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께 답한 편지〔答退溪先生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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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9회 작성일 21-07-28 14:45본문
퇴계 선생께 답한 편지〔答退溪先生書〕
상원(上元)에 답장을 받고 삼가 추위에 잘 계심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새해를 맞아 경사가 덕과 함께 더욱 높음을 생각하니 더욱 위안이 되어 멀리서 그리던 마음에 위로됩니다. 호당(湖堂)은 봄 가운데 물색(物色)이 아주 아름다울 텐데, 멀리서 웃으며 방전(芳展)을 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제생들이 모두 흩어진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준량은 비록 나이 한 살을 더 먹었지만 전혀 진보가 없으니 스스로 정신이 흐리고 산란함이 날로 심함을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오자강(吳子强)을 만나 주자의 글을 맛볼 수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와서 강론하며 때로 함께 읽어 가는데, 그의 간절한 질문으로 인하여 의심난 곳을 깨침이 많으나, 함장(函丈 퇴계 선생을 지칭함)을 뵙고 한 번 질정(質正)하여 흐리멍덩한 것을 깨우치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의리는 무궁한데 세월은 쉽게 감을 더욱 알겠으니 벼슬을 버리고 산림(山林)에 살며 종지(宗旨)를 궁구하려고 하는데 이 뜻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서 밀양(徐密陽)은 머리를 돌림이 비록 늦었지만, 독실하게 믿고 힘써 행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접대 때문에 어지럽다는 말씀은 여러 차례 간곡한 경계를 받았으니 기쁘고 기쁩니다. 다만 부지런히 마음을 다함은 종전 작은 고을의 조촐함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춘추로 향약(鄕約)의 법규를 펴고 매달 강독하는 과정을 밝히면 서로 믿음이 미쳐갈 듯하지만, 학력이 거칠어 스스로 크게 신뢰할 바탕으로 삼을 것이 없음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다만 고을이 번거로운 도로에 있어서 왕래가 본래 번잡하여 친한 벗 사이에 간혹 요구함이 있으면 문을 닫고 끌려 나가지 않을 수 없으니, 친분에 따라 응접하고 조금 부응하여 손님을 대하는 의리를 잊지 않으려하는데, 어찌 사정에 따라 공름(公廩)을 소모하는 일이 있는 데에 이르겠습니까?
이미 일체를 쓸어버리지 못하면 또한 세속의 관점이 되니 천리(天理)에 비교하면 사사로운 일을 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엄한 스승의 경계와 균구(筠舅)의 근심으로 항상 스스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간혹 더욱 일을 줄이시면 더더욱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문지(文之)의 일은 매우 이목 놀랍게 하니 비록 나쁜 풍습에서 나왔지만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강이(剛而 이정(李楨))가 사우(祠宇)를 크게 지은 것은 더욱 괴이하게 여길 만합니다. 근래 외부에서 풍색(風色)을 의논한다는 말을 듣고 간략하게 반으로 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왕의 사전(祀典)은 고을 현인의 사우와 다른 듯한데, 지방 수령이 건립하는 것은 또한 예법에 장애는 없지 않습니까?
또 들으니,《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주해(註解)는 사문(斯文) 이순(李純)에게서 나왔는데 상고한 것이 매우 정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목을 갖춘 사람의 교정을 거치지 않았으니, 하나하나 구봉(九峯)의 종지(宗旨)에 부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응천(凝川)은 지금 벌써 상판(上板)했다고 하니 또한 미칠 수가 없습니다. 좌우(左右)께서도 한 번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 가슴에 가득한 사연은 우러러 낱낱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삼가 동정(動靜)을 맑고 고요하게 하셔서 멀리 있는 저의 바람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
[주-D001] 오자강(吳子强)을 …… 있어서 : 오자강은 오건(吳健)을 가리킨다. 황준량이 성주 목사로 재임하던 당시 1559년(명종14) 1월에 36세로 성균관 권지학유가 되었다. 곧 성주 훈도(訓導)가 되어 목사 황준량과 주서를 강론하였다.
[주-D002] 서 밀양(徐密陽) : 서구연(徐九淵)을 가리킨다. 조선 중종(中宗), 명종(明宗) 때의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咸陽)과 밀양 등 다섯 고을을 다스리다가 밀양에서 사망했다.
[주-D003] 문지(文之) : 김취문(金就文, 1509~1570)의 자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구암(久菴),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에《구암집》이 있다.
[주-D004] 구봉(九峯)의 종지(宗旨) : 남송(南宋)의 학자 채침(蔡沈)이 편집한《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을 가리킨다. 그는 채원정(蔡元定)의 아들로 자는 중묵(仲默), 구봉(九峯)에 은거하였으므로 구봉(九峯) 선생이라 불렀다. 주희에게서 수업하였으며, 주희가 짓고자 하다가 이루지 못한《서집전(書集傳)》을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
[주-D005] 응천(凝川) : 응천은 밀양의 고호(古號)인데, 여기서는 당시 부사를 역임했던 서구연(徐九淵)을 가리킨다.
상원(上元)에 답장을 받고 삼가 추위에 잘 계심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새해를 맞아 경사가 덕과 함께 더욱 높음을 생각하니 더욱 위안이 되어 멀리서 그리던 마음에 위로됩니다. 호당(湖堂)은 봄 가운데 물색(物色)이 아주 아름다울 텐데, 멀리서 웃으며 방전(芳展)을 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제생들이 모두 흩어진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준량은 비록 나이 한 살을 더 먹었지만 전혀 진보가 없으니 스스로 정신이 흐리고 산란함이 날로 심함을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오자강(吳子强)을 만나 주자의 글을 맛볼 수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와서 강론하며 때로 함께 읽어 가는데, 그의 간절한 질문으로 인하여 의심난 곳을 깨침이 많으나, 함장(函丈 퇴계 선생을 지칭함)을 뵙고 한 번 질정(質正)하여 흐리멍덩한 것을 깨우치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의리는 무궁한데 세월은 쉽게 감을 더욱 알겠으니 벼슬을 버리고 산림(山林)에 살며 종지(宗旨)를 궁구하려고 하는데 이 뜻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서 밀양(徐密陽)은 머리를 돌림이 비록 늦었지만, 독실하게 믿고 힘써 행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접대 때문에 어지럽다는 말씀은 여러 차례 간곡한 경계를 받았으니 기쁘고 기쁩니다. 다만 부지런히 마음을 다함은 종전 작은 고을의 조촐함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춘추로 향약(鄕約)의 법규를 펴고 매달 강독하는 과정을 밝히면 서로 믿음이 미쳐갈 듯하지만, 학력이 거칠어 스스로 크게 신뢰할 바탕으로 삼을 것이 없음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다만 고을이 번거로운 도로에 있어서 왕래가 본래 번잡하여 친한 벗 사이에 간혹 요구함이 있으면 문을 닫고 끌려 나가지 않을 수 없으니, 친분에 따라 응접하고 조금 부응하여 손님을 대하는 의리를 잊지 않으려하는데, 어찌 사정에 따라 공름(公廩)을 소모하는 일이 있는 데에 이르겠습니까?
이미 일체를 쓸어버리지 못하면 또한 세속의 관점이 되니 천리(天理)에 비교하면 사사로운 일을 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엄한 스승의 경계와 균구(筠舅)의 근심으로 항상 스스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간혹 더욱 일을 줄이시면 더더욱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문지(文之)의 일은 매우 이목 놀랍게 하니 비록 나쁜 풍습에서 나왔지만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강이(剛而 이정(李楨))가 사우(祠宇)를 크게 지은 것은 더욱 괴이하게 여길 만합니다. 근래 외부에서 풍색(風色)을 의논한다는 말을 듣고 간략하게 반으로 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왕의 사전(祀典)은 고을 현인의 사우와 다른 듯한데, 지방 수령이 건립하는 것은 또한 예법에 장애는 없지 않습니까?
또 들으니,《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주해(註解)는 사문(斯文) 이순(李純)에게서 나왔는데 상고한 것이 매우 정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목을 갖춘 사람의 교정을 거치지 않았으니, 하나하나 구봉(九峯)의 종지(宗旨)에 부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응천(凝川)은 지금 벌써 상판(上板)했다고 하니 또한 미칠 수가 없습니다. 좌우(左右)께서도 한 번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 가슴에 가득한 사연은 우러러 낱낱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삼가 동정(動靜)을 맑고 고요하게 하셔서 멀리 있는 저의 바람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
[주-D001] 오자강(吳子强)을 …… 있어서 : 오자강은 오건(吳健)을 가리킨다. 황준량이 성주 목사로 재임하던 당시 1559년(명종14) 1월에 36세로 성균관 권지학유가 되었다. 곧 성주 훈도(訓導)가 되어 목사 황준량과 주서를 강론하였다.
[주-D002] 서 밀양(徐密陽) : 서구연(徐九淵)을 가리킨다. 조선 중종(中宗), 명종(明宗) 때의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咸陽)과 밀양 등 다섯 고을을 다스리다가 밀양에서 사망했다.
[주-D003] 문지(文之) : 김취문(金就文, 1509~1570)의 자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구암(久菴),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에《구암집》이 있다.
[주-D004] 구봉(九峯)의 종지(宗旨) : 남송(南宋)의 학자 채침(蔡沈)이 편집한《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을 가리킨다. 그는 채원정(蔡元定)의 아들로 자는 중묵(仲默), 구봉(九峯)에 은거하였으므로 구봉(九峯) 선생이라 불렀다. 주희에게서 수업하였으며, 주희가 짓고자 하다가 이루지 못한《서집전(書集傳)》을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
[주-D005] 응천(凝川) : 응천은 밀양의 고호(古號)인데, 여기서는 당시 부사를 역임했던 서구연(徐九淵)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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