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사호 유무에 관한 변론〔四皓有無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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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0회 작성일 21-07-27 04:50본문
상산사호 유무에 관한 변론〔四皓有無辨〕
삼가 고찰해본다. 한(漢) 나라 여택(呂澤)이 장량(張良)의 계책을 이용하여 태자의 편지를 받들고 가서 사호(四皓)를 맞이해오자 한 고조(漢高祖)가 이상해서 놀라 말하기를 “어떻게 내 아들을 따르며 교유하시오? 공들은 끝까지 태자를 보호해주기를 바라오.”라고 하면서 마침내 태자를 바꾸지 않았다.
내 생각에, 이 네 사람이 꼭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들을 맞이해 왔다는 일은 아마 반드시 있었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그들에게 우익(羽翼)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실로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꾀이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분서갱유의 참화를 일으키자 선비들 중에는 먼저 기미를 알고 세상을 도피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예컨대 서불(徐巿)은 속세 밖의 술사(術士)였고 무릉도원은 피란한 유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저 네 명의 노인들도 상산(商山)에서 소매를 떨치고 세속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영지(靈芝)를 따서 허기를 채우고 바둑을 두며 긴 날을 보내면서 옛적 요순(堯舜) 시대를 그리워하고, 화산(華山)과 위수(渭水)의 유풍을 사모하였다. 그리고 부귀한 삶을 걱정하고 빈천한 삶을 즐겁게 여겼다. 그런즉 큰 바다를 나는 봉황의 뜻을 어찌 세속의 그물로 얽어맬 수 있었겠는가? 후세에 남긴 곡조를 읊조리며 그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들이 수양한 바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진(秦)나라가 동쪽 세력에게 정권을 잃고 용과 범이 서로 각축하자 천지가 살상에 시달리고 전운이 휘몰아쳤다. 따라서 고상한 선비들이 기회에 편승하고 세력에 의지하던 시대는 아니었다. 더구나 말 위의 내옹(乃翁)에게 관대하고 어진 풍도가 있었지만, 그 규모가 비루하여 진(秦)나라의 옛 법도를 많이 답습하였다. 선비를 매도하고 업신여길 수는 있어도 그 의(義)는 욕보일 수 없으므로, 한(漢) 나라를 섬기지 않으려는 마음을 옛날보다 조금도 낮추지 않았고 영씨(嬴氏 진(秦))와 유씨(劉氏 한(漢))의 왕업을 백안시하고 업신여긴 지가 오래되었다. 비록 기록에는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를 갖추어 거듭 초청하자 결국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약한 태자가 아직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소문도 나지 않았는데, 험준한 바위틈에 숨어 있던 노인들이 어찌 태자를 바꾸는 일을 알고 세 번 초빙하는 예도 기다리지 않고 작은 종이쪽지를 보자마자 갑자기 뜻을 꺾고 동궁(東宮)의 뜰에 무릎을 굽혔는가? 더구나 영지(靈芝)를 먹는 입으로는 세상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소나무 소리를 듣던 귀로는 명예와 출세를 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사의 관(冠)과 지초(芝草)로 만든 옷을 벗어 놓고 세속의 화려한 의관을 입고 속된 얼굴을 쳐들고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제가 말하기를 “공들을 청하여도 나를 회피하다가 무슨 연유로 내 아들을 따르며 교유하시오?”라고 한 것으로 보면, 네 늙은이의 사람 됨됨이는 황제가 그들을 사모하면서도 뜻을 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갑자기 동궁에 앉아서 이들을 오게 하여 황제의 경탄과 의구심을 자아내었다. 이 어찌 세속을 초월하여 영원히 떠난 사람들이 출처(出處)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이토록 심하게 스스로 가볍게 처신하여 도리어 유후 장량의 속임수에 빠질 수 있는가?
그들이 “태자가 공경히 선비를 사랑하므로 태자를 위해 죽고자 합니다.”라 한 것은, 그 말은 파당 짓기에 가깝고 그 일은 부왕에 대한 협박이며, 일이 빨리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이해관계는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이 어찌 세상을 초월한 일민(逸民)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믿을 수 없음이 명확하다.
내 생각에, 한(漢)나라 조정의 신하로서 지혜가 많은 사람으로는 장량만한 이가 없다고 여긴다. 기이한 꾀와 은밀한 계략으로 걸핏하면 기회에 적중하여 손바닥 위에서 고제(高帝)를 쓰러뜨릴 정도였다. 여후(呂后)가 그를 위협하여 태자를 위한 계책을 모의하는 날에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왔지만, 황제의 뜻이 이미 정해져서 말로 논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황제가 마음속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를 먼저 헤아려 의외의 계책을 내어 상산사호의 이름을 빌려와 그들이 출입하고 응대할 때 은밀히 지시하여 우익(羽翼)으로 삼을 계책을 꾸미고 태자의 보좌역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천하의 인심이 태자에게 귀속되어 다시 흔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으니, 황제의 마음이 이미 믿게 되어 태자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나는 상산사호가 실제 인물이 아니고 유후 장량의 임기응변의 비책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난 날 황제가 마음에 들어 해도 초빙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한 번 동궁으로 들어오고는 은근하게 머물러 달라는 간청이 전혀 없었고 구름 덮인 산으로 다시 돌아간 후로는 상산의 노인들에게 안부를 묻는 한 명의 사자(使者)도 없을 수가 있는가? 또 어찌 태자를 바꾸려 하는 날에는 우익(羽翼)을 만드는 일에 중히 쓰다가 보위를 계승할 때는 이 노성(老成)한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단 말인가? 한 번 거동한 후에 자취를 더욱 비밀스럽게 숨기기보다 오히려 그냥 양가죽 옷을 물색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이 점에서도 더욱 이 일을 믿을 수 없다.
말하기를, “자방(子房)같이 훌륭한 사람으로서 도리어 임금을 속이고 부왕을 협박하는 죄에 빠진 것이 되는데, 이 어찌 억측을 가지고 믿을 만한 역사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라고 한다면, 답하기를, “자방은 선비의 기상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성인(聖人)의 대학의 도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은 정도에 가까웠지만 어떤 일을 조치할 때에는 권모술수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귓속말로 한신(韓信)의 봉군을 아뢴 일에 대해 논평하는 사람들은 임금을 모시는 신하로서 성실하지 못했다고 하고, 홍구(鴻溝)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자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서도 선유(先儒)들은 불의함이 심하다고 한 것들이 그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지혜를 사용함이 지나쳐서 음험한 속임수를 낸 것이며 상산사호 네 노인을 맞아오게 한 것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겠다.
적자(嫡子)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한 것은 실로 황제의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즉 기회를 틈타 본래의 약속을 받아들이게 하고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일은 본래 임금을 속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태자를 보조한다는 명분에 의탁하여 군부(君父)를 핍박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아 저들에게 주는 것은 임금을 협박하였다는 데에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적자를 세우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유씨(劉氏)의 종통을 길이 안정시킨 것은 지나친 점에서 인(仁)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 사람은 믿지만 그 행적은 의심하여, 그것을 변론하여 드러내어 그 은미한 뜻을 밝히는 바이다.
[주-D001] 상산사호(商山四皓) : 중국 진(秦)나라에서 한(漢)나라 초기에 상산(商山)에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은자(隱者) 네 사람을 말한다.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이 그들이다.
[주-D002] 한 고조(漢高祖) …… 않았다. : 한 고조가 만년에 척부인(戚夫人)의 소생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대신(大臣)들이 수없이 간쟁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여후(呂后)가 여택(呂澤)을 시켜 장량(張良)에게 좋은 계책을 내도록 강요하게 하여 장량의 계책에 따라 태자로 하여금 정중히 서신을 갖추어 겸손한 언사와 안거(安車)로써 상산(商山)의 사호(四皓)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을 초빙해 오게 한 결과, 과연 이 네 노인이 입조(入朝)하여 태자를 매우 지성으로 보호하게 되자 마침내 태자를 바꾸지 않았던 고사이다.
[주-D003] 화산(華山)과 위수(渭水)의 유풍 : 중국 춘추 시대 주(周)나라의 유풍을 말한다. 화산은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이며 위수(渭水)는 주나라 수도 호경(鎬京)을 감싸며 흐르는 강이다.
[주-D004] 남긴 곡조 : 상산사호가 남긴 노래로 전해지는 〈채지조(采芝操)〉로, 《악부시집(樂府詩集)》 〈금곡가사(琴曲歌辭)〉에 보인다. 그 내용은 “수목 우거진 높은 산 깊은 계곡 감아도네. 반짝이는 자주빛 지초(芝草)는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네. 요순시대 아득하니 나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하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도 근심 매우 크리. 고관대작이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지만, 빈천하면서 호방하게 사는 데는 미치지 못하리.〔莫莫高山 深谷逶迤 晔晔紫芝 可以疗饥 唐虞世远 吾将何归 驷马高盖 其忧甚大 高贵之畏人 不及贫贱之肆志〕”이다. 〈사호가(四皓歌)〉, 〈채지가(采芝歌)〉라고도 한다.
[주-D005] 동쪽 세력 : 중국 전국 시대와 진한(秦漢) 시대에는 효산(崤山)이나 화산(華山) 동쪽을 산동(山東)이라 칭하였다.
[주-D006] 용과 범 : 진(秦)이 망한 후 한(漢)의 유방(劉邦)과 초(楚)의 항우(項羽)가 패권을 다툰 일을 가리킨다.
[주-D007] 말 위의 내옹(乃翁) : 한 고조 유방(劉邦)을 가리킨다. 육가(陸賈)가 유방에게 시서(詩書)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유방이 “나는 말 위에서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다. 시서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乃公居馬上而得之 安事詩書〕”라고 매도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97 陸賈列傳》
[주-D008] 세 …… 예 : 임금이 현인을 초빙하는 예를 말한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세 번이나 초빙하러 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孟子 萬章上》
[주-D009] 양가죽 옷 : 은자(隱者)가 입는 옷을 말한다. 엄광(嚴光)은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친구였지만, 광무제 즉위 후 성명을 감추고 은거하였다.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란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늘 양가죽 옷〔羊裘〕를 입고 낚시를 하며 살았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주-D010] 귓속말로 …… 일 : 한신이 제(齊)나라를 평정하고 나서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 지역의 가왕(假王)으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방은 크게 화를 내며 거절하자 장량은 몰래 유방의 발을 밟으며 귓속말로 한신을 제왕에 봉해 주라고 권하였다.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진 한신이 스스로 왕을 칭하는 것보다 그 전에 유방이 그를 왕으로 봉하는 게 모양새가 낫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뜻을 알아들은 유방은 한신에게 글을 보내어 “대장부가 제후의 땅을 평정하였으면 진짜 왕이 되어야지 왜 가짜 왕이 되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한신을 제왕에 봉하였다. 《漢書 권34 韓信傳》
[주-D011] 홍구(鴻溝)를 …… 것 : 홍구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형양현(滎陽縣)에 있는 운하 이름이다. 한(漢)나라와 초(楚)나라가 천하를 다툴 때 장량의 계책으로 홍구 서쪽은 한(漢)이 동쪽은 초(楚)가 관할하기로 하였다. 장량은 항우에게 이 제의를 받아들이게 한 후 그 약속을 어기고 다시 항우를 공격하여 천하의 대세를 결정지었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삼가 고찰해본다. 한(漢) 나라 여택(呂澤)이 장량(張良)의 계책을 이용하여 태자의 편지를 받들고 가서 사호(四皓)를 맞이해오자 한 고조(漢高祖)가 이상해서 놀라 말하기를 “어떻게 내 아들을 따르며 교유하시오? 공들은 끝까지 태자를 보호해주기를 바라오.”라고 하면서 마침내 태자를 바꾸지 않았다.
내 생각에, 이 네 사람이 꼭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들을 맞이해 왔다는 일은 아마 반드시 있었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그들에게 우익(羽翼)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실로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꾀이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분서갱유의 참화를 일으키자 선비들 중에는 먼저 기미를 알고 세상을 도피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예컨대 서불(徐巿)은 속세 밖의 술사(術士)였고 무릉도원은 피란한 유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저 네 명의 노인들도 상산(商山)에서 소매를 떨치고 세속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영지(靈芝)를 따서 허기를 채우고 바둑을 두며 긴 날을 보내면서 옛적 요순(堯舜) 시대를 그리워하고, 화산(華山)과 위수(渭水)의 유풍을 사모하였다. 그리고 부귀한 삶을 걱정하고 빈천한 삶을 즐겁게 여겼다. 그런즉 큰 바다를 나는 봉황의 뜻을 어찌 세속의 그물로 얽어맬 수 있었겠는가? 후세에 남긴 곡조를 읊조리며 그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들이 수양한 바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진(秦)나라가 동쪽 세력에게 정권을 잃고 용과 범이 서로 각축하자 천지가 살상에 시달리고 전운이 휘몰아쳤다. 따라서 고상한 선비들이 기회에 편승하고 세력에 의지하던 시대는 아니었다. 더구나 말 위의 내옹(乃翁)에게 관대하고 어진 풍도가 있었지만, 그 규모가 비루하여 진(秦)나라의 옛 법도를 많이 답습하였다. 선비를 매도하고 업신여길 수는 있어도 그 의(義)는 욕보일 수 없으므로, 한(漢) 나라를 섬기지 않으려는 마음을 옛날보다 조금도 낮추지 않았고 영씨(嬴氏 진(秦))와 유씨(劉氏 한(漢))의 왕업을 백안시하고 업신여긴 지가 오래되었다. 비록 기록에는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를 갖추어 거듭 초청하자 결국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약한 태자가 아직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소문도 나지 않았는데, 험준한 바위틈에 숨어 있던 노인들이 어찌 태자를 바꾸는 일을 알고 세 번 초빙하는 예도 기다리지 않고 작은 종이쪽지를 보자마자 갑자기 뜻을 꺾고 동궁(東宮)의 뜰에 무릎을 굽혔는가? 더구나 영지(靈芝)를 먹는 입으로는 세상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소나무 소리를 듣던 귀로는 명예와 출세를 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사의 관(冠)과 지초(芝草)로 만든 옷을 벗어 놓고 세속의 화려한 의관을 입고 속된 얼굴을 쳐들고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제가 말하기를 “공들을 청하여도 나를 회피하다가 무슨 연유로 내 아들을 따르며 교유하시오?”라고 한 것으로 보면, 네 늙은이의 사람 됨됨이는 황제가 그들을 사모하면서도 뜻을 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갑자기 동궁에 앉아서 이들을 오게 하여 황제의 경탄과 의구심을 자아내었다. 이 어찌 세속을 초월하여 영원히 떠난 사람들이 출처(出處)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이토록 심하게 스스로 가볍게 처신하여 도리어 유후 장량의 속임수에 빠질 수 있는가?
그들이 “태자가 공경히 선비를 사랑하므로 태자를 위해 죽고자 합니다.”라 한 것은, 그 말은 파당 짓기에 가깝고 그 일은 부왕에 대한 협박이며, 일이 빨리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이해관계는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이 어찌 세상을 초월한 일민(逸民)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믿을 수 없음이 명확하다.
내 생각에, 한(漢)나라 조정의 신하로서 지혜가 많은 사람으로는 장량만한 이가 없다고 여긴다. 기이한 꾀와 은밀한 계략으로 걸핏하면 기회에 적중하여 손바닥 위에서 고제(高帝)를 쓰러뜨릴 정도였다. 여후(呂后)가 그를 위협하여 태자를 위한 계책을 모의하는 날에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왔지만, 황제의 뜻이 이미 정해져서 말로 논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황제가 마음속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를 먼저 헤아려 의외의 계책을 내어 상산사호의 이름을 빌려와 그들이 출입하고 응대할 때 은밀히 지시하여 우익(羽翼)으로 삼을 계책을 꾸미고 태자의 보좌역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천하의 인심이 태자에게 귀속되어 다시 흔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으니, 황제의 마음이 이미 믿게 되어 태자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나는 상산사호가 실제 인물이 아니고 유후 장량의 임기응변의 비책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난 날 황제가 마음에 들어 해도 초빙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한 번 동궁으로 들어오고는 은근하게 머물러 달라는 간청이 전혀 없었고 구름 덮인 산으로 다시 돌아간 후로는 상산의 노인들에게 안부를 묻는 한 명의 사자(使者)도 없을 수가 있는가? 또 어찌 태자를 바꾸려 하는 날에는 우익(羽翼)을 만드는 일에 중히 쓰다가 보위를 계승할 때는 이 노성(老成)한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단 말인가? 한 번 거동한 후에 자취를 더욱 비밀스럽게 숨기기보다 오히려 그냥 양가죽 옷을 물색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이 점에서도 더욱 이 일을 믿을 수 없다.
말하기를, “자방(子房)같이 훌륭한 사람으로서 도리어 임금을 속이고 부왕을 협박하는 죄에 빠진 것이 되는데, 이 어찌 억측을 가지고 믿을 만한 역사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라고 한다면, 답하기를, “자방은 선비의 기상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성인(聖人)의 대학의 도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은 정도에 가까웠지만 어떤 일을 조치할 때에는 권모술수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귓속말로 한신(韓信)의 봉군을 아뢴 일에 대해 논평하는 사람들은 임금을 모시는 신하로서 성실하지 못했다고 하고, 홍구(鴻溝)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자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서도 선유(先儒)들은 불의함이 심하다고 한 것들이 그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지혜를 사용함이 지나쳐서 음험한 속임수를 낸 것이며 상산사호 네 노인을 맞아오게 한 것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겠다.
적자(嫡子)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한 것은 실로 황제의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즉 기회를 틈타 본래의 약속을 받아들이게 하고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일은 본래 임금을 속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태자를 보조한다는 명분에 의탁하여 군부(君父)를 핍박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아 저들에게 주는 것은 임금을 협박하였다는 데에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적자를 세우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유씨(劉氏)의 종통을 길이 안정시킨 것은 지나친 점에서 인(仁)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 사람은 믿지만 그 행적은 의심하여, 그것을 변론하여 드러내어 그 은미한 뜻을 밝히는 바이다.
[주-D001] 상산사호(商山四皓) : 중국 진(秦)나라에서 한(漢)나라 초기에 상산(商山)에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은자(隱者) 네 사람을 말한다.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이 그들이다.
[주-D002] 한 고조(漢高祖) …… 않았다. : 한 고조가 만년에 척부인(戚夫人)의 소생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대신(大臣)들이 수없이 간쟁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여후(呂后)가 여택(呂澤)을 시켜 장량(張良)에게 좋은 계책을 내도록 강요하게 하여 장량의 계책에 따라 태자로 하여금 정중히 서신을 갖추어 겸손한 언사와 안거(安車)로써 상산(商山)의 사호(四皓)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을 초빙해 오게 한 결과, 과연 이 네 노인이 입조(入朝)하여 태자를 매우 지성으로 보호하게 되자 마침내 태자를 바꾸지 않았던 고사이다.
[주-D003] 화산(華山)과 위수(渭水)의 유풍 : 중국 춘추 시대 주(周)나라의 유풍을 말한다. 화산은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이며 위수(渭水)는 주나라 수도 호경(鎬京)을 감싸며 흐르는 강이다.
[주-D004] 남긴 곡조 : 상산사호가 남긴 노래로 전해지는 〈채지조(采芝操)〉로, 《악부시집(樂府詩集)》 〈금곡가사(琴曲歌辭)〉에 보인다. 그 내용은 “수목 우거진 높은 산 깊은 계곡 감아도네. 반짝이는 자주빛 지초(芝草)는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네. 요순시대 아득하니 나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하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도 근심 매우 크리. 고관대작이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지만, 빈천하면서 호방하게 사는 데는 미치지 못하리.〔莫莫高山 深谷逶迤 晔晔紫芝 可以疗饥 唐虞世远 吾将何归 驷马高盖 其忧甚大 高贵之畏人 不及贫贱之肆志〕”이다. 〈사호가(四皓歌)〉, 〈채지가(采芝歌)〉라고도 한다.
[주-D005] 동쪽 세력 : 중국 전국 시대와 진한(秦漢) 시대에는 효산(崤山)이나 화산(華山) 동쪽을 산동(山東)이라 칭하였다.
[주-D006] 용과 범 : 진(秦)이 망한 후 한(漢)의 유방(劉邦)과 초(楚)의 항우(項羽)가 패권을 다툰 일을 가리킨다.
[주-D007] 말 위의 내옹(乃翁) : 한 고조 유방(劉邦)을 가리킨다. 육가(陸賈)가 유방에게 시서(詩書)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유방이 “나는 말 위에서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다. 시서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乃公居馬上而得之 安事詩書〕”라고 매도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97 陸賈列傳》
[주-D008] 세 …… 예 : 임금이 현인을 초빙하는 예를 말한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세 번이나 초빙하러 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孟子 萬章上》
[주-D009] 양가죽 옷 : 은자(隱者)가 입는 옷을 말한다. 엄광(嚴光)은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친구였지만, 광무제 즉위 후 성명을 감추고 은거하였다.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란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늘 양가죽 옷〔羊裘〕를 입고 낚시를 하며 살았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주-D010] 귓속말로 …… 일 : 한신이 제(齊)나라를 평정하고 나서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 지역의 가왕(假王)으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방은 크게 화를 내며 거절하자 장량은 몰래 유방의 발을 밟으며 귓속말로 한신을 제왕에 봉해 주라고 권하였다.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진 한신이 스스로 왕을 칭하는 것보다 그 전에 유방이 그를 왕으로 봉하는 게 모양새가 낫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뜻을 알아들은 유방은 한신에게 글을 보내어 “대장부가 제후의 땅을 평정하였으면 진짜 왕이 되어야지 왜 가짜 왕이 되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한신을 제왕에 봉하였다. 《漢書 권34 韓信傳》
[주-D011] 홍구(鴻溝)를 …… 것 : 홍구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형양현(滎陽縣)에 있는 운하 이름이다. 한(漢)나라와 초(楚)나라가 천하를 다툴 때 장량의 계책으로 홍구 서쪽은 한(漢)이 동쪽은 초(楚)가 관할하기로 하였다. 장량은 항우에게 이 제의를 받아들이게 한 후 그 약속을 어기고 다시 항우를 공격하여 천하의 대세를 결정지었다. 《史記 卷8 高祖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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