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 노인보가 서원의 일을 논한 것에 답한 편지〔答盧星山仁父 論書院事書〕 > 금계외집 7권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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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노인보가 서원의 일을 논한 것에 답한 편지〔答盧星山仁父 論書院事書〕 > 금계외집 7권 소

성산 노인보가 서원의 일을 논한 것에 답한 편지〔答盧星山仁父 論書院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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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0회 작성일 21-07-2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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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노인보가 서원의 일을 논한 것에 답한 편지〔答盧星山仁父 論書院事書〕

창망(蒼茫)한 세모에 시내와 산에 눈이 가득하여 문을 닫고 깊숙이 살아가니, 함께 토론할 사람이 없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을 그리며 간절히 발돋움만 합니다.

가야(伽倻)의 서찰 한 통은 처음 구슬 같은 시고(詩稿)를 받고 급히 뜯어 빨리 읽어보니, 기쁘고 위안됨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게다가 진심을 담은 세 종류 물품을 멀리 남의 노인에게까지 보내주셨으니 큰 선물에 깊이 감사드리며, 보답할 수 없습니다.

저는 겨우 고을살이를 마쳤지만 미납된 조세로 어려움을 당하여 벼슬에 나아갈 계책이 없습니다. 더구나 모친의 슬하를 떠나지 않고 제 몸도 습증(濕症)을 앓아 학직(學職)에 부임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벗들의 재촉을 받고 있습니다. 양성(陽城)의 하고(下考)는 다만 맡겨둘 뿐입니다. 단지 한가롭게 지내는 달이 있지만 평상시에 공양(供養)한 것도 효험이 없고 날마다 더욱 정신이 흐리고 산란하니 우습습니다.

지난 가을에 공간씨(公幹氏 이중량(李仲樑))에게 고을 누각에 모여 담소했다고 들었는데, 동정이 매우 좋음을 잘 알았고, 겸하여 서원의 일을 언급하여 벌써 고명(高明)께서 현인을 본받고 학문을 흥기하려는 아름다운 의도가 여러 사람들의 입으로 소문이 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당을 건립한 잘못을 의논하지만, 지금 보내준 서찰을 읽어보니 사지(辭旨)가 간절하여 선을 좋아하고 교화를 일으키려는 성대한 뜻은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사모하여 마지않게 합니다.

서원(書院)에 관한 일은 고명(高明)에게 있어서 벌써 익숙하게 계획했으니 어찌 전혀 모르는 맹인에게 방도를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벌써 저에게 물어주시니, 어리석은 견해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 가호(家戶)에 글방을 두어 한 지역도 교육하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아주 큰 고을에 학문에 전념할 곳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흠사(欠事)가 아니겠습니까. 교원(敎員)이 자리에 기대면 제생(諸生)이 두건을 쓰고 따르며 뜻을 품은 선비들은 향교(鄕校)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오직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멀리 속세를 떠났으니, 앞에 사생(師生)의 구애가 없고 뒤에 율령(律令)의 얽매임이 없어서 도의 진수를 맛보고 위로 성현(聖賢)을 희구(希求)하여 도를 펴는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 서원으로부터 배출한 경우가 많으니, 회옹(晦翁 주희(朱熹))께서 백록(白鹿)서원을 보수하여 선비들이 모이는 문풍(文風)을 이루었습니다.

중국 조정에서 천여 곳에 건립하여 현인을 존모하고 인재를 양육하는 터전으로 삼았으니, 어찌 근본한 바가 없겠습니까. 이름 지을 만한 한 가지 행실이나 한 가지 절개도 또한 기어코 표출(表出)하니, 아름다움을 표창하고 선행을 사모하려는 뜻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문렬(文烈 이조년(李兆年)의 시호)의 외롭고 곧은 충절(忠節)은 원(元)나라 조정을 섬겨 왕가(王家)를 위하여 충성을 다했으니, 공명(功名)과 덕업(德業)이 일대(一代)에 빛나는 분을 마땅히 제사드림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고명께서 이 지역의 수령으로 와서 이 분을 존모하고 겸하여 문충(文忠 이인복(李仁復)의 시호)에게 미쳤으니, 급선무(急先務)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사당과 서원을 세움은 천만년토록 사모할 터전을 위함이니, 반드시 선성(先聖)을 이어서 후학을 계도한 공이 있어서 세도(世道)를 유지하고 백세(百世)의 표준이 될 만한 뒤에야 서원을 세워도 마땅하여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 노인이 하늘을 감동시킬 충의(忠義)는 비록 본 바가 없고 또한 유학(儒學)에 종사함도 보지 못했으면 다만 학문(學文) 가운데 일단(一端)으로 성인(成人)이라 하여 묘원(廟院)에 들이지 못하니, 어찌 바깥사람들의 의심을 면하겠습니까. 이는 이른바 ‘향선생(鄕先生)’을 사당에 제향(祭享)할 수 있음은 별도로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이 바로 그 마땅한 일입니다. 낙중(洛中) 제현(諸賢)들의 제삼의 설은 아마 혹시 그러할 것입니다.

저의 뜻은 문열사(文烈祠)를 구거(舊居) 곁에 세우고 문충(文忠)을 종사(從祀)하여 후예(後裔)들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고 향화(香火)를 지키게 하여 고을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제향하게 하고 한가로운 터에 서원을 건립하여 선비들이 강학하는 장소로 삼는다면, 충렬을 표창하고 교화를 흥기함이 아울러 시행되어 어긋나지 않을 것이니, 남의 흠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비방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성된 묘원(廟院)을 옮겨 정함은 옳지 못하니, 우선 원례(院隷)에게 묘우를 지키고 향생(鄕生)에게 향사를 지내게 함도 또한 변고(變故)에 대처하는 권도(權道)에 맞을 것입니다. 묘우가 서원 가까이 있어서 출입하는 학도(學徒)들은 모두 참배할 수 있고, 또한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마음에 미안함이 없지 않은 데에야 어찌 하겠습니까. 일찍이 퇴계 선생을 뵙고 이 일을 의논했는데, 저의 견해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명의 마음 씀이 성실하고 지극함을 가상하게 여겼고 또한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겼던 까닭으로 차마 저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번 선생의 서한은 곡절이 또 많아 다시 선생의 의견을 도모하여 인편에 부치니, 군수 중보(重甫)를 만나거든 또한 그대의 뜻을 전하기 바랍니다.

제가 일찍이 단구(丹丘 단양) 수령으로 재임할 때 황폐한 학교를 중신(重新)하고 고을에 좨주(祭酒) 우탁(禹倬)이 계셨는데, 높은 충절과 아름다운 학행은 참으로 묘원(廟院)을 세울 만했지만, 힘이 모자라고 솜씨가 졸렬하여 다만 문묘(文廟)의 아래 한 칸을 붙였을 뿐이니, 지나치게 천하고 제 마음대로 했다고 남에게 비평을 받겠지만, 단지 일의 마땅함과 그렇지 않음을 묻는다면 어찌 반드시 세속의 관점에 다 합치하겠습니까.

일찍이 들으니,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자손이 귀주(貴州 성주의 옛이름)에 살고 있다는데, 또한 전사(田舍)에 왕래한 옛 자취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만일 남아있다면 선생을 주향(主享)하고 제공(諸公)을 배향(配享)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름지기 빌려 들여서 구차하게 채울 것은 없습니다. 고명(高明)께서 고을의 현명한 대부들 및 어진 선비들과 수말(首末)을 상의하여 처리할 일이지 반드시 저의 말을 표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돌아가는 심부름꾼이 서서 독촉하고 산의 해가 갑자기 침침하여 서찰에 회포를 다 쓰지 못했으니 마땅히 후일 인편을 기다리겠습니다.

진중(珍重)한 보첩(寶帖)을 멀리서 인편으로 보내주시어 반복해서 읽어보니, 마치 마주 대하고 회포를 푸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매우 위로되었습니다. 게다가 보내주신 청풍(淸風 부채)을 받으니, 마치 고인(故人)을 만난 듯하여 문득 체증에서 소생됨을 깨닫겠습니다. 인하여 묘원(廟院)이 벌써 완성되고 선비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이미 일대사를 마쳤음을 알았으니, 어찌 사문의 다행이요 붕우의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예컨대, 서적을 보관하고 전답을 두어 구처(區處)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라도 빠뜨림이 없어야 할 것이니, 멀리서 생각건대 매우 신경이 허비될듯하여 참으로 양공(良工) 홀로 수고로웠을 것입니다. 임기가 끝난 뒤의 일은 곧바로 조물주에 부칠 따름입니다.

기문(記文)을 짓는 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면 퇴계 선생에게 위촉해야 할 것이니 어찌 그 일을 맡을 분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수양(首陽)과 영양(永陽) 같은 사람이 요구해도 일찍이 허락을 하지 않았으니, 또한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이문열(李文烈)이 세운 절의(節義)가 뇌락(磊落)하여 흠앙한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고명께서 충렬을 드러내고 현재(賢才)를 양성함이 한결같이 혈성(血誠)에서 나왔으니 만일 간절한 정성을 한번이라도 바친다면 비록 몸소 가서 뵙지는 않더라도 그 무슨 말로 사양하겠습니까. 만일 황무(荒蕪)한 것과 같은 것은 깎아낼 계책도 없이 여러 번 부지런히 부탁하게 된다면 아마도 성대한 거사에 흠이 될 것입니다.

제가 비록 물러나 한가롭게 있지만 연달아 질병을 앓았고 도산(陶山)에 가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더운 여름철이 바뀌었으니, 게으르다는 질책은 좌우에게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나가서 뵙는다면 마땅히 도타이 권면하여 거의 두터운 바람에 답하려고 합니다. 다만 보내주신 영봉록(迎鳳錄)은 벌써 책으로 완성했으니, 흠잡지 않을 필요가 없겠습니다. 저의 뜻에 의혹이 있어서 감히 이처럼 아룁니다. 영봉록 가운데 중원(中原) 서원(書院)의 장소 및 장서(藏書)와 학전(學田) 따위를 갖추 실은 것은 고사를 끌어서 증거로 삼아 말하려는 듯하나,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죽계잡지(竹溪雜志)》는 이제 주무릉(周武陵 주세붕(周世鵬))의 허물이 되었습니다. 고명의 견해로 어찌 반드시 따라서 이루려고 합니까. 다만 서질(書帙)을 베껴서 학전(學田)의 수량이나 모든 시행하는 조목들은 유사(有司)에게 적어서 부쳐 잘 전하여 지키도록 하는 것도 또한 도를 보위(保衛)하는 바탕이 될 것입니다. 서원에 들어온 선비는 과거의 격식에 구애되니, 이는 소수서원의 좁은 제도입니다. 그런데 귀원(貴院)도 입격(入格)한 선비를 먼저 받아주니, 말세의 일은 비록 정식(程式)을 완전히 폐기하지 못하겠지만, 운림(雲林)의 장수(藏修)하는 지역에 자질구레하게 문예(文藝)의 득실이란 말단을 계교(計較)하여 인륜을 밝히고 풍속을 선하게 하는 근본을 우선으로 삼지 않는다면, 비록 상투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부지런히 공부하게 하더라도 한갓 이익을 노리는 바탕이 될 뿐이니, 실제 쓰임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고명(高明)께서 겨우 과정(課程)을 설치하자마자 이미 미쳐갈 효과를 보셨으니 급박하게 이루려고 책임지우지 말고 강습(講習)하여 공효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록학규(白鹿學規) 및 사잠(四箴)은 우매한 사람의 지남철이 되니, 강당(講堂)에선 빠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바르게 써서 높게 걸어야 하니, 예컨대, 서당이나 재사의 문루(門樓)에 반드시 퇴계(退溪)가 대자로 쓴 편액을 받아서 온 서원을 빛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명호(名號)를 돌아보아 의리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도 감히 뒤로하지 못할 것이니,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황량한 연기 속에 있다가 사특함을 몰아내고 기반이 바로 잡혔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다행입니다. 한 번 문장(門牆)에 들어가면 현가(絃歌)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고명의 상쾌함에 바람 쏘이고 이락(伊洛)의 감한(紺寒)에 양치질하는 것은 헛된 계획을 공연히 달리고, 얽매이고 막혀 풀리지 않으니, 바람을 받고 선 듯이 부끄러워 답답함을 금하지 못합니다.

이어서 긴 서찰을 받았는데 말씀이 더욱 간절하니, 기다리던 무렵에 더욱 깊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묘원(廟院)에 대한 일은 이미 이루어진 규정이 있으므로 다시 확장해서는 안 되니, 또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향선생(鄕先生)을 사(社)에서 제사지냄은 예전에도 그런 예가 있었지만, 지역이 서로 가깝고 또 수호하기 편리하다면, 이 일은 단연코 다른 의심이 없습니다. 비록 외부의 시비가 있겠지만 어찌 다시 집집마다 알리겠습니까. 다만 보내주신 서찰을 받아 진수(眞手)를 그리고 단주(團珠 둥근 구슬)를 걸고 있는 것을 보니 의심할 만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문성(文成)과 문충(文忠)의 영정(影幀) 같은 것은 이런 일이 없습니다. 이는 비록 속태(俗態)를 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또한 밝은 달에 난 흠이 될 것입니다. 괴애(乖崖)가 앉아있는 영당(影堂)에 학도(學徒)들이 읍(揖)도 하지 않는 폐단이 있는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영정이 만일 묘당에 안치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면 밤나무〔栗〕로 대신하여 문묘(文廟)의 위판(位版)과 같이 한다면 무방할 듯합니다.

기문(記文)을 청하셨는데 지금까지 지연되었으니, 게으르다는 질책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러나 어찌 성의가 없는 탓이겠습니까. 저가 비록 보잘것없지만 퇴옹(退翁)이 소외시키지 않고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드러내어 조금도 숨김이 없었으니, 고명(高明)께서 나를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난겨울과 봄부터 좌우께서 보낸 서찰을 하나하나 질정(質正) 받았는데, 공께서 자주 칭찬하며 허여했고, 서찰이 오갈 때에 여러 차례 전말을 다 서술했으니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찌 얼굴을 대하여 말하고 귀에 대고 자세하게 말하는 것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일 옳다고 여긴다면 마땅히 단연코 실행하여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만일 기꺼이 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백 번이나 간청해도 돌이키지 않을 것이니, 어찌 직접 권면하여 이루도록 다그치겠습니까.

공께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 적지 않은 구설수를 만나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고 글을 지어달라는 부탁도 항상 대가들에게 미루고 손대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해양(海陽)과 영양(永陽)의 요청은 과연 허락하지 않았으니, 저도 단양의 새로 지은 향교 기문을 요청하여 여러 차례 간청했지만 거절하셨습니다. 다른 뜻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이로써 스스로 감당하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오직 영천(榮川 경북 영주)은 저의 고향인데다 또 처가 고을이니, 학당(學堂)의 기문(記文)과 재사(齋舍)의 편액(扁額)은 모두 이름 지어 걸었으나 오히려 경계를 깨뜨리고 함부로 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더구나 귀원(貴院)은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더욱 이런 시비의 무더기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직접 청하지 않고 이렇게 완곡하게 손을 빌리는 것은 벌써 의심스럽고 괴이합니다.

지금 들으니 귀댁의 심부름꾼이 바로 도산(陶山)에 도착하여 주옥같은 서한(書翰)으로 간절한 심정을 다 전했으리라 생각되니, 반드시 한 말씀을 내리실 것입니다. 《영봉지(迎鳳志)》는 또한 인편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만일 요청대로 되지 않으면 공께서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마땅히 노방(老龐)을 뵙고 다시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마침 복통을 앓고 있고 괴로워 장마가 진 뒤에 산길이 떠내려가고 끊어져 다닐 수가 없어서 감히 나가지 못하니, 다만 고명의 두터운 명망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또한 퇴옹(退翁)께서 배를 띄우고 달구경 하자던 약속도 어겼으니, 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 더욱 심합니다. 게다가 성대한 일을 하면서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잘못 의논하니, 기뻐하던 나머지 때때로 간혹 어리석은 생각을 말씀드리지만, 일을 서술하는 글은 진실로 대롱으로 표범의 무늬를 엿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으쓱거리며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자주 훌륭한 가르침을 보여주셨으니, 어찌 이른바 서로 마음을 알아줌이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영봉지》가운데 일은 이전 서찰에서 벌써 말씀드렸습니다. 서원을 지은 것은 백운동에서 창설되어 많게는 네 곳에 이르렀는데, 이미 나라의 학교가 되었고 장서(藏書)와 학전(學田)도 익숙하게 보고 들어 사람들을 놀랍고 괴이하게 여기는 데에 이르지 않습니다. 무릉(武陵 주세붕을 지칭함)의 번잡하고 너절한 말은 이미 함께 의논할 때에 삭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명께서 따라서 이루려는 일은 거의 물어보는 날에 완비함을 요구하려 합니다. 지금《죽계지》를 펼쳐 한번 보면 또렷이 알 수 있습니다. 무릇 군자가 교육을 베풀고 일을 행할 적에 다만 오도(吾道)를 밝힘에 힘써서 알아주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이 즐김을 기다려야 할 것이지, 시속을 따라 구애되니 영원히 남이 알아주기를 구해 남의 구설을 면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현경(太玄經)》을 초하는 사람도 오히려 후세의 자운(子雲)을 기다렸는데, 어찌 헛된 명성을 베풀 곳이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서원에 입학할 선비를 선발함은 입격(入格)한 사람으로 제한해야 하니, 말세(末世)의 규정은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선행으로 인도할 무렵에 근본에 힘쓰는 의리도 함께 보여주어 전부가 과거에 합격하고 이익을 탐하는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문장(門牆)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비록 아직 입격(入格)하지 못했더라도 대략 사학(四學)에서 일시 먹여주는 제도를 모방하여 학교를 흥기시키는 길을 넓혀야 할 것이니,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섬학전(贍學錢)이 매우 많고 부리는 노복(奴僕)들이 넉넉하면 유학(游學)하는 선비들의 많고 적음을 규정하지 않더라도 어찌 계속 지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후학들이 비록 고명께서 마음 쓰는 것과 같이 다 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찌 다 무관(無關)하게 보는 것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이천(伊川) 선생께서 월서계고(月書季考)의 제도에서 문자(文字)로 올리고 떨어뜨리는 것〔升黜〕은 본의를 크게 잃었는데, 회옹(晦翁)은 안정호(安定湖)의 호학제(湖學制)에 비루한 부분이 많다고 하여 항상 학정(學政)을 변경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항상 슬픈 뜻을 품고 있었다가 우연히 귀원(貴院)에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지나치게 유의해 주셨으니, 다시 상세하게 보여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학규(學規)는 예사롭게 보지 마시고 이름을 살펴보고 의를 생각하게 하는 것도 감히 늦추어서 안 될 듯합니다. 학규 가운데 절목(節目)은 이미 완전하게 구비되었으니 비록 기문을 얻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일에 큰 흠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마침내 아껴서 지어주지 않지는 않을 것임이리까.

도수(陶叟 이황)가 회답한 서찰 한 장은 기문(記文)에 대한 일로 답하여 거듭 보낸 것이 있는데, 다만 두 사람 사이에 사적으로 오고간 것이니, 다른 사람들 눈에 보여서 비웃거나 성나게 하는 자료로 삼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바쁘겠지만 여가를 내어 봉해서 돌려보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의 서간도 도산(陶山)으로 보내어 도와 이루도록 하였으니 공의 뜻을 마침내 괄시하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공께서 애호함을 믿고 거칠고 망녕되게 진술했는데 바깥 사람이 보게 될까 두려우니, 아울러 신중하게 더욱 성대하기를 바랍니다.

[주-D001] 노인보 : 노경린(盧慶麟, 1516~1568)으로, 인보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곡산(谷山), 호는 사인당(四印堂)이다. 153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학유ㆍ박사를 거쳐 공조ㆍ예조ㆍ호조ㆍ형조의 낭관(郎官)을 역임하였다. 성주 목사로 있을 때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세웠다.

[주-D002] 중보(重甫) : 박승임(朴承任)으로, 중보는 그의 자이다. 당시 성주 군수로 재직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D003] 김굉필(金宏弼) …… 없습니다 : 성주 지역에 이천(伊川)과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있음으로 인하여 천곡(川谷)이라 사원 이름을 짓고, 정주(程朱) 양 선생(兩先生)을 주향하고, 한훤(寒暄)을 종향(從享) 했다. 당초 배향하려던 이조년과 이인복은 별도로 사당을 지어 배향하였다.

[주-D004] 죽계잡지(竹溪雜志) : 1544년(중종39) 겨울 10월에 주세붕(周世鵬)이 편찬한 《죽계지(竹溪志)》를 가리킨다. 주자(朱子)의 글을 취하여 〈존현록(尊賢錄)〉을 만들었고, 학전(學田)ㆍ장서(藏書)에 관한 기록을 취하여 각각 〈학전록〉ㆍ〈장서록〉이라 하였는데, 이들을 잡록(雜錄)이라 했다. 그는 1541년(중종36) 47세의 나이로 예빈시 첨정을 지내고 7월 4일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부임하여 1542년 8월 15일 문성공묘 기공식을 하고 1543년 8월 11일 문성공 영정을 사당에 봉안하고, 이어서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주-D005] 주무릉(周武陵)의 허물이 되었습니다 : 이황이 이를 두고 비판한 글이 있다. 《퇴계집(退溪集)》권12 〈박택지에게 주다〔與朴澤之〕〉에 “왕년에 상산(商山) 주경유(周景遊)가 풍읍(豐邑)에서《죽계지(竹溪志)》를 찬(撰)하여 완성되자 바로 출판하였습니다. 내가 사우(士友) 몇 사람과 함께 자못 그 결점을 지적하여 고치기를 청하자 주경유가 스스로 옳다고 고집하며 듣지 않았는데, 지금 그 책을 보는 사람들은 병통이 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개 공정한 시비는 누구나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니, 어찌 일개인의 사견으로 배척해 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D006] 백록학규(白鹿學規) 및 사잠(四箴) :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는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에 게시한 학문의 목적과 방법을 적은 일종의 교육 지침이다. 사잠은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지은 시잠(視箴), 청잠(聽箴), 언잠(言箴), 동잠(動箴)을 가리킨다

.[주-D007] 현가(絃歌) : 거문고를 타며 시가를 읊조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공자가 일찍이 무성(武城)에 가서 현가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당시 무성의 원〔宰〕이었던 자유(子游)에게 농담으로 이르기를 “닭 잡는 데에 소 잡는 칼까지 쓸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예악 교화(禮樂敎化)를 의미한다. 《論語 陽貨》

[주-D008] 문성(文成)과 문충(文忠)의 영정(影幀) : 안향(安珦)과 이제현(李齊賢)의 영정을 가리킨다.

[주-D009] 괴애(乖崖)가 …… 하겠습니까 : 괴애는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호인데, 세종 때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존경하던 고승 신미(信眉)의 동생으로 불경에 달통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육경(六經)에 해박하여 뒤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일탈한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켜 세인의 혹평을 받았다.

[주-D010] 노방(老龐)을 …… 것입니다 : 매우 공경하는 어른을 만나 뵙고 예(禮)를 갖추어 절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퇴계를 지칭한다. 후한(後漢) 때 제갈량(諸葛亮)이 방덕공(龐德公)을 찾아가면 반드시 방덕공이 앉은 상(牀) 아래서 공경히 절하였는데, 방덕공은 제지하지 않고 태연히 절을 받았다는 고사에서 생긴 말이다. 《資治通鑑 卷65》

[주-D011] 태현경(太玄經)을 …… 기다렸는데 : 자운(子雲)은 전한(前漢) 양웅(揚雄)의 자이다. 그가《태현경(太玄經)》을 짓자 사람들이 비웃으니, 자운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해 될 것이 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있어 반드시 좋아할 것이다.” 하였다. 《御定唐宋文醇 卷3 昌黎韓愈文4 與馮宿論文書》여기에서는 후세에 훌륭한 문장가가 나와서 바로잡을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주-D012] 월서계고(月書季考)의 제도 : 매월 한 차례씩 배운 것을 써 보게 하고, 사계절에 한 차례씩 배운 내용이나 시문(詩文)을 시험 보이는 제도이다.

[주-D013] 안정호(安定湖)의 호학제(湖學制) : 송나라 학자 호원(胡瑗)이 일찍이 호주 교수(湖州敎授)가 되어 경의재(經義齋)ㆍ치사재(治事齋)를 두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 정한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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