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韓山) 이산해(李山海)가 삼가 발문을 쓰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42회 작성일 21-07-25 08:00본문
금계집 내집 발문〔錦溪集內集跋〕 [이산해(李山海)]
금계집 내집 발문
금계집 내집 발문〔錦溪集內集跋〕 [이산해(李山海)]
세상에는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그중 어떤 사람은 전인(前人)들의 작품을 절취하여 형형색색 짝을 맞추고 비단처럼 수식을 해서 사람들의 칭송을 구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이하고 괴상한 말을 써대면서 세상에 과시하고 속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계(錦溪) 황공(黃公)의 글로 말하면 이와 다르다. 그 시를 보면 성정(性情)에 바탕을 두고 음률을 조화시켜 화려함과 실질을 겸비하였고 의미가 심원하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서 지필묵을 잡고 글을 지으면 처음에는 흡사 엉성하여 주제를 다루지 못한 듯하지만, 읽어보면 봄 구름이 하늘을 떠가는 듯 하늘의 꽃잎이 햇볕에 비치는 듯 원숙하고 혼후하여 그 끝을 다 엿볼 수가 없다. 어찌 평범한 문인(文人)과 재사(才士)들이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더욱이 공은 만년에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깊이 싫어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을 독실하게 좋아하였는데, 그 뜻이 날로 더 부지런해지고 그 성과가 날로 더 깊어지니, 시문을 짓는 일은 단지 여기(餘技)일 뿐이었다. 세상에서 공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난 것만 알고 만년에 학문에 뜻을 둔 것이 매우 독실하였던 사실은 모른다. 또 모두 공이 사람들의 비방에 고생한 사실만 알고 귀하게 여길 만한 맑은 인품과 고고한 행실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 공 입장에서야 실로 이익이 되거나 손해가 될 것이 없지만 우리들 입장에서 어찌 일대 유감이 아니겠는가?
공이 일찍이 단양(丹陽)에서 고을살이를 할 때 단양 사람들 및 인근 고을 선비들이 대부분 이끌어 성취시킨 힘을 입었고 그 은덕에 감사하여 오래도록 마음에서 잊지 못하였다. 군수 손여성(孫汝誠)은 지성으로 선(善)을 좋아하였는데, 그에게 부탁하여 고을 동지들과 더불어 공이 끼친 은혜에 보답할 방법을 찾았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유고를 수습하여 퇴계 선생에게 책으로 편집해 주기를 청하여 정서하여 간행함으로써 길이 전해지기를 구하였다.
하루는 공의 동생 수량(秀良) 씨가 이 문집을 가져와서 내게 보여주고 아울러 퇴계 선생의 명(命)을 전하였는데 그 말씀에 “내가 이미 행장을 지었고 또 이 문집을 편집하였다. 금계(錦溪)를 아는 사람으로서 아무개만한 이가 없으니 어찌 아무개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여 문집 끝에 기록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금계공과 한가히 놀며 하루아침에 사귄 사이가 아니다. 돌아가신 것을 애도하고 옛일을 추억하니 감정을 억지할 수 없고, 또 퇴계 선생의 명이 있으니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한산(韓山) 이산해(李山海)가 삼가 발문을 쓰다.
문집 속의 시문에 오자(誤字)가 많은 것은 대개 판각하는 사람의 실수이다. 내가 선생의 유풍을 사모하여 선생께서 남기신 문집을 읽다가 간혹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는데 모두 13자였다. 상고해 보니 과연 선생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매우 애석하여 마침내 증빙하여 바로잡아 따로 오른쪽과 같이 부기한다. 만력(萬曆) 갑신년(1584) 가을에 창원(昌原) 황응규(黃應奎)가 쓰다.
교정한 13자를 지금 판본에서는 모두 이에 의거하여 썼다.
[주-D001] 손여성(孫汝誠) :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극일(克一), 호는 용담(龍潭)이다. 1561년(명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7년에 단양 군수를 지냈고, 효성으로 알려졌다.
[주-D002] 이산해(李山海) : 1539~160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ㆍ종남수옹(終南睡翁)이다. 이지번(李之蕃)의 아들이다.
[주-D003] 황응규(黃應奎) : 1518~1598.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ㆍ송촌(松村)이다. 주세붕(周世鵬)ㆍ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3년(중종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69년(선조2) 52세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임용되고, 호조ㆍ형조ㆍ공조의 정랑과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고, 1579년에 단양 군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병대장(鄕兵大將)으로 추대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의기를 고취하고 장정ㆍ군량 등을 모집하여 출전하였다. 저서로 《송간고》가 있다. 1584년 황준량의 문집인 《금계집》을 간행하였다.
금계집 내집 발문
금계집 내집 발문〔錦溪集內集跋〕 [이산해(李山海)]
세상에는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그중 어떤 사람은 전인(前人)들의 작품을 절취하여 형형색색 짝을 맞추고 비단처럼 수식을 해서 사람들의 칭송을 구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이하고 괴상한 말을 써대면서 세상에 과시하고 속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계(錦溪) 황공(黃公)의 글로 말하면 이와 다르다. 그 시를 보면 성정(性情)에 바탕을 두고 음률을 조화시켜 화려함과 실질을 겸비하였고 의미가 심원하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서 지필묵을 잡고 글을 지으면 처음에는 흡사 엉성하여 주제를 다루지 못한 듯하지만, 읽어보면 봄 구름이 하늘을 떠가는 듯 하늘의 꽃잎이 햇볕에 비치는 듯 원숙하고 혼후하여 그 끝을 다 엿볼 수가 없다. 어찌 평범한 문인(文人)과 재사(才士)들이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더욱이 공은 만년에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깊이 싫어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을 독실하게 좋아하였는데, 그 뜻이 날로 더 부지런해지고 그 성과가 날로 더 깊어지니, 시문을 짓는 일은 단지 여기(餘技)일 뿐이었다. 세상에서 공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난 것만 알고 만년에 학문에 뜻을 둔 것이 매우 독실하였던 사실은 모른다. 또 모두 공이 사람들의 비방에 고생한 사실만 알고 귀하게 여길 만한 맑은 인품과 고고한 행실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 공 입장에서야 실로 이익이 되거나 손해가 될 것이 없지만 우리들 입장에서 어찌 일대 유감이 아니겠는가?
공이 일찍이 단양(丹陽)에서 고을살이를 할 때 단양 사람들 및 인근 고을 선비들이 대부분 이끌어 성취시킨 힘을 입었고 그 은덕에 감사하여 오래도록 마음에서 잊지 못하였다. 군수 손여성(孫汝誠)은 지성으로 선(善)을 좋아하였는데, 그에게 부탁하여 고을 동지들과 더불어 공이 끼친 은혜에 보답할 방법을 찾았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유고를 수습하여 퇴계 선생에게 책으로 편집해 주기를 청하여 정서하여 간행함으로써 길이 전해지기를 구하였다.
하루는 공의 동생 수량(秀良) 씨가 이 문집을 가져와서 내게 보여주고 아울러 퇴계 선생의 명(命)을 전하였는데 그 말씀에 “내가 이미 행장을 지었고 또 이 문집을 편집하였다. 금계(錦溪)를 아는 사람으로서 아무개만한 이가 없으니 어찌 아무개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여 문집 끝에 기록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금계공과 한가히 놀며 하루아침에 사귄 사이가 아니다. 돌아가신 것을 애도하고 옛일을 추억하니 감정을 억지할 수 없고, 또 퇴계 선생의 명이 있으니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한산(韓山) 이산해(李山海)가 삼가 발문을 쓰다.
문집 속의 시문에 오자(誤字)가 많은 것은 대개 판각하는 사람의 실수이다. 내가 선생의 유풍을 사모하여 선생께서 남기신 문집을 읽다가 간혹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는데 모두 13자였다. 상고해 보니 과연 선생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매우 애석하여 마침내 증빙하여 바로잡아 따로 오른쪽과 같이 부기한다. 만력(萬曆) 갑신년(1584) 가을에 창원(昌原) 황응규(黃應奎)가 쓰다.
교정한 13자를 지금 판본에서는 모두 이에 의거하여 썼다.
[주-D001] 손여성(孫汝誠) :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극일(克一), 호는 용담(龍潭)이다. 1561년(명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7년에 단양 군수를 지냈고, 효성으로 알려졌다.
[주-D002] 이산해(李山海) : 1539~160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ㆍ종남수옹(終南睡翁)이다. 이지번(李之蕃)의 아들이다.
[주-D003] 황응규(黃應奎) : 1518~1598.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ㆍ송촌(松村)이다. 주세붕(周世鵬)ㆍ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3년(중종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69년(선조2) 52세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임용되고, 호조ㆍ형조ㆍ공조의 정랑과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고, 1579년에 단양 군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병대장(鄕兵大將)으로 추대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의기를 고취하고 장정ㆍ군량 등을 모집하여 출전하였다. 저서로 《송간고》가 있다. 1584년 황준량의 문집인 《금계집》을 간행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