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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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4회 작성일 21-07-27 04:51본문
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한 번 주남(周南)에 누워 지금까지 체류하고 있으며 증세가 더욱 심해져 아직 떠날 날짜를 잡지 못하니 마음이 울울합니다. 사직한 후 공무를 일체 끊고 시골집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며, 스무날 사이에 출발하려고 하나 몸이 이미 극도로 허약해져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소식이 오래 끊어졌었는데 요즘 동정이 어떠하신지요? 아마도 지금쯤 도산(陶山) 주위를 두루 다니면서 매화와 버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리시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병상에 누워 부질없이 탄식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이곳 서원(書院)의 위차를 정하는 일은, 이미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시끄러운 논란이 조금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한 차례 위차를 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병이 깊어 외부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후임 군자에게 걱정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달에 우연히 사방의 명유(名儒) 및 오자강(吳子强)이 문병을 왔기에 고을 선비들과 서원에 모여 여러 날 묵었으며, 이때 류 광주(柳光州)도 함께 했습니다. 그때 모두 말하기를, “서원의 위차를 정하지 않고 돌아가면 뒤에 오는 자가 감히 그 가부를 논의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유생들이 서원에 들어갈 때 마치 탱화가 없는 절과 같아 즐거이 모여 공부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유생들과 그 가부를 권점(圈點)하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을 홀로 제향 하여 정위 남향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에 대해 모두 찬성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인복)을 동쪽 벽에 배향하기를 원하는 자도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열공(文烈公)은 손에 염주를 들고 있어서 학궁에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절대로 다시 논의할 수 없습니다.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늙은이를 사당에 넣고자 의논한다면 유생들은 차라리 신발을 신고 떠나고 말아 서원 가운데 유생의 자취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의견을 합하여 논의를 결정해야 하는데 유생들의 말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생님께서 지으신 서원 기문은 엄연히 하나의 학문 규범인데, 저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일은 차마 못할 바이고, 이를 고집하며 유생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병으로 지친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 감히 급히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제 생각에 그 기문은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급박할 때 나왔고 여러 논의가 분분한 날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아마 다시 요량해야 할 곳이 있을 듯합니다. 십분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는 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미 정해진 기문이란 핑계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중외 유생들의 의혹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밝은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와병중이라 두서없이 한두 가지 말씀드렸을 뿐 자세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허둥지둥 대필을 시켜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중간에 두 이씨(李氏)의 후예들도 말하기를, “이씨 두 분을 고을의 현인이라 하여 사당에 들인 것은 퇴계가 결정한 일이고 노 목사(盧牧使)의 본래 뜻이니, 후배 젊은이들이 가볍게 고칠 일이 아니다. 만약 한훤당을 높이 받들고자 한다면 정당(正堂) 북쪽에 따로 세 칸 사당을 짓고 스승을 높이는 곳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서원 안에서 동쪽에는 향현사(鄕賢祠)를 모시고 북쪽에는 존현사(尊賢祠)를 모시는 일은 형세상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품의하는 편지를 올립니다.
[주-D001] 주남(周南)에 …… 있으며 : 질병 등으로 인하여 지방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말한다. 주남은 중국의 낙양(洛陽)을 이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태사(太史)인 사마담(司馬談)이 병이 위독하여 주남에 머물러 있다가 한나라 봉선(奉禪)의 일에 참예하지 못하여 울분으로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주-D002] 서원(書院) : 1555년(명종10)에 노경린(盧慶麟)이 성주 목사로 부임하여 건립하고 황준량(黃俊良)이 중수한 영봉서원(迎鳳書院)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다. 숙정자(叔程子), 주자(朱子), 김굉필(金宏弼), 이언적(李彦迪),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위패를 모셨다. 정구(鄭逑)가 1568년(선조1) 봄에 퇴계 선생에게 품의(稟議)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고쳤다.
[주-D003]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 1560년(명종15) 7월에 이황이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를 지었으며, 《퇴계집》 권42에 실려 있다.
[주-D004] 오자강(吳子强)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자강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덕계(德溪)이다. 남명 조식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인후(金麟厚)ㆍ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
[주-D005] 류 광주(柳光州) :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한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을 말한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이다. 1560년 광주 목사가 되었고, 뒤에 호조 참판, 예조 참판, 대사헌, 병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문집에 《구촌집》이 있다.
[주-D006] 권점(圈點) : 그림이나 글씨 옆에 동그라미를 치며 의견을 표시하는 것이다.
[주-D007] 문열공(文烈公)은 …… 있어서 : 문열공은 고려 때 문신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며, 고려 시대부터 전해오던 그의 영정 왼손에 염주가 들려 있던 것을 이른 것이다. 이조년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ㆍ백화헌(百花軒)이다.
[주-D008] 노경린(盧慶麟) : 1516~1568.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이다.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세워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
[주-D009] 두 이씨(李氏) : 애초에 노경린이 영봉서원에 제향 하고자 했던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과 그 장손 이인복(李仁復)이다.
한 번 주남(周南)에 누워 지금까지 체류하고 있으며 증세가 더욱 심해져 아직 떠날 날짜를 잡지 못하니 마음이 울울합니다. 사직한 후 공무를 일체 끊고 시골집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며, 스무날 사이에 출발하려고 하나 몸이 이미 극도로 허약해져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소식이 오래 끊어졌었는데 요즘 동정이 어떠하신지요? 아마도 지금쯤 도산(陶山) 주위를 두루 다니면서 매화와 버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리시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병상에 누워 부질없이 탄식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이곳 서원(書院)의 위차를 정하는 일은, 이미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시끄러운 논란이 조금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한 차례 위차를 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병이 깊어 외부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후임 군자에게 걱정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달에 우연히 사방의 명유(名儒) 및 오자강(吳子强)이 문병을 왔기에 고을 선비들과 서원에 모여 여러 날 묵었으며, 이때 류 광주(柳光州)도 함께 했습니다. 그때 모두 말하기를, “서원의 위차를 정하지 않고 돌아가면 뒤에 오는 자가 감히 그 가부를 논의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유생들이 서원에 들어갈 때 마치 탱화가 없는 절과 같아 즐거이 모여 공부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유생들과 그 가부를 권점(圈點)하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을 홀로 제향 하여 정위 남향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에 대해 모두 찬성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인복)을 동쪽 벽에 배향하기를 원하는 자도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열공(文烈公)은 손에 염주를 들고 있어서 학궁에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절대로 다시 논의할 수 없습니다.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늙은이를 사당에 넣고자 의논한다면 유생들은 차라리 신발을 신고 떠나고 말아 서원 가운데 유생의 자취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의견을 합하여 논의를 결정해야 하는데 유생들의 말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생님께서 지으신 서원 기문은 엄연히 하나의 학문 규범인데, 저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일은 차마 못할 바이고, 이를 고집하며 유생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병으로 지친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 감히 급히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제 생각에 그 기문은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급박할 때 나왔고 여러 논의가 분분한 날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아마 다시 요량해야 할 곳이 있을 듯합니다. 십분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는 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미 정해진 기문이란 핑계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중외 유생들의 의혹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밝은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와병중이라 두서없이 한두 가지 말씀드렸을 뿐 자세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허둥지둥 대필을 시켜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중간에 두 이씨(李氏)의 후예들도 말하기를, “이씨 두 분을 고을의 현인이라 하여 사당에 들인 것은 퇴계가 결정한 일이고 노 목사(盧牧使)의 본래 뜻이니, 후배 젊은이들이 가볍게 고칠 일이 아니다. 만약 한훤당을 높이 받들고자 한다면 정당(正堂) 북쪽에 따로 세 칸 사당을 짓고 스승을 높이는 곳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서원 안에서 동쪽에는 향현사(鄕賢祠)를 모시고 북쪽에는 존현사(尊賢祠)를 모시는 일은 형세상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품의하는 편지를 올립니다.
[주-D001] 주남(周南)에 …… 있으며 : 질병 등으로 인하여 지방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말한다. 주남은 중국의 낙양(洛陽)을 이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태사(太史)인 사마담(司馬談)이 병이 위독하여 주남에 머물러 있다가 한나라 봉선(奉禪)의 일에 참예하지 못하여 울분으로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주-D002] 서원(書院) : 1555년(명종10)에 노경린(盧慶麟)이 성주 목사로 부임하여 건립하고 황준량(黃俊良)이 중수한 영봉서원(迎鳳書院)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다. 숙정자(叔程子), 주자(朱子), 김굉필(金宏弼), 이언적(李彦迪),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위패를 모셨다. 정구(鄭逑)가 1568년(선조1) 봄에 퇴계 선생에게 품의(稟議)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고쳤다.
[주-D003]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 1560년(명종15) 7월에 이황이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를 지었으며, 《퇴계집》 권42에 실려 있다.
[주-D004] 오자강(吳子强)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자강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덕계(德溪)이다. 남명 조식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인후(金麟厚)ㆍ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
[주-D005] 류 광주(柳光州) :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한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을 말한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이다. 1560년 광주 목사가 되었고, 뒤에 호조 참판, 예조 참판, 대사헌, 병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문집에 《구촌집》이 있다.
[주-D006] 권점(圈點) : 그림이나 글씨 옆에 동그라미를 치며 의견을 표시하는 것이다.
[주-D007] 문열공(文烈公)은 …… 있어서 : 문열공은 고려 때 문신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며, 고려 시대부터 전해오던 그의 영정 왼손에 염주가 들려 있던 것을 이른 것이다. 이조년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ㆍ백화헌(百花軒)이다.
[주-D008] 노경린(盧慶麟) : 1516~1568.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이다.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세워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
[주-D009] 두 이씨(李氏) : 애초에 노경린이 영봉서원에 제향 하고자 했던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과 그 장손 이인복(李仁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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