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신재에게 올려 《죽계지》를 논한 편지〔上周愼齋論竹溪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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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7회 작성일 21-07-27 04:55본문
주신재에게 올려 《죽계지》를 논한 편지〔上周愼齋論竹溪志書〕
전날 선생님 뒤를 따라 백운동(白雲洞)에 가서 목욕재계한 뒤 분향(焚香)하고 회헌(晦軒)의 유상(遺像)을 알현하니, 온화하고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이 사람에게 경건한 마음이 일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곳 산천의 수려(秀麗)함과 사우(祠宇)의 존엄함을 보고서 사도(斯道)가 의지할 곳이 있음을 보고 내내 기뻐하였습니다. 다시 연일 고명하신 가르침을 듬뿍 받으니 시원하기가 마치 안개를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본 듯하였고, 제가 삶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면하게 되어 너무나 다행스러웠습니다.
우리 동방은 은나라 태사〔箕子〕가 봉해지고부터 홍범(洪範)의 가르침을 처음 듣게 되어 남자는 겸양하고 여자는 정숙할 줄 알아 현인(賢人)의 교화가 성대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하였고,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두고 예의가 있는 곳이라고 시를 읊었습니다. 오도(吾道)가 동방에 전파된 것은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부(二府)와 사군(四郡)을 지나 삼국 시대로 내려와 전쟁의 도탄에 빠져 극도로 혼란했습니다. 설홍유(薛弘儒 설총(薛聰))와 최문창(崔文昌 최치원(崔致遠))이 신라 말기에 태어났는데, 설씨는 오경(五經)을 번역하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말단적인 장구(章句)에 그쳤고, 최씨는 문장으로 이름났으나 역시 경세(經世)의 학문은 아니었습니다. 왕씨(王氏)가 일어나서도 또한 문교(文敎)는 알지 못했습니다. 인종(仁宗) 때에 최문헌(崔文獻 최충)이 구재(九齋)를 설치하고 후생을 교도하여 세상에서 그를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지만, 세상에 적용하여 도(道)를 밝힌 효험이 없었고, 자신에 돌이켜 궁구한 실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모두 문장이나 수식하는 부박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근본에 힘쓰고 사특한 것을 억누르는 의리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 담론하는 것이라곤 단지 성현들 말씀의 찌꺼기뿐이었습니다. 오직 회헌(晦軒) 선생이 공자(孔子)의 학문을 배우고 회암(晦庵)을 흠모하였는데, 만년에는 체득한 바가 더욱 진보하여 회암의 상(象)을 모셔두고 예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회암을 높이는 것이 바로 도를 높이는 것으로서 그가 지향한 바의 올바름은 여타 유자(儒者)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공은 이미 도에 대하여 대의(大意)를 보았습니다. 충효에 관한 논설은 무인(武人)의 마음을 복종시켰고, 학교 진흥에 힘쓴 것은 풍화(風化)의 근본을 세워 한 번에 삼한(三韓)의 풍속을 새롭게 하였으니, 실로 우리 유학에 공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말과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됨을 대략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봉황새 터럭 하나만 보아도 구포(九苞)의 덕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다만, “학교의 재원(財源)을 풍족하게 한 공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되었다.”라고만 하였고, 후인들도 그의 보이지 않는 빛을 발현시키지 못하여 지금까지 그의 공적이 민멸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옛날 전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너무 심한 것입니다.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회암의 도(道)가 거의 전해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 사람이 책 속에서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선(善)한 행실을 보고서도 천년 뒤에 칭찬하고 흠모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고을 안에 회헌과 같이 어질고 훌륭한 분의 풍성(風聲) 높은 고가(古家)가 초목 속에 매몰되어 있고 사당 한 칸이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선생처럼 옛것을 좋아하고 선(善)을 취하는 마음을 가진 분으로 볼 때, 어찌 급히 존숭하여 우리 도(道)를 높이는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농사의 흉년과 풍년도 물을 겨를이 없고 사람들의 비웃음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시시비비에 미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결행하여, 선생의 유지(遺址)를 가지고 스승을 높이는 터전으로 삼고 밭을 공부하는 장소로 삼은 뒤에야 놀라던 자는 의아히 여기고 의아히 여기던 자는 본뜻을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 전지(田地)를 마련하여 선비를 기르는 재원으로 삼았고, 서적을 소장하여 교육을 세우는 기틀로 삼았으며, 회헌의 유상(遺像)을 봉안하고 문정공(文貞公)과 문경공(文敬公)을 배향(配享)하셨습니다. 봄가을로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올리고 가곡(歌曲)을 노래하며 영령을 맞이하고 보냈으니, 그 제도가 이미 더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추어졌습니다.
아, 이 마음이 바로 회암이 선사(先師)를 모신 마음입니다. 대개 사묘(祠廟)가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없던 것으로서 금세에 처음 생긴 것입니다. 사당에 모셔 높이고, 또한 예배할 뿐만이 아니라 존숭하고 드러내어, 전해지지 않은 회옹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니, 참으로 성대합니다.
지난번에 또 《죽계지(竹溪志)》의 편목을 보았는데, 행록(行錄)은 여러 안씨(安氏)들의 사적이고 여타 편(篇)은 주자의 글로서 역시 모두 볼 만하고 본받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아, 선생의 근면한 마음과 어진 이를 높이는 지성이 어쩌면 이런 정도까지 이르렀습니까! 다만 편차(編次) 사이에 약간의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어찌 선생께서 생각하지 못하신 것이겠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회암을 통하여 회헌을 탐구하여 회헌의 학문이 연원(淵源)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竹溪)는 안씨의 세거지입니다. 여러 안씨들의 저술을 모아 ‘죽계지’라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회암의 글을 발췌하여 그 사이에 집어넣어 아울러 ‘죽계지’라고 하였으니, 억지스러운 문제가 없겠습니까? 이미 “회헌의 마음을 알려면 마땅히 회암의 글을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마디 말로 그 뜻이 다 표현된 것입니다. 회헌의 마음을 탐구해 보려는 자는 마땅히 별도로 회암의 글을 취해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전승(傳承)의 계통이 있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꼭 《죽계지》에 회암의 글을 넣어 억지로 일관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죽계지》에서는 여러 안씨(安氏)들의 사적(事蹟)을 주로 넣고, 〈학전록(學田錄)〉ㆍ〈장서록(藏書錄)〉ㆍ〈가곡(歌曲)〉ㆍ〈속상기(俗尙記)〉 같은 것과 서원(書院)에 관련된 기사는 잡록(雜錄)으로 정리하여 그 뒤에 붙이고, 다시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의 명언(名言)을 뽑아내어 ‘주서(朱書)’라 표제하여, 서원에서 간행하여 배우는 이들이 회헌을 탐구하는 자료로 삼게 한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곧고 조리가 분명할 것입니다. 책은 무리하게 합편(合編)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고, 도(道)는 폐단 없이 전승되어, 전술(傳述)하고 옛것을 좋아하는 도(道)에 아마도 가깝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만약 “옛것에서 증빙하지 않으면 지금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한다.” 하여, 반드시 이를 취하여 법으로 삼는다면,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도록 하려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들이 할 것은 단지 옛사람에게서 법을 취할 뿐이며, 옳고 그름의 분별은 자연히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물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문정공(文貞公)의 주리곡(珠履曲)과 고양곡(高陽曲)은 한 때 희학(戲謔)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세에 영송(詠誦)할 만한 것은 아니며, 이는 선생께서도 이미 평(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께서 성현(聖賢)의 격언을 번안(飜案)하여 시가(詩歌)를 지었는데, 유유히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가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이 있으며, 호연(浩然)히 천리가 유행하는 묘미가 있으니, 역시 조예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옛것을 번안했다 하나 자신이 지은 사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면, 역시 이 《죽계지》에 함께 편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죽계곡(竹溪曲)〉을 삭제하여, 별록(別錄) 및 〈엄연가(儼然歌)〉 등의 시가와 함께 일단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취사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여깁니다. 대저 자신에게 조금의 착오도 없으면 한때의 비난이 있더라도 마침내 후세에 그 시비가 정(定)해지겠지만,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미진(未盡)함이 있으면 비난의 구실이 되기에 족합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전(傳)함이 멀지 못하고, 전함이 멀지 못하면 도(道)가 밝아질 수 없으니, 군자가 가르침을 세우고 교훈을 전하는 일에서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죽계의 사당은 오랫동안 가려졌던 회헌 선생의 도(道)를 빛내기에 충분한 것이고, 또한 선생의 뜻이 회암의 도(道)에 부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회암의 도가 이를 통하여 더욱 밝아지고 또한 후세의 성인도 바꾸지 않을 것을 기약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지》는 모두 온당하게 편집되지만은 않은 듯하며, 이것이 제가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의 경우에서 보면 소견이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외부의 논란이 있더라도 기필코 선입견으로 주장하고 허심탄회하게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고명하신 선생님께 의구심을 가질 바가 아니지만, 다만 홀로 알고 있는 지혜를 당하에 있는 자는 미처 보지 못하는 점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어울리면서도 부화뇌동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논의에 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저의 짧은 소견을 다 말씀드렸으니 재단(裁斷)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가를 보아 계당(溪堂)에서 뵙고 다시 질정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준량(俊良)이 황공한 마음으로 삼가 올립니다.
[주-D001] 주신재(周愼齋) :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을 말한다.[주-D002] 죽계지(竹溪志) : 주세붕이 순흥 죽계 가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1544년경 편찬한 책으로, 목각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주-D003] 이부(二府)와 사군(四郡) : 사군은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없애고 그 옛 땅에 둔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네 군을 말하는데, 각 군에는 한나라의 군현제(郡縣制)에 따라 여러 속현(屬縣)이 각각 설치되었다. 이부는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사군을 다시 합하여 평주(平州), 동부(東府) 두 도독부(都督府)로 만들었던 것을 말한다.[주-D004] 구재(九齋) : 고려 시대 최충(崔沖)이 설립한 사학(私學)이다. 최충이 문하시중을 거쳐 1055년(문종9) 나이 72세로 내사령(內史令)을 그만두고 사학을 설치하여 후진을 양성하자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아홉 개의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으므로 이른 것이다. 일명 구재학당(九齋學堂) 또는 최공도(崔公徒)라 하였고, 최충이 죽은 뒤에는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하였다.[주-D005] 충효에 …… 복종시켰고 : 안유(安裕)가 국학(國學)의 재원(財源) 확보를 위해 모금을 한 적이 있는데, 고세(高世)가 자기는 무인(武人)이기 때문에 학교와 상관없다고 하면서 희사금 내기를 거부하자, 안유가 충효(忠孝)와 공자에 관한 논설로 설득시켰다.[주-D006] 구포(九苞)의 덕 : 봉황에 대한 미칭이다. 구포는 봉황의 깃에 나타나는 아홉 종류의 빛을 말한다.[주-D007] 주리곡(珠履曲)과 고양곡(高陽曲) :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말한다. 그 속에 ‘고양주도 주리삼천(高陽酒徒 珠履三千)’이라는 구절이 있어 이른 것이다.
전날 선생님 뒤를 따라 백운동(白雲洞)에 가서 목욕재계한 뒤 분향(焚香)하고 회헌(晦軒)의 유상(遺像)을 알현하니, 온화하고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이 사람에게 경건한 마음이 일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곳 산천의 수려(秀麗)함과 사우(祠宇)의 존엄함을 보고서 사도(斯道)가 의지할 곳이 있음을 보고 내내 기뻐하였습니다. 다시 연일 고명하신 가르침을 듬뿍 받으니 시원하기가 마치 안개를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본 듯하였고, 제가 삶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면하게 되어 너무나 다행스러웠습니다.
우리 동방은 은나라 태사〔箕子〕가 봉해지고부터 홍범(洪範)의 가르침을 처음 듣게 되어 남자는 겸양하고 여자는 정숙할 줄 알아 현인(賢人)의 교화가 성대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하였고,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두고 예의가 있는 곳이라고 시를 읊었습니다. 오도(吾道)가 동방에 전파된 것은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부(二府)와 사군(四郡)을 지나 삼국 시대로 내려와 전쟁의 도탄에 빠져 극도로 혼란했습니다. 설홍유(薛弘儒 설총(薛聰))와 최문창(崔文昌 최치원(崔致遠))이 신라 말기에 태어났는데, 설씨는 오경(五經)을 번역하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말단적인 장구(章句)에 그쳤고, 최씨는 문장으로 이름났으나 역시 경세(經世)의 학문은 아니었습니다. 왕씨(王氏)가 일어나서도 또한 문교(文敎)는 알지 못했습니다. 인종(仁宗) 때에 최문헌(崔文獻 최충)이 구재(九齋)를 설치하고 후생을 교도하여 세상에서 그를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지만, 세상에 적용하여 도(道)를 밝힌 효험이 없었고, 자신에 돌이켜 궁구한 실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모두 문장이나 수식하는 부박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근본에 힘쓰고 사특한 것을 억누르는 의리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 담론하는 것이라곤 단지 성현들 말씀의 찌꺼기뿐이었습니다. 오직 회헌(晦軒) 선생이 공자(孔子)의 학문을 배우고 회암(晦庵)을 흠모하였는데, 만년에는 체득한 바가 더욱 진보하여 회암의 상(象)을 모셔두고 예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회암을 높이는 것이 바로 도를 높이는 것으로서 그가 지향한 바의 올바름은 여타 유자(儒者)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공은 이미 도에 대하여 대의(大意)를 보았습니다. 충효에 관한 논설은 무인(武人)의 마음을 복종시켰고, 학교 진흥에 힘쓴 것은 풍화(風化)의 근본을 세워 한 번에 삼한(三韓)의 풍속을 새롭게 하였으니, 실로 우리 유학에 공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말과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됨을 대략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봉황새 터럭 하나만 보아도 구포(九苞)의 덕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다만, “학교의 재원(財源)을 풍족하게 한 공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되었다.”라고만 하였고, 후인들도 그의 보이지 않는 빛을 발현시키지 못하여 지금까지 그의 공적이 민멸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옛날 전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너무 심한 것입니다.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회암의 도(道)가 거의 전해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 사람이 책 속에서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선(善)한 행실을 보고서도 천년 뒤에 칭찬하고 흠모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고을 안에 회헌과 같이 어질고 훌륭한 분의 풍성(風聲) 높은 고가(古家)가 초목 속에 매몰되어 있고 사당 한 칸이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선생처럼 옛것을 좋아하고 선(善)을 취하는 마음을 가진 분으로 볼 때, 어찌 급히 존숭하여 우리 도(道)를 높이는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농사의 흉년과 풍년도 물을 겨를이 없고 사람들의 비웃음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시시비비에 미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결행하여, 선생의 유지(遺址)를 가지고 스승을 높이는 터전으로 삼고 밭을 공부하는 장소로 삼은 뒤에야 놀라던 자는 의아히 여기고 의아히 여기던 자는 본뜻을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 전지(田地)를 마련하여 선비를 기르는 재원으로 삼았고, 서적을 소장하여 교육을 세우는 기틀로 삼았으며, 회헌의 유상(遺像)을 봉안하고 문정공(文貞公)과 문경공(文敬公)을 배향(配享)하셨습니다. 봄가을로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올리고 가곡(歌曲)을 노래하며 영령을 맞이하고 보냈으니, 그 제도가 이미 더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추어졌습니다.
아, 이 마음이 바로 회암이 선사(先師)를 모신 마음입니다. 대개 사묘(祠廟)가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없던 것으로서 금세에 처음 생긴 것입니다. 사당에 모셔 높이고, 또한 예배할 뿐만이 아니라 존숭하고 드러내어, 전해지지 않은 회옹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니, 참으로 성대합니다.
지난번에 또 《죽계지(竹溪志)》의 편목을 보았는데, 행록(行錄)은 여러 안씨(安氏)들의 사적이고 여타 편(篇)은 주자의 글로서 역시 모두 볼 만하고 본받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아, 선생의 근면한 마음과 어진 이를 높이는 지성이 어쩌면 이런 정도까지 이르렀습니까! 다만 편차(編次) 사이에 약간의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어찌 선생께서 생각하지 못하신 것이겠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회암을 통하여 회헌을 탐구하여 회헌의 학문이 연원(淵源)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竹溪)는 안씨의 세거지입니다. 여러 안씨들의 저술을 모아 ‘죽계지’라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회암의 글을 발췌하여 그 사이에 집어넣어 아울러 ‘죽계지’라고 하였으니, 억지스러운 문제가 없겠습니까? 이미 “회헌의 마음을 알려면 마땅히 회암의 글을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마디 말로 그 뜻이 다 표현된 것입니다. 회헌의 마음을 탐구해 보려는 자는 마땅히 별도로 회암의 글을 취해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전승(傳承)의 계통이 있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꼭 《죽계지》에 회암의 글을 넣어 억지로 일관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죽계지》에서는 여러 안씨(安氏)들의 사적(事蹟)을 주로 넣고, 〈학전록(學田錄)〉ㆍ〈장서록(藏書錄)〉ㆍ〈가곡(歌曲)〉ㆍ〈속상기(俗尙記)〉 같은 것과 서원(書院)에 관련된 기사는 잡록(雜錄)으로 정리하여 그 뒤에 붙이고, 다시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의 명언(名言)을 뽑아내어 ‘주서(朱書)’라 표제하여, 서원에서 간행하여 배우는 이들이 회헌을 탐구하는 자료로 삼게 한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곧고 조리가 분명할 것입니다. 책은 무리하게 합편(合編)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고, 도(道)는 폐단 없이 전승되어, 전술(傳述)하고 옛것을 좋아하는 도(道)에 아마도 가깝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만약 “옛것에서 증빙하지 않으면 지금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한다.” 하여, 반드시 이를 취하여 법으로 삼는다면,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도록 하려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들이 할 것은 단지 옛사람에게서 법을 취할 뿐이며, 옳고 그름의 분별은 자연히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물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문정공(文貞公)의 주리곡(珠履曲)과 고양곡(高陽曲)은 한 때 희학(戲謔)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세에 영송(詠誦)할 만한 것은 아니며, 이는 선생께서도 이미 평(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께서 성현(聖賢)의 격언을 번안(飜案)하여 시가(詩歌)를 지었는데, 유유히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가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이 있으며, 호연(浩然)히 천리가 유행하는 묘미가 있으니, 역시 조예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옛것을 번안했다 하나 자신이 지은 사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면, 역시 이 《죽계지》에 함께 편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죽계곡(竹溪曲)〉을 삭제하여, 별록(別錄) 및 〈엄연가(儼然歌)〉 등의 시가와 함께 일단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취사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여깁니다. 대저 자신에게 조금의 착오도 없으면 한때의 비난이 있더라도 마침내 후세에 그 시비가 정(定)해지겠지만,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미진(未盡)함이 있으면 비난의 구실이 되기에 족합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전(傳)함이 멀지 못하고, 전함이 멀지 못하면 도(道)가 밝아질 수 없으니, 군자가 가르침을 세우고 교훈을 전하는 일에서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죽계의 사당은 오랫동안 가려졌던 회헌 선생의 도(道)를 빛내기에 충분한 것이고, 또한 선생의 뜻이 회암의 도(道)에 부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회암의 도가 이를 통하여 더욱 밝아지고 또한 후세의 성인도 바꾸지 않을 것을 기약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지》는 모두 온당하게 편집되지만은 않은 듯하며, 이것이 제가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의 경우에서 보면 소견이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외부의 논란이 있더라도 기필코 선입견으로 주장하고 허심탄회하게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고명하신 선생님께 의구심을 가질 바가 아니지만, 다만 홀로 알고 있는 지혜를 당하에 있는 자는 미처 보지 못하는 점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어울리면서도 부화뇌동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논의에 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저의 짧은 소견을 다 말씀드렸으니 재단(裁斷)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가를 보아 계당(溪堂)에서 뵙고 다시 질정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준량(俊良)이 황공한 마음으로 삼가 올립니다.
[주-D001] 주신재(周愼齋) :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을 말한다.[주-D002] 죽계지(竹溪志) : 주세붕이 순흥 죽계 가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1544년경 편찬한 책으로, 목각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주-D003] 이부(二府)와 사군(四郡) : 사군은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없애고 그 옛 땅에 둔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네 군을 말하는데, 각 군에는 한나라의 군현제(郡縣制)에 따라 여러 속현(屬縣)이 각각 설치되었다. 이부는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사군을 다시 합하여 평주(平州), 동부(東府) 두 도독부(都督府)로 만들었던 것을 말한다.[주-D004] 구재(九齋) : 고려 시대 최충(崔沖)이 설립한 사학(私學)이다. 최충이 문하시중을 거쳐 1055년(문종9) 나이 72세로 내사령(內史令)을 그만두고 사학을 설치하여 후진을 양성하자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아홉 개의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으므로 이른 것이다. 일명 구재학당(九齋學堂) 또는 최공도(崔公徒)라 하였고, 최충이 죽은 뒤에는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하였다.[주-D005] 충효에 …… 복종시켰고 : 안유(安裕)가 국학(國學)의 재원(財源) 확보를 위해 모금을 한 적이 있는데, 고세(高世)가 자기는 무인(武人)이기 때문에 학교와 상관없다고 하면서 희사금 내기를 거부하자, 안유가 충효(忠孝)와 공자에 관한 논설로 설득시켰다.[주-D006] 구포(九苞)의 덕 : 봉황에 대한 미칭이다. 구포는 봉황의 깃에 나타나는 아홉 종류의 빛을 말한다.[주-D007] 주리곡(珠履曲)과 고양곡(高陽曲) :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말한다. 그 속에 ‘고양주도 주리삼천(高陽酒徒 珠履三千)’이라는 구절이 있어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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