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요집》 뒤에 적음〔書尊堯集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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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2회 작성일 21-07-28 14:15본문
《존요집》 뒤에 적음〔書尊堯集後〕
옛날의 군자는 도를 품고 덕을 안아 이 세상에 큰일을 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참으로 불행하여 간당(奸黨)에 혹란(惑亂)되어 일시의 공론(公論)이 가려져서 밝지 않자, 일어나 책을 저술하여 시비를 분명하게 보이고, 차라리 일시에 화를 얻더라도 만고의 청의(淸議)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생각했으니, 이는 확연히 자신을 지켜 몸을 잊고 순국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회(理會)가 미진하여 간혹 두려워서 피하거나 혐의하는 사심이 있다면 끝내 우물쭈물 망설이며 미루는 잘못을 면하지 못해 마침내 군자의 기롱을 받기에 충분하니, 사명(四明)의《존요집(尊堯集)》같은 것이 이것이다. 공이 이락(伊洛)의 전함을 얻고 성학(聖賢)의 학문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당세 명유(名儒)의 책임을 저버렸고 임금의 신임을 얻어 도를 행하려는 바람이 도리어 지고 못난 유생들의 탄압을 받아 꾹 눌러 참고서 미루며 시사(時事)에 주먹을 불끈 쥔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 수사관(修史官)에게 언급하기를 “오로지 일록(日錄)을 근거하니, 변란의 시비가 시사를 크게 속여 신고(神考)를 박하게 하고 안석(安石)을 후하게 하며, 사사(私史)를 높이고 종묘를 탄압했으니 송 철종(宋哲宗) 때에 붓을 잡은 사람은 참으로 종산(鍾山)을 우호(右護)하는 바탕이 되어 일세(一世)의 심목(心目)이 모두 속임을 당했으니 후세에 믿을 만한 것을 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선생이 이를 걱정하여 하나의 이 책을 찬술하여 일록의 잘못되고 참람된 부분을 변정하여 공손하지 못한 배식을 논하고, 화패(禍敗)의 근원을 깊이 밝혀 다시 군신의 의리를 바로잡았으니 탄식하여 어렵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합포(合浦)가 저술한 것을 보니, 회피하고 은외(隱畏)한 자취가 있는 듯 했다. 개보(介甫 왕안석)의 은미한 심술(心術)과 주진(朱盡)의 분명한 적발은 대관(大觀 송 휘종의 연호)이 뒤늦게 후회한 작품에 이르러 비록 나라를 미혹시키고 조정을 그르친 죄를 잘 지적했으나 또한 서로 잡고 늘어지는 말이 있었으니, 간당(奸黨)의 사설(邪說)을 드러내고 일시의 공론(公論)을 의탁하기에 충분했으나 또한 사소한 사의(私意)의 실수 면하지 못했다. 더구나 고집스러운 사람이 한결같이 조정을 마음대로 하여 신묘(神廟)의 총명을 덮고 조종의 양법(良法)을 바꾸어 독이 방가(邦家)로 흐르고 화가 천하에 끼친다면 진실로 한 때 보고 들은 것에서 달아나기 어렵다. 《일록》의 작품은 종횡(縱橫)으로 열고 닫아 번쩍이게 속였으니 채변(蔡卞)이 찬사(贊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두 안석의 입과 손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소성(紹聖)의 역사는 간사한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고 아부하여 단점을 감싸고 아름다움을 빛냈으나 정정당당한 의논은 끝내 그 참람되고 거짓된 자취를 숨길 수 없음이 분명했으니, 어찌 진형중(陳瑩中)이 저서를 발휘하기를 기다린 뒤에 그 간사한 모의를 적결(摘決)하겠가? 이는 이해의 사사로움에 절박함을 면하지 못했고, 정미한 의리(義理)에 밝지 못한 듯하니, 대유(大儒)의 사업과 비교해보면 또한 밝은 달에 조금 흠이 있는 격이다. 그러나 일신을 잊고 참소의 칼날을 범하여 공의(公議)를 아끼고 인기(人紀)를 도와 간사하고 회피하는 나쁜 말이 그 꾀를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면 풍도를 듣기만 해도 나약함을 떨쳐 기운을 북돋워줄 수 있을 것이니, 그 공이 어찌 적겠는가? 내가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여《춘추(春秋)》의 책비(責備)하는 뜻을 붙인다.
[주-D001] 존요집(尊堯集) : 송(宋)나라 진관(陳瓘)이 지은 책 이름이다. 철종(哲宗)의 사관(史官)이 왕안석(王安石)의《일록(日錄)》에 근거하여《신종실록(神宗實錄)》을 개수한 것에 대하여,시비를 분변하기 위하여 저술했는데, 그가 합포에 귀양가서 지었기 때문에《합포존요집(合浦尊堯集)》이라 한다. 그의 자는 형중(瑩中), 호는 요옹(了翁)이다. 학문이 있어 진사 갑과(進士甲科)에 올랐다.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 채경(蔡京)을 써서는 안 된다고 극언(極言)하였으므로 채경이 깊이 유감을 품어 누차 귀양을 갔었는데 사면을 받아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학자가 요재(了齋) 선생이라 칭했다. 저술로는《요옹역설(了翁易說)》, 《존요집》이 있다.
[주-D002] 이락(伊洛) :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학문을 말한다. 송(宋)나라의 정호는 낙양(洛陽)에 살았고, 정이는 이천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주-D003] 채변(蔡卞) : 중국 송나라 휘종(徽宗) 때의 간신(奸臣)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사위이다. 그의 형 채경(蔡京)과 함께 선량한 사류(士類)를 많이 중상하였다.
[주-D004] 간사하고 …… 말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한쪽으로 치우친 말에서 그의 마음이 가려 있음을 알며, 지나친 말에서 마음이 빠져 있음을 알며, 부정한 말에서 마음이 도(道)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하였다.
[주-D005] 춘추(春秋)의 책비(責備)하는 뜻 : 책비(責備)는 훌륭한 사람에게 조그마한 잘못도 지적하여 완전무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은 항상 어진 사람에게 책비(責備)한다 하였는데, 현자의 잘못을 두둔하지 않고 바로 쓰는 것을 말한다.
옛날의 군자는 도를 품고 덕을 안아 이 세상에 큰일을 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참으로 불행하여 간당(奸黨)에 혹란(惑亂)되어 일시의 공론(公論)이 가려져서 밝지 않자, 일어나 책을 저술하여 시비를 분명하게 보이고, 차라리 일시에 화를 얻더라도 만고의 청의(淸議)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생각했으니, 이는 확연히 자신을 지켜 몸을 잊고 순국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회(理會)가 미진하여 간혹 두려워서 피하거나 혐의하는 사심이 있다면 끝내 우물쭈물 망설이며 미루는 잘못을 면하지 못해 마침내 군자의 기롱을 받기에 충분하니, 사명(四明)의《존요집(尊堯集)》같은 것이 이것이다. 공이 이락(伊洛)의 전함을 얻고 성학(聖賢)의 학문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당세 명유(名儒)의 책임을 저버렸고 임금의 신임을 얻어 도를 행하려는 바람이 도리어 지고 못난 유생들의 탄압을 받아 꾹 눌러 참고서 미루며 시사(時事)에 주먹을 불끈 쥔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 수사관(修史官)에게 언급하기를 “오로지 일록(日錄)을 근거하니, 변란의 시비가 시사를 크게 속여 신고(神考)를 박하게 하고 안석(安石)을 후하게 하며, 사사(私史)를 높이고 종묘를 탄압했으니 송 철종(宋哲宗) 때에 붓을 잡은 사람은 참으로 종산(鍾山)을 우호(右護)하는 바탕이 되어 일세(一世)의 심목(心目)이 모두 속임을 당했으니 후세에 믿을 만한 것을 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선생이 이를 걱정하여 하나의 이 책을 찬술하여 일록의 잘못되고 참람된 부분을 변정하여 공손하지 못한 배식을 논하고, 화패(禍敗)의 근원을 깊이 밝혀 다시 군신의 의리를 바로잡았으니 탄식하여 어렵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합포(合浦)가 저술한 것을 보니, 회피하고 은외(隱畏)한 자취가 있는 듯 했다. 개보(介甫 왕안석)의 은미한 심술(心術)과 주진(朱盡)의 분명한 적발은 대관(大觀 송 휘종의 연호)이 뒤늦게 후회한 작품에 이르러 비록 나라를 미혹시키고 조정을 그르친 죄를 잘 지적했으나 또한 서로 잡고 늘어지는 말이 있었으니, 간당(奸黨)의 사설(邪說)을 드러내고 일시의 공론(公論)을 의탁하기에 충분했으나 또한 사소한 사의(私意)의 실수 면하지 못했다. 더구나 고집스러운 사람이 한결같이 조정을 마음대로 하여 신묘(神廟)의 총명을 덮고 조종의 양법(良法)을 바꾸어 독이 방가(邦家)로 흐르고 화가 천하에 끼친다면 진실로 한 때 보고 들은 것에서 달아나기 어렵다. 《일록》의 작품은 종횡(縱橫)으로 열고 닫아 번쩍이게 속였으니 채변(蔡卞)이 찬사(贊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두 안석의 입과 손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소성(紹聖)의 역사는 간사한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고 아부하여 단점을 감싸고 아름다움을 빛냈으나 정정당당한 의논은 끝내 그 참람되고 거짓된 자취를 숨길 수 없음이 분명했으니, 어찌 진형중(陳瑩中)이 저서를 발휘하기를 기다린 뒤에 그 간사한 모의를 적결(摘決)하겠가? 이는 이해의 사사로움에 절박함을 면하지 못했고, 정미한 의리(義理)에 밝지 못한 듯하니, 대유(大儒)의 사업과 비교해보면 또한 밝은 달에 조금 흠이 있는 격이다. 그러나 일신을 잊고 참소의 칼날을 범하여 공의(公議)를 아끼고 인기(人紀)를 도와 간사하고 회피하는 나쁜 말이 그 꾀를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면 풍도를 듣기만 해도 나약함을 떨쳐 기운을 북돋워줄 수 있을 것이니, 그 공이 어찌 적겠는가? 내가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여《춘추(春秋)》의 책비(責備)하는 뜻을 붙인다.
[주-D001] 존요집(尊堯集) : 송(宋)나라 진관(陳瓘)이 지은 책 이름이다. 철종(哲宗)의 사관(史官)이 왕안석(王安石)의《일록(日錄)》에 근거하여《신종실록(神宗實錄)》을 개수한 것에 대하여,시비를 분변하기 위하여 저술했는데, 그가 합포에 귀양가서 지었기 때문에《합포존요집(合浦尊堯集)》이라 한다. 그의 자는 형중(瑩中), 호는 요옹(了翁)이다. 학문이 있어 진사 갑과(進士甲科)에 올랐다.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 채경(蔡京)을 써서는 안 된다고 극언(極言)하였으므로 채경이 깊이 유감을 품어 누차 귀양을 갔었는데 사면을 받아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학자가 요재(了齋) 선생이라 칭했다. 저술로는《요옹역설(了翁易說)》, 《존요집》이 있다.
[주-D002] 이락(伊洛) :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학문을 말한다. 송(宋)나라의 정호는 낙양(洛陽)에 살았고, 정이는 이천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주-D003] 채변(蔡卞) : 중국 송나라 휘종(徽宗) 때의 간신(奸臣)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사위이다. 그의 형 채경(蔡京)과 함께 선량한 사류(士類)를 많이 중상하였다.
[주-D004] 간사하고 …… 말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한쪽으로 치우친 말에서 그의 마음이 가려 있음을 알며, 지나친 말에서 마음이 빠져 있음을 알며, 부정한 말에서 마음이 도(道)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하였다.
[주-D005] 춘추(春秋)의 책비(責備)하는 뜻 : 책비(責備)는 훌륭한 사람에게 조그마한 잘못도 지적하여 완전무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은 항상 어진 사람에게 책비(責備)한다 하였는데, 현자의 잘못을 두둔하지 않고 바로 쓰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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