과 사귈 수 있고, 천하의 훌륭한 선비라야 천하의 훌륭한 선비들과 사귈 수 있다. 이 세상의 훌륭한 선비와 벗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면 다시 옛 시대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 시대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下》

[주-D035] 대순(大舜)의 …… 있었고 : 요순(堯舜) 시대에 악명을 떨쳤던 네 악인(惡人)인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을 가리키는데, 순 임금이 일찍이 공공을 유주(幽州)에 귀양 보내고, 환도를 숭산(崇山)에 내치고, 삼묘를 삼위(三危)로 쫓아내고, 곤을 우산(羽山)에서 죽였다. 《書經 舜典》

[주-D036] 우(禹) 임금의 …… 것 : “우왕(禹王)이 외출하여 죄인을 보자 수레에서 내려 물어보고는 눈물을 흘렸다.〔禹出見罪人 下車問而泣之〕”라는 읍고(泣辜)의 고사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설원(說苑)》 〈군도(君道)〉에 나온다.

[주-D037] 상(商)나라는 …… 경계했으니 : 《서경》 〈이훈(伊訓)〉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태갑(太甲)이 지위를 잇자 이윤(伊尹)이 글을 지어 훈도하였는데 사관(史官)이 기록한 글이다.

[주-D038] 감옥이 텅 비고 : 죄인이 없어 감옥이 텅 비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왕포(王褒)의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에 “옛날 주공(周公)이 식사를 하다가 입안의 밥알을 뱉고, 감던 머리를 쥐고서도 현자를 맞이하는 수고를 몸소 실천하였던 까닭에 감옥이 텅 빌 정도의 융성한 시대를 이루었다.〔昔周公 躬吐握之勞 故有圄空之隆〕”라고 하였다. 어공(圄空)이라고도 한다.

[주-D039] 형벌을 …… 않았으니 : 형벌을 버려두고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권4 〈문제기(文帝紀)〉에, 문제의 시대에는 범법자(犯法者)가 없었으므로 “거의 형벌을 쓸 일이 없게 되었다.〔幾致刑措〕”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주-D040] 소공(蘇公)이 …… 여겼고 : 《서경》 〈입정(立政)〉에 주공(周公)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사(太史)야! 사구(司寇)인 소공(蘇公)이 그 행할 옥사(獄事)를 공경하여 우리 왕국(王國)을 장구히 하였으니, 이에 법받아 삼감을 두면 조열(條列)로써 알맞은 형벌을 쓸 것이다.〔周公 若曰 太史 司寇蘇公 : 式敬爾由獄 以長我王國 玆式有愼 以列用中罰〕”

[주-D041] 자산(子産)이 …… 비난했으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6년〉에 보이는 이야기로,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재상 자산이 형법을 새겨 넣은 솥〔鼎〕을 주조하자, 진(晉) 나라 숙향(叔向)이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한 선왕(先王)의 법을 쓰지 않고 형벌을 쓴다고 비판한 것을 이른다.

[주-D042] 한 문제(漢文帝)가 육형(肉刑)을 없앴고 : 육형(肉刑)은 육체에 가하는 형벌로, 묵형(墨刑)ㆍ의형(劓刑)ㆍ월형(刖刑)ㆍ궁형(宮刑)ㆍ대벽(大辟) 등 오형 등이다. 한 문제 13년(167) 5월 제나라 태창령(太倉令)인 순우의(淳于意)가 죄를 지어 형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의 막내딸인 효녀 제영(緹縈)이 상서하여 관비가 되겠다고 자청하면서 부친의 육형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자, 문제가 감동한 나머지 경형(黥刑)에 해당하는 자는 곤겸(髡鉗)하여 성단용(城旦舂)에 처하고, 의형에 해당하는 자는 태삼백(笞三百)에 처하고, 왼쪽 발목을 자르는 형벌에 해당하는 자는 태오백(笞五百)에 처하는 것으로 감형하여 3개의 육형을 없앴다. 《史記 卷10 孝文本紀》《漢書 卷4 文帝紀》

[주-D043] 부끄러움을 …… 방도 : 《논어》 〈위정(爲政)〉에 “백성들을 법령으로 이끌고 형벌로 단속하면 백성들이 처벌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겠지만,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단속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느껴서 더욱 선해질 것이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44] 형벌은 …… 기약하여 : 형벌을 잘 씀을 뜻한다. 《서경》 〈여형(呂刑)〉에 “형벌은 흉한 도구인데 상서라고 말한 것은 형벌은 이후 형벌을 시행할 일이 없음을 기약하여 백성들이 중(中)에 화합하면 그 상서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夫刑凶器也 而謂之祥者 刑期無刑 民協于中 其祥莫大焉〕”라고 하였다.

[주-D045] 신야(莘野)에서 …… 취지 : 신야(莘野)는 유신국(有莘國)의 들이라는 뜻인데, 이윤(伊尹)이 탕(湯) 임금의 현상(賢相)으로 일찍이 여기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었다. 탕 임금이 그가 어질다는 명성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그를 초빙하였으나, 처음에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세 번째 사자가 왔을 때는 문득 마음을 바꾸어, 요순(堯舜)의 도를 직접 세상에 한번 행해 보겠다고 다짐을 하고 나가서 마침내 탕 임금을 도와서 그로 하여금 왕천하(王天下)를 이루게 했다. 《孟子 萬章上》

[주-D046] 위수(渭水) …… 가졌으니 : 위수(渭水)는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이 출사(出仕)하기 전에 낚시질을 하며 은거하던 물 이름인데, 그가 뒤에 주 문왕(周文王)의 초빙을 받고 나가서 주나라를 도와 왕업을 이루게 했다.

[주-D047] 팔을 …… 있고 :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며 도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나물밥에 물을 마시고 팔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나니, 떳떳하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

[주-D048] 대그릇과 …… 않았으니 :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단표(簞瓢)는 밥을 담는 대그릇과 물을 담는 표주박이란 뜻으로, 전하여 가난한 사람이 먹는 보잘것없는 음식을 뜻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어질구나, 안회는. 한 대그릇 밥과 한 바가지 물로 누추한 마을에서 지내는구나.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치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주-D049] 안자(顔子)가 …… 일인가 :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태학(太學)에서 공부할 때 호원(胡瑗)이 학관(學官)으로 있으면서 〈안자소호하학론(顔子所好何學論)〉이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일반적으로 〈호학론(好學論)〉이라 약칭하는데, 이 구절에 근거하여 출제한 것이다. 《二程全書 卷62 雜著》

[주-D050] 노래하며 …… 허여했으나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곳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내용이《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증점(曾點)은 증삼(曾參), 즉 증자(曾子)의 아버지이다.

[주-D051] 천하에 …… 않다 :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주-D052] 중엄(仲淹)은 …… 했다 : 어려운 처지에서도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송(宋)나라 재상 범중엄(范仲淹)이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묘당의 높은 자리에 있으면 그 백성을 걱정하고, 강호의 먼 곳에 있으면 그 임금을 걱정하는지라, 이는 나가서도 걱정, 물러가서도 걱정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어느 때에 즐거울 수 있겠는가. 그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보다 앞서 걱정하고 천하 사람들 뒤에 즐긴다고 할 것이다.〔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 然則何時而樂耶 其必曰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라고 한 것을 이른다. 《范文正公集 卷7》범중엄(范仲淹)은 북송(北宋) 시대의 명재상이었는데, 당시의 대신들에게 비난을 받아 결국 좌천되었다.

[주-D053] 연을 사랑하고 : 북송(北宋) 시대 학자로 호가 염계(濂溪)인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연(蓮)을 매우 사랑하여 〈애련설(愛蓮說)〉을 지어서 연을 예찬하였다.

[주-D054] 뜰에 …… 같다 : 뜰에 무성하게 자란 풀도 뽑지 않았으니, 자신이나 풀이 다 같이 생명을 가졌으므로 살고 싶어 하는 생각은 다 마찬가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가 창 앞뜰에 풀이 무성하여도 제거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 까닭을 묻자 “나의 의사(意思)와 저 풀의 의사가 서로 같다.” 하였다. 《近思錄 卷14》

[주-D055] 꽃 …… 자득했다 : 송(宋)나라 성리학자 정호(程顥)가 호현(鄠縣)의 주부(主簿)로 있을 때 지은 〈춘일우성(春日偶成)〉이라는 시에 “엷은 구름 상큼한 바람 정오가 다 되는 때, 꽃 찾아 버들 따라 앞 시내를 건너도다. 사람들은 나의 마음 즐거운 것을 모르고서, 틈만 나면 소년처럼 나돌아 다닌다 말하리라.〔雲淡風輕近午天 傍花隨柳過前川 時人不識予心樂 將謂偸閒學少年〕”라고 하였다. 또 〈추일우성(秋日偶成)〉이라는 시에 “만물은 고요히 관찰해 보면 모두가 자득하여, 사시의 아름다운 흥취가 사람과 똑같네.〔萬物靜觀皆自得 四時佳興與人同〕”라고 하였다.

[주-D056] 눈과 …… 희롱하고 : 송대의 철학자 소옹(邵雍)이 상수학(象數學)에 뛰어나 신비한 수리 학설을 세워 우주의 조화를 풀이한 것을 말한다. 그가 지은 〈수미음(首尾吟)〉에 “제왕과 제후들이 가볍게 포폄을 행하여 설월과 풍화를 품평하지 않았네.〔皇王帝伯輕褒貶 雪月風花未品題〕”라는 구절에 나오는 말로, 1년 사시(四時)의 경물(景物)을 말한 것이다. 《伊川擊壤集 卷20》

[주-D057] 무이(武夷)와 …… 붙였다 : 무이산(武夷山)의 중국 복건성(福建省) 무이산시(武夷山市)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주자(朱子)가 일찍이 서재(書齋)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운곡(雲谷)은 복건(福建) 건양현(建陽縣) 서북 70리에 위치한 노봉(蘆峯)으로, 주자가 그곳에 회암초당(晦庵草堂)을 짓고 글을 읽으면서 산 이름을 운곡이라 고쳤다.

[주-D058] 인자(仁者)와 지자(智者)의 즐거움 : 공자(孔子)가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論語 雍也》

[주-D059] 어려서 …… 구제함 : 학문을 하여 세상에 포부를 펴려던 뜻이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사람이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하여 행하고자 해서이다.〔夫人幼而學之 壯而欲行之〕”라고 하였다. 또《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곤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는 말이 있다.

[주-D060] 임금을 …… 부탁 :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준말로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恩澤)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주-D061] 성인을 …… 본받아 : 북송(北宋)의 주돈이(周敦頤)가 말하기를 “성인은 하늘을 본받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본받기를 바라고, 선비는 현인을 본받기를 바란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 하였다. 《通書》

[주-D062] 어진 …… 시작된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어진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夫仁政 必自經界始〕”라고 전제한 뒤에, 본문의 이 말과 함께 토지 정책과 관련된 왕도 정치에 대해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D063] 공법(貢法) …… 시행 : 우(禹)가 홍수를 다스린 후 땅의 높낮이에 따라 전답을 9등급으로 분리하였고, 하(夏)나라는 50묘(畝)를 기준으로 하여 공법〔貢〕을 썼고, 은(殷)나라는 70묘를 기준으로 하여 조법〔助〕을 쓴 것이 서로 다르긴 해도 평야를 구획정리하여 등수를 매긴 점은 공통적이다. 주(周)나라에 와서는 사마법(司馬法)을 만들어 6척(尺)을 1보(步)로 하고, 100보를 1묘(畝)로 하고, 100묘를 1부(夫)로 하여 8가구가 정전(井田) 하나를 공동 경작하면서 철법〔徹〕을 썼다.

[주-D064] 상앙(商鞅)이 …… 부강해졌고 : 상앙(商鞅)이 진 효공(秦孝公)에게 발탁된 뒤에 천맥을 없애는 일종의 경지 정리를 해서 토지 면적을 늘리고 새로운 세법을 적용하여 국가 재정을 증대시켰다.

[주-D065] 신망(新莾)이 …… 원망했다 : 신망(新莽)은 서한(西漢) 말에 권력을 찬탈하고 국호를 신(新)으로 고친 왕망(王莽)을 말한다. 정전(井田)은 선왕(先王)의 훌륭한 법인데 자세한 절목(節目)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아 맹자(孟子)가 말한 때부터 이미《예기(禮記)》 〈왕제(王制)〉와도 달랐다. 동중서(董仲舒)의 한전(限田)이나 원진(元稹)의 균전도(均田圖)가 자못 모방하여 옛날에 가깝지만 오히려 한결같이 정도(正道)로 돌아와 제도를 다 터득하지는 못하였다. 신망은 정전이 오랫동안 폐지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제도를 모방할 본보기조차 무시하고 다만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한 것일 뿐이었으므로 백성들에게 원망을 받았다.

[주-D066] 들판을 경영하는 제도 : 《주례(周禮)》 〈천관총재(天官冢宰)〉에 보이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이다. 여기서 ‘체(體)’는 나눈다는 뜻이고 ‘경(經)’은 이수(里數)를 정한다는 뜻으로, 국도(國都)를 건설하고 향읍(鄕邑)을 구획한다는 말이다.

[주-D067] 은(殷)나라 …… 시행했는데 :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평양(平壤)에 옛 성터 둘이 있다. 하나는 기자(箕子) 때에 쌓은 것으로, 성안의 구획이 정전제도(井田制度)를 사용하였고, 하나는 고려 성종(成宗) 때에 쌓은 것이다.” 하였다. 또《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자가 만들었던 정전은 평양부 남쪽 외성(外城) 안에 있다.”라고 하였다.

[주-D068] 의(義)와 이(利)의 구분 : 공자는 의(義)와 이(利)를 대비하여 설명했다. 예컨대, 《논어》 〈이인(里仁)〉에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고 하는 등 구절이 있다.

[주-D069] 정밀하게 …… 뜻 :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키면서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도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16자(字)를 압축한 것이다.

[주-D070] 공경과 …… 경계 : 《순자(荀子)》 〈의병(議兵)〉에 “공경하는 마음이 게으른 마음을 이기면 길하고, 그 반대이면 몸을 망친다.〔敬勝怠則吉 怠勝敬則滅〕”는 말이 있다. 여기서 ‘태(怠)’는 ‘경(敬)’의 반대이다. 또 ‘의(義)’는 ‘욕(欲)’의 상대 개념인데, ‘의(義)’는 곧 천리(天理)의 공(公)이요, ‘욕(欲)’은 곧 인욕(人欲)의 사(私)이다. 그러므로 의리(義理)와 이욕(利欲)의 구분을 판별해야 한다.

[주-D071] 자사(子思)가 …… 삼은 : 《대학장구》전 10장에서 “나라는 이익으로써 이로움을 삼지 아니하고, 의로움으로서 이로움을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다.〔此謂國 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라고 한 구절을 가리킨다.

[주-D072] 동자(蕫子)가 …… 설(說) : 한(漢)나라 학자인 동중서(董仲舒)가 “그 의를 바르게 하여 이익은 도모하지 않고, 그 도를 밝히고 그 공은 생각지 않는다.〔正其誼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라고 하였다. 《漢書 卷56 董仲舒傳》그는《춘추》를 전공한 금문학자(今文學者)로,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로 임명되었는데, 무제(武帝)에게 상소를 올려 유교(儒敎)를 국교로 정하게 하였다.

[주-D073] 한자(韓子)가 …… 논(論) : 한유(韓愈)가 〈원도(原道)〉를 지어 요순(堯舜) 삼왕(三王)의 도(道)를 추구(推究)하여 밝혀서, 불씨(佛氏)ㆍ노씨(老氏) 등의 이단(異端)을 극력 배척하고,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ㆍ주(周)ㆍ공(孔)ㆍ맹(孟)으로 이어져 온 사도(斯道)를 극력 존숭(尊崇)한 것이다. 여기서 ‘원(原)’ 자는 유도(儒道)의 원의(原義)를 밝힌다는 뜻이다. 그 가운데 “불씨(佛氏)와 노장(老莊) 등 이단의 학설을 막지 않으면 우리의 도가 유행하지 못할 것이요, 저지하지 않으면 우리의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이다.〔不塞不流 不止不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4] 장자방(張子房)은 …… 지녔고 : 자방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항우(項羽)를 멸망시키고 한(漢)나라를 세우게 한 장량(張良)의 자(字)이다. 한 고조가 천하를 평정하고 황제의 위에 오르자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초연히 물러나 신선(神仙)의 술(術)을 즐기며 공명(功名)을 완전히 보전하여 천명으로 죽었다.

[주-D075] 염계(濂溪)는 …… 분석했고 : 주돈이(周敦頤)가 지은《통서(通書)》에 “성은 작위가 없으며, 기에 선악이 있다.〔誠無爲 幾善惡〕”라고 한 구절이다. 여기서 성(誠)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고 기(幾)는 선악(善惡)이 갈리는 분기점이라는 뜻이다. 이 내용은《심경(心經)》권2에 도식(圖式)과 함께 인용되어 있다.

[주-D076] 정자(程子)는 …… 말했으니 : 정자(程子)가 “함양에는 모름지기 경으로써 해야 하고 배움을 진전시키는 것은 치지에 달려 있다.〔涵養須用敬 進學在致知〕”라고 한 구절이 있다. 《성리대전》권46과《주자어류》권95 〈정자지서(程子之書)1〉에 수록되어 있다. 인용된 이천(伊川)의 말은《근사록》권2 〈위학류(爲學類)〉에도 나온다.

[주-D077] 무소위(無所爲)와 …… 설 : 송(宋)나라 장식(張栻)의 말로, ‘무소위’는 이해는 따지지 않고 오직 의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유소위’는 이해를 계산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近思錄 卷7》

[주-D078] 중흥한 …… 사람 : 어지러운 세상에서 스스로 유학(儒學)을 부지하는 책임을 떠맡을 사람이 없음을 탄식한 말이다. 진(晉)나라 범녕(范甯)이 지은《춘추곡량전》 〈서문(序文)〉에 “공자가 창해의 횡류를 보고 위연히 탄식했다.〔孔子睹滄海之橫流 乃喟然而嘆〕”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백성들이 어지럽게 이산하는 것이 마치 물이 마구 넘쳐흐르는 것과 같다.〔百姓散亂似水之橫流〕”라고 하였다.

[주-D079]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의 길 : “닭이 울면 일어나 힘써 선을 행하는 자는 순(舜)의 무리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 힘써 이득을 취하는 자는 도척(盜跖)의 무리이다. 순 임금과 도척의 구분을 알려면 다른 것이 없다. 이(利)와 선(善)의 사이이다.”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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