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봉서원의 제현들에게 보내는 편지〔與迎鳳諸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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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7회 작성일 21-07-27 04:27본문
영봉서원의 제현들에게 보내는 편지〔與迎鳳諸賢書〕
높은 누각과 바람 부는 정자가 시원하게 풍진을 벗어나 있으니, 불같은 더위도 자취를 감추고 부채질하지 않아도 시원하고 여럿이 함께 생활하며 인(仁)을 도와 유익함이 필히 깊으리라 여깁니다. 또 자강(子强)의 강론이 조리가 있어 믿고 따르는 자가 많으니 반드시 마음속으로 기뻐하는 효과를 얻을 것입니다.
저는 공무에 얽매인 데다 질병과 게으름이 서로 거듭하여 연일 강론과 평론을 듣는 즐거움을 아직 얻지 못하고, 그저 혼자 기뻐하고 흠모할 뿐입니다. 다만 제현(諸賢)들께서 이미 속된 견해를 벗어버리고 바야흐로 자신을 위하는 공부에 돈독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고인(古人)에게 있어서도 쉬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그 성취를 요하며 성현의 가르침은 본래 이루어진 법이 있으니, 단지 맑게 수양한 훌륭한 선비가 되고 싶을 뿐이라면 오히려 혹 그럴 수 있지만, 만일 성현의 길을 따라가 남의 본보기가 되고자 한다면 도(道)의 뜰에 들어가는 선후와 차례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필히 먼저 《소학(小學)》을 읽어서 떳떳한 인륜과 일용(日用)의 상도(常道) 및 절차와 행동거지의 준칙에 근본을 세우고 하나하나 강론하여 밝혀, 실천이 견실하게 정해지고 함양이 순수하고 익숙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대학(大學)’의 성공은 다만 그 정채(精彩)를 발산하는 것일 뿐이고, 실로 차례를 뛰어넘어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경(敬)을 위주로 하는 공부는 동정(動靜)을 꿰고 내외를 합하여 마치 흠결을 보완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통상 행하는 절목을 애초에 강구해두지 않으며, 이미 근거할 본령(本領)이 없어 마침내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의 바탕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방심(放心)을 수습하여 그 덕성을 기르고자 한들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청소하고 윗사람 접대하는 일이 곧 형이상(形而上)이다.”고 하였고, 주자(朱子)도 만년에 이르기를 “근자에 바야흐로 《소학》을 일삼아 전날의 거칠고 소략하였던 허물을 보완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성현들의 일용(日用)은 늘 비근한 데에 있었으니 가까운 데 있는 것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근본에 힘쓰는 것이 아닙니다. 고인들이 늙으면 각오 또한 사라지므로 먼저 입지를 정한 뒤에 차례를 따라 차츰 나아갔던 것이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제군들도 이미 지나간 것은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 다만 열흘이나 한 달 공력을 들여 그 속에서 마음을 살펴, 피부와 근골을 단단하게 결속하고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의 근본을 길러 뿌리를 북돋우고 가지를 뻗게 하는 도구로 삼는다면, 보완하는 공(功)이 역시 늦었다고 한탄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제군들이 젊은 날 이미 읽었다 하더라도 필히 힘쓸 자리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터이니, 지금에 이르러 더욱 이해를 하여 고인이 교육을 세운 근본을 상고하고 《근사록(近思錄)》을 참조하여 그 의리(義理)의 지취를 넓혀나가면 학문의 본말이 거의 아울러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심경(心經)》한 부(部)는 비록 산만한 듯하지만 선유(先儒)들의 격언을 부주(附註)로 하여 오로지 마음 다스리기를 위주로 하고, 경(敬)을 주로 하고 ‘이(理)’를 궁구하는 요체가 거의 미진함 없고 더욱이 심술(心術)의 은미한 즈음에 대하여 통렬히 드러내었으니, 이른바 ‘일병일약(一病一藥)’이라는 것으로서 또한 강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 책을 통해 연찬(硏鑽)의 공력을 겸해 쌓은 연후에 사서(四書)에서 그 극(極)을 모으고 그 선후 차례를 문란하게 하지 않으면 사변(思辨)의 공력이 외울 때와는 훨씬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안과 밖, 정밀함과 거침, 온전한 본질〔全體〕과 큰 쓰임〔大用〕이 찬란하고 명백하게 하나로 꿰어지게 될 것이고, 훗날의 사업 또한 이를 들어서 저곳에 적용하는 데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재인(榟人), 장인(匠人), 윤인(輪人), 여인(輿人)이 반드시 규구(規矩)에 맞추어 물건을 만들어 교묘하고 졸렬한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알맞게 쓰일 만한 물건이 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고원(高遠)하여 행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비 된 자가 간혹 고상하게 성명(性命)을 담론하면 도리어 과거공부에 누가 된다 하여 심지어 무리지어 괴이하게 여기며 지목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이는 하찮은 선비의 비루한 견해입니다. 심지(心地)가 허명하면 온갖 변화에 잘 대응하니, 이로부터 흘러나가면 또한 어디에 간들 통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정자와 주자 선생이 젊은 나이에 급제를 한 것이 어찌 모두 머리를 숙이고 시문(時文)을 공부한 것입니까? 근심해야 할 것은 배움이 지극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반드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업으로 삼겠다고 한다면 그 뜻이 단지 이록(利祿)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조정에서도 어찌 앵무새처럼 말만 잘 하는 자를 쓰겠습니까? 더군다나 두 업(業)에는 또한 세월의 다과(多寡)가 있어 역시 급하게 여기는 바에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사람들이 기량을 숨기고서 초빙을 기다린 것과 비교하면 그 경중과 취사(取捨)는 반드시 따로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제군들께서는 면려하십시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고생스럽게 공부하는 것은, 독실하게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입에 맛있는 고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그 도(道)에서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산에 오르는 것과 같으니, 각자 노력하는 것일 뿐이지 어찌 다른 사람의 인도를 기다리겠습니까? 또 어찌 다른 사람이 도울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말하는 자가 경솔하면 믿음을 얻을 수 없는데, 제군들이 저를 도외시하지 않은 덕분에 감히 구구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명하신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부디 절차탁마하여 도덕을 진전시키고 공업(功業)을 닦아 큰일을 담당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터득하신 것을 보여주어 저의 몽매함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한가한 날 계당(溪堂)에서 직접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주-D001] 자강(子强)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 호는 덕계(德溪)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인후(金麟厚)와 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한데, 이황은 그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조 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사(書史)를 섭렵하면서 시작(詩作)과 강론으로 여생을 마쳤다.
높은 누각과 바람 부는 정자가 시원하게 풍진을 벗어나 있으니, 불같은 더위도 자취를 감추고 부채질하지 않아도 시원하고 여럿이 함께 생활하며 인(仁)을 도와 유익함이 필히 깊으리라 여깁니다. 또 자강(子强)의 강론이 조리가 있어 믿고 따르는 자가 많으니 반드시 마음속으로 기뻐하는 효과를 얻을 것입니다.
저는 공무에 얽매인 데다 질병과 게으름이 서로 거듭하여 연일 강론과 평론을 듣는 즐거움을 아직 얻지 못하고, 그저 혼자 기뻐하고 흠모할 뿐입니다. 다만 제현(諸賢)들께서 이미 속된 견해를 벗어버리고 바야흐로 자신을 위하는 공부에 돈독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고인(古人)에게 있어서도 쉬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그 성취를 요하며 성현의 가르침은 본래 이루어진 법이 있으니, 단지 맑게 수양한 훌륭한 선비가 되고 싶을 뿐이라면 오히려 혹 그럴 수 있지만, 만일 성현의 길을 따라가 남의 본보기가 되고자 한다면 도(道)의 뜰에 들어가는 선후와 차례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필히 먼저 《소학(小學)》을 읽어서 떳떳한 인륜과 일용(日用)의 상도(常道) 및 절차와 행동거지의 준칙에 근본을 세우고 하나하나 강론하여 밝혀, 실천이 견실하게 정해지고 함양이 순수하고 익숙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대학(大學)’의 성공은 다만 그 정채(精彩)를 발산하는 것일 뿐이고, 실로 차례를 뛰어넘어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경(敬)을 위주로 하는 공부는 동정(動靜)을 꿰고 내외를 합하여 마치 흠결을 보완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통상 행하는 절목을 애초에 강구해두지 않으며, 이미 근거할 본령(本領)이 없어 마침내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의 바탕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방심(放心)을 수습하여 그 덕성을 기르고자 한들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청소하고 윗사람 접대하는 일이 곧 형이상(形而上)이다.”고 하였고, 주자(朱子)도 만년에 이르기를 “근자에 바야흐로 《소학》을 일삼아 전날의 거칠고 소략하였던 허물을 보완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성현들의 일용(日用)은 늘 비근한 데에 있었으니 가까운 데 있는 것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근본에 힘쓰는 것이 아닙니다. 고인들이 늙으면 각오 또한 사라지므로 먼저 입지를 정한 뒤에 차례를 따라 차츰 나아갔던 것이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제군들도 이미 지나간 것은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 다만 열흘이나 한 달 공력을 들여 그 속에서 마음을 살펴, 피부와 근골을 단단하게 결속하고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의 근본을 길러 뿌리를 북돋우고 가지를 뻗게 하는 도구로 삼는다면, 보완하는 공(功)이 역시 늦었다고 한탄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제군들이 젊은 날 이미 읽었다 하더라도 필히 힘쓸 자리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터이니, 지금에 이르러 더욱 이해를 하여 고인이 교육을 세운 근본을 상고하고 《근사록(近思錄)》을 참조하여 그 의리(義理)의 지취를 넓혀나가면 학문의 본말이 거의 아울러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심경(心經)》한 부(部)는 비록 산만한 듯하지만 선유(先儒)들의 격언을 부주(附註)로 하여 오로지 마음 다스리기를 위주로 하고, 경(敬)을 주로 하고 ‘이(理)’를 궁구하는 요체가 거의 미진함 없고 더욱이 심술(心術)의 은미한 즈음에 대하여 통렬히 드러내었으니, 이른바 ‘일병일약(一病一藥)’이라는 것으로서 또한 강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 책을 통해 연찬(硏鑽)의 공력을 겸해 쌓은 연후에 사서(四書)에서 그 극(極)을 모으고 그 선후 차례를 문란하게 하지 않으면 사변(思辨)의 공력이 외울 때와는 훨씬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안과 밖, 정밀함과 거침, 온전한 본질〔全體〕과 큰 쓰임〔大用〕이 찬란하고 명백하게 하나로 꿰어지게 될 것이고, 훗날의 사업 또한 이를 들어서 저곳에 적용하는 데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재인(榟人), 장인(匠人), 윤인(輪人), 여인(輿人)이 반드시 규구(規矩)에 맞추어 물건을 만들어 교묘하고 졸렬한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알맞게 쓰일 만한 물건이 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고원(高遠)하여 행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비 된 자가 간혹 고상하게 성명(性命)을 담론하면 도리어 과거공부에 누가 된다 하여 심지어 무리지어 괴이하게 여기며 지목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이는 하찮은 선비의 비루한 견해입니다. 심지(心地)가 허명하면 온갖 변화에 잘 대응하니, 이로부터 흘러나가면 또한 어디에 간들 통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정자와 주자 선생이 젊은 나이에 급제를 한 것이 어찌 모두 머리를 숙이고 시문(時文)을 공부한 것입니까? 근심해야 할 것은 배움이 지극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반드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업으로 삼겠다고 한다면 그 뜻이 단지 이록(利祿)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조정에서도 어찌 앵무새처럼 말만 잘 하는 자를 쓰겠습니까? 더군다나 두 업(業)에는 또한 세월의 다과(多寡)가 있어 역시 급하게 여기는 바에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사람들이 기량을 숨기고서 초빙을 기다린 것과 비교하면 그 경중과 취사(取捨)는 반드시 따로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제군들께서는 면려하십시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고생스럽게 공부하는 것은, 독실하게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입에 맛있는 고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그 도(道)에서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산에 오르는 것과 같으니, 각자 노력하는 것일 뿐이지 어찌 다른 사람의 인도를 기다리겠습니까? 또 어찌 다른 사람이 도울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말하는 자가 경솔하면 믿음을 얻을 수 없는데, 제군들이 저를 도외시하지 않은 덕분에 감히 구구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명하신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부디 절차탁마하여 도덕을 진전시키고 공업(功業)을 닦아 큰일을 담당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터득하신 것을 보여주어 저의 몽매함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한가한 날 계당(溪堂)에서 직접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주-D001] 자강(子强)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 호는 덕계(德溪)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인후(金麟厚)와 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한데, 이황은 그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조 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사(書史)를 섭렵하면서 시작(詩作)과 강론으로 여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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