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跋〕 이광정(李光庭) [이광정(李光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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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1회 작성일 21-07-28 13:48본문
발〔跋〕 이광정(李光庭) [이광정(李光庭)]
금계선생문집(錦溪先生文集) 12권 가운데 원집(元集) 4권은 퇴도(退陶) 선생께서 손수 편정하여 단산군(丹山郡)에서 개간(開刊)하였고, 외집(外集) 8권은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께서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재임할 때 수교(讐校)하고 정서(淨書)하여 간행하려 했으나 미처 실행하지 못하고 정 선생께서 관직을 떠나게 되어 그 고본(稿本)을 선생의 본손(本孫)에게 돌려주었다. 선생의 집안에 연이어 상화(喪禍)가 있고 선생을 모신 서원의 사력(事力)이 피폐하여 간행할 재물을 준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단산(丹山) 판본(板本)도 화재를 당하여 선생의 한 글자 한 마디도 사라져 전해질 수 없게 되었다.
무오년(1738, 영조14) 봄에 덕수(德水) 이만화(李萬華) 군이 동주(洞主)가 되어 원중(院中)의 장보(章甫 유생)들과 서원에 저축된 재물 약간을 내어 중간을 도모하였는데 선생의 종손인 상화(尙鏵)가 실제 주관하였으나 시작하기 전에 황군이 불행하게도 죽었다. 이전 해 겨울에 사림이 판각을 도모하여 상사(上舍) 김익경(金翼景) 군에게 부탁하여 간행하는 일을 감독하여 바로잡게 하였다. 동주 황군 정대(黃君鼎大)가 책을 들고 종손군(宗孫君) 중윤(仲胤 둘째 아들) 윤덕(潤德)과 함께 나에게 와서 사본(寫本)의 와오자(訛誤字)를 교수(校讐)해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본디 식견이 없는 데다 늙고 질병이 심하여 사문(斯文)의 간역(刊役)을 도울 수가 없었지만, 평생 깊이 경모(景慕)하였으므로 죽기 전에 유문(遺文)이 세상에 간행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이에 혼매(昏昧)함을 헤아리지 않고 본군(本郡)의 사림과 서로 질문하고, 각기 지견(知見)이 미치는 바를 적어서 판각하도록 하였다.
금년 중하(仲夏)에 윤덕(潤德)의 형 윤구(潤九)가 와서 간역이 벌써 완료되었다고 말하였다. 그 전말을 기록하는 일은 또 늙고 병든 사람이 맡을 바가 아니지만 윤구가 매우 간절하게 요청하기에 일어나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선생은 빼어난 재능을 타고나서 일찍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일시에 여러 노성(老成)한 분들에게 추천을 받았다. 이에 머리를 돌리고 발길을 멈추어 중인(衆人)들이 맛보지 않는 것을 맛보아 퇴도(退陶) 선생께서 깊이 허여(許與)하시며 오도(吾道)에 사람 얻은 것을 기뻐하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세가 50이 되지 않아 뜻을 지닌 채 지하로 갔으니, 아 애석하도다. 혹시 하늘이 선생에게 수십 년을 빌려주어 대업(大業)을 잘 마무리하도록 했다면, 선생께서 도를 향한 돈독함과 학문을 좋아하는 용기로 주자의 글에 힘을 써서 마침내 사문(師門)의 부탁을 잇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주자의 학문을 전수함에 선생이 아니면 장차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퇴도(退陶) 선생께서 항상 도가 외로워졌다는 애통과 잃음을 안타까워하는 말씀이 간절하여 누차 붕우들과 수작(酬酢)하는 사이에 발하셨으니 어찌 서로 허여한 것이 깊었을 뿐이겠는가. 선생의 문장은 참으로 선생의 지극한 것이 아니지만 그 서적을 읽어보고 그 사람을 상상하며 그 언어로 인하여 그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선생의 평일 사업도 이 문집을 제외하고 구하지 못할 것이다. 또 내외 문집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해타(咳唾)와 성기(聲氣)의 나머지이니, 진실로 공교롭고 졸렬함을 가릴 것이 없다. 그러나 노선생(老先生 이황)께서 초록한 분량이 5분의 1에 지나지 않으니 취사(取舍)할 바가 아니다. 단양군의 능력에 비긴다면 우선 더욱 긴절한 것을 전할 따름이다. 그 외집은 또 정 선생(鄭先生)께서 손수 교감하고 정서한 것이니 후학들이 의논하여 감히 수정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감히 합하여 한 편(編)으로 하지 않은 것은, 원집을 먼저 간행했고 외집(外集)은 다음에 간행했기 때문에 두 선생께서 서차(序次)하신 체례(體例)를 보존하고, 행장(行狀)과 제문(祭文), 만장(挽章) 약간 편을 부록으로 실어 전집(全集)으로 하였다.
아, 선생께서 후학(後學)을 버리신 지가 이제 200여 년이 되었는데 7, 8세(世)를 지나 지금 비로소 간행하였으니, 사문(斯文)의 드러남과 감춰짐이 또한 운수가 존재하는 것인가. 이에 그 한두 가지를 뒤에 적어서 일을 주간(主幹)한 제군(諸君)들의 정성스러운 뜻을 드러낼 따름이다.
영조(英祖) 31년 을해년(1755) 중하(仲夏)에 후학(後學)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 삼가 적다.
[주-D001] 이광정(李光庭) : 1674~1756.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다. 어려서부터《좌전(左傳)》,《국어(國語)》,《한서(漢書)》,《사기(史記)》, 굴원(屈原) 등의 문장 읽기를 좋아했는데, 나이가 든 후에는 찬술하는 것을 그만두고 홀로 거처하면서 육경(六經)만을 강마하였다. 한편 영남 선현의 문집을 교감하고 서문을 지었다.
금계선생문집(錦溪先生文集) 12권 가운데 원집(元集) 4권은 퇴도(退陶) 선생께서 손수 편정하여 단산군(丹山郡)에서 개간(開刊)하였고, 외집(外集) 8권은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께서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재임할 때 수교(讐校)하고 정서(淨書)하여 간행하려 했으나 미처 실행하지 못하고 정 선생께서 관직을 떠나게 되어 그 고본(稿本)을 선생의 본손(本孫)에게 돌려주었다. 선생의 집안에 연이어 상화(喪禍)가 있고 선생을 모신 서원의 사력(事力)이 피폐하여 간행할 재물을 준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단산(丹山) 판본(板本)도 화재를 당하여 선생의 한 글자 한 마디도 사라져 전해질 수 없게 되었다.
무오년(1738, 영조14) 봄에 덕수(德水) 이만화(李萬華) 군이 동주(洞主)가 되어 원중(院中)의 장보(章甫 유생)들과 서원에 저축된 재물 약간을 내어 중간을 도모하였는데 선생의 종손인 상화(尙鏵)가 실제 주관하였으나 시작하기 전에 황군이 불행하게도 죽었다. 이전 해 겨울에 사림이 판각을 도모하여 상사(上舍) 김익경(金翼景) 군에게 부탁하여 간행하는 일을 감독하여 바로잡게 하였다. 동주 황군 정대(黃君鼎大)가 책을 들고 종손군(宗孫君) 중윤(仲胤 둘째 아들) 윤덕(潤德)과 함께 나에게 와서 사본(寫本)의 와오자(訛誤字)를 교수(校讐)해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본디 식견이 없는 데다 늙고 질병이 심하여 사문(斯文)의 간역(刊役)을 도울 수가 없었지만, 평생 깊이 경모(景慕)하였으므로 죽기 전에 유문(遺文)이 세상에 간행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이에 혼매(昏昧)함을 헤아리지 않고 본군(本郡)의 사림과 서로 질문하고, 각기 지견(知見)이 미치는 바를 적어서 판각하도록 하였다.
금년 중하(仲夏)에 윤덕(潤德)의 형 윤구(潤九)가 와서 간역이 벌써 완료되었다고 말하였다. 그 전말을 기록하는 일은 또 늙고 병든 사람이 맡을 바가 아니지만 윤구가 매우 간절하게 요청하기에 일어나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선생은 빼어난 재능을 타고나서 일찍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일시에 여러 노성(老成)한 분들에게 추천을 받았다. 이에 머리를 돌리고 발길을 멈추어 중인(衆人)들이 맛보지 않는 것을 맛보아 퇴도(退陶) 선생께서 깊이 허여(許與)하시며 오도(吾道)에 사람 얻은 것을 기뻐하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세가 50이 되지 않아 뜻을 지닌 채 지하로 갔으니, 아 애석하도다. 혹시 하늘이 선생에게 수십 년을 빌려주어 대업(大業)을 잘 마무리하도록 했다면, 선생께서 도를 향한 돈독함과 학문을 좋아하는 용기로 주자의 글에 힘을 써서 마침내 사문(師門)의 부탁을 잇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주자의 학문을 전수함에 선생이 아니면 장차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퇴도(退陶) 선생께서 항상 도가 외로워졌다는 애통과 잃음을 안타까워하는 말씀이 간절하여 누차 붕우들과 수작(酬酢)하는 사이에 발하셨으니 어찌 서로 허여한 것이 깊었을 뿐이겠는가. 선생의 문장은 참으로 선생의 지극한 것이 아니지만 그 서적을 읽어보고 그 사람을 상상하며 그 언어로 인하여 그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선생의 평일 사업도 이 문집을 제외하고 구하지 못할 것이다. 또 내외 문집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해타(咳唾)와 성기(聲氣)의 나머지이니, 진실로 공교롭고 졸렬함을 가릴 것이 없다. 그러나 노선생(老先生 이황)께서 초록한 분량이 5분의 1에 지나지 않으니 취사(取舍)할 바가 아니다. 단양군의 능력에 비긴다면 우선 더욱 긴절한 것을 전할 따름이다. 그 외집은 또 정 선생(鄭先生)께서 손수 교감하고 정서한 것이니 후학들이 의논하여 감히 수정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감히 합하여 한 편(編)으로 하지 않은 것은, 원집을 먼저 간행했고 외집(外集)은 다음에 간행했기 때문에 두 선생께서 서차(序次)하신 체례(體例)를 보존하고, 행장(行狀)과 제문(祭文), 만장(挽章) 약간 편을 부록으로 실어 전집(全集)으로 하였다.
아, 선생께서 후학(後學)을 버리신 지가 이제 200여 년이 되었는데 7, 8세(世)를 지나 지금 비로소 간행하였으니, 사문(斯文)의 드러남과 감춰짐이 또한 운수가 존재하는 것인가. 이에 그 한두 가지를 뒤에 적어서 일을 주간(主幹)한 제군(諸君)들의 정성스러운 뜻을 드러낼 따름이다.
영조(英祖) 31년 을해년(1755) 중하(仲夏)에 후학(後學)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 삼가 적다.
[주-D001] 이광정(李光庭) : 1674~1756.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다. 어려서부터《좌전(左傳)》,《국어(國語)》,《한서(漢書)》,《사기(史記)》, 굴원(屈原) 등의 문장 읽기를 좋아했는데, 나이가 든 후에는 찬술하는 것을 그만두고 홀로 거처하면서 육경(六經)만을 강마하였다. 한편 영남 선현의 문집을 교감하고 서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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