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퇴계가 금계의 행장을 적은 계기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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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건립 특강 ...퇴계가 금계의 행장을 적은 계기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추모비 건립 특강 ...퇴계가 금계의 행장을 적은 계기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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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4회 작성일 23-08-11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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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퇴계는 청탁받은 비문은 짓지 않고 행장을 다시 지었다. 그 과정을 보면 거의 자청, 자임自任해서 쓴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이 두려워하고 피한 것’이라 했으니, 모두가 기피했다. 그런데 지금 정암 같은 대현의 일대기를 한갓 진사 홍인우 같은 인물의 글로 남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당대 인물에게 받아야만 했다. “당대의 훌륭한 문장가를 찾아보라” 했지만, 그 문장가는 사실 자신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자신이 써야 사리에 맞았다. 부탁받은 비문을 써 주면 될 일이지만 퇴계는 그렇지 하지 않았다.

‘회재행장’은 1566년 지어졌다. 몰년이 1553년이니, 13년 뒤에 이루어졌다. 글을 보면 퇴계는 회재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회재가 찬술한 여러 책을 보고 ‘반복해서 참고하고 검토하고’ 나서야 ‘진정한 도학자임을 알게 되었으며’, “옛 성현의 말씀과 대조해보아도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쓰게 되었다고 했다. 소회의 기록은 이러하다.

“몇 년 전 선생의 서자 전인全仁이 와서 선생이 찬술한 여러 책을 보여 주었는데, 근래 전인이 또 그 아들 준浚 편에 수집한 선생의 시문과 지명 및 거쳐 간 관직의 시말, 언행과 사실을 거듭 보내 주었다. 황이 삼가 받아서 읽고 반복해서 참고하고 검토하면서 옛 성현들의 말씀과 대조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선생이 도학에 대해서 이렇게 절실하게 추구하고, 이렇게 힘을 다해서 행하고, 이렇게 바름을 얻어, 선생의 출처의 대절과 충효의 일치가 모두 근본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문: 頃年。先生庶子全仁來示先生所纂修諸書。近全仁又遣其子浚。以其所裒集先生詩文誌銘及歷官首末言行事實重來示。滉謹受而伏讀之。反覆參究。質之以古聖賢之言。於是始知先生之於道學。其求之如此其切也。其行之如此其力也。其得之如此其正也。而凡先生之出處大節。忠孝一致。皆有所本也。

2)

참고로, ‘행장行狀’이란 글을 좀 더 설명하며 이렇다. 누군가 죽으면 집안차원에서 일대기를 쓴다. 그 글을 ’가장家狀‘, 혹은 ’유사遺事‘라 한다. 가장이 완성되면 이를 가지고 저명한 학자에게 요청하여 다시 글을 받는데, 이 글이 행장行狀이다. 행장은 공인된, 완성된 글이다. 가능한 당대 인물에게 받고자 한다. 왜냐하면 행장은 시호諡號를 받기 위한 글, 즉 ‘시장諡狀’의 기초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호를 받기 위해서는 가장-행장-시장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모든 글이 다 잘 쓰여야하지만, 행장의 글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당대 석학 퇴계에게 받고자함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게 쓰여 진 행장은 당연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하겠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 정작 퇴계 자신은 행장이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퇴계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암도 그러한 측면이 없지 않다. 누가 쓸 수 있었을까. 퇴계 한 분이 아니었을까. 45년이 흐르는 동안 그 누구도 올바른 행장을 쓸 수 없었음이 이를 증언 한다. 신神을 쓰려면 신보다 위에 있거나, 적어도 동급은 되어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저마다 퇴계를 썼다. 월천 조목의 ‘퇴계선생언행총록退溪先生言行總錄’, 간재 이덕홍의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학봉 김성일의 ‘퇴계선생실기退溪先生實記’, 문봉 정유일의 ‘언행통술言行通述’, 사암 박순의 ‘행략行略’, 율곡 이이의 ‘퇴계유사退溪遺事’ 등이 그런 글들이다.

후대에도 창설재 권두경의 ‘퇴계선생언행총록退溪先生言行總錄’, 청벽 이수연의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 성호 이익의 ‘이자수어李子粹語’ 등의 글이 계속 쓰여 졌다.

이런 글의 양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만큼 퇴계를 모른다는 반증이다. 월천 조목은 퇴계 문도에 장남이요, 간재 이덕홍은 비서실장 격이다. 퇴계를 가장 가까이서 오래도록 모신 분들인데, 두 분이 퇴계의 실체를 두고 언쟁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된다. 다름 아닌 ‘퇴계 성인聖人 논쟁’이다. 월천은 “선생님은 성인에 가깝다”하니, 간재가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은 이미 성인입니다.” 하는 논쟁이 그것이다.

이렇듯 퇴계는 아무도 몰랐다. 퇴계의 인간관계가 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과시함’을 싫어한 분이기에, 나이 과시, 관직 과시, 학문 과시, 인품 과시가 없어 알 수가 없었다. ‘학문 사단’ 만들고, 관리하기에 골몰하는 소위 요즈음 학자라는 사람들이 진정 본받아야 할 교훈이다. 이판 스님이 가야할 길은 이판의 길이지 사판의 길은 아니지 않은가. 퇴계가 인류의 사표가 될 수 있었음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선조 임금이 어전회의에서 대신들에게 “시호와 증직을 위해 행장을 지으라.”하니, 율곡이 “선생은 행장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쓸 수 없습니다.”고 했다. 그래서 대신 지어진 글이 ‘퇴계유사’이다. 행장, 시장 없는 시호는 퇴계가 처음이었다. 율곡의 ‘퇴계유사’에는 퇴계와 정암을 비교, 평가한 부문이 있어 흥미롭다. 그 글은 이러하다.

“선생은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셨다. 정암 조광조 이후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재조才調와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리義理를 탐구하고 정미精微함을 긍구한데 이르러서는 정암 또한 미칠 수 없었다.”

참고로, ‘퇴계 행장’, 즉 ‘퇴계선생 일대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500년이 지난 근년, 청민 권오봉權五鳳 박사가 쓴 책이『퇴계선생 일대기』였다. 이 책은 박사의 퇴계 추모의 정성이 녹아 있는 역작이다. 그 동안 쓰여 진 그 누구의 글보다 앞서는 책이다. 퇴계 이해의 필독서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 글은 행장 형식의 글이 아닌, 일종의 평전評傳에 가까운 글이다. ‘퇴계행장’은 아직까지도 쓰여 지지 않았으며, 어쩌면 먼 후일에도 쓰여 지지 않을 수도 있다.

3.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앉아 책을 읽었다”

1)

16세기는 고뇌의 시대였다. 참된 정치는 무엇인가 하고. 사림士林은 진보였기에 고뇌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뇌 속에서 희망이 잉태되었다.『소학小學』이라는 책을 새삼스럽게 읽었으며, 생활도 사관생도처럼 했다.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일두 정여창鄭汝昌 등이 먼저 그러했다.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다른 길이었다. 이들은 문득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앉아 책을 읽었다”고 했다.

남명 조식도 그러했고, 회재도 그러했다. 퇴계 역시 그런 행동을 “어제도 그렇게 했고 오늘도 그렇게 했다”고 했다. 심지어 도학과 연관성이 옅은 농암도 그러했다고 했다. 모두 똑 같았다. 농암 행장 기록은 이러하다.

“평소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정침正寢에 나가 거쳐하였는데, 종일토록 주렴과 책상이 깨끗하였으니, 비록 춥고 더울 때라도 그러하였다.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으며, 혼인도 벌열閥閱 집안을 찾지 않았다...향촌에서 사적 일로 공적 일을 범한 적이 없었다."

원문: 平居 必晨起 盥漱整衣冠 出居正寢 以終日簾几翛然 雖寒暑猶然 子弟婢僕恩無所偏 昏嫁未嘗希求於閥閱之家 性雖高簡 待人不間愚賤 表裏如一 或置酒而邀請亦不苟辭 居鄕未嘗以私撓公

“의관을 단정히 하고 꼿꼿하게 앉는 자세”는 한자로 ‘관대이좌冠帶而坐’라 한다. 이런 자세는 이때까지 보편적으로 취해온 전통적 생활양식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정암이 생원합격이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니 그 때 대부분의 ‘학생(儒生)’들이 이러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매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정암의 술회를 보면, 그들은 여름에 “옷을 벗고 마음 되로 나가고 눕고 했으며(赤脫出臥),” “누가 의관을 갖추고 단정한 행동을 하면 모두들 몹시 비웃고 멸시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부형들로부터도 노골적으로 제지당했다.”고 했다.

수많은 ‘적탈출와’하는 학생들 속에 홀로 사관생도처럼 행동하고 ‘관대이좌’ 한 인물이 정암이었다. 정암의 입학 초기 입장은 시쳇말로 ‘왕따’ 그것이었다. 피의 투쟁 발발을 예고하는 초기 양상이었다.

1519년, 기묘년 정암과 맞선 최대 정적 남곤南袞은 국왕에게 “근래 선비들이 독서에는 힘쓰지 않고 단지 벽을 향해 잠잠히 앉아 있는 것만 높게 생각합니다.” 했다. 그 결과는 정암의 사사처형이었다. 그러나 곧 부활했다. 국립 서울대학교-성균관-의 학생들이 정암의 외침을 목마른 사슴이 물을 들이키듯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여기에 참다운 인생의 길, 구국의 길, 즉 도道가 있다고 확신했다. 학생들이 『소학』을 읽었고, ‘관대이좌’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중국 남방의 한 인물을 떠올랐다. 본명이 주희朱熹인데, ‘선생’으로 통칭하여 ‘주자朱子’라 했다. 호는 ‘회암晦菴’인데, 문득 우상이 되 버렸다. 신진 사림들이 주자를 생각했다. 주자 시를 따라 짓고 수많은 ‘무이9곡’을 양산했다.

금계도 예외일 수 없었다. 고향으로 가면서도 주자를 생각한다. 오로지 문헌 때문이었다. 제목이 “소백산 욱금가는 길에서 회암의 시에 차운하다(小白山郁錦路中 次晦菴韻)”이다

『주자전서』는 이 무렵 떠오른 최고의 이념서적이었다. 이치(理)에 맞는 생각(念)이라 했다. 퇴계는 이 책을 너무 좋아해서 ‘건강을 해치겠다.’고 말리는 사람까지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 마음부터 시원해지는데 건강이 무슨 걱정이랴” 했다. 뿐만 아니다. 방대한 『주자전서』를 요점 정리하여 『주자서절요』라는 책을 펴내기까지 했다.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다. ‘선비들의 숲’, 즉 사림士林은 이를 ‘도학道學’이라 했다. 그래서 이 시대는 ‘도학의 시대’가 되었다. 16세기 진보주의 출현이며, 한편으로 주자학의 한국적 토착화의 새로운 선언이었다.

뿐만 아니다. 이들은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도 전연 새로운 해석을 들고 나왔다. 이들은 이理와 기氣라는 전래의 두 개념을 새롭게 설명하면서, 이기 개념을 통해 모든 현상을 포괄하고자 했다. 그런 연유로 이 이론의 해석과 정립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고, 이 땅의 문인 지식인들이 순식간에 사색적, 철학적 구도자의 자세를 갖도록 했다.

‘사색적, 철학적 구도자의 자세’를 다시 한 자로 규정했는데, 그 글자 곧 ‘경敬’이었다. 경은 불교의 ‘선禪’과 비교되는, 극복의 개념이었다. 다 같이 구도 방법의 일환이었지만, 그 길, 道는 저 멀리 있었다. 퇴계는 아주 쉬운 말로 ‘옷깃을 여미는 일’이 경이라 했다.

이런 이론들의 연장선에서 퇴계의 이기분속론理氣分屬論과 율곡의 이기묘합론理氣妙合論이 등장했다. 그 이론의 요약은 이렇다. 이기분속론은 사화士禍를 극복하기 위한 논리이고, 이기묘합론은 당쟁黨爭을 극복하기 위한 논리였다. 퇴계가 탄압받는 야당의 중핵 입장에서 논리를 펴 나갔다면, 율곡은 어느덧 집권여당의 중진입장에서 정국을 이끌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율곡과 퇴계의 이론이 같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퇴계의 행장 저술은 철저히 도학에 맞추어 있었다. 도학의 기준에, 혹은 기여함이 선정 기준이었다. 정암은 ‘창명도학唱名道學했다’고 했으니,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38세 나이에 ‘선생’이란 면류관을 받음도 그런 연유였다. 그럴 만 했다. 행장의 한 부분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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