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께 올린 문목 《근사록》〔上退溪先生問目 近思錄〕 > 금계외집 7권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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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께 올린 문목 《근사록》〔上退溪先生問目 近思錄〕 > 금계외집 7권 소

퇴계 선생께 올린 문목 《근사록》〔上退溪先生問目 近思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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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2회 작성일 21-07-2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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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께 올린 문목 《근사록》〔上退溪先生問目 近思錄〕

〔문〕 1권 8장. 〈박괘(剝卦)〉는… 위에서 다 갉아버리면 아래에서 다시 생겨난다.〔剝盡於上 則復生於下〕라고 한 조목의 주(註)에 “30푼이 쌓여서 하나의 효(爻)가 되니, 10월 중순에서 11월 중순에 이르기까지가 쌓여서 복(復)괘의 한 효를 이룬다.”라고 하였으니, 30일로써 30푼에 해당시키는 것입니까?

〔답〕 이것은 보내온 그대의 말이 옳습니다.


〔문〕 13장. “태어남〔生〕을 성(性)이라 하니, 성(性)이 곧 기(氣)이고 기가 곧 성(性)인 것을, 생함을 말하는 것이다.……〔生之謂性 性卽氣 氣卽性 生之謂也……〕”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성(性)과 기(氣)는 본래 서로 떨어질 수 없는데, 한쪽을 가려내어 기질의 성〔氣質之性〕이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生)함을 가리켜 성(性)이라 하는 것은 정론(定論)이 아닌 듯합니다.

또 ‘악도 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惡亦不可不謂之性〕’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기(氣)에 국한해서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또 ‘선과 악은 모두 천리이다.〔善惡皆天理〕’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나침과 미치지 않음〔過與不及〕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대개 형체가 있은 뒤에 기질의 성이 있고, 천명(天命)으로 부여 받은 성이 순수하여 잡됨이 없으니, 이 두 단락은 매우 의심할 만합니다. 또 ‘성(性)이 곧 이(理)이니, 그 시초를 추구해보면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性卽理也 原其所自 未有不善〕’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선설(性善說)과 같으니, 저는 이 단락이 참으로 정견(定見)이라 생각합니다.

〔답〕 명도(明道)가 이 단락에서 성(性) 자를, 혹 이기(理氣)를 함께 뒤섞어 말하고, 혹은 본연의 성〔本然之性〕으로써 말하고, 혹은 기(氣)를 품부 받은 곳으로 말하였습니다. 한 단락 안에 서너 가지의 뜻이 있으니, 알아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주자 문하에서 이 단락을 논한 것이 하나가 아니며《주자어류》제 4권에 보이는 것이 더욱 상세하니, 상고해 보기 바랍니다. 지금은 여기에 상세하게 다 말할 여가가 없습니다.


〔문〕 2권 28장. “사현도가 이천을 뵈었는데……이천은 바로 사람을 단련시켜야 함을 말하고 또 딱 맞게 할 수 있는 공부를 말해 주었다.〔謝顯道見伊川……伊川直是會鍛煉得人說了 又道恰好著工夫〕”라고 한 것에서, ‘설료(說了)’로 구두(句讀)를 끊어야 합니까? ‘득인(得人)’으로 구두를 끊어야 합니까? 또 “너무 빠르게 드러낸다.〔發得太早〕”고 한 것은 ‘딱 맞게 할 수 있는 공부〔恰好著工夫〕’에 있는 것입니까?

〔답〕 ‘득인(得人)’의 인(人) 자 아래에서 구두를 끊어야 합니다. 그러나 득(得) 자는 단란(鍛爛)과 붙여서 보아야 하고, 인(人) 자는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너무 빠르게 드러낸다.’는 곳은 ‘공부(工夫)’에 붙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로 인하여 머리를 돌리고 걸음을 물려 평실(平實)한 경지에 나아가 실질적인 계획을 하는 것이 딱 맞게 공부할 수 있는 곳입니다.


〔문〕 3권 8장. “의리에 의심이 있거든 옛날 견해를 씻어 버리고……마음속에 깨우치는 것이 있으면 곧 문득 기록할지니〔義理有疑 則濯去舊見……心中有所開 卽便箚記〕”라고 한 것에서, ‘기록〔箚記〕’한다는 것은 마음에 새겨둔다는 것입니까? 책에 기록한다는 것입니까? 만약 참으로 알면 곧 녹아 풀릴 것이며, 떨쳐버리고 기억하지 않으면, 도리어 다니지 않는 산길과 같이 막혀버리게 되니, 그렇게 되면 아마도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답〕 ‘차(箚)’는 간책(簡冊)에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참으로 알면”이라고 한 것 이하는 옳습니다.


〔문〕 10장의 “묻노니, 형중이 일찍이 문중자의 …를 사랑했으니〔問瑩中嘗愛文中子〕”라고 한 구절에 의거하면, 다만 구삼(九三) 효만 사용한다.〔據此一句 只做得九三使〕”라고 한 것에서, ‘사(使)’자를 만약 ‘사용하다〔用〕’로 본다면 윗 구절에 붙여 읽어야 하고, 혹 아래 문장에 붙여 읽는 것은 잘못된 듯합니다.

〔답〕 윗 구절에 붙여 읽는 것이 옳습니다.


〔문〕 20장. “지금 시대의 사람이《역》을 읽을 때에……올자를 알지 못하면〔今時人看易……不識兀子〕”이라고 하였는데,《장자(莊子)》에 “올자무지(兀者無趾)”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한쪽 다리가 없는 것을 말하거나, 혹은 지금의 책상〔机子〕과 같은 것이라 하기도 하는데, 어떻습니까?

〔답〕 후설(後說)에 지금의 책상이라 한 것이 옳습니다.


〔문〕 4권 6장. “백순(伯淳)이 옛날 장안(長安)의 창중(倉中)에 있을 때……너무나 마음을 써서 집착하면 더욱 안정되지 않는다.〔伯淳昔在長安倉中……越著心把捉 越不定〕”라고 한 것에서, ‘월(越)’ 자를 조어(助語)로 보는 것이 아마도 은미한 뜻이 있는 것 아닙니까?

〔답〕 월(越)은 더욱〔愈〕과 같습니다. 마음을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안정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문〕 19장. “명도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에게 사백 네 가지 병이 있음은 다 자신에게서 비롯하지 않으나……〔明道先生曰 人有四百四病 皆不由自家……〕”라고 하였는데, 사람에게 사백 네 가지 병이 있음은 모두 외부로부터 감응이 되어 이르는 것으로, 모두 자신에게서 비롯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마음만은 곧 잡아 간직하는 것이 나에게 달려 있으니, 모름지기 자신에게서 비롯하게 해야 합니다. 일설(一說)에는 ‘사람에게 사백 네 가지 병이 있음은 모두 마음에서 말미암고 몸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은 반드시 자신으로부터 통솔하고 제어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답〕 앞의 말이 옳습니다.


〔문〕 5권 9장. “묻기를, 성냄을 옮기지 않는 것과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 것……자신이 조금이라도 그에 끌려가서 맞추려고 한다면〔問不遷怒不貳過……自家著一分陪奉他〕”이라 하였는데, 성낼 일이 저에게 있으나 나도 또한 그것에 간여하게 되면, 이것은 얼마간이라도 성난 마음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배봉은 따라 받든다〔陪隨奉持〕’의 뜻과 같은 것입니까?

〔답〕 이 말 역시 옳습니다. 다만 받든다〔奉持〕의 ‘지(持)’는 ‘사(事)’로 고쳐 보아야 마땅합니다. 대개 위〔上〕를 받들어 모신다는 것이니, 이른바 외물에 부림을 당한다는 뜻이 적절합니다.


〔문〕 15장. “세상에 학문이 강론되지 않아……사람이란 모름지기 한결같이 일마다 병을 없애야 하는 것이니, 그러면 의리의 마음이 항상 이기는 것이다.〔世學不講……人須一事事消了病 則義理常勝〕”라고 한 것에서, ‘한결같이 일마다’는 ‘일을 좇아서〔逐事〕’로 보아야 합니까?

〔답〕 ‘한결같이 일마다’의 말뜻은 그 차이를 분명히 알지는 못하겠으나, 아마도 그대의 말과 같을 듯합니다.


〔문〕 5장. “젖먹이 여종을 사는 것이 흔히 부득이해서 하는 일이다……다만 소비한 것만 있을 뿐이다.〔買乳婢多不得已……但有所費〕”라고 한 것에서, 다만 소비한 것만 있을 뿐이다〔但有所費〕는 윗 구절에 붙여 보아야 합니까? 젖먹이 여종을 사더라도 양쪽 자식을 다 온전하게 하지 못하면, 한갓 소비한 것만 있을 뿐이고 젖먹이 여종을 산 실상은 없다는 것입니까?

〔답〕 ‘단유(但有)’는 ‘한갓 있다〔徒有〕’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대개 이 구절은 윗 구절에 붙는 것도 아니고 또한 아래 구절에 붙는 것도 아닙니다. 윗 문장에서 이미 ‘두 아이의 젖을 가지고 세 아이를 먹이는 것이 좋다〔用二子乳 食三子之爲善〕’고 하였는데, 드디어 다만 이와 같이 두 사람의 젖먹이 여종을 산다고 말하면 실제로는 소비한 것만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의 젖먹이 여종을 샀는데 불행히 잘못되게 되면, 저 아이에게 어찌 큰 해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윗 문장에서 말한 양쪽 아이를 다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란 뜻이 됩니다. 어떠합니까?


〔문〕 7권 11장. “선생이 강연에 있을 때……걸핏하면 그저 또 걸(乞)만 말하는 것이다.〔先生在講筵……動不動 又是乞也〕”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대부가 습관적으로 ‘걸(乞)’ 자는 ‘진술해 빈다〔陳乞〕’는 뜻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동(動)과 부동(不動)이 모두 ‘걸(乞)’이라 하니, 동은 진걸(陳乞)의 동(動)입니까? 마음을 움직인다〔動心〕의 뜻입니까?

〔답〕《어록(語錄)》에 보통 ‘동부동(動不動)’이라고 말한 것은, 다만 걸핏하면〔動輒〕의 뜻입니다. 동심(動心)이란 뜻은 옳지 않습니다. 또 부동(不動) 두 글자는 반드시 실사(實辭)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문〕 8권 13장. “횡거 선생이 범손지에게 답한 편지에……대체로 임금이나 상신이〔大都君相〕”라고 한 곳에, 대도(大都)는 대개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까?

〔답〕 옳습니다.


〔문〕 9권 5장. “이천 선생이 삼학의 조목 제도를 상세히 살피고

…또 삼사의 승보하는 법을 말하였다.〔伊川先生看詳三學條制……又云三舍升補之法〕”라고 하였는데, 삼학(三學)과 삼사(三舍)는 무엇을 명명한 것입니까? 지금의 사학(四學)의 종류 같은 것입니까? 승보(升補)는 삼사(三舍)에서 조정에 등용되는 것입니까?

〔답〕 삼학(三學)은 국자감(國子監)ㆍ태학(大學)ㆍ사문학(四門學)을 말하고, 삼사(三舍)는 외사(外舍)ㆍ내사(內舍)ㆍ상사(上舍)를 말하고, 승보(升補)는 처음 외사에 들어가서, 외사에서 내사로 승보되고 내사에서 상사로 승보되는 것을 말합니다.


〔문〕 9장. “또 말하기를, 일 년에는 일 년 동안 해야 할 공부가 있으니〔又曰 一年有一年工夫〕”라고 하였는데, 계보를 수습하여 종자법(宗子法)을 세워서 점차적으로 행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닙니까? 아마도 착간(錯簡)인 듯합니다.

〔답〕 이것은 계보(系譜)를 수습하여 종자법을 세우는 한 가지 일을 말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천하 국가의 도(道)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1년, 3년, 5년, 7년이라고 한 것과 같은 종류입니다.


〔문〕 12장. “개보(介甫)가 말하기를, ‘법률의 글씨는 팔분체(八分體)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가 옳게 본 것이다.〔律是八分書 是他見得〕”라고 하였는데, 팔분체는 전서(篆書)를 변화시켰지만 고법(古法)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율서(律書)는 뒤에 나왔으나 고의(古意)에 오히려 가깝기 때문에, 그가 옳게 보았다고 한 것입니까?

〔답〕 팔분(八分)은 팔분체(八分體)의 서법(書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정교(政敎)는 분명한 도리(道理)가 있으니, 형률(刑律)로써 말한 것은 8푼〔分〕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문〕 10권 16장. “선생이 이어서 말하기를 ‘오늘날 직책을 수행하는 데 첫째로 할 일은……’ 하였다.〔先生因言今日供職 只第一件……〕”라고 하였는데, 첫째로 할 일이란 것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까? “일찍이 서명하지 않았다〔不曾簽〕”고 한 것에서, 첨(簽)은 서압(署押)과 같은 뜻입니까?

〔답〕 모두 옳습니다.


〔문〕 12권 6장. “사람들은 외물이 내 몸을 받들어 주는 것에 대해서는〔人於外物奉身〕……곧 자기의 몸과 마음은 이미 먼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却不知道自家身與心 却已先不好了也〕”라고 한 것에서,《소학》의 구결(口訣)로 보면, ‘자기의 몸과 마음을 알지 못하면 이미 먼저 좋지 못한 것이다.〔不知自家身心 則已先不好〕’라는 뜻이 됩니다. 일설에는 ‘비록 외물의 좋은 것을 얻어서 외물이 좋은 것이라고 볼 때일지라도, 곧 자기의 몸과 마음이 이미 먼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두 설이 어떻습니까?

〔답〕《소학》의 구결은 잘못되었습니다. 뒤의 설이 매우 좋습니다.


〔문〕 14권 4장. “임희(林希)가 양웅(揚雄)을 ‘관록(官祿)에 숨어 지낸 사람’이라고 말하였으니〔林希謂揚雄爲祿隱〕……문득 그를 옳다고 인정하려 하지만, 어떻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便須要做他是 怎生做得是〕”라고 하였습니다. 후인(後人)들은 양자운(揚子雲)의 저서를 보고 옳다고 생각하였지만, 양웅이 자신의 몸을 잘 처신하지 못하고 왕망(王莽)을 섬겨 저술을 한 일은 옳지 않은 것이니, 어찌 옳은 처신을 했다고 하겠습니까? 옳다〔是〕는 것은 성현(聖賢)의 일을 가리킨 것입니까? 일설에, 시(是)는 관록(官祿)에 숨어 지낸다는 뜻을 가리킨다 하니, 두 설이 어떠합니까?

〔답〕 시(是)는 곧 옳고〔是〕, 잘못되다〔非〕의 시(是)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양웅의 저서를 보고 곧 양웅을 옳다고 여기게 하려는 것이니, 어떻게 옳음이 되겠습니까? 양웅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고, 후세 사람들이 양웅을 옳다 하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문〕 10장. “명도 선생이 말하기를 ‘주무숙이 창 앞의 풀을 제거하지 않았다.’ 하였다.〔茂叔窓前 草不除去〕”라고 한 것의 주(註)에, ‘자후(子厚 장재(張載))는 당나귀가 우는 것을 듣고 또한 이와 같이 말했다.〔觀驢鳴 亦謂如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생의(生意)가 충만하여 소리가 크고 멀리까지 들려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뜰에 난 풀과 같다〔與庭草一般〕’라는 것과 무슨 의사(意思)가 있는 것입니까?

〔답〕 ‘뜰에 난 풀과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고, 또한 다만 ‘자신의 의사(意思)와 같다〔與自家意思一般〕’고 말한 것입니다. 저 물건이 자연스럽게 생의(生意)를 품고, 자연스럽게 울 줄 알아서 뜻이 통한 것이니, 곧 자신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주-D001] 사현도 : 사양좌(謝良佐)로, 현도는 그의 자이다. 송(宋)나라의 학자로서 정자(程子)의 제자 가운데 정문 네 선생〔程門四先生〕의 한 사람이다. 상채인(上蔡人)이었으므로 후인들이 상채(上蔡) 선생이라고 불렀다.

[주-D002] 형중 : 송(宋)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진관(陳瓘, 1060~1124)이고, 호는 요옹(了翁)이고, 형중은 그의 자이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요옹역설(了翁易說)》ㆍ《존요집(尊堯集)》이 있다.

[주-D003] 문중자 : 왕통(王通)의 시호이다. 수(隋)나라 용문(龍門) 사람으로 자는 중엄(仲淹)이다. 유년 시절부터 학문에 돈독하고 장안에 가서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올리고는 자신이 쓰이지 않을 것을 알고는 물러나 하분(河汾)에 살면서 문인들을 가르치며 생활하면서 후진을 양성했다. 저서에 이른바 왕씨육경(王氏六經)이 있었으나, 이미 산일하고 오직《중설(中說)》만 전한다. 《舊唐書 卷190 王勃列傳》

[주-D004] 백순(伯淳) : 송(宋)나라 때의 학자 정호(程顥)로, 백순은 그의 자이고, 호는 명도(明道)이다. 《宋元學案 卷14 明道學案》

[주-D005] 횡거 : 송나라 때 학자인 장재(張載)의 호이다. 자는 자후(子厚)이다.

[주-D006] 이천 : 송나라 때의 학자인 정이(程頤)의 호이다. 자는 정숙(正叔)이다. 숭정전 설서(崇政殿說書)로 있으면서 국자감(國子監) 학제(學制)의 조례를 정한 일이 있는데, 예의와 교양을 가르침의 기본으로 하여 매달 시험치는 것을 월과(月課)로 바꾸어 경쟁을 배제하는 등 수십 조의 학제를 마련하였다.

[주-D007] 승보하는 법 : 외사(外舍)에서 내사(內舍)로, 내사에서 상사로 올려 보입(補入)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8] 계보를 …… 것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계보를 밝히고 세족을 거두며 종자에 관한 법을 세워야 한다.〔程子曰 管攝天下人心 收宗族 厚風俗 使人不忘本 須是明譜系 收世族 立宗子法〕”라고 하였다. 《近思錄》

[주-D009] 개보(介甫) : 송나라 신종(神宗) 때의 재상 왕안석(王安石)으로, 개보는 그의 자이다. 호는 반산(半山),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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