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서절요》발문〔晦菴書節要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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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3회 작성일 21-07-27 04:57본문
《회암서절요》발문〔晦菴書節要跋〕
일찍이 주자(朱子) 문하에서 학문을 강론하며 주고받은 편지로서 간혹 다른 책에 실려 있는 것을 읽어 보니 모두 말은 비근(卑近)하면서도 뜻이 심원하고 어휘는 간략하면서도 이치가 분명하였는데, 늘 전집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이윽고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얻어서 읽어보니 마치 만물을 지고 있는 땅과 물이 가득한 바다처럼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나같이 얕은 식견으로 그것을 헤아리려니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탄식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오사암(吳思菴) 이 선록한 책을 보니 단지 정수(精髓)만 뽑았고 실제 학문에 관한 것은 빠트려서 너무 축약된 병폐를 면치 못하였으니, 소위 한 가지를 들다가 백 가지를 빠트리는 격이었다. 유독 왕노재(王魯齋)가 이 책을 선집하여 북산(北山)의 하선생(何先生)에게 교정을 구하였으니 참으로 정밀하였을 것이나, 송잠계(宋潛溪)조차 이 책을 얻어 보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으니 하물며 우리 동방의 후학에 있어서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주자전서》를 구한 것을 기뻐하여 신명(神明)처럼 공경하며 신봉하였고, 오래도록 잠심(潛心)하여 그 요체를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는 부자(夫子 주자)께서 평소에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한 노력과 후학들이 학문에 입문하고 착수하는 지점이 특히 편지와 상소문에 있으며, 다른 문장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여기셨다. 이에 학문과 가장 관련이 있고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을 손수 뽑아서 번잡한 것은 요약하여 간략하게 한 다음 약간의 교정과 해석을 덧붙였으니, 취한 것이 겨우 삼분의 일 분량이었다. 그러나 평생의 출처(出處)와 언행의 절조(節操), 그리고 사우(師友)들과 강명(講明)하고 경책(警責)한 뜻이 모두 남김없이 포괄되었으니 참으로 덕을 함양하고 학문을 닦는 데 있어서 비결이며 사문(斯文)의 보배로운 경전이다.
내가 삼가 생각하건대, 자양(紫陽) 주부자(朱夫子)께서는 성인에 버금가는 자질을 타고나서 여러 유학자의 장점을 집대성하였고 도덕이 높고 두터워 교화(敎化)가 무궁하였다. 이에 절로 한마디 이야기와 한마디 말에 오묘한 도(道)와 정밀한 의리가 축적되지 않은 것이 없고, 경전의 뜻을 발명하여 드러내는 일에 더욱 마음을 다해, 곧바로 도학의 관건을 열어젖혀서 만세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단서를 언급한 것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뜻을 설명한 것이 간략하면서 심오하여 문을 찾아서 들어가기가 역시 어려운 것이었다. 《주자어류(朱子語類)》와 같은 책들이 다 평소 한 말이지만 기록자가 한 사람이 아니고 또 반드시 스승의 뜻을 모두 다 체득하였다고 볼 수 없다. 서찰에 이르러서는 모두 주자가 직접 수시로 기록한 것이고, 학문을 면려하고 진작한 열성은 누구에게나 차이가 없었다. 요체는 격물치지를 가지고 닦아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단서를 나타내어 사람에게 제시해 주는 방법에서, 어떤 사람은 억누르고 어떤 사람은 추켜세우는가 하면 한 번 나아가게 하기도 하고 한 번 물러나게 하면서 재질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고 증상에 따라 약 처방을 하였다. 한 마디 말과 한 조각 글자라도 모두 천리(天理)의 정묘함을 다하고 털끝 하나 실오라기 하나라도 세밀하게 분석하여 심술의 은미한 부분에서도 중정을 찾아, 문하에 들어온 선비들이 경건히 깨닫고 도약하듯 진전을 이루게 하였다. 따라서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유익함을 얻게 되었고, 비록 백세(百世) 이후 사람이라도 그 가르침에 감격하여 마치 엄한 스승을 배알하고 면전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았다.
아, 지극하도다!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생각하면서 여기에 종사하여 참되게 알고 실천하여 마음과 이치가 무르익게 되면,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거슬러 올라가 수수(洙水)와 사수(泗水)까지 도달하는 데에 이 책이 길머리가 되어 사서(四書) 등 여러 경전도 칼날에 쪼개지듯이 절로 해석될 것이다.
장차 이 책이 간행되면 《근사록(近思錄)》과 함께 사서(四書)로 올라가는 계단이 될 것이고, 그 규모의 방대함과 심법(心法)의 엄정함은 곧 앞의 네 선생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점이 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퇴계(退溪) 공께서는 오히려 취사선택이 외람되고 지목되는 데 처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셨다.
나는 문득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그 원고가 쉽게 없어져 버릴 것을 깊이 두려워하여 임고서원(臨皐書院)에서 활자를 빌리고 관찰사 홍담(洪曇)이 보조해 준 절반의 돈을 가지고 겨우 일을 마칠 수 있었지만 한 고을의 힘으로 널리 펴지 못함이 한스럽다. 만약 동호인들이 있어서 이 책을 드러내어 더러는 목판으로 새기고 더러는 활자로 인쇄하여 이 책이 집집마다 전해지고 사람마다 낭송하여 주경(主敬)과 궁리(窮理)의 종지(宗旨)를 얻을 수 있게 한다면, 여운을 가다듬고 끊어진 실마리를 이어서 후세에 걸출한 인물로 나타날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저 즐겁게 음미할 의미와 무궁한 의리(義理)에 대하여는 이 책을 잘 읽는 사람이면 당연히 스스로 얻게 될 것이고, 행하고 여력이 있어 본집을 구하여 널리 읽어보면 주자의 성대한 덕망과 크나큰 업적이 이 책의 범위 밖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5월 갑진일(甲辰日)에 기성(箕城) 황준량(黃俊良)이 삼가 발문(跋文)을 쓰다.
[주-D001] 오사암(吳思菴) : 중국 명(明)나라 때의 학자 오눌(吳訥)이다. 오눌은 자(字)가 민덕(敏德), 호(號)는 사암(思菴), 시호는 문각(文恪)이다.
[주-D002] 왕노재(王魯齋) : 송(宋)나라 왕백(王柏)이다. 왕백은 자(字)가 회지(會之) 또는 백회(柏會)이고, 호는 노재(魯齋)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주-D003] 송잠계(宋潛溪) : 명(明)나라 송렴(宋濂)이다. 송렴은 자(字)가 경렴(景濂)이고, 호는 잠계(潛溪)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주-D004]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 중국 북송(北宋)의 유명한 성리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는 낙양(洛陽) 사람이다. 낙양 근처에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가 합류하고 그곳에서 두 형제가 성리학을 공부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이락(伊洛)은 정씨 형제의 학문 또는 성리학의 근원을 가리킨다.
[주-D005]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 두 강은 모두 공자의 고향 중국 곡부(曲阜) 근처를 흐른다. 따라서 수사(洙泗)는 흔히 공자의 학문 또는 유학의 근원을 가리킨다.
[주-D006] 네 선생 : 위에서 언급한 공자, 맹자, 정호, 정이를 이른 것이다.
[주-D007] 임고서원(臨皐書院) :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있는 서원으로, 고려 말의 충신이자 유학자 정몽주(鄭夢周)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주-D008] 홍담(洪曇) : 1509~1576.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태허(太虛)이다.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 김개(金鎧)와 함께 정철(鄭澈) 등의 사림파와 대립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경기도 관찰사, 영남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예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일찍이 주자(朱子) 문하에서 학문을 강론하며 주고받은 편지로서 간혹 다른 책에 실려 있는 것을 읽어 보니 모두 말은 비근(卑近)하면서도 뜻이 심원하고 어휘는 간략하면서도 이치가 분명하였는데, 늘 전집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이윽고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얻어서 읽어보니 마치 만물을 지고 있는 땅과 물이 가득한 바다처럼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나같이 얕은 식견으로 그것을 헤아리려니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탄식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오사암(吳思菴) 이 선록한 책을 보니 단지 정수(精髓)만 뽑았고 실제 학문에 관한 것은 빠트려서 너무 축약된 병폐를 면치 못하였으니, 소위 한 가지를 들다가 백 가지를 빠트리는 격이었다. 유독 왕노재(王魯齋)가 이 책을 선집하여 북산(北山)의 하선생(何先生)에게 교정을 구하였으니 참으로 정밀하였을 것이나, 송잠계(宋潛溪)조차 이 책을 얻어 보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으니 하물며 우리 동방의 후학에 있어서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주자전서》를 구한 것을 기뻐하여 신명(神明)처럼 공경하며 신봉하였고, 오래도록 잠심(潛心)하여 그 요체를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는 부자(夫子 주자)께서 평소에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한 노력과 후학들이 학문에 입문하고 착수하는 지점이 특히 편지와 상소문에 있으며, 다른 문장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여기셨다. 이에 학문과 가장 관련이 있고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을 손수 뽑아서 번잡한 것은 요약하여 간략하게 한 다음 약간의 교정과 해석을 덧붙였으니, 취한 것이 겨우 삼분의 일 분량이었다. 그러나 평생의 출처(出處)와 언행의 절조(節操), 그리고 사우(師友)들과 강명(講明)하고 경책(警責)한 뜻이 모두 남김없이 포괄되었으니 참으로 덕을 함양하고 학문을 닦는 데 있어서 비결이며 사문(斯文)의 보배로운 경전이다.
내가 삼가 생각하건대, 자양(紫陽) 주부자(朱夫子)께서는 성인에 버금가는 자질을 타고나서 여러 유학자의 장점을 집대성하였고 도덕이 높고 두터워 교화(敎化)가 무궁하였다. 이에 절로 한마디 이야기와 한마디 말에 오묘한 도(道)와 정밀한 의리가 축적되지 않은 것이 없고, 경전의 뜻을 발명하여 드러내는 일에 더욱 마음을 다해, 곧바로 도학의 관건을 열어젖혀서 만세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단서를 언급한 것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뜻을 설명한 것이 간략하면서 심오하여 문을 찾아서 들어가기가 역시 어려운 것이었다. 《주자어류(朱子語類)》와 같은 책들이 다 평소 한 말이지만 기록자가 한 사람이 아니고 또 반드시 스승의 뜻을 모두 다 체득하였다고 볼 수 없다. 서찰에 이르러서는 모두 주자가 직접 수시로 기록한 것이고, 학문을 면려하고 진작한 열성은 누구에게나 차이가 없었다. 요체는 격물치지를 가지고 닦아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단서를 나타내어 사람에게 제시해 주는 방법에서, 어떤 사람은 억누르고 어떤 사람은 추켜세우는가 하면 한 번 나아가게 하기도 하고 한 번 물러나게 하면서 재질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고 증상에 따라 약 처방을 하였다. 한 마디 말과 한 조각 글자라도 모두 천리(天理)의 정묘함을 다하고 털끝 하나 실오라기 하나라도 세밀하게 분석하여 심술의 은미한 부분에서도 중정을 찾아, 문하에 들어온 선비들이 경건히 깨닫고 도약하듯 진전을 이루게 하였다. 따라서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유익함을 얻게 되었고, 비록 백세(百世) 이후 사람이라도 그 가르침에 감격하여 마치 엄한 스승을 배알하고 면전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았다.
아, 지극하도다!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생각하면서 여기에 종사하여 참되게 알고 실천하여 마음과 이치가 무르익게 되면,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거슬러 올라가 수수(洙水)와 사수(泗水)까지 도달하는 데에 이 책이 길머리가 되어 사서(四書) 등 여러 경전도 칼날에 쪼개지듯이 절로 해석될 것이다.
장차 이 책이 간행되면 《근사록(近思錄)》과 함께 사서(四書)로 올라가는 계단이 될 것이고, 그 규모의 방대함과 심법(心法)의 엄정함은 곧 앞의 네 선생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점이 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퇴계(退溪) 공께서는 오히려 취사선택이 외람되고 지목되는 데 처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셨다.
나는 문득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그 원고가 쉽게 없어져 버릴 것을 깊이 두려워하여 임고서원(臨皐書院)에서 활자를 빌리고 관찰사 홍담(洪曇)이 보조해 준 절반의 돈을 가지고 겨우 일을 마칠 수 있었지만 한 고을의 힘으로 널리 펴지 못함이 한스럽다. 만약 동호인들이 있어서 이 책을 드러내어 더러는 목판으로 새기고 더러는 활자로 인쇄하여 이 책이 집집마다 전해지고 사람마다 낭송하여 주경(主敬)과 궁리(窮理)의 종지(宗旨)를 얻을 수 있게 한다면, 여운을 가다듬고 끊어진 실마리를 이어서 후세에 걸출한 인물로 나타날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저 즐겁게 음미할 의미와 무궁한 의리(義理)에 대하여는 이 책을 잘 읽는 사람이면 당연히 스스로 얻게 될 것이고, 행하고 여력이 있어 본집을 구하여 널리 읽어보면 주자의 성대한 덕망과 크나큰 업적이 이 책의 범위 밖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5월 갑진일(甲辰日)에 기성(箕城) 황준량(黃俊良)이 삼가 발문(跋文)을 쓰다.
[주-D001] 오사암(吳思菴) : 중국 명(明)나라 때의 학자 오눌(吳訥)이다. 오눌은 자(字)가 민덕(敏德), 호(號)는 사암(思菴), 시호는 문각(文恪)이다.
[주-D002] 왕노재(王魯齋) : 송(宋)나라 왕백(王柏)이다. 왕백은 자(字)가 회지(會之) 또는 백회(柏會)이고, 호는 노재(魯齋)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주-D003] 송잠계(宋潛溪) : 명(明)나라 송렴(宋濂)이다. 송렴은 자(字)가 경렴(景濂)이고, 호는 잠계(潛溪)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주-D004]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 중국 북송(北宋)의 유명한 성리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는 낙양(洛陽) 사람이다. 낙양 근처에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가 합류하고 그곳에서 두 형제가 성리학을 공부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이락(伊洛)은 정씨 형제의 학문 또는 성리학의 근원을 가리킨다.
[주-D005]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 두 강은 모두 공자의 고향 중국 곡부(曲阜) 근처를 흐른다. 따라서 수사(洙泗)는 흔히 공자의 학문 또는 유학의 근원을 가리킨다.
[주-D006] 네 선생 : 위에서 언급한 공자, 맹자, 정호, 정이를 이른 것이다.
[주-D007] 임고서원(臨皐書院) :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있는 서원으로, 고려 말의 충신이자 유학자 정몽주(鄭夢周)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주-D008] 홍담(洪曇) : 1509~1576.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태허(太虛)이다.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 김개(金鎧)와 함께 정철(鄭澈) 등의 사림파와 대립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경기도 관찰사, 영남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예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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